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al one's identity

박우식展 / PARKWOOSIK / 朴佑植 / painting   2015_0512 ▶︎ 2015_0519 / 월요일 휴관

박우식_s identity_캔버스에 유채_100×80.3cm_2015

초대일시 / 2015_051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 29-4(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현전하는 현존재(Dasein)에 대한 회화적 팡세(Pensée)-현전(現前)을 대리 표상하는 현존재의 재현을 위하여1. 박우식의 작품은 왜 '회화적 팡세'일까? 그는 줄곧 조물주(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나(인간)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섬세함이 극사실주의를 지향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진정한 방법으로 '섬세한 마음'을 믿었듯이 박우식도 내면을 향하는 섬세한 직시로 신의 섭리에 다가가고 있다. '섬세함'을 영혼의 가장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지적' 직감으로 여긴 파스칼처럼 박우식도 그것을 내면에로 예인하는 '회화적' 직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 파스칼은『팡세』에서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만 신을 알 수 있다. 이 매개자가 없다면 신과의 교제는 전혀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미 대속(代贖)을 신앙해온 박우식에게 신과 교제하고 소통하게 하는 매개자는 현존재로서 현전하는 '나'이고 '우리'이다. 그에게는 섬세한 직감에 의한 현존재의 재현(représentation)이 곧 대타자(L'Autre)에 의한 현전(présence)임을 재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섬세하게 재현한 작품들은 모두가 신의 현전을 신앙하는 자신에 의해 재현된 것들인 셈이다.

박우식_s identity_캔버스에 유채_72.5×72.5cm_2015

2. 박우식에게 개별적 자아인 '나'와 '우리'는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의 자기외화(Selbst-Entäußerung)처럼 신의 현전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주체로서 현전은 시공에 의해 구속받으므로 '지금, 여기에' 있는 존재, 즉 현존재(Da+Sein)이기도하다. 그것이 형이상학적 존재일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밖으로'(Ek) 향하는 존재(istenz), 즉 '탈존'(Ex-istenz)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 하이데거는 '나의 존재의 지금, 여기(現)에로 던져져 있음'을, 이른바 자의와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진 존재의 피투성(Geworfenheit)을 강조하기 위해 현존재의 '탈자적'(脫自的) 본질을 탈존(脫存)으로 규정한다. 사르트르에게도 탈존은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부단히 넘어설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를 가리킨다. 사르트르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주장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이렇듯 현존재로서의 실존은 곧 탈존이다. ● 하지만 절대적 섭리의 열쇠로 동원된 박우식의 작품들이 지향하는 탈존은 (사르트르적이기보다) 하이데거적이다. 하이데거가 실존의 조건으로서 피투성(被投性)과 탈자(ek-stase)를 주장하듯 박우식도 절대자에 의해 '밖으로 던져져' 있는 '현존재의 피투성'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성적으로 논증해온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증명을 '무엇보다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그 대신 매개자를 통한 깨달음을 강조하듯 그 또한 작품마다 매개자들을 통해 우리가 현전하는 현존재임을 제각각 달리 말하고 있다.

박우식_s identity_캔버스에 유채_122×194cm_2015

이를테면「Escape from reason」(2004)을 비롯하여「Chunri」(2010),「Reveal one's identity」(2015)등 어느 작품에서든 시니피앙과도 같은 이미지로 실존을 우선하여 대리표상하고 있는 주체들이 그것이다. 그 피투적 주체들은 저마다의 한계상황 속에 던져진 채 몸이나 표정으로 말하며 탈이성, 불면, 가상현실과 같은 탈존의 현장을 직시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 박우식은 대(大)타자에 의한 현전의 섭리를 탈존의 주체들이 보여주는 매개효과를 통해 줄기차게 확인하고자하는 것이다. ● 그러면서도 그에게 실존하는 주체들은 그것이 '세계-내-존재'처럼 상호주관적이다. 그가 이제껏 다양한 매개자를 통해 관계적인 표상의지를 쉼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2010년 이후 그의 작품들은 주체들의 상호관계성을 묵시적으로 상징하면서도 생활세계(Lebenswelt)와의 의미연관을 표상하려한다. ●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고 있는 미학적 매트릭스가 '섬세한 사실주의'일 수밖에 없는 까닭, 그리고 그가 '의식의 지향성'을 동원한 현상학적 리얼리스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는 일상에서 초월의 통로로 연결하는 매개자로서 포착된 순간을 재현함으로써 신, 즉 대타자와의 인격적 만남뿐만 아니라 타자들과의 일상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대자적' 현상과 표상들을 보다 사실적으로 재현하고자한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의 상호개입과 침투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은 의식의 미분화를 그대로 드러내면서까지 그와 같은 개입과 침투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박우식_s identity_캔버스에 유채_122×194cm_2015

