Landscape of Time

박인혁展 / PARKINHYUK / 朴仁赫 / painting   2015_0402 ▶︎ 2015_0415 / 백화점 휴점시 휴관

박인혁_Another landscap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182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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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롯데갤러리 창작지원展 1부

관람시간 / 10:30am~08:00pm / 주말_10:30am~08:30pm 4월15일_10:30am~03:00pm / 백화점 휴점시 휴관

롯데갤러리 광주점 LOTTE GALLERY GWANGJU STORE 광주광역시 동구 독립로 268 롯데백화점 11층 Tel. +82.62.221.1807~8 blog.naver.com/glotteart

시간성과 정체성 ● 2005년 박인혁 작가가 도불하면서 일상적 삶에서 부딪히게 된 것은 다다이스트나 포스트모더니스트 보다, 역시 데카르트가 먼저였다. 마르셀뒤샹을 비롯한 다다이스트들이 그리고 미셀 푸코를 비롯한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의 해체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랑스에 발을 디디면 일상사에서 부딪히게 되는 것은 데카르트적 모더니즘이다. 작가는 근대주의나 정체성이 아직은 심각하게 피부에 와닿지 않는 한국에서 왔기에 그 차이를 더욱 예민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생각하는 자아를 바탕으로 세워진 프랑스식 모더니즘에 부딪히면서 작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자화상을 통해 자아를 찾고, 르몽드지로 상징된 프랑스적 시공간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이었다. 일간 신문지위에 하루하루 그린 그의 자화상에서 어느 날은 르몽드 위에서 아주 선명하게 그의 정체성이 드러나고, 어느 날은 윤곽만 드러나기도, 또 어떤 날은 태어나지도 않은 것 같기도, 또 다른 날은 태어났지만 바로 사라진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떤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찾아서 자신만만한 듯한 터치로 된 얼굴, 또 다른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모두 해체된 듯 실루엣조차 알아보기 힘든 얼굴, 남의 나라에 왔으니 이방인의 정체성을 세워봤자 상처만 커서 뭉개버린 듯한 얼굴 등등 다양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무표정함으로 일관함에도 불구하고 감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서로 다른 느낌의 초상화들은 작가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눈에 보이는 듯하다.

박인혁_Another landscap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4
박인혁_Another landscap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5×150cm_2014

「시간의 통로Passage of Time」연작에서 작가는 매일 하루에 한 점씩을 그리며 시간을 나열한다. 이처럼 2차원적으로 시간을 나열하는 것과 달리, 다른 연작에서는 수직적으로 시간의 층을 쌓는다. 신문지 한부(약 24쪽 정도)를 모두 사용하며, 각 층(페이지)마다 다른 색으로 아크릴을 칠한 후, 신문이 어느 정도 굳어졌을 때, 신문지를 일부 뜯어내며 시간의 지층이 드러나게 한 작품이「무제-2013」다. 또 다른 작품「무제-2011」도 얼굴을 단면으로 그리고 신문의 각 장을 아크릴 메디엄으로 물과 섞은 후 얇게 발라서 배접하여 시간의 층을 수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시간의 층은 '연대기적'(chronological)시간이 아니라 '수직적 카이로스적'(kairological) 시간의 층을 말한다. 새로운 연작이 나올 때마다, 얼굴은 점점 더 모호해 진다. 작가가 말했듯이 자신의 얼굴에 점점 더 익명성이 들어오고 타자화 되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시공간화 된다.

