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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열展 / KWONOYEOL / 權五烈 / photography   2015_0804 ▶︎ 2015_0809

권오열_Estranged Woods-1405_디지털 C 프린트_115.2×76.8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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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석사학위청구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국민아트갤러리 KOOKMIN ART GALLERY 서울 성북구 정릉로 77(정릉동 861-1번지) 국민대학교 예술관 1층 Tel. +82.2.910.4465 art.kookmin.ac.kr

가시성의 수수께끼와 현상(보이는 세계)의 코드해독을 위하여경계의 미학을 추구하며 1.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뽕띠는 『눈과 마음』(L'oeil et l'esprit, 1964)에서 시각이 느끼는 보편적 가시성은 과거와 미래까지 포함하는 온갖 결합력을 분할하고 종합하는 능력으로 간주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말은 눈에 보이는 세계란 보이지 않는 내용도 담고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안감(doublure)을 모종의 부재로 현전하게 한다.…왜냐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부를 언제나 보이는 세계에 첨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그는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이른바 '부재의 현전'(présence des absences)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눈의 시지각(vision)과 가시성(visibilité)에 있다고 생각했다. 눈과 더불어 마음의 가시성이 가시적/비가시적 세상을 사물의 피부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속살이나 뼈대까지도 지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눈이 곧 '영혼의 창문'(fenêtre de l'âme)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메를로-뽕띠에 의하면 "눈은 영혼에게 창조의 무한한 다양성을 표상한다. 마음이 관계를 맺는 상대는 세계가 아니라 마음속의 사유들이거나 또 다른 마음이다. 영혼은 창문이 있다는 신화를 받아들이게 한다." ● 실제로 조형예술가에게 눈은 마음의 통로이다. 나아가 그것은 영혼으로 통하는 창문이기도하다. 눈의 시지각과 가시성에 의한 해석과 표상의 창조적 작업은 화가나 조각가뿐만 아니라 기계의 눈으로 피사체에 대한 신화를 창조해야 하는 사진작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는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세상(피사체)을 특정한 이미지로 표상하기 위한 해독(解讀)이 요구된다. 나아가 사진작가가 어떤 피사체에 대해 해독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미학적 세계관과 예술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 그 때문에 예술비평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 1977)에서 사진작가는 우선 자신의 사진이 관람자에게 '어떻게 보여야 할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실제로 사진작가들이 현상의 해독(reading)과 해석(interpretation)을 위한 저마다의 고유한 코드를 선택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또한 코드에 따라서 그들이 피사체에다 자기가 선호하는 노출방식과 특정한 기준을 동원하는 이유도 그와 다를 바 없다. ● 손택은 "카메라가 현상을 그대로 포착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진작품도 회화나 데생처럼 이 세계를 해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자아의식을 없앤 채 별다른 생각 없이 아무 것이나 사진에 담는다 해도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에 내재된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태도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사진이 우리에게 건네주는 메시지이다"라고 주장한다. 포토메신저 권오열이 이제껏 '가시성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매달려온 작업들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권오열_Estranged Woods-1407_디지털 C 프린트_115.2×76.8cm_2014
권오열_Nevertheless-1410_디지털 C 프린트_67.2×100.8cm_2014
권오열_Nevertheless-1417_디지털 C 프린트_115.2×76.8cm_2014

