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Montague) + 미약(微弱)한 관계

김정민_김수_신원준展   2015_0714 ▶ 2015_0831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5_0717_금요일_06:30pm

몽타주(Montague) / 김정민展 미약(微弱)한 관계 / 신원준_김수 2인展

후원 / (주) 연림_이연주 갤러리

관람시간 / 10:00am~07:30pm / 06:30pm 입장 / 월요일 휴관

이연주 갤러리 LEEYEONJU GALLERY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 170-5번지 끌레22 4층 Tel. +82.51.723.4826 cafe.naver.com/gallery2yeonju

완전하다-보여 진 그리고 약하다-말해진 실존들 The existences that were showed complete and were defined delicate -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To live as the name of Human ● 관계의 문제, 그것은 서점을 가득채운 베스트셀러들의 주된 모체가 되고 있으며 "친구들아 모여라" 뽀로로 ost부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까지 그것을 노래하는 대상의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부분을 인간의 삶 가운데 타인과 관계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관계의 문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며 정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은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늘 우리가 예상했고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의 것을 경험하게 한다. 그 가운데 특히 부정적인 성격을 띤 것들은, 내가, 우리가 추측하고 추정한 것 이상의 고통을 경험하게 한다. 『미약한 관계展』은 바로 그러한 지점에 서있다. ● 최근 이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된 나로서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 그 관계 속에서 발견되고 있는 문제들에 집중하고 있는 김수와 신원준의 작업에 조금 더 밀접하게 다가갈 수밖에 없다. 이 소소한 나의 사적 일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글의 성격이 객관성을 잃는데 일조하기보다 작품을 마주하는 그대들의 경험들에 비추어 이해를 쉬이 돕기 위함에 있음을, 작품과 감상자의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어서 실존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에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실존이라 이름을 붙임은 우리의 현실, 즉 구체적인 경험의 세계를 살아가는 개개인이라는 의미에서의 바로 그 실존이다. 『미약한 관계展』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김정민_전달된기억_미송합판_280×280×400cm_2012
김정민_전달된기억_미송합판_280×280×400cm_2012
김정민_기억집합체_자작나무합판에 아크릴도장_200×166×18cm_2014

김수: 완전하다-보여 진 ● 김수의 작업은 주지하듯이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은 유리라는 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소박하게 출발해보자. 쉽게 형성되고 그것이 쉬운 만큼 해체되기 역시 쉬운, 지금 우리의 인간관계와 작은 균열이 전체의 파열을 가져오는 속성을 가진 유리는 대응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아주 작은 균열 하나가 판 전체의 파열을 가져오는 유리, 그리고 그 파편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微微)하다 하더라도 큰 상처를 입힌다. 자, 그럼 이제 나를 시작으로 우리 주위를 한 번 돌아보자. 타인과 함께 함이 결코 긍정적인 결과만을 안겨주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에서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깨어지고 상처입고-입힘의 관계를 결코 쉽게 벽을 세워 막거나 잘라내어 내칠 수 없음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 깨어짐을 억지고 매우고 때워 맞추어 살아간다. 이런 관계함의 문제, 인간이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살아가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아리스토델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homo politicus)"이라는 말한 것처럼 오랫동안 인간의 삶 가운데 논의 되어온 문제이기도 하다. ● 우리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 왜 우리는 왜 관계 가운데 스스로를 놓고 또한 그 가운데 상처받고 아파하면서도 그것을 지향하며 살아가는가. 그 근본적인 물음 가운데로 우리를 던져 놓아보자. 사르트르의 『구토』의 "살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어울려야(pour exister, il faut qu'ils se mettent á plusieurs)"한다는 구절로부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공포로 다가온다. 깨어지고 다치고 상처입어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니 너무나도 공포스럽지 않은가.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인은 지옥과 같은 존재이다.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자이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타인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너무나도 유명한 명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단순히 생을 연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우러져야만 한다. '살아가기 위함'이라는 관계를 향한 나의 욕구가 그리고 타인이 나를 향하는 욕구로 인해 맺는 관계 속 우리는 유리의 파편처럼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이는 그것을 지향하는 대상에 있어서 강압과 또 다른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파괴적 관계와 맹목적 관계 유지는 '관계중독'이라는 병리적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조금 더 유리라는 매체에 집중해 보도록 하자. 유리는 충격에 매우 약하다는 특징 이외에도 물질구조상 녹는점이 없기 때문에 열을 가했을 때의 유연성과 열 냉각시의 투명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유리의 물리적인 특징을 표현하는 '투명성'이라는 용어는 미학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인 의미로 자주 자용된다. 특히 미학과 철학에서는 그 대상에 대해 명석 판명하게 이해할 수 있음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Venn Diagram』에서 유리는 그 겹침(집합관계)으로 인해 투명성{넘어서 보인다[Trans(across) + Parent(see)]}을 상실한다. 이로써 명석판명하게 들여다보기는 실패로 끝난다. 관계의 의미와 관계를 통해 발생하게 되는 의미는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늘 우리가 기대하고 미루어 짐작한 것을 넘어서 있지 않던가. ● 김수의 작업들은 관계에 집중한다. 그것이 겹침으로 인해 더욱더 나의 앎을 벗어나 있는 관계이든 깨어짐으로 상처 입히는 관계이든, 이 관계함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Glass series2-Second」와 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미적이고 완전한 형대로 드러나지만 가해지는 물리적 힘에 의해 조각난 채로 서로를 상처 입히는, 열을 가함에도 찐득한 연결로 남을 뿐 결코 끊을 수 없고 유지될 수밖에 없는 이것은,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다. 그것이 작가 김수가 경험했고 나 역시, 그리고 우리가 또한 경험했던 관계의 의미이며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경험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이기도 하다. "삶은 멀리서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The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과 같은 그러한 관계로써 말이다.

