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숲 Forest of Art

달서문화재단 출범 1주년 기념 특별展   2015_0423 ▶ 2015_0521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5_0423_화요일_06:00pm

참여작가 두류갤러리 / 이용재_민복기 야외전시장 일원 / 김봉수_방준호_윤상천_이상호

주최 / (재)달서문화재단 웃는얼굴아트센터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웃는얼굴아트센터 SMILING ART CENTER 대구시 달서구 문화회관길 160(장기동 722-1번지) 두류갤러리,야외전시장 일원 Tel. +82.53.584.8720 www.dscf.or.kr

"예술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이웃을, 자신의 지역을, 사회를,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미국의 비평가 Tony Kushner는 말했다. 예술이 우리의 삶과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알게 해주는 말이다. (재)달서문화재단 출범 1주년을 기념한 『미술의 숲』展은 현재 대내·외적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봉수, 방준호, 윤상천, 이상호, 이용재, 민복기 작가의 조각·설치 작품을 아트센터 실내·외에 설치하여 웃는얼굴아트센터 전체를 갤러리로 만들고자한 전시이다. 또한 작가의 영감이 담긴 예술작품이 지역민의 문화예술 공유와 욕구충족의 한 축을 담당함은 물론 우리 지역사회를 이해하는 소통의 창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전시이기도하다. 웃는얼굴아트센터는 산업단지와 인접해있으면서도 근방에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있어서, 문화예술의 혜택을 누리고자하는 주민 또한 많은 복합적인 주변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런 우리 지역의 모습과 그 속에서 생활하는 도시민의 내면이 6인 작가의 작품들에서 포착되고 있다. ● 작품의 표현 매체로 활용된 쓰다가 버린 폐차, 의료용 폐기물인 주사약병, 산업재료로 이용되는 브론즈는 우리지역의 장소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작품의 테마가 된 도시 속 사람들의 다양한 감성들은 작가의 영감 속에서 새로운 조형언어로 재탄생되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삭막한 도시의 물질적·정신적 산물들이 승화되어 예술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우리의 모든 일상이 흥미롭게 예술작품에 담겨있어서 애정어린 시선으로 우리지역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애초 산업단지 속 야외조각공원과 같은 아트센터를 만들어 보고자 기획된 달서문화재단 1주년 기념 특별전의 진행 과정에서 아쉬움이 남는 점도 있지만, 오늘날 문화예술이 사회와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만큼이나 지역민에게 따스한 예술의 향기를 선사한 전시로 기억되기를 희망한다. ■ 웃는얼굴아트센터

