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OCI YOUNG CREATIVES

정희정_강호연展   2015_0723 ▶︎ 2015_0818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5_0723_목요일_05:00pm

정희정展 / 『태우다, 태어나다』 강호연展 / 『합의된 노스텔지아』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정희정의 작업-제의적 퍼포먼스, 소지에서 불에 탄 산수에로 ● 곰브리치는 엄밀하게 재현적이기만 한 그리고 표현적이기만 한 그림은 없다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때 재현충동과 표현충동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고 했다. 우리 식으로 치자면 진경과 의경이, 실경과 의경이 상호 삼투된다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경도 실경도 없다. 모든 그림은 결국 어느 정도 의경이랄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진경이란 말에 실경과 의경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 실제로 보고 그린 그림과 의중을 담은 그림이 포함돼 있다. 그래서 모든 그림은 의경이면서 심경이면서 관념화일 수 있다. 이때의 관념은 말할 것도 없이 주체에서 그림 쪽으로 건너간 것이며, 자연에 반영된 주체의 가치관인 것이며, 일종의 이상향이며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리고 때로 디스토피아(유토피아와는 비교되는 억압된 실재가 만든 풍경)이며 헤테로토피아(없는 장소며 부재하는 장소)일 수도. ● 시대가 바뀌면 관념이 달라지고, 관념이 바뀌면 형식이 달라진다. 예컨대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반영한 붉은 산수며, 문명의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현실을 그린 쓰레기 산수가 그렇고, 도시의 빌딩숲이 그려낸 스카이라인과 같은 인위적인 선을 전통적인 산수에 대입해 그린 도시산수 혹은 도시풍경이 그렇다. 그리고 불완전한 기억을 그린 기억된 풍경이며, 희미해진 기억을 그린 흐릿한 풍경이 그렇다. 그리고 정희정은 불에 탄 산수를 그린다. 불에 탄 산수? 산불로 황폐해진 산수를 그린? 그처럼 황폐한 현실을 그린? 앞으로 그런 관념이며 현실을 반영한 그림을 그릴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선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정희정_骨山-Daedunsan_장지에 화선지 콜라주, 향, 라이터_180×390cm_2015
정희정_Peakcape_장지에 화선지 콜라주, 채색, 향, 라이터_91×116cm_2015

작가의 불에 탄 산수 그림은 이런 관념으로서보다는 방법론이며 형식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작가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불에 태워서 그린다. 큰 그림은 라이터로 태워서 그리고 작은 그림은 향불로 지져서 그린다. 라이터와 향불이 전통적인 붓을 대신한 것인데, 지두화며 죽필 그리고 마른 나뭇가지나 뿌리를 붓으로 대용한 경우의 연장으로 보면 되겠다. 이것들은 다 뭔가? 전통적인 회화에서의 형식논리로 치자면 남다른 선이며 개성 있는 선을 얻기 위한 것이다. 흔히 서양화는 색이고 동양화는 선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전통적인 회화에서 선은 중요하고 결정적이다. 준과 필과 획이 세부적으로 다르지만, 크게는 대동소이하게 이런 선에 맞춰져 있다. ● 작가는 태운 종이 조각을 화면에 중첩시켜 첩첩이 중첩된 산세며 능선을 재현한다. 먹그림의 이력으로 감을 잡지만, 종이 조각이 태워지면서 만들어내는 가장자리 선은 완전한 통제를 넘어선다. 감과 우연이 상호작용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선은 희한하게 먹의 선염을 닮았고, 먹의 농담을 머금는다. 그리고 여기에 한지를 중첩시키는데, 알다시피 한지는 반투명이다. 그래서 마치 엷은 먹을 덧발라 밑 색이 우러나오는 것처럼 종이와 한지가, 한지와 한지가 하나의 층위로 어우러져서 은근하고 은은한 색감과 질감을 자아낸다. 이처럼 종이며 한지를 태운 자국이 어우러져서 첩첩이 중첩된 산세를 만들고, 앙상한 골산을 만들고, 아련한 능선을 만들고, 올망졸망한 봉우리를 만든다. 실제로도 작가는 이 산들을 골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골산은 우리 산을 표현하기에도 걸맞다. 우리 산은 늙어서 옆으로 퍼지는 부드러운 능선도 있지만, 대개는 바위산이 많고 기암절벽이 많다. 남다른 선을 얻기 위한 형식논리도 있겠지만, 작가의 무의식에 흐르는 기억과 관찰이 작용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정희정_骨山-어떤 풍경_장지에 화선지 콜라주, 먹, 향, 라이터_145×60cm×2_2015

