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

우종택展 / WOOJONGTAEK / 禹鍾澤 / painting   2015_0808 ▶︎ 2015_0926 / 일,월,공휴일 휴관

우종택_Memory of origin_혼합재료_192×510cm_201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0827b | 우종택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5_0808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화~토요일_​10:00am~06:00pm / 일,월,공휴일 휴관

보데갤러리 BODE Galerie 대구시 남구 대명9동 493-12번지 Tel. +82.10.2757.5627 blog.naver.com/bodegalerie www.bode-galerie.de

시원성(Originalität)에의 유혹과 추체험(Nacherlebnis)의 향연조형적 해석학의 모색을 위하여 1. 인간은 자연을 늘 신비스러워한다. 자연의 초인간적인 위력과 거대함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것의 발생 기원(Ursprung)이나 원본(das Original)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연이 거기에 '스스로 그렇게 있음'에도 그 기원이나 원본에 대해 궁금해 한다. 발생(Entstehung)의 신비가 예부터 인간을 참을 수 없이 유혹해온 탓이다. 일찍이 기원전 8세기의 시인 헤시오도스가 무사이(Mousai) 여신들의 찬가로 발생의 신비를 노래한 것이나 탈레스가 물에서 원질(archē)의 단서를 찾으려 한 것이 그러하다. 나아가 엠페도클레스가 물, 불, 공기, 흙 등을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만물의 뿌리'가 되는 네 가지 요소로 간주했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 근대의 범신론자인 스피노자는 자연(Natura)을 소산적(Naturata)일뿐만 아니라 능산적(Naturans)이라고 하여 신의 섭리가 자연에 온전히 편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자연의 신비를 신의 '예정조화'라고도 믿었다. 그에 비해 오늘날 물리학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은 그 신비스런 질서를 『혼돈으로부터의 질서』(Order Out of Chaos, 1984)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연의 질서를 가리켜 불안정적이고 불확실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아마도 어떤 탈무드의 교과서들이 창세기의 신이 바랐을 것이라고 여기는 제한된 희망에 대한 공감만을 불러일으키는 위험하고도 불확실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 1966)에서 '인간이란 기원이 없는 존재, 고향이나 생일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존재의 기원에 대해 이의제기하는 일'이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 이처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화에서 현대과학에 이르기까지 이제껏 인간은 자연의 발생기원으로서, 또는 자연의 시원으로서 창세의 질서(Kosmos)가 발생하기 이전인 암흑의 혼돈에 대해 궁금해왔다. 본래 카오스(Chaos)는 「입을 벌리다」(chainein)라는 동사의 명사화로서 「캄캄한 텅 빈 공간」을 의미한다. 허무가 점령한 무질서(질서 이전)의 공간이다. 그 때문에 모름지기 인간은 거기에 자연의 질서에 대한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가 있다고 믿어온 것이다. 신화나 종교도 그랬고, 과학이나 철학도 그러했다. 문학도 그랬고, 미술도 그러했다. ● 이를테면 8세기의 로마시인 오비디우스(P.N. Ovidius)는 서사시집 『변신이야기』(Metamorphoses)에서 카오스를 만물의 모든 가능성이 은폐되어 있는 「종자들」(semina)의 혼합상태라고 가정했다. 춘원 이광수도 그 상태로부터 질서로의 변화를 금강산 비로봉에서 천지창조의 순간에 비유하며 지은 시집 『금강산 유기(遊記)』(1924)에서 「홍몽(鴻濛)이 부판(負板)하니」라고 표현했다. 그는 암흑의 카오스(홍몽)에서 시작된 천지의 웅대한 개벽(부판)을 그렇게 상상했던 것이다. 그것은 색면 추상의 거장 바넷 뉴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1946년 「창세기」, 「태초」, 「발생순간」 등으로 표현한 혼돈에서 질서에로의 미학을 숭고미라고까지 규정했다. 「이제 숭고가 도래했다」(The Sublime is Now, 1990)는 것이다.

