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브릭

박창환展 / PARKCHANGHWAN / 朴昶奐 / painting   2015_0429 ▶ 2015_0520 / 일요일 휴관

박창환展_브릭브릭_갤러리 마노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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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42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마노 Gallery MANO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51-95번지 예전빌딩 4층 Tel. +82.2.741.6030~1 www.manogallery.com

보인 것과 보이게 하는 것 ● 『브릭브릭』이라는 전시부제는 벽돌이라는 영어단어를 두 개 중첩시켜 경쾌한 느낌을 준다. 원색에 야광의 기미까지 감도는 색의 향연들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다. 작품 소재도 벽돌집이나 식물같이 친근한 일상과 자연이며, 주렁주렁 열리거나 부풀어 오르는 형태는 뭔가 긍정적이다. 그러나 예쁜 색들은 남용되어 생경하게 보이고, 벽돌집들은 뭔가 허술하고 사람 사는 흔적이 없다. 뭉글뭉글한 식물적 형상들 역시 자연의 질서에 위배되는 과도함과 비정상성이 두드러진다. 대부분의 작품이 멀리서 보면 단색의 추상화면처럼 보이지만, 박창환의 그림은 현실을 모델로 한다. 부제인 '브릭브릭'은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에 올라 왔을 때 그의 눈에 띄었던 다닥다닥 붙은 연립주택의 벽돌들에서 온 것이다. 각자 흩어져 살면 그리 좁다할 수도 없는 이 땅에서, 그러한 밀집 주택들이 보편화 된 것은 대량생산과 소비를 원동력으로 하는 현대 도시의 특성 때문이다. ● 벽돌 및 벽돌의 축적으로 가시화된 공간적 형식들은 권력이 구조화된 형태를 말한다. 아파트 숲이라는 다음단계의 주거형태가 밀려오기 전, 3-4층 높이로 획일적으로 지어진 건물들은 인간보다는 구조(경제, 자본)를 앞세운 결과이다. 건축가 아닌 업자의 건물이며, 최소비용에 최대효과를 겨냥한 그것들이 모두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최초의 모델이 성립된 이후, 속도전처럼 막 지어졌을 주택들이 점령한 도시는 다른 곳에서 온 이방인에게는 낯선 풍경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연립주택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지만, 그 자체로도 하나의 벽돌처럼 보인다. 마치 프랙털 도형처럼 구조 안에 구조들이 반복된다. 멀리서 보면 사회도 자연에 속한다. 자연도 사회처럼 주어진 한계 내에서 근근이 살아간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연에는 없는 역사의 지고한 목적은 사회를 타락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박창환展_브릭브릭_갤러리 마노_2015

좁은 공간에 가장 많이 쌓을 수 있는 벽돌은 현대 도시의 경제 원리를 압축한다. 벽돌은 하나의 코드처럼 자신만의 질서감각으로 현실을 점령해가고, 가상현실 또한 그러한 벽돌같은 정보 단위로 구성된다. [연립주택]이라는 제목이 붙여 있기도 한 박창환의 그림 역시 그런 집을 짓듯이 허술하게 그렸다. 지상에 뿌리내린 가장 안정적인 구조로서의 집이 아니라, 가파른 계단들, 지붕 흉내만 낸 기와들, 땅과 밀착되지 않고 붕 떠 있는 듯한 어중간한 형태가 눈에 띈다. 그의 [연립주택]들은 표면만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메커니즘을 모방한다. 그림에 남발된 원색은 발랄하기 보다는 우울해 보인다. 값비싼 유화물감이 두텁게 칠해진 색은 대상을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니라. 푹 묻어버린다. 동시에 그 두터운 물감 층은 그림 표면의 물성을 강조한다. 하나하나 셀 수 도 있을 만큼 벽돌을 강조하거나 마룻바닥의 무늬목을 화면 가득히 그린 그림, 특히 단색조의 화면에 떠있는 사각형의 창문들은 모두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 노란색 평면 속에 탁본한 듯이 도드라진 벽돌들은 작품 평면의 기원이 미술사이자 현실임을 가리킨다. 실제의 창은 투명하고 얇지만 그의 창은 불투명하고 두텁다. 관객의 시선은 물감의 두터운 층에 막혀 창 너머의 광학적 공간으로 뻗어나가지 못한다. 어떤 작품은 보라색을 하도 두껍게 발라 거의 검정에 가까워 보인다. 그 와중에도 좁게 배치된 창들은 그 안의 비좁은 방들을 상상하게 한다. 녹색 평면에 위아래 수평으로 떠있는 창 역시 밀집도 높은 주거양식을 암시한다. 화면 앞으로 바짝 당겨진 창들은 좁게 마주한 맞은편 연립주택에서 보이는 풍경의 시점일 것이다. 박창환의 작품들은 그림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광경이자, 그림 자체이다. 그림 속 창, 벽, 바닥은 물리적 평면이자 회화적 평면이다. 회화적 언어를 통해서 보게 함과 동시에, 회화적 언어 자체를 주목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중으로 코드화되어 있다. 그의 그림들은 현대적 풍경을 현대적 어법으로 그린 것이다.