작가의 무의식에 흐르는 기억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산을 좋아하는 아버지 탓에 어릴 적부터 산을 자주 찾았고 산에 친숙했다. 한국화라고 한다면 당연히 거치는 코스로 보기 이전에 작가는 산을 일종의 내적필연성의 한 계기로서 심중에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 년에 열두 번도 넘는 제사를 치렀고, 제사에는 어김없이 향불이며 소지가 등장한다. 특히 소지는 종이를 태워 재를 만들어 날려 보내는 것인데, 죽은 사람을 상징한다. 죽은 사람? 작가의 그림은 삶과 죽음이, 생성과 소멸이 순환 반복되는 자연의 이치이며 존재의 원리와도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그림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태워서 없애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이 스스로 생성되게 한다. 소멸을 통해서 그림이 재생되게 한다. 차후에 죽음과 소멸과 부재, 공과 허와 무를 통해서 존재를 생성시키고 형상을 낳는, 없는 것을 통해서 있는 것의 원인을 밝히는 근원에 대한 그리고 그 생성운동에 대한 이치에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엿보인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일까. 이렇게 불에 탄 산수며 한지를 태워 만든 산수의 종합이 일어난다. 얼핏 작가의 그림은 남다른 선을 얻기 위한 형식논리의 소산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처럼 작가의 유년의 기억이며 무의식과 같은 내적 필연성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정희정_Burning of Ridge_장지, 라이터_22×75×15cm×2_2015_부분
정희정_骨巖-어떤 돌_장지에 화선지 콜라주, 향, 라이터_90×90cm×3_2015

한편으로 작가의 그림은 산세를 닮았고 골산을 떠올리게 한다는 선입견을 제외하고 있는 그대로 보면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닮았고 주름을 떠올리게 만든다. 실제로도 작가의 그림을 보면 첩첩이 중첩된 천 개의 고원 같고 겹겹이 포개진 주름 같다. 그리고 알다시피 고원도 주름도 들뢰즈의 리좀을 형용하는 개념이다. 리좀은 구근류의 뿌리를 의미하고, 뿌리가 따로 없는 뿌리를 의미하고, 모두가 뿌리인 뿌리를 의미하고, 다중심을 의미하고, 그 자체 이미 대우주인 소우주를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적이며 완성과 같은 이미 가 닿은 어떤 지점으로서보다는 과정과 이행, 운동과 생성원리를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는 소멸을 통해서 스스로를 생성시키고 재생시키는 자연의 원리를 그려놓고 있었고, 그 항상적인 생성원리를 그려놓고 있었다. 종이를 태운 자국이 만들어내는 그림이 마치 알 수 없는 얼룩처럼 어느 정도 가변적이고 우연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일이고, 기본적으론 예측불가능성에 노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일이며, 그리고 그렇게 예측 불가능한 것의 우연한 포획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일이다. ● 그렇게 작가는 불에 탄 산수를 통해 실경(감각적인 풍경)을 재현하고 있었고, 의경(관념적인 풍경)을 반영하고 있었다. 형식논리로 치자면 일종의 콜라주 기법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나아가 불에 탄 종이 조각을 아예 일종의 오브제처럼 사용한다. 콜라주에서 오브제로 확장되고 심화된 경우라고나 할까. 불에 탄 종이 조각을 화면에 콜라주하는 대신에 그 자체로 중첩시켜 제안하는데, 여기서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결정적이다. 중첩된 종이 조각이 일종의 산수 혹은 풍경처럼 보이고, 높낮이에 따라서 그 산수 혹은 풍경은 매번 다르게 보이고, 이는 그대로 전통적인 시점논의를 패러디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산수그림은 전통적인 산수화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놓고 있었고, 전통을 현대로 전유하는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 고충환

강호연_산장(내부)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4
강호연_산장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4

