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탐탐 드로잉 프로젝트

김은하_김형기_윤세영_이민경_이민경展   2015_0530 ▶︎ 2015_0715

1부 초대일시 / 2015_0530_토요일_03:00pm 2부 초대일시 / 2015_0709_목요일_06:00pm

무등갤러리 기획공모 당선展

1부 / 2015_0530 ▶︎ 2015_0627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일요일 휴관

충정각 SPACE CHUNGJEONGGAK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360-22번지 Tel. +82.2.313.0424 www.chungjeonggak.com

2부 / 2015_0709 ▶︎ 2015_0715 관람시간 / 10:00am~06:00pm

무등갤러리 MOODEUNG GALLERY 광주광역시 동구 예술길 18-1(궁동 51-25번지) Tel. +82.62.236.2520

'엄마'라는 이름의 예술 혹은 마술 ● '엄마'라 불리는 존재, 혹은 삶의 방식이 있다. 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돌보는 일이 그녀들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이다. 어떤 엄마는 거기에 보태어 이중삼중의 사회적, 경제적 책무를 더 떠안기도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엄마도 있다. 어떤 엄마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의식을 모두 내려놓고, 그저 한 가정의 잉여 노동력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가족의 위급한 부름에 답하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존재와 시간을 일정부분 비워두면서 말이다. 이런 엄마든 저런 엄마든, 엄마들의 삶이란 어찌 보면 숭고한 희생의 삶이지만, 또 어찌 보면 고단함과 상실감에 찌든 삶이다. 그 점에서 결국 모든 엄마들은 닮아 있다. ● 그런 수많은 엄마들 중에 예술을 하려는 엄마가 있다. 이제 우리는 그 '엄마예술가' 혹은 '엄마작가'들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그런데 '엄마예술가', '엄마작가'라고 하면 어딘가 어색한 단어의 조합 같다. 자기 고유의 정체성보다도 가족관계의 틀 안에서 규정되고, 생활인으로서의 책무를 먼저 떠오르게 하는 엄마는, 독자성과 고유성을 담보로 하는 예술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인다. 가족의 관계망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엄마의 삶과, 절대적 고독 속에서의 몰입을 요구하는 예술가로서의 삶은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마련인 것이다.

윤세영_엄마 the mom_종이에 채색_38×25cm_2015
윤세영_시간 as time goes by_종이에 채색, 스크래치_34×22cm_2015
윤세영_두여자 two women_종이에 채색, 스크래치_60×44cm_2007

가령,「두 여자」(윤세영)를 보자. 여기에는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하는 두 개의 자아가 있다. 아이를 잉태한 '엄마'로서의 자아와 아직 순수한 소녀의 몸과 뜨거운 열정을 가진 '예술가'로서의 숙명적 자아가 그것이다. 한 여자의 내면에서 두 자아는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어느 하나가 사라지거나 버려질 수 없다. 하지만 둘은 좀처럼 타협하지 못한 채, 여자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타자화한다. 그것은 여자의 내면에 간극과 균열을 만들어내고, 가시 같은 고통을 안겨준다.(「엄마」「자회상」) 한 여자가 엄마이자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그러한 내면의 간극과 고통을 끌어안은 채, 오랜 인내를 통해 그 고통을 치유의 힘으로 바꾸어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상처-위로」「시간」) ● 치유의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엄마작가들은 부단히 창작을 해야 한다. 엄마작가들에게 가장 큰 치유는 결국 창작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엄마작가들은 잠깐의 겨를이 날 때마다 짐승이 새끼 낳을 자리를 찾아가듯 조용히 자신만의 공간으로 찾아든다. 그곳에서 그녀들은 자신의 몸에 끈덕지게 들러붙어 있는 엄마라는 자의식을 털어내고, 그 자리에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새롭게 채워 넣는다. 그녀들은 그런 각성과 자기규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도처럼 밀려오는 일상에 매몰될 것이 분명하고, 들끓는 주변의 요구를 하나하나 들어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때론 너무 너그러워서 어리석다.

이민경_초록 나무_종이에 유채, 콜라주_70.5×48.5cm_2015
이민경_붉은 지붕, 붉은 해_종이에 색연필, 수채_29.7×21cm_2015

너그럽고 이타적인 엄마일수록, 그 엄마 안의 예술가는 혼돈스럽다. 엄마가 아닌 예술가로 자신을 규정하고 자신만의 시간에 몰두하는 것은 절대로 도덕의 문제가 아님에도, 그녀들은 때때로 엄마로서의 의무를 방기했다는 죄의식에 휩싸이곤 한다. 너무 이기적인 자신을 탓하게 되고, 자기 예술의 존재 의미마저 되묻게 될지도 모른다.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런 내 아이의 미소조차도 창작자에겐 때로 독이 될 수 있다는, 그 처연한 아이러니 속에서 그녀들은 끝없이 방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작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욱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시킬 수밖에 없다. 일련의「집」시리즈(이민경 b.1979)의 엄마작가는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지독하게 밀어붙였던 모양이다. 기존의 사진 작업이 드로잉으로 옮겨지면서, 집은 좀 더 단순한 몇 개의 기하학적 형태로 '소멸'되었다. 부피와 질량을 가진 입체는 넓이만을 가진 평면으로 옮겨지고, 곧 몇 개의 선으로 더욱 더 축약되었다. 집은 주변세계와 외부세계가 한꺼번에 작도되었고, 그 자체로 완결된 구조이지만, 어딘가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듯 위태롭다. 아마도 작가는 그렇게 위태롭게, 하지만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김형기_개화_혼합재료_45×53cm_2015
김형기_304나비_혼합재료_15×15cm_2015

매니큐어로 그린 일련의 일러스트 작품들(김형기)은 엄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여자의 성장과 고민의 시간이 담겨있다. 그녀에게는 조금 더 이기적이어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다. 작가는 적어도 창작에 임할 때만은 충분히 이기적일 권리가 있다. ● 이처럼 엄마작가들이 지금도 자신의 공간에서 창작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세상이 알아주든 아니든, 그녀들은 자기의 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엄마작가들은 그 힘겨운 시간을 견뎌내는 것일까?

