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길 The Path of The Human Being

우산 황용엽展 / 又山 黃用燁 / HWANGYOUNGYOP / painting   2015_0725 ▶ 2015_1011 / 월요일 휴관

황용엽_여인_캔버스에 유채_65.5×80cm_1959

작가와의 만남 / 2015_0919_토요일_02:00pm

정기해설 / 매일 02:00pm_제1전시실 앞

관람료 / 2,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토요일_10:00am~09:00pm / 월요일 휴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경기도 과천시 광명로 313(막계동 산58-4번지) 제1전시실 Tel. +82.2.2188.6000 www.mmca.go.kr

『황용엽: 인간의 길』전은 한국현대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원로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작가시리즈 전시이다. 한국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치열한 예술 혼으로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구축한 원로 화가 우산 황용엽(又山 黃用燁, 1931~)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창작활동에 매진한 투철한 예술가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 1931년 평양에서 출생한 황용엽은 평양미술학교 2학년 때인 1950년 6.25 전쟁의 참화를 피해 월남하였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 속에서 1957년 홍익대를 졸업한 황용엽은 1950년대 말 이후 한국화단을 휩쓴 다양한 예술 경향 즉, 앵포르멜, 단색조 회화, 극사실주의 등의 집단적인 활동이나 화단 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인간'을 화두삼아 자신만의 독자적인 형상회화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황용엽이 목격했던 '인간'은 추악한 본능을 드러내는 악마의 얼굴과 무기력하고 발가벗겨진 연약한 모습을 함께 지닌 이중적인 존재였다. 그의 작품 초기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실망과 분노, 무기력함의 깊은 상처는 시간의 더께가 쌓이면서 믿음과 희망으로 변화하였다. ● 작가로서의 활동을 막 시작한 1960년대 황용엽의 작품은 시대의 암울함을 반영하듯 검붉은 탁색(濁色)의 우울한 색채와 폐허처럼 뜯겨진 표면 속에 각인된 이지러진 형태의 인간상이 나타난다. 이에 반해 1970년대는 전 세대의 표현과 대조적으로 회갈색 톤의 단색조 배경과 감옥과도 같이 꽉 막힌 폐쇄적인 공간 속에 자유를 박탈당한 수형자(受刑者)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1980년대 초반 독재와 저항으로 점철된 피폐했던 시대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희생자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격렬한 표현의 '인간상'을 제시했던 작가는 이후 설화와 민화, 고분 벽화, 무속 신앙 등 민족 고유의 전통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인간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 1989년 '제1회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하며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인정받은 황용엽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 한계상황 속 절박한 인간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대자연을 배경으로 기나긴 인생의 여정을 떠나는 구도자(求道者) 같은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격동에 휩쓸린 인간의 굴곡진 삶을 긍정하는 관조의 시선을 보여주었다. 인생의 후반기에 이른 현재도 꾸준히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작가는 격동의 세월을 통해 시도했던 다양한 형태의 '인간상'을 현재의 시선과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숙명처럼 펼쳐진 '인간의 길'을 감내하며, 묵묵하게 걸어온 노화가의 60년 예술 여정은 절망과 고난, 치유와 회복의 감동적인 울림으로 관객들과 소통하고 있다.