방준호_wind_화강석_180×300×64.3cm_2014

이 평론을 쓰기 위해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이제 시작한다. 실은 그 며칠 사이에 잡지에 실릴 리뷰를 썼고, 다른 월간지에 현대 미술에 관한 에세이를 보냈다. 어제는 언론사들이 쓸 보도 자료를 완성했고, 방금 전까지 미술대 강의안을 새로 짰다. 이 글을 오잘 끝내고, 내일 퇴근 후에는 또 다른 비평문을 써서 출판사에 송고할 생각이다. 이건 나의 일이니까 딱히 불만은 없다. 다만 중간에 진도가 안 나갈 때엔 동네 한 바퀴를 걸으며 머릴 식히곤 하는데, 주변이 번잡해서 산책할 맛이 안 난다. 우리 동네에 웃는얼굴아트센터가 있었으면 좋겠다. 정확하게는, 특별전 『미술의 숲』이 벌어지고 있는 그곳 말이다. ● 건물 안팎의 공간을 여섯 명의 작가들이 해석한 이 프로젝트는 기획자의 의도 그대로 공공 미술(Public Art)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 공공의 미술이 가지는 교과서적 의미까지 되짚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미술의 숲』이 현재 문화 환경 속에서 합의된 개념으로 쓰이는 공공 미술의 성격에 어느 정도 부합되는지, 어떤 점은 그 평균치보다 탁월한지, 또 어떤 면은 아쉬운지 따져보는 일은 필요하다. 공공을 위한 미술은 특별하고 우월한 집단에 속한 소수를 위한 미술의 반대편을 향한다. 아, 반대편을 '향하는' 것이지, 거기에 서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 이상적인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에 예술가와 작품, 그리고 예술 정책 입안자와 예술 기획자의 조정이 하나로 모인다. ● 내 관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출 때 공공 미술로 다뤄질 수 있다. 첫째로 공적인 건물이나 야외에 놓이는 미술 작품, 둘째는 도시 경관을 아름답게 꾸미는 미술, 세 번째는 미술가들을 위해 벌어지는 공공사업이다. 먼저, 공적 공간에 설치되는 미술. 『미술의 숲』 프로젝트가 벌어지는 공간은 자치단체가 마련한 문화 공간이다. 미술 작품이 일상적으로 전시되는 두류 갤러리는 말할 것도 없고, 야외 공간을 조형물로 장식하는 일은 당연하다. 따라서 전시 기간 동안 여기에 구현된 공간 배치는 법으로 정해놓은 건축비 대비 일정액의 미술 작품 설치안을 따라야 하는 일반 건축물 소유자들에게 일종의 견본이 되어야 한다. ● 다음으로, 도시 경관(urban landscape)에 대한 기여. 하나의 장소 안에 들어가는 유무형의 콘텐츠가 그 주변 환경과 주고받는 영향을 '장소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현대 지리학에서 중요하게 고려되는 개념이다. 지금 지리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장소성이 생산성을 높이는 쪽을 중시해야 되나 아니면 생태적인 면을 우선해야 되는지에 관한 대립이다. 예술은 확실히 자본주의 시장 제도에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지리학의 옆 동네 사회학 쪽에서 바라보는 내 생각은 생산과 분배라는 그 딜레마를 성서 지역의 공간 연구로 풀어볼 만하다. 사방으로 아파트 거주 공간과 공업 단지와 상업 지구와 임야 지대로 둘러싸인 아트센터의 입지는 도심 난개발이 성행하면 산업 폐기물이 쌓이기에 적당한 조건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고철더미가 아닌 예술이 모여 있다. 프로젝트의 기획자와 초대 작가들이 이 점을 의식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출품작들이 보여주는 자원 리사이클링이나 기념비적 의미가 이곳의 시간과 공간의 맥락을 복합적으로 드러낸다고 본다.

방준호_묵시_화강석_300×260×95cm_2013

방준호의 조각 「묵시」는 아트센터의 정문과 중앙 통로에 서로 다른 두 점의 작품이 설치되었다. 돌을 깎아 만든 이 작품은 이번 전시 『미술의 숲』에 공개된 모든 작업 가운데 기획 의도에 제일 가까이 다가서 있다. 그러나 작품이 놓인 지점은 애당초 조각 작품이 놓일 곳이 아니다. 그 배치는 자연스러운 동선에 걸쳐져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래서 관객은 심지어 작품이 어정쩡하게 들어선 느낌까지 받는다. 좌대 아래를 받힌 부목은 '이 자리는 제 자리가 아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므로, 이런 설치 시도는 내게 흥미를 돋운다. ● 즉 「묵시」는 공간을 환류하는 바람을 막고 서 있다. 이 작품에 재현된 나무들은 전면으로 바람을 마주한다. 「묵시」 연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나무라는 매체(media)를 통해 관찰 가능한 대상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방준호는 이미 다른 여러 평론을 통해 예컨대 '돌로 바람을 조각한다'는 문학적 표현을 획득했다. 지금까지 나온 비평문들은 이 레토릭을 계속 재활용하는 일에 거리낌 없다. 작가는 이제 그 일관된 찬사를 넘어서 평론가들이 새로운 해석을 내놓게끔 궁리한다. 이런 일이 있다. 뉴욕 9.11 사태를 보고 작곡가 스톡하우젠(K. Stockhausen)은 "이 세계를 위한 예술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당시 미국의 패권주의를 빗대어 비난한 본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숱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예술가는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예술 작품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게 최선이다. 지난 시기 동안 동시대 미술의 전위적인 경향을 실험해 온 방준호가 작품에 새겨 넣은 사람의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이 침묵어린 관찰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김봉수_I am Pinocchio15-3_화강암, 브론즈_120×140×120cm_2015
김봉수_I am Pinocchio15-3_화강암, 브론즈_120×140×120cm_2015_부분