박창환_브릭브릭 S 4-1_캔버스에 유채_53×41cm_2015
박창환_브릭브릭 S7-10_캔버스에 유채_194×145.5cm_2015
박창환_브릭브릭 S12-16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15

설치작품은 벽돌의 무한축적을 낳았던 욕망을 보다 직접적으로 말한다. 전래동화에 나오는 혹부리 영감의 욕심 사나운 혹 덩어리들이 벽에 주렁주렁 걸려 있다. 혹은 암세포처럼 어떠한 한계도 모르고 증식된 병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욕망은 아름답게 치장된다. 특히 우리사회에서 그러한 욕망은 급격한 물질적인 성장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단독 주택들을 밀어낸 연립주택은 몇 십 년 지나지도 않아 다시 아파트에 의해 밀려날 처지에 있다. 이러한 과도기적인 공간은 삶의 터전으로 가꾸어지지 않는다. 짧은 기간 동안 소비되었다가 폐기되는 다른 상품과 다를 바 없다. 자본은 상품의 순환주기를 더욱 짧게 만든다. 그래서 현대의 어떤 측면은 현대가 극복하고자했던 전통보다 더 열악해 보인다. 공간이 재구조화될 때 마다 사회적 계층의 격차는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회는 간과한다. ● 혹 형태에 붙여진 반짝이 스티커는 조악한 벽돌집을 미화했던 색들과 같은 위상을 가진다. 120cm 지름의 거대한 마스크 팩에는 혹이 붙어있다.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이 도를 넘어 비정상과 추함으로 변한다. 다닥다닥 붙어서 무한 증식하는 벽돌집들은 그러한 욕망을 담아낸 것이다. 벽돌들이 이상 증식하는 세포들처럼 현실을 뒤덮고 있다면, 식물형상을 담은 그림들은 동글동글한 유기적 형태로 이상 증식한다. 집, 식물, 더 나아가 인간까지, 그의 작품에서 전체와 부분간의 조화에 근거해야할 유기체적 모델은 부분들의 집합으로 바뀐다. 조화로웠을 완전한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부분들은 또 다른 유기적 질서의 형식으로 연결되어 번창한다. 그것은 뿌리줄기의 방식이다.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생태 환경에 걸 맞는 뿌리줄기의 방식은 기원과 목적이 불분명한 욕망이 확장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는 풍선처럼 날아다니는 혹들이, 포도송이처럼 집합된 사람의 얼굴들이, 고구마 줄기에 토마토가 열리는 만능 식물이 보인다.

박창환_브릭브릭 S 14-2_캔버스에 유채_53×41cm_2015
박창환_브릭브릭 S 15-32_캔버스에 유채_53×41cm_2015
박창환_브릭브릭 S 19_캔버스에 유채_135×115cm_2015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것들은 부정적인 기미를 벗어내고 새로운 융합으로 도약한다. 그것들 모두에는 뿌리가 발견되지 않으며 상하좌우의 구별도 불분명하여, 전 방위적으로 확장하는 듯하다. 벽돌은 기하학적 형태로, 줄기에 붙은 덩어리들은 유기적 형태로 뻗어나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기하학적이든 유기적이든, 분절화 된 형태들은 끝없는 이어짐을 가능하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스타일을 크게 바꿨지만, 이전 작품들과의 연속성은 파편적 형식에 대한 관심이다. 검정 바탕에 얇은 부조의 두께로 튀어나온 인간 두상들의 집합을 그린 작품제목은 아예 「파편」이다. 다른 기관들을 삭제한 채 머리들만 여럿 모여 있다. 머리통과 머리통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발로 모여 있을 뿐이다. 거리에서 익명의 불특정 다수들이 뭉게뭉게 모여 있듯이 말이다. 소비 중심 사회로의 재편은 개인을 더 흩어지게 했지만, 우리의 일상은 타인들과의 잠정적인 이합집산의 연속으로 구성된다. ● 그러나 파편들은 '브릭브릭'이라는 어감처럼 얼기설기하다. 파편들은 잘 조직된 유기적 총체성의 일부가 아니라, 부분들이 단지 집합되어 있는 전체일 뿐이다. 총체성이 닫혀있다면(또는 완성되어 있다면), 전체는 열려있다(또는 미완성이다). 박창환의 작품에서 어둡고 두터운 화면 사이에 가늘게 새어나오는 빛 같은 외곽선들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연결의 단위들을 강조한다. 여기에서의 파편화는 반드시 부정적 뉘앙스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몸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집의 파편성이 단박에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것과 차이가 있다. 사실 유기체의 파편화란 죽음을 깔고 있는데도 말이다. 욕망은 죽음조차 무시하며, 죽음에까지 뻗어있는 것이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파편화는 현대의 보편적 조건이 되었다. 현대예술의 파편화가 많이 회자되곤 하는데, 그것은 현실과 동형구조를 이루는 예술의 속성 때문이 아닐까.