황용엽_마른 소년_캔버스 유채_53×45.5cm_1965
황용엽_변질한 여인_캔버스 유채_116×80.5cm_1960

1960년대 ● 북한의 징집을 피해 위험한 월남을 감행했던 청년 황용엽은 국군에 입대하여 6.25에 참전하였으나, 총상을 입고 제대한 후 삶의 전쟁터에 내동댕이쳐진다. 연고가 없던 남한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사투를 벌이던 황용엽은 우여곡절 끝에 편입한 홍익대학교를 1957년 졸업 한 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작업 초기 「실존미술가협회」(1958)에 관여하고「앙가주망(Engagement)」의 창립멤버(1961~1969)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후 어떤 형태의 그룹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본인의 독자적인 작업에 몰두하였다. ● 1950년대 말과 60년대는 전후 미술대학을 졸업한 젊은 작가들이 아카데믹한 구상회화 중심의 보수 화단에 반기를 들고 유럽 앵포르멜과 미국 추상표현주의 등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접하면서 집단적인 예술 경향을 천명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던 시기였다. 당시 해방과 전쟁 등 치열한 삶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의 실존'에 대해 고민하던 황용엽은 동기들의 전위적인 추상미술운동 단체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형상회화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참여했던「앙가주망」동인은 특정한 이념과 경향을 내세우지 않고 각자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인정하는 미술단체였다. ● 1960년대 황용엽의 작품에는 전쟁의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고, 전후의 생존 경쟁에 내몰린 절박한 인간의 형상이 등장한다. '두 사람', '여인', '마른 소년' 등의 서정적인 작품 제목과 달리 어둡고 검붉은 색채와 두터운 마티에르의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일그러지고 왜곡된 형상에는 극단의 경험을 겪었던 한 인간의 고뇌와 절박한 시선이 녹아있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표현주의, 야수파, 큐비즘, 앵포르멜 등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다양한 특징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작가의 머릿속에 각인된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들을 외면화 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당시 그의 작품에는 전반적으로 어둡고 탁한 색채와 두텁게 쌓아올려진 물감 층의 거친 바탕 위에 빠르고 단속적으로 그어진 붓 터치와 간략한 선으로 묘사된 과장되고 왜곡된 형태의 인물이 특징적으로 등장한다. ● 전시에 출품된 그의 초기 대표작 중 「여인」(1959)은 거친 붓 터치를 겹겹이 쌓아올린 바탕면 위에 속도감 있는 검은 선으로 묘사한 여인의 형태를 보여준다. 과장되게 부푼 가슴과 비쩍 마른 팔과 손가락, 좌우로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정면을 주시하는 서늘한 시선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어두운 검붉은 바탕색 위에 여기저기 덧칠된 적색과 청색 터치의 보색 효과는 화면에 생기를 주고 있으며, 인물 주위의 붉은색 배경은 인물의 형상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이에 반해 1965년 작 「여인」과 「마른 소년」의 경우 붉은색과 검정의 강렬한 대비와 전쟁의 폐허처럼 거칠게 뜯겨진 표면의 거친 마티에르의 효과 등이 앵포르멜 회화의 형식과 유사하다. 제목에서 암시하는 인물들의 형태는 바탕과의 뚜렷한 구분 없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인식하기 어렵다. 그 외에도 「변질한 조화」(1964)와 「변질한 여인」(1960) 같은 작품은 화강암의 표면같이 거칠고 우툴두툴한 표면에 선을 새기듯 물감을 쌓아올린 표면의 촉각적인 특징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뜯겨진 물감 층 사이로 비치는 바탕면의 붉고, 푸른색 점들이 무거운 화면에 생기를 주고 있다. 인물들의 형상은 배경과 함께 짓이겨지고 왜곡되어 형태를 알 수 없으며, 온전한 추상화의 표면과 유사해 보인다.

황용엽_인간_캔버스 유채_135×111cm_1973
황용엽_인간_캔버스 유채_90.9×72.7cm_1977
황용엽_인간_캔버스에 유채_60.6×50cm_1985