김봉수의 「I am Pinocchio」 역시 선배 작가 방준호의 창작 원칙을 같이 한다. 몇 해 전 그는 피노키오 연작을 세상에 공개하면서, 그 이전까지 취해온 작업 경향을 버리게 된 이유에 대하여 자기 고백 식으로 털어놓았다. 그 말의 요지는 '이 세상이 모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그럴듯한 거짓을 포장해서 드러내는데, 작가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작업들은 진실함 없이 난해한 철학으로 위장된 기만이었으며, 그 모습이 피노키오와 같았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빚어낸 피노키오 형상은 이 속세를 사는 현대인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작가 스스로의 반성인 셈이다.

김봉수_I am Pinocchio15-4_화강암_220×60×60cm_2015

그의 예술관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옆에서 봐온 나로서는 이와 같은 그의 고백 언술이 진솔함 이전에 몹시 영리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태도에 나는 신뢰감을 느낀다. 내가 관계하는 쪽이 이런 일이다보니까, 예컨대 핵심은 흐린 채 인문·자연·사회과학 용어를 예술 비평에 포장지처럼 덮어 쓰는 비평문을 하루에 한 편씩은 꼭 접한다. 나는 간혹 그런 습관이 든 미술평론가가 전공 학자에게 지적 받고 망신당하는 일을 가끔 본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미술의 숲』에 공개된 작품의 제목이 '나는 피노키오다'인데, 작품에 새겨진 글귀는 '우리가 피노키오다'이다. 작가의 실수일 수도 있지만 뜻을 겹쳐서 드러낸 일종의 장난일거다. 이 뻔뻔한 피노키오는 보란 듯이 동상의 기념비적 기능을 가상으로 연출하고 있으며, 다른 작품에서는 책 위에 걸터앉아 있다. 내 맘 같아서는 그게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나 조르쥬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책이었으면 풍자가 더 시원했겠다. 그런데 밑에 깔린 책 제목은 "진실된 내가 거짓된 내게"이다. 어디서 봤더라? 혹시 영화 「동방불패」에서 임청하가 불렀던 노랫말? 멋있다, 이 작가.

민복기_Medi city 14_혼합재료_21.3×21.3cm×9_2014

건물 안에 들어가면 색다른 작가의 이름이 눈에 띤다. 이름이 민복기다. 그리 낯선 이름이 아닌데, 그는 작가이기에 앞서 저명한 의사다. 예술 애호가인 그가 작가를 겸직하는 건 설득력을 가진다. '덕후질'의 끝은 나와 대상의 일체로 결실을 맺는다는데, 그렇다면 스타워즈 팬인 나는 오비완 케노비(Obiwan Kenobi)의 외투를 덮어쓰고 광선검도 들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덕력' 혹은 용기가 부족하다. 그는 달랐다. 민복기 원장 혹은 작가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남은 물건들을 오브제 삼아 작품을 완성했다.