우종택_Memory of origin_혼합재료_255×192cm_2015

2. 작가 우종택은 일찍부터 자연의 시원성(Originalität)에 대한 아드리아네를 즉물주의(卽物主義)에서 찾아온 조형예술가다. 그의 조형 프로젝트는 질서의 시원을 줄곧 현상의 즉물성(Sachlichkeit)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질서(자연)의 현전성(現前性)보다 즉물 자체(Sache-an-sich)가 무엇인지를 물으며 질서의 원향(原鄕), 즉 카오스에 대한 우리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시적/비가시적 존재의 절대적 '선차성'(priomess)에 대한 기대감도 드러내고 있다. ● 원본과 원향의 신비한 사정은 아직 질서화되지 않은 비사물(Unding)의 중립성에 있다. 춘원이나 뉴먼처럼 원향과 시원에의 상기(anamnesis)를 시도해온 그의 영혼이, 그리고 그의 조형적 신기(神氣)가 귀향을 위해 자연에 거슬리지 않는 순리적 연상을 신들린 듯 토해내고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질서에 대한 존재론적 중립을 표상하기 위해 그의 조형의지가 신내림 받고 있는 것이다. 자연물의 중립적 생기에서 얻은 영감이 이제껏 「시원의 기억」들로 본풀이 하듯 원향제를 올려온 연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작품들은 관념이나 물상(物象)의 재현체라기보다 '영혼의 재현체'(Seelesrepräsentanz)인 것이다. ● 우종택이 몸짓하는 '시원에의 상기'(想起)는 다름 아닌 탈재현적 추상(abstractiō; 배제나 추출 행위를 의미한다)이다. 그에게 추상은 우선 복잡한 가시적 질서의 소거이거나 부정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존 라이크만(J. Rajchman)이 추상을 가리켜 오직 '부정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 일종의 신성한 '부정의 신학'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을 연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1915)처럼 재현적인 형(Form)과 선(Linie)의 배제를 통해 '존재의 0도'(0 Grad des Sein)에로 돌아가려는 시도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 또한 우종택에게 시원에의 추상적 연상은 비가시적 인출(引出)이나 다름없다. 그에게 추상(abs-tractus)은 '밖으로 이끌어내다'를 뜻하는 어의 그대로 모든 존재의 조건인 특정한 리미트(Limit)에 종속되지 않은 중립적인 영감을 실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미 「회화 프로젝트, 묻다」(2014)의 연작들을 통해 보여준 추상공간의 이중상연이 그것이다. 거기서 그는 무엇보다도 자연(질서)에 대하여 느껴지는 힘과 느껴지지 않는 힘,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을 보고 느끼도록 추상화한 것이다. ● 이렇듯 '추상화한다'(abstrahieren)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소한', 또는 '시원의' 영감을 빌어 내재적인 생기(힘이나 느낌)를 밖으로 이끌어낸다(abziehen)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도 '추상화'란 환영주의적 공간을 벗겨낸 결과라기보다 그것에 선행하는 그 무엇, 즉 맨 처음에 등장한 그 무엇이라고 하여 그것이 동기에서도 '최초의 것'임을 강조한다. ● 실제로 그것은 작가(우종택)가 지금도 질서의 시원을 줄기차게 묻고 있는 까닭과도 맞닿아있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원향에 대해 추상적으로 표상하려는 그의 조형욕망은 모름지기 파라노적(paranoid)이기까지 하다. 질서의 시원에 대해 더욱 내면화하고 있는 그만의 노스탤지어가 마법의 단서에 대한 물음을 좀처럼 멈추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우종택_Memory of origin_나무에 페인팅_350×1200cm, 설치_2015
우종택_Memory of origin_나무에 페인팅_350×1200cm, 설치_2015