1970년대 ● 1960년대의 표현주의적인 회화와 달리 1970년대의 작품들은 형식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거친 붓 터치의 과장되고, 왜곡된 형태가 사라지고, 회갈색의 단색조 색채와 규칙적이며 정교한 선의 중첩, 얽히고설킨 직선과 곡선의 흐름과 함께 기하학적으로 구획된 공간 속에 간략한 선으로 도식화된 인간의 형태가 주를 이룬다. 70년대 초중반까지는 빨강과 파랑 등 강한 보색 대비가 돋보이던 원색적인 배경은 1974년을 기점으로 회색과 갈색 등의 무채색 단색조 배경으로 변화한다. ● 70년대 초중반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밀폐된 좁은 공간에 감금되어 고깔처럼 생긴 모자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두 눈이 가리어져있다. 이는 1970년대 군부독재 시기의 암울했던 정치적 상황과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연상시키며, 불가항력으로 자유를 박탈당한 답답한 고립의 상황을 좁은 감옥에 갇혀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가면으로 가려진 수인의 모습으로 상징화한 것이다. 1970년대 초기 작품인 「인간」(1973)에는 어두운 푸른색 바탕에 붉은색 선이 촘촘히 그어진 수직 벽으로 막힌 폐쇄적인 공간 속의 인물이 등장한다. 화면 하단의 인물은 마치 거울이미지처럼 상단에도 비춰지고 있다. 뒤집힌 삼각형 형태와 몇 개의 선으로 단순화된 형상의 인물은 머리에 뒤집어쓴 흰색 고깔로 인해 두 눈이 가려져있다. ● 강한 원색의 배경을 보여준 초기 작품과 달리 1977년 작 「인간」은 회색조의 단색조 배경이 두드러진다. 촘촘하게 쌓아올린 중첩된 선으로 꽉 채워진 무채색의 공간의 중심에는 가부좌를 틀고 고요히 앉아 있는 인물이 보인다. 차가운 회색빛 콘크리트 독방에 갇힌 듯한 인물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원형의 형태는 붓다의 광배처럼 신비함과 동시에 화면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기하학적인 선으로 도식화된 인물은 명상에 잠긴 구도자처럼 하얀색 천으로 몸을 감싸고 가부좌를 한 채 고요히 앉아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존엄성과 믿음을 잃어버린 인간, 자유를 빼앗기고 비참하게 갇힌 상태의 절망 속에서도 이 인물은 여전히 스스로의 존엄과 자유에 대한 희망을 굳건히 지키려는 듯 보인다. ● 1970년대 말부터 황용엽의 작품에서는 기하학적인 엄격한 공간 구성과 단순화된 인간 형태에 새로운 변화가 감지된다. 화면 속 공간 전체를 감싸는 유연한 곡선의 흐름이 돋보이며, 하얀색 천으로 머리와 몸을 감싼 인물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역삼각형 얼굴에 어두운 갈색 피부, 삐쩍 마른 몸의 긴 상체를 지녔고, 길게 늘어진 팔다리를 지니고 있다. 이들의 형태는 마치 동남아와 인도 지역의 고승과 수도자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는데, 절박한 시대상황 속에서 '기름진 인간'을 표현할 수 없었다는 작가의 언급처럼 극한의 환경 속에서 갇히고 포박된 피폐한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형상은 1980년대 초반 격렬한 붓 터치의 표현적인 인물형상 이후 1990년도에 본격적으로 재등장하며 황용엽 작품의 전형적인 인물 형태로 자리 잡는다.

황용엽_인간_캔버스 유채_50×45.5cm_1982
황용엽_인간_캔버스 유채_116.8×91cm_1983
황용엽_인간_캔버스 유채_130.3×97cm_1988

