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감각 Some Sense of Order

문영민展 / MOONYOUNGMIN / 文永民 / painting   2015_0703 ▶ 2015_0717 / 월요일 휴관

문영민_관계의 감각20150503_캔버스에 유채_38×46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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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703_금요일_06:00pm

기획 / 스페이스몸미술관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몸미술관 SPACEMOM MUSEUM OF ART 충북 청주시 흥덕구 서부로 1205번길 183 (가경동 633-2번지) 제2,3전시장 Tel. +82.43.236.6622 www.spacemom.org

유년시절 내 뇌리에 가장 인상 깊게 각인된 것은 제사의 예절, 특히 엄숙하게 절하는 행위가 지닌 어떠한 무거움과 비는 마음임을 깨닫게 되었다. 조상의 기일이나 정월 초하루가 다가오면 집안팍을 청소하고 몸을 씻고 마음을 바로 가진다는 일련의 절차에 모종의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제삿날에는 저고리나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었다. 물론 제삿상 음식도 좋았지만, 연도라는 기이한 천주교 기도문을 읊는 행위와 엄숙하게 절하는 순간, 그 침묵의 연장된 순간들이 어린 나이에도 나에게 특별하게 인식되었다. ● 절하는 모습을 그리는 이유는 그것이 물론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애도의 보편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행위란 내가 친숙하고 잘 아는 것이라고 느끼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낯설고 정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는 모순에서 기인한다. 종교를 거부한지 오래된 이 시점에도, 제사를 통해 친숙해진 절하기라는 행위의 의미는 불가사의한 것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요컨데, 누군가의 영혼을 위해 절을 통하여 염원을 할 때, 절하는 사람의 마음은 그 영혼에게 전해지는가? 사후의 영역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논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절을 행하는 이에게는 그 행위가 평범한 시간에서 사후의 영혼과 연결을 시도하는 일종의 경계를 뛰어넘는 순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그러한 경계를 뛰어넘는다는 것, 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연결된다는 것을 현재 나로서는 설명할 수 없다. 나에게 절이란 그러한 원천적인 실패와 불가능성을 전제로 행하는 것이다. 절하는 순간의 염원이 정신적으로 내재된 것이라면 그 행위의 모습은 외적인 것이다. 내가 그릴 수 있는 것은 그 외적인 면에 불과하다. 내 그림은 그러한 한계의 인식에서 시작된다.

문영민_관계의 감각展_스페이스몸미술관_2015
문영민_관계의 감각展_스페이스몸미술관_2015

절은 반복된다. 절을 통한 염원은 웬지 한번의 행위로만은 부족하다는 듯이, 반복을 통해서 그 불가능성과 실패를 극복하려는 시도일지 모른다. 오랜 기간동안 회화에 대한 애증을 가졌던 내가 다시 회화를 실천하기 위해서 나는 반복하는 절 행위를 회화를 통해 반복하고 있다. 내게 회화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마치 절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가다듬듯이, 회화를 실천하고 싶다. 적어도 지금 내게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은 학문을 연마하듯이,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도 하나를 제대로 하려고 노력하듯이, 매일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시도이다. 더 향상시키려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물론 항상 오늘 그린 것이 어제 것보다 나아지지 않는다. 때로는 그럴 수도 있지만 흔히 실패한다. ● 반복은 그림 하나에, 이미지 하나에 한 번 이상의 기회를 가져보고 싶다는 모순된 욕망에서 비롯된다. 동일한 이미지를 반복해서 그리더라도 각 그림은 한 번만의 기회를 허용할 뿐이다. 그리고 같은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은 내 작업을 편집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면에서 내 작업은 하나의 주제와 그 변주를 만들려 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그림을 매번 정확하게 똑같이 그려내려고 반복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반복되는 한 부분, 즉 누군가를 기억하는 행위, 애도의 행위, 죽음의 묵상을 회화라는 반복적으로 옮기는 실천이다.

문영민_관계의 감각20150406_캔버스에 유채_38×46cm_2015

나는 유화로 한국의 전통적 정신문화의 중요한 상징인 절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작업이 단순히 '전통적'이거나 '전통문화' 그 자체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나에게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의 인물들을 그린 이 그림들은 비한국인, 또는 절이라는 예절과 친숙하지 않은 한국인에게 문화적 이국성을 풍기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서구에서 보낸 학생시절 각인된 회화의 종언을 극복하면서, "애도의 임무로서 회화"라는 명제가 내포하는 모더니즘의 죽음충동을 삶에서의 그것이라는 더 넓은 차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 애초에 그림의 시작이 제사의 기억인만큼, 그림의 배경에 제사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을 고집하지 않는 이유는 내 그림이 제사와 절이라는 특정한 문화적 맥락에서만 읽히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비록 절은 특수한 형식을 취하지만 애도의 발로는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은 유/불교나 제사와 무관하게 절을 한다. 어쩌면 한국사회에서 절의 행위는 남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윗 어른에게 향한 공경심의 표현이나 결혼식의 하객들에게 절하는 신랑신부는 전통적 의례에 근거한다고 보겠으나, 유권자에게 절하는 정치인의 가식적인 모습, 반면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는 절실한 유가족과 후원자들을 보며, 직립한 인간이 바닥의 범주에 몸을 낮추는 행위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수 밖에 없다.

문영민_관계의 감각20150603_캔버스에 유채_38×46cm_2015 문영민_관계의 감각20150606_캔버스에 유채_38×46cm_2015
문영민_관계의 감각展_스페이스몸미술관_2015

기실 4.16 세월호 참사 이후 내 작업은 본의 아닌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본다. 실종자를 다 찾지도 못한 상황에서 유가족을 모독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목도하면서, 애도의 행위란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망자를 기억하는 애도의 행위 때문에 국가의 처벌을 면치 못하는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 안티고네처럼 말이다. ● 현란하고 스펙터클한 현대의 문화에서 사실이건 픽션이건 죽음의 재현은 널려있고 매일 소비되지만 애도와 그것의 재현은 드물다. 나는 그러한 불안한 이미지와 소리를 걸러냄을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 작업은 제한되고 절제된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가난한 언어를 쓰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회화는 내가 살아가면서 중요하다고 느끼는 소중한 행위와 느낌, 즉 애도와 기억하는 행위를 절제있게, 그러나 가볍고 담담하게 그려나가는 것이다.

문영민_관계의 감각展_스페이스몸미술관_2015
문영민_관계의 감각展_스페이스몸미술관_2015

『관계의 감각』이라는 제목은 동양의 관습에 뿌리를 둔 것으로, 망자의 삶의 종결에 필요한 격식, 속죄, 제의식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들의 자리를 부여하고, 이승의 고리를 끊고 저승으로 떠나가도록 돕는 행위에 수반되는 어떠한 느낌을 지칭한다. ● 궁극적으로, 죽음을 기억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죽은 자의 모습을 재현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암시하는, 죽음에 대한 묵상을 발현하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한다. 그것은 생활 속에서 죽음을 기리는 행위, 즉 제도화된 소위'미술' 이전의, 혹은 그 바깥의 것을 그리기 위함이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죽음이라는 현상에 있어서 산 자가 매듭짓는 행위, 죽음의 적절한 종결을 위해 필요한 하나의 의식을 그리고자 함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종국에는 거부할 수 없는,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믿음과 관련된 실천이며, 그것은 예술의 본질과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 문영민

Vol.20150712b | 문영민展 / MOONYOUNGMIN / 文永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