박인혁_Untitled_신문지에 혼합재료_47×32cm_2011
박인혁_Untitled_종이에 스탬프_149×215cm_2015

「또다른 풍경Another landscape」에서 작가는 캔버스 위에 목탄으로 얼굴을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이 직접 만든 안료로 수 회 덧칠하면서, 시간의 지층 속에 얼굴을 묻는다. 모더니즘을 극복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하여 포스트 모던에 이른 로만 오팔카(Roman Opalka, 1931-2011)의 자화상(사진 작품)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동시에 한꺼번에 부딪힌 박인혁의 자화상 (회화 작품)에서 공통점은 시간이 축척될수록 정체성이 점점 흐려지고 애매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방법론과 스타일은 문자 그대로 '백'과 '흑'처럼 전혀 다르다. 72년부터 사망 시까지 찍은 로만 오팔카의 자화상은 같은 조건의 초상을 찍기 위해, 동일한 환경의 촬영 현장(고정된 카메라 높이, 고정된 카메라와의 거리, 같은 흰색 뒷 배경 등등)같은 머리 모양, 하얀 셔츠, 감성을 최대한 중성화한 표정 등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의 자화상은 점점 더 하얗게 변하면서 공간화 되고 있다. 박인혁의 초상도 역시 입을 꽉 다문 같은 표정을 유지하는 듯하나 자세도 모양도 바뀌고, 무엇보다 붓 터치의 자유로움을 통해 그의 감성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오팔카의 얼굴처럼 박인혁의 초상도 역시 점점 흐릿해져 가나 하얀 여백 속으로가 아니라 반대로 어둠 속, 카오스 속으로 들어간다. 전자는 모든 것을 겪은 후 숭고의 단계로 접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반면에 후자는 적극적으로 창조적 혼돈(카오스) 속으로 들어가는 알 수 없는 에너지와 passion (정열, 고난, 등)이 엄청난 밀도로 농축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카오스적 움직임이 그의 붓 터치로 표현되며, 그 가운데 드러나는 얼굴의 실루엣은 이러한 붓 터치의 움직임에 의해 생겨나면서 동시에 사라지고 있다. 박인혁의 또 다른 작품에서는 스탬프로 현재를 고정시키려는 듯, 무수한 도장을 찍으며 현재를 각인하고 있다. 현재로만 모아진 또 다른 풍경이다. 때로는 현재라는 시간의 수액들이 모아져 '시간의 나이테'가 만들어지기도, 때로는 아예 즉흥성과 우연성에 맡겨 흐르는 시간에 스탬프를 찍었을 때, 공교롭게도 이 작품은 시간의 숲, 혹은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시간의 밀물과 썰물을 연상시킨다.

박인혁_Untitled_신문지에 유채_47×32cm_2013
박인혁_Untitled_종이에 스탬프_800×200cm_2014

1965년 이래, 오팔카는 1부터 무한대로 아라비아 숫자를 일일이 쓴다(「OPALKA 1965 / 1 – ∞」연작). 그리고 이 숫자가 1000000에 이른 1972년부터 그는 사람 크기의 캔버스(196×135cm)위에 흰색(blanc de titane)으로 숫자를 쓰며 자신이 쓰고 있는 숫자를 폴란드어로 발음하며 녹음한다. 그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이전의 바탕색에 흰색(blanc de zinc)을 1% 첨가한 새로운 바탕색을 사용한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캔버스는 점점 더 하얗게 되어 가고 그의 마지막 작품은 거의 하얀색의 모노크롬에 가깝게 되었다. 마치 숫자가 공간화 되는 느낌이다. 마찬가지로, 자화상 사진에서 도오팔카는 사진의 뒷배경처럼 점점 더 작품화 혹은 공간화 되고 있다(작품이 작가화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화된다).반면에 박인혁은 한 작품 단위로, 처음 하얀 캔버스(한지)는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더 붉은 색이 된다. 오팔카의 숫자를 읽는 음성은 비록 아무런 감정없이 숫자만 읽는 것 같아도 작가의 상태와 변화가 느껴지며 마치 어떤 주문을 외우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반면에 박인혁은 스탬프를 찍을 때의 그 소리를 녹음해 규칙적인 듯 하나 작가의 신체의 에너지, 운동성과 리듬을 느끼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팔카는 서구사상의 오랜 전통인 영원성의 상징인 '수(數)의 음성'을 듣게 하고, 박인혁은 '지금 여기에서'(hicetnunc) 외부와의 부딪힘을 공명시킨다.

박인혁_Untitled_신문지에 유채_47×32cm_2012
박인혁_Untitled_신문지에 혼합재료_150×520cm_2013
박인혁_Untitled_신문지에 혼합재료_215×149cm_2015

포스트모던 시대의 가장 애매해진 개념인 정체성이 시간 속에서 점점 더 희석화 되는 것을 의도하는 오팔카와, 이와 반대로 이를 최대한 지연시키려고 하는 박인혁의 가장 큰 공통점은 시간의 양의성에 대한 인식이다. 인간의 정체성이 시간의 지층 속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고 있는데, 그 현재라는 것이 단지 과거와 미래의 순간적 접촉점일 뿐이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과거라는 시간은 이미 지나갔으니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라는 시간은 오지 않았으니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라고 우리가 믿는 것은 두 비존재 사이에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혹은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시간의 통로'(Passage of Time)일 뿐이다. 박인혁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라는 시간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라는 시간 사이에 얼굴로 표상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치시키기 위해, 또한 두 비존재의 통로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 현재를 고정시키기 위해 일상의 노동을 자처한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에서'(hicetnunc) 생겨난 의도치 않게 타자화 되고 시공간화 된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 ■ 심은록

Vol.20150405a | 박인혁展 / PARKINHYUK / 朴仁赫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