1980년대 ● 1970년대의 단색조 배경과 기하학적 공간 속의 도식화된 인물은 1980년대 초반 파격적으로 변화한다. 침잠하듯 절제된 색채와 기하학적인 엄격한 화면 구성과 달리 화면 속엔 격한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으며, 뜨거운 피와 살을 지닌 인간들의 과장된 행위가 넘쳐난다. 70년대 작품에 주로 보이던 무채색 배경과 촘촘하고 빽빽하게 그어진 기하학적인 선의 흐름이 사라지고, 날 것 같은 원색의 사용과 성기고 빠른 붓 터치와 속도감 있는 선, 유기적인 형태의 인물군상이 등장한다. 폐쇄된 공간 속에 속박되어 억압된 인간들은 두 팔과 두 다리를 쭉쭉 뻗어 화면 밖으로 뛰쳐나갈 듯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 속도감 있는 빠른 선의 흐름이 강조된 표현적인 화면 속의 인물들은 해체된 고깃덩어리처럼 피를 흩뿌리는 듯 격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1970년대의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과 가라앉은 단색조의 색채가 이처럼 단기간에 극적으로 변화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980년대 초반은 정치, 사회적인 혼란기였으며, 미술계의 경우에도 주류 모더니즘의 대척점에서 비판적 리얼리즘 형식의 민중미술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황용엽은 1979년 말 잠시 파리에 머물면서 당시 국내에서는 극도로 통제되었던 광주민주화항쟁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이 1982년의 파격적인 표현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 1982년 작 「인간」은 이전 세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파격적인 표현을 보여준다.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 물감의 과감한 사용과 속도감 있는 선의 중첩으로 표현된 인간 군상은 알 수 없는 격렬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중심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인물들과 몸을 수그린 채 인물의 주위를 둘러싸고 인간들의 모습은 마치 어떤 끔찍한 사건의 장면을 묘사한 듯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화면을 가로질러 그어진 기하학적인 선들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폐쇄된 공간을 표현한 듯 보인다. 인간의 존엄이 내팽개쳐지고 생존 본능만 남은 인간들의 짐승 같은 폭력과 원색적인 카니발리즘의 격한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다. 날 것 같은 강렬한 원색의 사용과 격정적인 인간 군상들의 파격적인 표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1983년 경 발표된 작품에서는 격렬한 감정의 분출이 잦아들고 70년대의 회갈색 배경과 드로잉하듯 부유하는 자유로운 선의 흐름이 두드러지는 인간의 형상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전 해의 파격적인 표현의 여파는 화면 속 인물들의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면 속 인물들은 이전의 폐쇄된 공간 속에 속박된 수동적인 인간이 아니라 구속을 깨고 탈출하여 새로운 길을 찾아 끊임없이 걷고 있는 능동적인 행위를 보여준다. ● 1983년 작 「인간」은 바로 한 해 전의 작품들의 보여주던 파격적인 표현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적으로 제한된 색채와 정제된 인물의 형상을 보여준다. 70년대의 엄격하게 절제된 기하학적인 선의 터치와 달리 거칠고 자유롭게 그어진 선의 형식은 바로 전해의 파격적이며 자유로운 표현의 시도로 인한 의미 있는 변화로 보인다. 