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섭展 / LEEYEOUNGSUP / 李英燮 / sculpture   2015_0420 ▶ 2015_0620 / 일요일 휴관

이영섭_고깔모자_혼합재료_69×32×14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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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613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예동 마린점 GALLERY YEDONG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마린시티1로 91 두산위브 포세이돈 102동 105호 Tel. +82.51.781.5337 www.galleryyedong.com

한국인의 원형적 초상, 얼굴 조각가 이영섭의 작업실은 이제는 터만 남은 고달사의 빈터 위에 자리했었다, 사람들이 의탁하고 있는 모든 땅이 대체로 그러하겠지만 작가의 작업실에서는 유달리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이 교차하는 시간의 실체가 감지된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하나의 공기로 흐르는 곳, 과거의 터와 현재의 터가 하나의 결로 맞댄 그곳에서 작가는 켜켜이 중첩된 시간의 더께를 걷어내고 있는 것이다. ● 작가는 수년 전에 고달사의 빈터에 정착했다. 아마도 현재의 시간이 정지하고 과거의 시간이 흐르는 듯한 그곳의 희박하면서도 아득한 공기가 작가에게 내재한 본성을 건드린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작가의 화두는 시간의 관성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마치 회귀(회향) 본능이란 생물학적 코드에 붙잡힌 연어가 그런 것처럼 본향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 작가는 그동안 자신의 작업이 현재라는 시간과 거꾸로 가는 것은 아닌지, 동시대적인 조각의 요구에 역행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음을 토로한다. 이런 의문이 재차 화두가 되고 그 화두가 다시 처음의 의문 속에 답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발굴이 진행 중인 그곳에서 작가는 현재가 아닌 과거 속에서 그 의문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한다. ● 여기서 작가가 찾아낸 답이 비록 과거에 속한 것이긴 하지만 동시대적인 조각의 요구를 외면한 것이라곤 보기 어렵다. 대신 그것은 모든 시간의 지층을 관통하는, 시시각각 존재의 소멸을 노리는 시간의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아 현재에도 여전히 감동을 줄 수 있는 어떤 궁극적이고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미의식 같은 것에 가깝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환원적이고 회귀적이며, 원형적이고 본질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적이다. 시대와 존재와 조각의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표면이 아닌 이 모두의 저변에 면면히 흐르는 통시적인 것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 이런 원형적인 미의식은 감각적인 표면 현상에 친근함을 느끼는 동시대인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다. 이를테면 신라 토우에 반영된 해학미, 백제인의 불상에 나타난 고졸한 미소, 조선백자와 분청자기에 나타난 구수한 큰 맛과 무기교의 기교가 이런 원형적인 미의식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는 비록 무의식의 형태로 나마 잊히거나 상실한 것들을 그리워하는 회향의식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회향의식은 자연성 곧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향수 자체는 단순한 기억보다 더 동적인 감정으로서 그 속에서 현재가 끊임없이 과거와 소통하는 어떤 심적 계기 같은 것이다.

이영섭_달빛소나타_혼합재료_77×28×16cm_2014
이영섭_달을품은소년_혼합재료_33×15×9cm_2015
이영섭_봄이_혼합재료_52×14×9cm_2015

실제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견인해내는 원천으로서 마치 백제 민중의 넉넉한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한 불상의 고졸한 미소, 고대 그리스의 원시조각에 나타난 아르카익 스마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 시대에 적지 않은 수가 제작된 동자석이나 벅수를 꼽는다. 시대가 흘러 잊힌 탓도 있겠지만, 이런 다양한 석물 중 대개는 이름 없는 장인의 손으로 제작돼 장인의 무명과 마찬가지로 당시로써는 예술의 이름조차 얻지 못한 것들이 많다. ● 미술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여러 형식적인 틀로부터 자유로운 만큼이나 민중의 무심한 손길과 체취가 강하게 묻어 있다. 존재 본래의 태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이런 석물들에 새겨진 의지는 예술보다는 삶의 의지에 가까운 것으로서, 요샛말로 내적 필연성과 프리미티비즘, 그리고 자연성(단순히 물리적 실제를 의미하기보다는 존재의 궁극적인 원인에 가까운)이 이런 삶의 의지를 추동했을 것이다. 실상 자연의 의지에 추동된, 거의 자연이 빚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이런 원형적 형상의 의도적이거나 인위적인 실현은 엄밀하게는 불가능하다. 여차하면 잘해야 자연에 대한 어설픈 흉내 내기나 조악한 골동 취미에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다. 다만 그것은 인물동기 곧 자연의 성질과 작가의 성품이 하나의 기로서 통할 때에만 가능해진다. 이런 인물동기는 논리적인 프로세스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소재와의 지난한 싸움에 의해 체득될 때 그 자체 인위적일 수 밖에 없는 모든 해법을 허물어 무효화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로부터 그런 투쟁의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기는 것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 여기서 작가가 이런 인물 동기를 자신의 작업을 추동하는 멘탈리티로 삼고 있다는 점이며, 실제의 작업에서 그 실현 가능성이 상당할 정도로 엿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이영섭의 작업은 소재의 본성에 자신의 본성을 맞춘 지난한 모색의 흔적인 것이며, 그 자체 꽉 찬 형태로서 완결된 것이기 보다는 반쯤은 암시의 형태로 방기된 것이다. 이런 흔적을 내재한 암시적인 형태 자체는 전통적인 회화에서의 여백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비어 있는 공간을 보이지 않는 형태로서 채우는 것은 정작 작가가 아닌 관객의 몫이다.