3. 우종택이 추구해온 시원의 신비에 대한 조형적 기투(企投)는 해석학적이다. 「시원의 기억」 이후 이중상연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해석학적이고 추체험적인 탓이다. 이제껏 시원의 영매와도 같은 강신(降神)의 흔적 찾기에 유달리 몰두해온 그가 몸소 접신하기 위해 마련한 것은 다름 아닌 신목(神木)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의 분신들이나 다름없다. 질서의 시원에 대한 영감과 직관에 따른 '투시의 창'(fenestra aeternitatis)이 그를 신들린 듯 (목신들을 통한) 추체험(Nacherlebnis)의 공간으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 그의 해석학적 미학은 토대론적이고 수직(垂直)존재론적이다. 그가 신목을 해석의 매체로 선택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본래 수목상(樹木狀)의 근원주의적 수직존재론은 모든 존재의 시원이나 배후에 대한 불안감을 근원적으로 치유받기 위해 고대인들이 기독교보다 먼저 고안해낸 종교적 교의와도 같은 것이다. 심지어 무속의 원초의식조차 그것을 영계의 지상명법(Imperativ)으로 삼는다. ● 이처럼 그가 보여주는 시원에 대한 해석학적 추체험의 실천은 수목상의 영감과 지평융합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시간과 영원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끝날지 모를 그의 프로젝트가 더욱 신비스럽다. 그것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과 시간 밖에 있는 것(영원한 것) 사이의 구분이 인간의 상징적인 활동의 근원에 있다. 아마도 이것은 예술 활동에서는 특히 그러할 것이다"라든지 "예술적인 활동은 대상물의 시간적 대칭성을 파괴한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적 비대칭성을 대상물의 시간적인 비대칭성으로 번역하는 흔적을 남긴다"는 물리학자 프리고진의 생각과 다를 바 없다. ● 그의 해석이 남겨온 추체험의 흔적들은 다수다양화(多樹多樣化)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그는 비대칭적으로 이중상연하는 접신의 향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목들을 따라 혼돈에서 질서에로 지나온 억겁의 시간들을 소급하기 위해서다. 그가 평면을 붙박이로 고립시키는 이젤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마 그 역시도 1947년 1월 잭슨 폴록의 개인전을 보고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이제 이젤회화는 죽었다」(Nation, 2월호)고 평한 심정 그대로였을 것이다. 추체험이 탈아(脫我)나 무아(無我)의 찰나에 이를수록 그에게는 접신하는 자와 같은 즉흥성과 속도감이 더욱 요구되었을 터이다. ● 우종택의 작업 과정은 몰입의 속도나 영감의 즉흥성에서 어떤 과정미술(process art)보다도 역동적이다. 그의 조형속도는 어떠한 금기나 규범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애초부터 암흑을 가르는 창세의 질서가 혼돈의 위반이었듯이 미술의 금기나 규범 또한 깨트리고 위반하기 위해 있는 것임을 몸소 실증하려 한다. 그 때문에 지금도 시원을 향해 무한(infīnītus)으로 치닫고 있는 그의 추상기계들은 속도나 규범뿐만 아니라 모든 경계도 뛰어넘을 태세이다. 그의 작업들은 "오늘날 미술가들은 모든 권리를 찬탈하고 모든 표현 수단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으며, 모든 금기 사항을 위반했다. 그들은 고상한 문화적 태도에 대한 규범의 칙령을 뒤엎고, 모든 경계를 뛰어넘었으며, 매일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고 추가시켰다"는 장-루이 프라델(J-L. Pradel)의 주장을 편들고 있는 셈이다.

우종택_Memory of origin_혼합재료_120×70cm_2015
우종택_Memory of origin_혼합재료_120×70cm_2015

4. 우종택의 프로젝트 속에 참여하면 누구라도 이내 감각의 권태(l'ennui)에서 깨어난다. 그 작용인으로서의 역동적 동태가 관람자의 무방비한 감각을 긴장시키며 영혼의 수면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은 질서의 시원에로 데려가려는 강신술사의 영매(靈媒)가 되기 때문이다. ■ 이광래