민복기_Medi city 8_엮은 동선_29×103.3cm_2014

「Medi City」 연작은 반 세기 전 작가 아르망(Arman)이 시도했던 누보레알레슴의 흔적이 나타난다. 엄청난 수로 남은 규격 제품들의 잔해를 아크릴 액자 속에 집어넣는 그의 작업은 파괴와 집합이라는 서로 다른 상황을 결합시키는 효과를 보여준다. 자신의 얼굴이 표지 사진으로 실린 잡지를 잘라내어 다시 구성한 작업 역시 자기 부정과 긍정의 이중적 언로가 교차하고 있다. 이는 제법 장구한 역사를 축적하기에 이른 현대 미술의 넘치는 재치를 구현한다. 어떤 작품에는 약제 병을 규칙적으로 쌓아두고, 또 어떤 작품은 빈 주사기가 뒤섞여 있다. 민복기의 이와 같은 아상블라주(assemblage)는 단색화가 나타내는 무정형의 패턴을 표면적으로 닮아있기도 하다. 적지 않은 수의 단색화 작가들이 현재 자신의 빈약한 예술 철학을 예컨대 현실 저항이나 형이상학 등으로 부풀려서 미화하는 상황을 작가는 주시할 필요가 있다. 즉 그가 작품을 완성하며 획득한 추상적인 아름다움은 그 자체의 미로 인정을 해야 하며, 어쩌면 추상화가 가질지도 모르는 신비화 과정을 참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대로, 통속과 숭고, 창의성과 기성품, 그리고 삶과 미술이 결합하는 방식의 작업을 통해 그는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논쟁과 비판에 정직하게 맞서면 된다.

이용재_표류-떠도는 대화_엮은 동선_가변설치_2015

역시 같은 공간 내, 그리고 야외 중정에 조각 설치를 완성한 작가 이용재는 『미술의 숲』 프로젝트에서 가장 많은 공간을 부여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가에 대한 학예연구가 부족했다는 것을 여기서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어설픈 지인 비평이 통한다면, 동선을 꼬아 엮은 그의 작업은 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네 명의 작가들이 벌이는 작업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가령 땅에 문자를 배열하여 맥락을 낯설게 하는 시도는 류현민과 김승현의 작업과 맥락이 닿는다. 또한 추상적인 형태의 조각을 무게감을 탈락시켜 배치하는 방식은 박선기와 이재효에게서 전형을 봐 왔다. 앞의 두 작가는 그보다 나이가 어리고, 나머지 두 작가는 그와 동년배다. 하지만 그는 이들 작가보다 창작 활동 경력이 짧다. 이 말은 그에게 이제 본격적인 숙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진리를 감수해야 하는 현대 미술은 그 약한 고리를 여러 문화적 요소들로부터 보충 받아 왔다. 이용재가 밝힌 레퍼런스는 존 던(John Donne)의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다.

이용재_표류-떠도는 대화_엮은 동선_가변설치_2015

'인간은 둥둥 떠다니는 섬과 같은 존재(가 되지 말아야 된다)'라는 시인의 이상주의는 그로 하여금 「표류-떠도는 대화」를 완성하는 주제가 되었다. 내가 존 던을 공부한 건 「노튼 영문학 개관」을 읽던, 꽤나 옛날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후대에 '형이상학파'로 잘못 알려지며 괜한 설교나 해대는 이미지의 존 던을 새로 발견한 건 뻔한 레토릭 범벅의 기존 문학과 구별되는 이 시인만의 억센 문장이었다. 확실히 이 부분은 조각가의 태도와 닮은 부분이 있다. 온갖 감정의 눈물이 흘러 강을 이룬다는 「누하」의 실내 벽면 설치에서 흘러내린 음표가 실재로 구체적인 가락을 재현하진 않을 듯하다. 그래도 내 욕심 같아서는 줄리 런던이 불렀던 「크라이 미 어 리버 Cry Me A River」의 악보였으면 더 좋았겠다.