이영섭_사색(대)_혼합재료_84×44×23cm_2015

작업에서 문제는 이렇듯 외관상 비어 있으면서 실상은 채워진(예컨대 팽팽한 긴장감이나 어떤 시적 아우라 같은 것으로) 이율배반적인 형태를 체득하고 찾아내는 것에 있으며, 형태와 암시적인 형태를 조율하는 것에 있다. 많은 경우에 작업에 대한 끌림은 이렇듯 형상 자체보다는 미처 형상화를 얻지 못한 잠재적이고 암시적인 형태에서 연유하기 쉽다. ● 이영섭의 작업에서 이런 잠재적이고 암시적인 형태는 마치 자연스러운 풍화의 흔적을 보는 듯한,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린 듯한, 만들다 만 듯한 반 형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치 암각화에서처럼 이런 반 형상 위에 선각으로서 최소한의 형태를 암시한다. 형태에 대한 구상적인 선입견을 비켜난 이런 반 형상에서는 대체로 기교와는 거리가 먼 어눌한 손맛이 느껴지는데, 이런 느낌은 작달막한 아동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더 두드러져 보인다. 실상 아동에게서 느껴지는 이런 인상은 작가의 모든 모델에게서, 예컨대 모자상이나 가족상에게서조차 공통으로 발견되는 특징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 이 모든 모델에게서 아동의 심성이나 천진난만하고 선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로써 이영섭의 작업은 그 레이더가 현재보다는 과거에, 감각적인 포면 현상보다는 시간의 폭력에 휘둘리지 않는 어떤 궁극적인 존재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역류의 시간 속에서 현재를 끊임없이 과거와 통하게 하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한국인의 원형적인 초상(얼굴)을 찾아내는 것에 작가의 작업이 갖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 고충환

이영섭_소녀2_혼합재료_33.5×10×8cm_2015
이영섭_소녀3_혼합재료_34×10×8cm_2015

매장과 발굴을 통한 조각논리의 전복 ● 이영섭은 이 시대에 은둔자적 삶을 살아온 작가다. 한 때 승려가 되기로 결심했을 정도로 냉엄한 구도자와 같이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려온 그의 특이한 삶의 태도의 연원은 유년시절부터 형성되어온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목수인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장인 정신과 어린 시절 조부의 묘비 앞에 놓인 허물어진 화강석(동자석)을 매만지던 기억은 청년조각가의 작업방식과 사고를 결정지을 만큼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불과 물에 대한 집착 속에서의 거의 10여 년이란 세월동안 부여잡았던 테라코타 인체 작업은 그렇게 어린시절부터 그를 지배해 온 알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자신의 작업에 대한 논리적 해명 없이 묵묵히 진행되었다. 더욱이 82학번 동시대 작가와는 달리 사회의 권력 투쟁과 정치, 경제 논리와 동떨어진 강원도에서의 교육환경은 그를 더욱 완벽하게 혼자인 채로 살게 했다. 그러나 마치 다른 인간의 존재 자체를 접해 본 적도 없는 은둔자의 자세로 천착해 온 테라코타 작업은 그 조형성과 숙련된 기술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진정 그가 의미를 두고자 한 내면적 욕구와 항상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이방인과 현실이 점차 구체화 되면서 새로운 앎의 과정은 기적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때문에 갈등과 고통이 배가되었던 것이다.

이영섭_아가_혼합재료_54×17×10cm_2015

형상과 재료에서 속박에서 벗어나는 방법 ● 현실과 실제가 과연 그가 추구해 온 이미지에서 얼마나 먼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가 우연히 고달사지 발굴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은 1998년의 일이었다. 발굴현장의 흙은 그가 알고있던 흙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지된 악마적 시간성을 뚫고 마각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맥박이었다. 그렇게 이영섭은 '출토'의 의미가 갖는 지정학적, 문화사적 문맥과 그 또 하나의 생산성에 전율했고 발굴이라는 '행위성'에서 원효의 '깨달음'을 일순간 체험한 것이다. 그곳에서 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가마라는 예배실을 박차고 나오게 된 것이다. 즉 발굴현장에서 기술과 기능의 '전승자'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연결 짓는 중개인으로서의 진정한 '조각가'의 역할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추구했던 이미지의 감각적인 온전함이 주는 쾌감과 실제에 대한 부족한 인식이 주는 부담감 사이의 부채감이라는 빚을 일시에 탕감할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이영섭_아이_혼합재료_39×15×8cm_2015