2. 이제까지 보여준 작가 권오열의 메시지는 늘 자연주의적(Naturalistic)이었다. '낯선 숲'(Estranged Woods, 2010)의 시리즈나 '막'(Membrance, 2012), '가시적/비가시적'(Visible/Invisible, 2014),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less, 2015) 등을 통해 그가 지금까지 해독해온 자연(사물)의 즉물적 주름과 그 에너지의 흐름에 대한 표상화 작업이 그것이다. ● 그는 정태적 자연에서 동태적 자연을 해독한다. 그는 이미 사진을 피사체에 대한 지배수단이자 봉헌물로만 간주하는 플라톤주의자들에게 반기를 들어온 반플라톤주의의 진영에 동참한 채 이미지의 표상의미론자(sémantiste représentative)가 되고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이미지를 무상하며 미망에 불과하다고 하여 과소평가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자연에다 보이지 않는 자연을 수사적으로 첨부해온 일련의 메시지들에서 보듯이 그의 자연주의적 묘사(描寫)는 애초부터 가시성과 비가시성과의 관계사고(Beziehungsdenken)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 이렇듯 그의 작품들은 가시적인 자연의 질서나 외양에 대한 단순한 이미지만을 진실한 도상들(vero icones)로 간주하기보다 실재(reality)에 대한 해석학적 관조, 즉 마음의 눈을 통해 심미적 수사의 이미지로 '재질서화'하고 '재영토화'하는 과정이었다. 이를테면 Visible/Invisible(2014)에서 그가 표상하고자 한 작품들이 이미지의 재질서화, 즉 '유사-존재의 구현'이자 '부재의 징표'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미술사학자 마틴 켐프(Martin Kemp)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Seen/Unseen, 2006)에서 "사진 이미지는 최고의 소묘가가 그린 어떤 이미지도 넘보지 못할 특유의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창의적 상상력에 따른 자연현상에 대한 이미지의 지배권과 권위가 소묘가보다 사진작가에게 더 많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숲과 막의 이미지를 새롭게 표상화한 권오열의 이미지 지배권이 그러하다. ● 사진작가 권오열에게도 '세상은 나의 표상이다'를 천명한 쇼펜하우어처럼 또 다른 의미에서 세상은 그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인 것이다. 「낯선 숲」(2010)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2015)에서도 보듯이 그가 이미 '나의 욕망은 나를 좀 더 깊숙한 숲으로 이끈다.'고 토로한 까닭이 그것이다. ● 그는 사물들이 어떻게 피부가 되고 어떻게 안감이 되는지, 사진작가는 가시적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어떻게 소유하며, 거기에 왜 메시지를 담아 표상하려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렇게 현상을 자신의 영토(인화지) 위에 재질서화 한다. 그것들이야말로 이제껏 "현상은 늘 이미지에 기록된 대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플라톤 이래 많은 철학자들은 (재현의) 이미지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현실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다양하게 제시하는 식으로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손택의 주장을 확인시켜온 셈이다. ● 한마디로 말해 작가로서의 권오열은 코드해독자(code-breaker)이자 코드분석가(cryptanalyst)이다. 무엇보다도 현상을 자기코드화(encoding)하기 위해서다. 그에게는 보이는 세계의 보편적 비법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부재하는 현전'에 대해서도 그는 나름대로의 코드에 따라서 창의적으로 독해하고 해석해 온 탓이다. ● 자연현상에 대한 그의 코드분석(crytology)은 자연의 즉물성(literalness)에 대한 이미지의 창출이다. 하지만 그 현상에 대한 그의 해독과 분석은 관점과 가치에서 중립적일 수 없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의지개입적이었다. 예술행위로서의 분석이 감각의 주관적 개입이어야 하고, 해석 또한 선이해나 선판단에 따른 지평융합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작품들이 전면주의(All-over Photography)로 일관해오면서도 자연의 색과 형들에 대해 보여준 '메타이미지들'에 있어서 즉물적이지 않았던 까닭이나 그것들이 로크가 주장하는 사물의 제2성질에 대한 미학적, 예술적 해독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권오열_Membrane-1506_디지털 C 프린트_76.8×115.2cm_2015
권오열_Membrane-1514_디지털 C 프린트_115.2×76.8cm_2015