박창환_연립주택 S 3-21_캔버스에 유채_162×135cm_2015
박창환_연립주택_캔버스에 유채_91×65cm_2014

파편들과 그것의 연결망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가지고 있는 『앙티 외디푸스』(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는 부분적 대상들, 벽돌들 및 잔여물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들은 통일되지도 전체화되지도 않으면서 부분들이 부분들 곁에서 생산되는 방식을 강조한다. 서로 다른 것들이 연결되는 원동력은 욕망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욕망은 단지 막힘없이 흘러갈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 『앙티 외디푸스』에 의하면, 욕망은 모든 것이 가능한 자유로운 종합들의 영역, 즉 끝없는 연결들, 배타적이지 않은 이접들, 특수성이 없는 결합들, 부분적 대상들 및 흐름들이다. 욕망은 생물학적인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앙티 외 디푸스]에 따르면, 욕망은 기계요 기계들의 종합이요 기계적 배열이다. 즉 욕망하는 기계들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을 규정하는 것은 모든 방향과 방면에서 그것들이 무한한 것과 연결되는 능력이다. 이 힘에 의하여 그것들은 많은 구조들을 동시에 횡단하고 지배한다. ● 박창환의 작품에서는 인간과 집, 자연과 사회, 그리고 예술까지도 모두 '욕망하는 기계'의 면모가 있다. 이것과 저것, 이러한 특성과 저러한 특성이 끝없이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전체는 브리콜라주처럼, '다양하고 모양이 기괴하지만 제한된 자재와 규준의 소유'이며, 서로에게 속한 단편들로 인해, '생산하는 작업과 생산되는 것, 도구 전체와 만들어지는 것 전체를 구별할 수 없게 된다'(레비 스트로스) 현대회화 역시 보인 것과 보이게 하는 것을 일치시켜 나간다. 박창환의 작품 속 벽, 창, 바닥은 캔버스의 사각 틀과 나란히 존재하면서 물질과 언어를 중첩시킨다. 그림 속 기하학적이거나 유기적인 단위들은 현대사회에 편재한 뿌리 줄기적 형태이자 형식이다. 그의 창을 통해 우리는 물질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성을 소외시키는 현대사회의 물질주의'라는 상투화된 문장같이, 현실에 팽배한 물질주의를 지칭함과 동시에, 이러한 물질주의를 덮거나 또는 한 술 더 뜨기 전략으로 과장하는 물질, 즉 캔버스 표면에 채색된 표시를 만들어내는 재료로서의 물질을 말한다. ● 그가 문제 삼는 현실에는 회화적 현실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는 사선으로 어슷하게 배열하여 원근감을 보여주는 창도 있지만, 더 많은 창들은 캔버스 평면과 평행하게 그려져 있다. 그것들은 물감의 층으로 원근감을 표현한다. 물감의 층은 화면 뒤편 어딘가에 있을 광학적 공간을 뒤덮는다. 벽돌, 또는 덩이줄기들의 외곽선을 얇고 밝게 처리한 작품들은 심도와 표면 사이의 역학관계를 보여준다. 어떤 작품은 실루엣 그림처럼 그림자의 속성을 강조한다. 박창환에게 창으로서의 회화는 여러 차원에서 의문시된다. 그의 그림은 물질주의를 볼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근본적인 감각인 촉각은 아직 완전히 코드화되지 못했다. 르네상스 이후 현대회화는 시각보다는 촉각의 영역에서 주로 놀았다. 창이 사진이나 '윈도우' 화면으로 점차 환원되면서, 회화의 야생적 바탕은 중시되었다. 시각과 촉각, 관념과 물질을 동시에 겨냥하는 그의 그림은 세계와 접촉하는 전 방위적인 감각을 고무한다. ■ 이선영

Vol.20150429j | 박창환展 / PARKCHANGHWAN / 朴昶奐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