화면 속 인물은 긴 팔과 다리를 지니고 하얀색 천으로 몸을 감싼 채 두 팔과 다리를 힘차게 내딛어 앞으로 달려 나가는 강한 운동감을 보여준다. 이전과는 다른 두드러진 변화는 작품 속 배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전까지 주로 폐쇄공포를 유발하며, 인간을 억압하던 감옥 같은 좁은 공간에 갇혀있던 인간은 바깥세상으로 탈출한 듯 광활한 공간으로의 확장을 보여준다. 기다란 다리를 쭉 뻗어 뛰어나가는 인물의 하단부는 마치 대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물과 끝없이 펼쳐진 황토색 평야처럼 보인다. 인물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곡선과 기하학적인 선들의 모습은 흐트러지고 해체된 느슨한 형태를 갖고 있다. 마치 인물을 옭죄고 억압하던 상황들을 풀어 헤치고 자유의 세상 속으로 달려 나가는 인물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듯 보인다. ● 1983년 이후 화면 속 공간의 확장과 세상으로 탈출한 인간들의 끝없는 여정은 다양한 형태로 변모하며 황용엽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바탕이 된다. 이 시기를 통해 작가는 기존의 처절한 한계 상황 속에 갇힌 인간들의 폐쇄적이고 억압된 모습을 벗어나 고난의 세상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면 속의 퇴색된 듯한 색채와 간략하게 형상화된 자연의 모습,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다랗게 확대된 인물의 표현 등은 전설과 신화, 무속 등 한국의 전통문화와 어린 시절 고향 근처에서 자주 접했던 강서 고분 벽화에서 보았던 여러 가지 형태를 참고하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다. 1987년 작 「인간」은 마치 고대 벽화의 한 부분을 떼어낸 듯한 바탕과 인물의 형태, 청홍의 강렬한 보색대비와 장식적인 문양을 통해 당시 작가의 관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 전통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의 작품에서도 이미 찾아 볼 수 있다. 1975년 작 「인간」의 배경에는 한국의 전통 담장이나 창틀, 혹은 각종 공예품의 장식적인 문양과 간략하게 도식화된 수탉의 형태 등이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인 장식 문양과 원색의 민화풍 색채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시기는 1988년 전후의 시기였다. 80년대 중후반 갈색조의 배경 위를 부유하던 인물들은 87년경부터 음양오행에 바탕을 둔 오방색(청, 적, 황, 백, 흑)의 강렬한 색채, 화려한 장식 문양과 함께 등장한다. 청, 홍, 황 등 다양한 원색의 사용은 민화와 전통 채색화의 색채감각을 연상시키며, 다양한 형태의 기하학적 패턴들은 전통적인 한국의 공예품과 건축물의 장식적 패턴과 유사하다. 1988년에 발표된 작품들은 전작들과 확연하게 대비되는 화려함과 장식성을 지니고 있는데, '무녀의 대화', '무녀의 비밀', '토속의 합창', '혼을 부르는 여인' 등의 제목은 전통과 무속에 대한 관심을 작품에 녹아내려는 작가의 시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황용엽_어느날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1990