기꺼이 속아주는 관객들: 강호연의 환영주의적인 풍경"제우시스(Zeuxis)가 자신의 포도 그림을 개봉하자 새가 날아와서 쪼아 먹었다. 이윽고 제우시스는 패러시우스(Parrhasius)에게 커튼을 열어 당신의 그림을 보여 달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패러시우스가 그린 것은 커튼이었다. 승리는 당연히 패러시우스의 차지였다. (이에) 제우시스는 '나는 새를 속였고 패러시우스는 제우시스를 속였다'고 말했다." (Pliny the Elder, The Natural History, Book XXXV, "An Account of Paintings and Colours," Ch. 36. Trans. John Bostock (London: Taylor and Francis, 1855), pp. 65-66.) ● 제우시스와 패러시우스의 일화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5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빈번하게 회자되는 에피소드중의 하나가 되었다. 『자연의 역사(The Natural History)』(기원후 79년, 로마시대)에서 플리니 엘더(Pliny the Elder)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소재로도 얼마든지 '진정한' 미의 경지인 사실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제우시스의 에피소드를 인용하였다. 그런데 제우시스의 예는 현대미술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환영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유도한다. 그리스 최고의 화가인 제우시스는 왜 눈앞에서 그려진 커튼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였을까? 어떻게 평생 동안 남의 눈을 속여 온 제우시스가 그리도 쉽게 '눈속임'에 넘어갔을까? 그렇다면 과연 환영과 착각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강호연_모닥불_일상용품(가습기, 스탠드)_가변크기_2015

글의 서두에서 필자가 제우시스의 고전적인 예를 든 것은 강호연의 설치 작업이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풍경들을 각종 오브제들과 기재들을 사용해서 만든 환영주의 기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노끈, 신문지, 박스, 손전등 등을 이용하여 스위스 융프라우(Jungfrau), 백사장이 있는 해변, 한 밤의 보름달, 백야와 오로라로 유명한 핀란드 라플란드(Lapland)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절경들을 재현하여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필자가 강호연의 환영주의적인 설치 작업에 관심을 지니게 된 것은 단순히 그의 기술에 탄복해서만은 아니다. 대신 필자는 작가가 어떠한 의도로 환영주의적인 수법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환영주의가 관객들에게 어떠한 즐거움을 주게 되는지, 과연 작가와 관객간의 '속고 속이는 과정'이 현대미술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 미술이 눈속임의 역사이어 왔다면 새삼스럽게 이러한 역사가 왜 현대미술에서 반복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13년에 송은 아트큐브에서 열린 강호연의 첫 개인전 『대안 풍경』에서 작가는 회사 내 전시장을 각종 일상용품들로 만들어진 가상풍경으로 채워 넣은 바 있다. 자신이 평소에 즐겨 사용하던 탈취제(Deodorant)가 개인적으로 시원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작가는 탈취제의 윗부분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탈취제의 상단 부분이 설치된 거울에 반사되면서 결과적으로 화면을 통해서 관객은 그럴듯한 빙산의 정상을 보게 된다. 거대한 자연 풍경들을 일상용품들을 사용하여 재현하는 방식은「별이 빛나는 밤(Starry Starry Night)」(2012)에서도 발견된다. 작가는 "은하수가 보이는 밤하늘 아래서 야영을 하는 기분"을 내고자 용접 불똥이 티어서 우연히 만들어진 불규칙한 구멍들 사이로 손전등 빛을 투과시켜서 벽면이 천장에 별의 풍경을 가상적으로 조성하게 된다. 또한 최근「야호를 외치는 방법(How to Shout Yahoo)」(2011)에서는 휴대폰 두 대의 실시간 스피커폰 통화를 통해 하울링이 발생되고 이것으로 메아리의 효과를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작가는 폐지형태의 박스로 일종의 아이맥스 영화관과 같이 한 개인이 들어가서 수평으로 뻗은 별들의 이미지들을 감상할 수 있는 작은 설치물「산장(Cabin)」(2014)을 제작하였다. 그런데 '허접한' 박스 외관과는 달리 관객들은 박스 내부에서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이 유영하는 모습(환영)을 목격하게 된다. 어두움 속에서 서서히 별빛이 드러나는 과정도 실제 자연 속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의 경험을 모방한 것이다.