이민경_LegoHouse_트레이싱지에 색연필_21×29.5cm_2015
이민경_빌린 집_아이들과 거리 퍼포먼스_2015

「레고 하우스」시리즈와 일련의 사진 작품들(이민경2)이 현실을 견뎌내는 방법을 들여다보자. 길거리 곳곳에는 투자욕구를 자극하는 빌라매매 전단지가 나붙어있지만, 빈곤한 예술가 엄마와 그녀의 아이들에게는 편히 몸을 기댈 조그만 집 한 채 없다. 엄마는 작은 아이를 등에 업고, 큰 아이는 옆에서 걸음을 걸리고서, 길고양이처럼 집을 찾아 부단히도 떠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가련한 하우스 노마드들에게 현실은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 엄마는 집이 없어 애가 타는데, 아이들은 천진하게도 길바닥에 마구 집을 그렸다 지워버리곤 한다. ● 바로 이러한 때에, 현실이 눈물겹고 소망이 간절할수록 엄마 안의 예술가는 깨어난다. 엄마 안의 예술가는 상상의 힘으로 이 답답한 현실을 탈주한다. 아이들은 어떠한 장소라도 놀이터로 만들어버리고, 어떤 문제도 저희들만의 방식으로 가볍게 초월해버리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엄마 안의 예술가는 바로 그것을 포착해낸다. 이제 엄마는 아이들처럼 집을 가지고 놀아보기로 한다. 빌라전단지로 집을 접어서 길거리에 늘어놓고 맘껏 조롱해본다. 레고로 집을 지어 가족들이 한 채씩 나눠가지는 상상도 해본다. 싫증나면 부수고 다시 지으면 그만이다. 아스팔트 위에 금을 그어 내 땅을 차지해 보기도 하고, 골목길을 내 소유인 양 맘껏 뛰어다녀도 보고, 남의 집 담벼락에 그림도 그려본다. 장난감을 던져주면 질릴 때까지 가지고 노는 아이들처럼, 엄마도 그렇게 집과 집을 갖지 못한 서러움을 질리도록 가지고 놀아본다. 이것이 이 엄마작가가 현실을 탈주하는 방법이다. 결국 엄마작가들에게는 현실을 탈주하는 방법 역시 창작이다.

김은하_코를 조심해 드로잉 연작_종이에 목탄, 금박_2015
김은하_긴코 자화상_종이에 목탄_65×56cm_2015

엄마작가에게 아이는 창작의 중요한 테마가 되곤 한다.「긴 코 여행」시리즈(김은하)의 엄마작가에게도 그렇다. 이 엄마작가는 어른의 세계에서는 너무도 당연하여 이젠 말할 필요조차 없는 세계의 거짓과 부조리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는 것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인식의 힘은 엄마만의 관점이 아닌, 엄마와 아이의 중첩된 관점에서 나왔다. 내 아이가 세상의 부조리와 거짓 앞에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해줄 엄마는 없을 것이다. 엄마작가는 이제 자신의 시선 위에 아이의 시선을 덧입혀서 세상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으로, 엄마는 세상의 진실에 대해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은 원래 깨끗하고 참된 것이라고 말자체가 거짓에 대한 거짓증언일 뿐임을. 또한 아이의 시선을 빌려 바라본 세계의 첫 장면은, 거짓으로 코가 늘어나 있는 자신의 모습임을.(「긴 코의 자화상」) 이제 엄마는 세상의 거짓 이전에 자신의 거짓에 대해 먼저 증언해야 할 것이다. 엄마작가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내가 아닌 관점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힘을 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그 과정을 견뎌내겠지만, 그러한 관점으로 보는 세상은 얼마나 더 깊고 오묘할 것인가. ● 이렇듯 여기 모인 다섯 엄마작가들은 엄마작가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이고 있다. 말이야 쉽지, 그 과정은 무척이나 지난하고 힘겨웠을 것이다. 절대 녹록치 않은 일상 속에서 창작의 시간을 얻어낸다는 것은 모래 속에서 사금을 캐내듯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이 엄마작가들에게는 예술이 아니라 마술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들을 둘러싼 모든 자질구레한 일상과 도덕적 잣대와 현실적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잠시나마 완벽히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데려가줄 신데렐라의 호박마차 같은 것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열두시가 되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시간일지라도, 그녀들에겐 오롯이 창작에 몰두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 그런데 놀랍게도 이 다섯 명이 엄마작가들은 서로를 다독여가며 그런 마법 같은 시간을 만들어냈고, 마침내는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이게 되었다. 그녀들의 그런 노력이야말로 진짜 마술이 아닐까, 잠깐 생각해보기도 한다. 혹여 그녀들에게 공감한 당신이라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예술을 할 것인가? ■ 송혜진

Vol.20150530f | 호시탐탐 드로잉 프로젝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