1990년대, 그 이후 ● 1989년은 황용엽의 작품세계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한 해였다. 어떠한 예술 그룹에도 관여하지 않고, 미술계의 화단 정치와도 멀리하며, 온전히 작품에만 몰두해온 작가의 예술정신과 작품성을 인정받아 제1회 『이중섭 미술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비극적이며 드라마틱한 삶과 치열한 예술혼의 상징이 된 이중섭의 예술세계는 따뜻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평생을 몰두해온 황용엽의 작품세계와 일맥 하는 부분이 있다. ● 1990년대는 황용엽의 작품세계가 명실 공히 꽃을 피운, 완숙기에 이른 시기였다. 황용엽의 작품을 생각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특징적인 인물들의 표현과 한국 전통의 민화와 설화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 토속적이며 따뜻한 황용엽만의 자생적인 회화 세계가 완성된 시기였다. 작가 나이 환갑을 맞이하여 새롭게 조망하게 된 '인간의 길'이었다. 황용엽은 90년대의 새로운 변화를 통해 치열했던 반세기를 뒤돌아보고, 숙명처럼 펼쳐진 굴곡진 인간의 길을 긍정하며 함께 끌어안고 가야할 운명의 길임을 보여준다. 작가 개인적으로는 90년대 초반 어렵게 알게 된 북의 가족 소식을 통해 평생 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이산의 고통이 다소나마 해소되었던 것도 작가의 시선이 변화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내용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작품의 크기도 이전보다 대폭 확대되었다. 200호가 넘는 대작들 속의 인물들은 대자연을 배경으로 세상과 대면한다. 이전까지 심리적, 정신적인 자폐로 인해 스스로 좁은 화폭 속으로 한없이 침잠했던 인간들은 이제 열린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 9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는 '나의 이야기', '마을로 가는 길', '가족', '삶 이야기', '나와 여인', '고향 가는 길', '축복을 비는 가족' 등 따뜻하고 정감어린 제목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월남과 이산의 아픔, 남한 사회에 정착하기 위한 치열한 삶의 궤적 속에 깊이 팬 상처를 '인간'이라는 소재를 통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작가는 이제 온전히 자신의 삶과 굴곡진 이야기를 전통적인 구전 설화나 전설처럼 관조의 시선으로 펼쳐내고 있다. ● 짙게 그을린 갈색 피부와 비쩍 마른 몸, 하얀색 천을 몸에 두른 채 바지런히 움직이는 인물들은 어딘가를 향해 부지런히 걷고 있는 수행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자연을 닮은 탁 트인 풍경 속 부드러운 곡선의 산과 언덕, 굴곡진 나무의 형태들은 고대의 벽화나 민화 속에 등장하는 온화한 한국의 자연과 닮아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손에 쥔 부채나 방울, 지팡이 같은 사물들은 전통적인 무속 신앙과 연결되어 있는 기물들이다. 대지를 가로지르는 선과 나무의 구불구불한 가지의 모습 등 인물과 배경을 가로지르는 유려한 선들의 형태는 과거의 속박과 억압적 상징을 벗어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엮는 선순환의 세계를 보여준다. ● 2000년대 이후 황용엽은 이전 세대의 다양한 작품 스타일이 절충적으로 혼합된 형식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90년대의 민화나 설화, 무속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화면에는 다시금 빨강, 파랑 등 밝은 채도의 배경 속에 70년대의 작품 속에 등장하던 도식화된 인물들이 재등장한다. 평면적인 배경 속에 녹아들어 간략한 선으로 도식화된 인물들의 형태는 고대 문명의 벽화 속 기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몇몇 작품에 나타나는, 동그란 두 눈에 미소 띤 인물들의 풍부한 표정도 이전과는 다른 변화이다. '삶 이야기', '나의 이야기' 등의 연작은 이제 세월의 풍파를 지나 인생을 반추하는 원로 화가의 담당한 고백과, 고난의 삶을 반추하는 화가의 완숙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 황용엽은 해방과 전쟁, 이산이라는 격동의 20세기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버텨내고 남과 북의 정치체제와 미술계를 동시에 경험했던 마지막 세대의 작가다.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의 비극에 휩쓸려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억압당했던 기억, 가족과의 생이별, 생존의 본능만 가득찬 인간들의 악마 같은 폭력을 목격했던 극단적인 체험은 황용엽의 몸과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 깊은 상처였다. 황용엽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화면 속에 토해내고 이를 용감하게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상실과 공포, 절망의 기억을 털어내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서서히 회복시켰다. 1950년대 말 이후 전위적인 추상미술 경향이 화단의 주류로 자리 잡았던 한국현대미술계에서 비극적인 현대사와 개인사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자생적인 형상회화를 제시한 황용엽의 예술세계는 한국화단에서 굉장히 드물고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또한 '현대미술'이라는 한정적인 영역을 넘어 역사적으로 소중한 '살아있는 증언'이기도 하다. 굴곡진 역사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버텨온 한 인간의 운명 같은 삶의 흔적이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연계 프로그램

작가와의 만남 - 일시: 2015. 9. 19.(토)/14:00~15:00, 총1회 - 대상: 일반인 및 전공자 50명 - 장소: 제1전시실 - 강의자: 황용엽 작가 큐레이터 토크 - 일시: 2015. 9. 30.(수), 10. 10.(토) /14:00~15:00, 총2회 - 대상: 일반인 및 전공자 30명 - 장소: 제1전시실 - 강의자: 이추영 학예연구사 어린이 감상가이드 제작 - 대상: 초등학생 - 방법: 지면 2000부, 온라인 다운로드 문화 행사 컬러링 엽서 이벤트 - 기간: 전시기간 중 - 대상: 전시 관람객 정기해설 - 매일(개관일) 오후 2시, 제1전시실 앞 * 추후 교육 프로그램 세부일정 공지 * 상기 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세부 일정은 추후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www.mmca.go.kr)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Vol.20150725f | 우산 황용엽展 / 又山 黃用燁 / HWANGYOUNGYOP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