3. 자연주의자 권오열은 지금 변신중이다. 그가 뜻밖에 선보이는 새로운 이미지들은 사회학적이다. 무엇보다도 현상에 대한 착목(着目) 의지, 즉 노에시스(noesis)가 바뀐 탓이다. 의식적으로 지향하려는 현상과 그에 대한 해석의 코드를 그는 더 이상 자연에만 국한시키려 하지 않는다. 어느새 그의 새로운 화두는 인위와 문화가 된 것이다. 후기의 에드문트 후설처럼 그의 마음의 눈과 창이 자연에서 사회로, 즉 인간의 '생활세계(Lebenswelt) 속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 권오열의 미학적 변신은 의식의 선험적 지향성을 강조하던 현상학자 후설이 후기로 갈수록 의식의 체험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 내재되었거나 함축되어 있는 지향성까지 현상에 대한 의식작용으로 설명함으로써 '활동하는 삶'(leistendes Leben)을 강조하려 했던 경우와 유사하다. 그것은 세계와 내가 '지금, 여기에', 즉 실존하는 세계 속에 놓여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사유된 자'(Cogitatum)로서의 존재의 타당성을 확인하기 위한 표상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사물(객체)의 외형으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주체의) 생활세계 내면에 간직된 본질적인 성질에 관한 문제로 여길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관념과 의식이 바뀌면서 상상력 또한 바뀐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그의 작업 결과로서의 노에마(의식된 像)가 '자연에서 문화(인위)에로' 일대 전환을 가져온 것은 당연지사이다. ● 문화적 삶을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네 가지 실존적 차원인 'Mitwelt'(사회적 차원), 'Umwelt'(물질적 차원), 'Eigenwelt'(심리적 차원), 'Überwelt'(정신적 차원) 속으로 들어온 그는 이제 기호학자, 또는 문화인류학자로 변신하고 있다. 그에게 새로운 텍스트를 위한 새로운 코드의 발견은 호기심 많은 예술가에게 나타나는 '콜럼버스 증후군'이나 다름없다. 이를테면 그가 텍스트의 매개체로서 새롭게 주목하는 기호상징태인 '문패'가 그것이다. ● 그에게 문패(name plate이자 door plate)는 이미 삶의 네 가지 실존적 차원을 상징하는 코드이자 기호이다. 인간적인 토폴로지라는 텍스트를 창출시킨 문패에는 저마다의 보이지 않는 '이기적 유전자'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회적 관계의 창으로서 문패는 존재(name)와 소유(door)의 이중지시 효과를 나타내는가 하면 존재와 소유 모두의 분류기호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에게 문패는 이미지의 재영토화를 위한 인간 지세학(topologie)의 교재들인 것이다. ● 실제로 대문마다의 문패는 시니피앙이지만 사회적 분류체계로서의 문패는 이미 시니피에이자 기호학적 텍스트이다. 문패는 의미되는 것과 의미하는 것의 한 몸이다. 그가 문패를 새로운 미학적 도구로 삼으려는 것도 우리의 삶이 의미와 의미작용 내에서의 활동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벗어나는 생존을 생각할 수 없음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 고유명사로서의 이름이 그렇듯 문패는 자기의 정체성을 타자에게로 옮겨다주는 운반수단이면서도 자기현전성이나 자기동일성에서 분리하는, 즉 자기를 자기로부터 분리하는 타자화 작용의 도구이다. 그것은 자기현전성으로부터 자기를 분할시킨 대리표상으로서의 에크리튀르(écriture)이기 때문이다. 관람자가 권오열의 새 작품들에서 '콜럼버스 효과'를 느끼는 것도 그가 이미 문패에서 그것을 간파한 탓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생활세계 속에서 현전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에 기민하게 나선 첨병인 셈이다. ● 기호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텍스트로서의 문패(언어)를 통해 자신의 작품들을 '현상으로서의 텍스트'(phéno-te×te)에서 '생성으로서의 텍스트'(géno-texte)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본래 진정한 코드분석이란 후자의 경우이다. 그것은 현상을 아래로부터 떠받치는 기반, 즉 무의식으로부터 표층화(의식화)된 기호(언어)이기 때문이다.

권오열_In the name of-1513_디지털 C 프린트_177.6×86.4cm_2015

4. 권오열은 지금 '이름'의 미학과 철학 사이에서 새로운 코드를 발명중이다. 그는 언표행위의 모형들(les matrices d'énonciation)을 통해 사진예술을 기호학 속에 편입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독과 생산(창작) 사이에서 그의 코드미학은 "사진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공간까지 갈 수 있도록 해준다. 사진은 경험을 증명해주는 방법이지만 경험을 거부하는 방법이기도하다"는 손택의 말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 좀처럼 멈추려 하지 않는 그의 욕망기계(카메라)가 공격하려는 '이미지 헌팅'(image hunting)의 다음 사냥터는 어디이고, 사냥감은 무엇일지 자못 궁금하다. 그 다음에 지향할 그의 노에시스가 어떤 것일지, 노에마는 어떤 형상일지가 기대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이광래

Vol.20150804f | 권오열展 / KWONOYEOL / 權五烈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