매장과 발굴 ● 이영섭이 차용하게 된 발굴의 행위성은 기억과 관련한 시간의 출발이지만 단순히 '잃어버린 시간을'을 찾아나서는 일차원적인 태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즉 과거라는 시공간을 들여다보게 하는 박물관적 컨텍스트가 아니라 발굴을 전제로 한 매장과 작가의 신체성을 개입시키는 '접촉의 고고학'을 제시한다. 마사토 위에 이미지를 드로잉하여 그 형상을 거꾸로 파낸 후 콘크리트를 매장하여 출토하는 이영섭의 발굴 행위는 흔적의 기록이라는 측면을 현재의 시간성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고고학적, 문화사적 기억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닌 복합적이고 정교한 개념으로 개방되는 행위가 된다. 다시 말해서 정지된 시간의 불가역성을 파기하고 봉인된 시간과 체취를 '현재화'하는 행위성에 의해 배장과 발굴이라는 과정의 문제를 집중시키는 매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콘크리트 속에 내장되는 조선 시대의 기와 조각들과 고려청자의 파편들은 그러한 현재성 위에 다양한 층위의 시공간의 '차이'를 내포하는 시간관을 제시하는 장치가 된다. 그 파편들이 콘크리트와 충돌하여 역동적인 융합이 이루어질 때 현재와 조선 시대와 고려 시대의 시공간은 단선적 시간의식을 극복하게 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생성론처럼 각기 고유한 연상의 사슬을 따라 다른 속도로 전개되어간다. ● 이 지점에서 이영섭의 발굴행위에 동원된 콘크리트라는 매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차피 콘크리트라는 재료가 생성되는 방법론 자체가 '뒤죽박죽'의 방식을 채택한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이영섭의 작업에서 생산되는 시간성은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가 지적한 것처럼 선을 따라 흐르는 시간이 아닌 '단절', '가속도', '균열', '공백'이 팽창하는 중층적 시간성이 됨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얼굴', '아이', '강아지' 등의 명제로 등장하는 그의 콘크리트 작업들은 들뢰즈의 '주름'의 개념처럼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그리고 오늘이라는 멀리 떨어진 세 지점이 갑자기 나란히 존재하는 '접힘'의 방식을 선보이게 되는 것이다. (미술평단 2014년 여름호) ■ 이원일

이영섭_입학식_혼합재료_55×14×10cm_2015

이영섭의 이번 조각 전시는 발굴기법을 통해 한국의 정서성에 기인한 따뜻한 감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조각에 회화성을 도입시키면서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질박한 질감을 통해 오래된 듯하면서 자연에 동화된 느낌마저 든다. 최근 들어 소재에서 현대적인 재료인 스테인레스나 유리 또는 정선의 칠보석 등이 재료에 포함되기도 하는데 그동안 작업해왔던 다양한 재료들이 혼재되어 더욱 풍부한 작업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 내용도 인물이나 의자 테이블 등 조각의 경계를 넘어 일상에서 작가가 애착을 갖는 대상들이 모두 보여지고 있다. 향수(鄕愁) - 시간과 곡선 ● 작가는 회기(回期)를 통해 미래를 꿈꾸며 접속해 나가는 방식으로 시간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만들어 나아간다. 발굴(發掘)방식으로 작업하며 현재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놓고 미래의 시간을 현재의 시점에 낯설게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시간의 직선성을 곡선으로 자유롭게 휘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 뭉개질 듯 변화하면서 움직이는 구름을 통해 형상들을 상상하고 기억들을 추려내어 그것이 다시 조각으로 형상화되는 방식은 추상을 구상으로 만드는 능력이 아닐까? 또한, 구상이란 것도 빈듯한 공간을 채우지 않고 여백으로 처리되고 있는 작가의 작품을 감상자가 채울 공간마저 배려된 여유를 머금을 수 있는 공간이다. ●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면서도 따뜻함이 있는 조각을 하려는 작가는 기술이라는 한계를 넘어 자연과 일상 속에서 터득되는 것들을 그저 형상이란 것으로 바꾸어 소박한 작품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 특히 이번 전시는 작가가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에서 작업하고 있는 다양한 색감의 대리석 조각들도 함께 선보이게 되며, 그동안 발굴작업을 통해 얻어진 조형세계가 다시 조각이라는 단순한 방법으로 환원되어 보여지는 또 다른 계기가 될 것이다. ● 발굴작업에서 얻어지는 우연성이란 의식적 세계에서 얻어지지 못하는 조형세계가 네가티브적 방법으로 인해 변형되고 흙이라는 매체에서 얻어지는 시간성까지 포함되는 결과를 말한다. ● 대리석으로 유명한 피에트라산타는 '성스러운 돌' 이란 뜻이다. 이곳에서 한국의 미가 대리석과 만나 발굴작업을 통해 또 다른 세계로의 유목을 기대한다. ■ 갤러리 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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