3. 애초부터 박우식의 리얼리즘은 이율배반(Antinomie)이었다. 그가 착안한 것이 현존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즉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양립하지 않는 불일치와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실재로 간주할 수 없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실재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칸트의 물자체(物自体)처럼 없다고 말할 수도, 그렇다고 하여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것이다. 이를테면「 Escape from reason/180×732cm/oil on canvas/2004」에서 인물들이 나열되면서 중첩되는 빈 공간을 그대로 남겨진 경우가 그러하다. ● 하지만 박우식에게 그것은 물자체(Ding-an-sich)가 아니다. 그것은 실재의 이미지일 뿐이다. 반대로 그 이미지들이 섬세하게 극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할지라도 그는 그것들을 가시적 현상과 이미지 사이의 인식론적 착각으로 이해한다. 그가 이를 원본과의 '거리두기'(espasment)를 실험하는 포토리얼리즘의 재현현상과 유비시키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작업의 여정을 '이미지와 동행'하기 위해서다.

박우식_s strange actions_캔버스에 유채_194×122cm_2015

이미『사진론』(1973)을 쓴 수전 손탁(Susan Sontag)도 플라톤 이래의 철학자들은 이미지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현실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며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으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미지와의 동행만을 강화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녀가 '자연의 연필'(탈보트)인 사진을 가리켜 피사체와 닮았을 뿐만 아니라 피사체에 대한 일종의 '봉헌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작가 박우식이 자신의 작품들로 하여금 봉헌물로서 사진의 가시적 이미지와 교집합을 이루며 그것이 지닌 신뢰의 힘을 빌리려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 이렇듯 그는 사진이 회화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에 즉각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든지, "사진 이미지는 현재진행중인 개인의 행적이나 삶을 증명해주는 각각의 단면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약해서 묘사되는) 한 편의 회화와는 달리 한 장의 사진은 다른 사진이 더 많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는 피사체의 '연장성'에 대한 손탁의 주장을 자신의 극사실주의 회화에서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박우식_s strange actions_캔버스에 유채_97×97cm_2015

4. 박우식의 리얼리즘은 지금 현존재에 대한 실존적 사유를 치유의 지평으로 확장중이다. 그는 실존의 대리보충과 소통을 고뇌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치유의 미학'으로 실현하고 있다. 예컨대「Reveal one's identity, the identity of one's strange actions」(2015)에서는 도시 속의 고독한 군중인 현대인의 화석화된 표정이나 상실의 군상을 소년의 익살스럽고 해맑은 웃음과 대비시키고 있다. ● 그의 일련의 작품들은 일찍이 프란스 할스(Frans Hals)가 16세기에 80년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인한 고통의 질곡에서 헤매는 네덜란드인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수많은 웃음의 화폭을 국민에게 선사함으로써 슬픔의 시대를 '웃음의 시대'로 바꾸려 한 치유의 미학을 상기시키고 있다. 웃음은 '관계의 표현'이다. 웃음은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웃음은 '열림의 신호'이고, '무언의 소통'이기도 하다.

박우식_s strange actions_캔버스에 유채_97×97cm_2015

이에 반해 웃고 싶지 않은 사회, 웃지 못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거기서는 많은 이들이 '생명의 언어'인 웃음으로 더 이상 세상과 만나거나 소통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렇듯 웃음은 개인과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어떠한 막힘도 소통시키는 '에네르기의 원천'이고, '마음의 통로'인 것이다. 이와 같은 웃음의 의미는 지금, 소통의 방식을 바꾸고 있는 작가 박우식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작품들은 도처에서 웃음을 전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웃으라고 말하고 있다. 웃음은 얼굴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멜로디이고, 치유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 이광래

Vol.20150512c | 박우식展 / PARKWOOSIK / 朴佑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