신원준_열등감_혼합재료_4×4×2cm_2015
신원준_열등감_혼합재료_50×200×50cm_2015
신원준_바라다_레진, 대나무살, 시바툴_60×50×30cm_2015

신원준: 약하다-말해진 ● 뒤집어진 고래의 배위에서 분주하게 자신들의 성을 만들어 가는 새우들이 주를 이루는 신원준의 작업들은 한편의 우화(寓話)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우화는 인간의 행위와 삶의 이야기를 동식물의 의인화를 통해 드러낸다. 신원준의 작업들을 우화로 읽어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러한 작업들이 담지하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지구상에서 현존하는 포유류 가운데 가장 큰 몸집을 소유한 흰수염 고래와 그 주 먹이가 되는 크릴새우, 작가는 그것 각각에서 자신에게 열등감을 유발시키는 사회기득권층의 권력과 그에 종속되고 따라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비기득권층인 자신과의 유사성을 발견해 냈다. ● 작업의 중심이 되는 문제인 '열등감'에서 드러나듯이 신원준 작업의 출발점은 작가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에 있으며 이 감정은 몸집이 큰 고래와 먹이인 작은 새우의 관계에서처럼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의 '관계'로부터 발생한다. 즉, 작업의 출발점이 되는 감정은 '현실'이라 불리우는, 작가 자신이 점유하고 있으며 또한 위치 지어진 삶의 장(場)에 대한 성찰로부터 온다. 열등한 위치에 놓여 진 존재,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이름이기도 했고 스스로도 승인한 이름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반추(反芻)의 과정, 전복시킨 고래 위에서 자신들의 세계를 형성해 나가는 작은 새우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열등한 존재라는 부정성의 의미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것은 스스로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주체적 삶의 실천이며 신원준의 우화가 제약된 자신을 극복하고자 하는데 있기 때문에 공격성을 품고 있는 조소와 냉소로 읽혀지는 것인 아닌 미소(微笑)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 따라서 신원준의 작업은 자신의 존재를 획득하는 본래성과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는 비본래성의 사이의 선택에서 본래성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본래성을 취함은 스스로의 인정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본래성을 취하는 것이 꼭 아름답고 밝은 것만이 아닐 수 있다. 즉 본래성을 취하는 길은 너무나도 큰 불안과 고통을 직면하게 하지만 그것을 취할 때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예정되어 있는 정체성-약하다 말해진-을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의미를 새로이 획득 할 수 있는 길. 뒤집어진 배 위의 새우들, 우리라는 새우들은 이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 작가는 또한 그러한 형상 위에 자신이 살아낸 삶을 새겨 넣는다. 그것은 작업의 필수적 요소의 반추의 과정이 과거라 불리우는 것을 지금-여기에 끌어오는 현재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살아낸 삶을 무채색 바탕위에 새기며 그 가운데 여전히 현재의 삶을 추동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삶을 새겨 넣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서열화 된 사회계층(social stratification)에 따라 사회적 삶의 기회가 차별화되어 있다.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비추어지는 작가 개인이 살아낸 삶, 거기에서 비롯한 감정이 우리에게 우리의 이야기로 읽혀진다면 우리가 동일 혹은 유사한 계층으로서 삶을 함께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신원준의 작업들은 우리가 처한 상황으로 우리를 이끌고 그러한 인정으로부터 우리의 본래성을 획득할 기회를 마련하게 한다. 인간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존재는, 실존으로 살아가는 존재는 이 삶의 세계에 아무런 이유 없이(無) 던져졌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이 세계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그것은 나의 행동과 행위로 가능하게 된다. 인정하는 스스로에게 『다가서기』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될 수 있다. 진실 된 것이자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써.

몽타주(Montague) + 미약(微弱)한 관계展_이연주 갤러리 김수 섹션_2015
김수_Glass series 2-Second_ glass_3m 이내 가변설치_2015
김수_Glass series 2-Albert Einstein_유리_35×50cm_2015
김수_Glass series 2-A heart_유리_35×30cm_2015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하고 그 가운데서 또한 새로운 삶의 방식들을 발견해 낸다. 이러한 관계함 가운데 있어서 부정적인 결과를 도출해 내는 꽤 많은 부분이 '살아가기 위해서'라는 이기(利己)와 그 피상적인 것에만 머무르는 이성적인 관계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데카르트를 위시한 서구철학이 강조하는 합리적 이성을 가지고 사고하는 존재이기 보다 타인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고 또한 그들의 아픔에 같이 슬퍼하고 울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각과 감각, 그로부터 출발하는 정서적 연대감이라는 것이 우리를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 없이 겹겹이 쌓인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었던 관계가 가져오는 것은 깨어진 유리조각의 집합과 같은 결말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나와 우리가 언제나 놓치고 있는 부분이 아닐까. 책이나 노랫말이 아닌 진정으로 관계함으로부터 마주하게 된 나-의, 우리-의 모습, 그러나 그것을 인정함으로부터 다시금 시작할 수 있으며 비로소 내가, 그리고 우리가 현재를 현재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약한(미약:微弱)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으며(미:敉) 그것에 신의가 있는(약:約)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말이다. ■ 박은지

Vol.20150719b | 몽타주(Montague) + 미약(微弱)한 관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