윤상천_2015 Pine tree art car_자동차에 미러타일_165×428×173cm_2015
윤상천_2015 Pine tree art car_자동차에 미러타일_165×428×173cm_2015_부분
윤상천_2014 Pine tree art car_자동차에 카페인트_131×435×179cm_2014

소나무 작가로 많이 알려진 윤상천은 『미술의 숲』에 자동차 두 대를 주차시켜 놓았다. 크라이슬러 PT크루저 위에 거울처럼 반짝이는 조각이 소나무 그림을 이룬 아트 카는 전시 공간을 찾는 일반인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을 만하다. 자신이 그리는 소나무 도상을 실재 자동차 위에 옮겨 놓음으로써 그가 얻고자 하는 결과는 단지 관객의 호응만은 아니다. 사실, 아트 카는 자동차 회사들과 아티스트들이 협업 단계를 거쳐서 선보인 프로젝트가 이미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장재철이 BMW 그란 쿠페 아트 카 제작(2013)처럼 정교하게 기획된 조형 작업으로부터 폐차 위에 그라피티(graffiti) 형식의 페인트칠을 하는 단순한 이벤트까지 자동차를 매체로 한 작업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시도가 아니다. 다만, 윤상천은 우리 미술사에서 중요한 소재로 이어져 온 소나무를 「Pine tree art cat」라는 현대적인 대상에 적용한 유연성을 드러냈다. 또한 전시 공간 인근에 자리 잡은 자동차 정비소, 부품 공장, 중고차 매매단지, 운전교습소 등 유난히 밀집한 자동차 클러스터를 반영한 점은 나머지 다른 의도를 앞지른다.

이상호_생태이미지_경주석, 마천석, 포천석, 황등석_77×210×98cm_2015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참여 작가는 이상호다. 그가 조각한 「생태 이미지」는 작가 본인의 설명을 따르면 곤충의 성장 과정에서 반복되게 관찰되는 세포 분열의 형상을 추상화한 작업이다. 내가 볼 때, 여기서 세포 분열이 체세포 분열이든 감수 분열이든 그것은 상관없다. 중요한 건 정확한 현상의 묘사적 접근이 아니라 (곤충학자들을 제외한) 사람들이 가지는 벌레에 관한 인지체계다. 작가가 어떤 연유에서 곤충 형태를 미적 대상으로 삼았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 주변에 근접한 벌레는 본능적으로 죽이거나 내쫒거나 피한다. 그 자연으로부터 넘어 온 타자(the others)에게서 아름다움을 구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바퀴벌레 한 마리 잡는 데도 신문지 뭉치를 구해서 난리법석 피우는 내 담력으로 추체험해보자면, 작가가 가지는 곤충의 아름다운 생명 활동은 예컨대 곤충류의 기능 진화가 보여주는 형태를 디자인 기술로 응용한 인공물의 심미성, 혹은 생물의 형태를 수학 공식으로 환산한 동물학자 달시 웬트워스 톰슨(D'Arcy Wentworth Thopson)의 「성장과 형태」 같은 책에서 소개된 패턴일 것이다.

이상호_도시_마천석, 포천석, 고흥석_228.5×220.2×107cm_2003

나는 이런 형태학(morphology)조차 내쇼널 지오그래피 유의 간접 관찰을 통해서만 구성과 변이의 신비로움을 느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예술 작품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을 곤충에 대한 이질감으로 같이 취급할 당위성은 없다. 그는 곤충의 생명력을 주제와 소재 두 측면에서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작가가 돌 재료의 조합과 대비에서 오는 구성미에 더 흥미를 가질뿐더러, 그 점이 생물학보다 전문성을 승인 받는 더 손쉬운 방법이란 걸 모를 리 없다. ● 어찌 되었던 이 작품들이 예술의 맥락으로 드러나는 곳은 자연이며, 따라서 특별전의 제목으로 붙은 『미술의 숲』은 합당하다. 지금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산과 들녘과 강, 그리고 숲은 따지고 보면 자연이 아니라 인공이다. 이 사실을 사람들은 종종 잊는다. 계획되어 심어진 나무와 억지로 바꾼 물줄기, 논과 밭으로 일궈진 들판은 우리에게 자연(nature)은 인위적으로(artificial) 설계되고, 그 속에서 예술(art)은 자연스러운(natural) 생명력을 얻는다. 지금 이 프로젝트처럼 말이다. ■ 윤규홍

Vol.20150423g | 미술의 숲 Forest of Art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