강호연_야호를 외치는 방법_영상 퍼포먼스_00:01:40_2011

이번 강호연의 전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가상의 풍경보다는 '무대 뒷부분'이 일반 관객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방식은 이미 송은 아트큐브의 전시에서도 선보였었다. 관객은 층위가 다른 방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뚫린 창으로 가상의 풍경을 접한 후에 그 광경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다양한 물건들이 동원된 방을 순차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반면에 이번 전시에서는 각각의 장면과 장면을 조성하기 위하여 사용된 설치 세트가 두 개의 서로 다른 방으로 나뉘어서 배열되게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한 쪽방에는「산장」과 같이 어두움 속에 별들이 유영하는 광경이 펼쳐지고 반면에 불이 켜진 다른 방에는 가습기와 스탠드만으로 효과를 낸「모닥불(Campfire)」(2015), 선풍기와 라디오의 잡음으로 파도의 효과음을 만들어낸「전파(Radio Wave)」(2015)가 전시되게 된다. 결과적으로 관객들은 어두운 한쪽 방에서는 완벽한 가상의 풍경을, 그리고 불이 켜진 방에서는 가상의 풍경을 만들기 위하여 작가가 사용한 작은 오브제와 설치물들을 발견하게 된다. ● 또한 이번 전시에 선보일 강호연의 작업은 작가의 관심이 시각 뿐 아니라 청각이나 촉각, 혹은 심지어 후각의 다른 감각기관들로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선풍기와 기타 기자재들을 이용해서 자연풍경에서나 경험하게 되는 파도소리를 만들어 내거나 가습기와 붉은 빛이 품어내는 아지랑이와 같은 온기 그 자체를 가지고 불을 재현해 보려는 최근의 작업들은 더 이상 그의 관심이 관념 속의 이상화된 풍경이 아니라 단편적이고 개인적인 것들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모닥불」은 따뜻한 불을 접했을 때의 느낌, 비 오는 날 라디오를 접했을 때의 느낌, 파도 소리와 같이 일상적인 생활이나 풍경 속에서 접하게 되는 다른 공감각적인 자극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을 다룬다. ● 그렇다면 작가가 풍경 그 자체보다는 과정에서 사용되었던 개벽적인 오브제들을, 혹은 풍경과 연관된 관람객들의 정서적인 반응을 더 부각시키게 될 때 어떠한 변화들이 일어나게 되는가? 필자는 두 가지의 측면에서 추측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가상적인 풍경이나 풍경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된 오브제들의 존재감이 부각되면서 강호연의 작업은 보다 효율적으로 관객의 다양한 정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강호연의 가상 풍경을 경험한 관객들은 '합의하'에 상상의 세계에 몰입한다. 관객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결코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 관객은 상상의 세계에 몰입하고 이내 그로부터 벗어나게 되면서 복합적인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달리 말해서 환영적인 가상풍경에 탄복하게 되는 것은 과연 왜 속고 있으며 어떻게 속고 있는지에 대하여 관객이 확실하게 자각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게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강호연의 행보는 당연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강호연_Radio Wave_일상용품(라디오, 선풍기, 손전등, 가전제품 등)_가변설치_2015

두 번째로 최근 강호연은 시각이 아닌 공감각적이거나 보다 추상적인 정서적 반응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작가 스스로가 동경하거나 직접 방문하였던 풍경 그 자체보다는 그러한 장소를 여행하거나 상상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경험하였던 단편적인 기억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야영장에서 추웠던 기억이나 비 오는 날 라디오를 통하여 들은 소리 등이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가상의 풍경 그 자체보다는 그것과 연관된 작가의 경험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사용된 오브제들이 관객들의 적극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도 용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까지 강호연이 사용하여온 알프스의 풍경이나 북유럽의 오로라 현상들이 비교적 유형화된 풍경에 해당한다면 캠프파이어나 파도와 같이 보다 일상적인 소재들은 관객의 미묘하고 적극적인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에 있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 이러한 측면에서 강호연의 이번 전시는 작가에게 중요한 터닝 포인트이다. 물론 작고 일상적인 소재들이 지나치게 감상주의적이라는 비판을 가할 수도 있다. 최근 작업들에서 빈번하게 1970년대 디스코 음악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버더 레인보우"와 같은 클래식하며 흘러간 음악들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최근 행보가 덜 물리적이고 직접적으로 환영적인 장면을 만드는 일에 집중된다는 것은 반길 일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환영주의적인 풍경 그 자체가 줄 수 있는 감흥은 그다지 크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이 실패했을 때 파생되는 기대와 실망, 호기심과 반전의 미학이 더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될 수도 있다. 나아가서 이러한 측면에서 제우시스의 '쿨'한 반응을 보다 복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우시스의 '쿨'한 반응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속았음을 인정하는 아니 오히려 이를 즐기고 있는 대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따라서 강호연의 미래 행보가 그럴듯한 풍경이나 상상의 공간을 일시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보다 공감각적이고 복합적인 관객의 정서적 반응에 집중해 보기를 제안해 본다. 왜냐면 환영주의의 완성은 단순히 예술가의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기꺼이 속아주고자 하는 관객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그들의 적극적인 정서적 참여를 끌어내는 일이 병행되어져야 한다. 또한 그가 예로 든 '백색소음'과 같이 환영주의의 완벽성이 무너지고 잡음이 드러나는 순간에 기꺼이 속아주고자 하는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욱 증대될 것이다. 강호연의 환영주의에 더 많은 여지들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 고동연

Vol.20150723b | 2015 OCI YOUNG CREATIVES-정희정_강호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