우종택_Memory of origin_나무에 페인팅_1200×350cm, 설치_2015

Attractions towards Originality (Originalität) and a Feast of After-Experiences (Nacherlebnis) ―In pursuit of visual hermeneutics ● 1. Humans have always felt mysterious towards nature. We feel it not only when contemplating nature's overwhelming power and immensity, but also when pondering its origin (Ursprung) or original state (das Original). Even though nature 'has always been there in itself,' we never cease to wonder about its origins; the mystery of genesis (Entstehung) has irresistibly attracted humans throughout history. Some early examples include the poet Hesiod's invocation of the Muses to begin his ancient Greek mythical cosmogony in the 8th century BC, or Thales's theory proclaiming water as the original substance (archê) and single source of all existence. By the 5th century BC, Empedocles would claim that a total of four elements—earth, air, fire and water (both visible and invisible)—serve as the roots of all things. Many hundreds of years later, the modern pantheist Spinoza understood nature (Natura) to embody both the produced (Naturata) and the producer (Naturans), thus showing God's providence to be omnipresent; meanwhile, Gottfried Wilhelm Leibniz perceived the mystery of nature as 'pre-established harmony.' In Order Out of Chaos(1984), BelgianphysicistIly a Prigoginecalledthemysteriousorderofnatureunstable, statingthat"we are living in a dangerous and uncertain world which inspires no blind confidence, but perhaps only the same feeling of qualified hope that some Talmudic texts appear to have attributed to the God of Genesis." Michel Foucault even argued in TheOrderofThings(1966)that"Man is a being without origin, who has neither country nor date, and therefore our task is to call into question the origin of things." As such, we have perpetually wondered about the chaos of darkness that preceded the universe as we know it, from ancient mythology to modern science. ● The term 'chaos' (a noun derived from the Greek verb 'chainein,' or 'to open the mouth') connotes a dark, empty space. It is a space of disorder, a space of nothingness. Nevertheless, humans have long searched for keys to unlocking the mysterious order of nature—by way of mythology, religion, science, philosophy, literature and art. The 8th century Roman poet Ovid, for instance, presumed in his Meta morp hoses that chaos was a combined state of seed-likeelements(semina), containingwithinthemallthepotentials of every existence. In Koreanauthor YiKwang-su's(penname:Chunwon) Record of Travels in the Diamond Mountains(1924), hewrote"the single undivided state of Heaven and Earth became split in two." This metaphor, comparing 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to the transition from chaos to ordered cosmos, was Yi's vision of the grand beginning of the universe. The same can be said for Barnett Newman, master of 20th century Color-Field abstract painting. In works such as TheBeginning, Genesis—The Break, and Moment(1946) onecanfindvisualevidence of whattheartistwroteinhisseminalessay The SublimeIs Now(1948): that theaestheticsofthisverytransition—from chaos to cosmos—is the embodiment of sublime beauty. ● 2. Woo Jong-taek employs objectivity as a means of working through his deep questions about the originality (Originalität) of nature. His visual project suggests that the origin of the cosmos can be understood by maintaining a detached objectivity (Sachlichkeit) toward perceived phenomena. Rather than questioning the presence of cosmos/nature, Woo investigates each object as a thing-in-itself (Sache-an-sich), awakening an innate nostalgia for chaos and the origin of universal order. He assumes the absolute priorness of visible/invisible existence and considers the neutrality of the non-object (Unding), which exists in chaos, as a means for contemplating 'the original' or 'the primordial.' This is why Woo's images, which resonate with nature, are nonetheless created with such explosive and magnificent energy; they are attempts at anamnesis—or remembrance—of the original and the primordial, much like the aforementioned works of Chunwon and Newman. As a result, Woo almost seems possessed, or shaman-like, in order to represent this ontological neutrality toward the order of the cosmos. Woo's Memory of the Beginning series revealstheinspirationhegainsfromtheneutralvitalityofnaturalexistences, asthoughpartofashamanicexorcismorothersuchritual. Inshort,Woo's work can be seen as a 'representation (Seelesrepräsentanz) of spirits' rather than of ideas or objects. ● Woo's efforts to recollect 'the beginning' take form as non-representational abstraction. Unsurprisingly, he conceptualizes abstraction as the removal or negation of complex visible order, akin to John Rajchman's notion of the abstract as a 'sanctifying negative theology' reachable only by way of denial. It also suggests an attempt to return to the 'zero degree of being' (0 Grad des Sein) by excluding representational form and line, as seen in Kazimir Malevich's BlackSquare(1915).Woo'sinclinationtowardabstraction(fromabs-tractus,"to draw out" in Latin) as a way of visualizing the emergence of the cosmos differs little from a 'withdrawal' or 'drawing-out' of the non-visible. The result is a visual manifestation of neutral inspiration which transcends the specific limits and conditions of all beings—and of existence itself. This can be seen in the double presentation of abstract space in Woo's series PaintingProject, Asking(2014), whichleadsviewerstolookforandappreciateforcesbothfeltandunfelt, visibleandinvisible. The Germantermforabstraction(abstrahieren) meanstowithdraw(abziehen) animpliedvitality, forceorfeeling, withtheassistanceofsome'unfamiliar' or 'primordial' inspiration. Thus, Deleuze and Guattari emphasize that 'abstraction' is far from a byproduct of artists who deprive themselves of illusionistic space, and closer to something prior; that is, something that has existed since the beginning and which initiates all else. In truth, this suggests a reason for Woo's continual contemplation of our origin. Although the impulse to continually abstract the origins of existence might be considered paranoid behavior, Woo's nostalgic internalization of the source of natural order precludes him from setting aside his questioning. ● 3. Woo's outward projections of our mysterious origins are based in hermeneutics. From the Memory of the Beginning series on ward, his art practicehasbeenconcernedwithnotions of phenomenology and the lived experience of anexternalconsciousness. Likeapsychicabletodivinethebirthofthecosmos, Woohasdevotedhimselftolocatingtracesofspiritsbyusingsacredtreestochannelhisvisions. Thesetrees, whichwereonceworshipedbyancientcultures, serveasWoo's other self. The search for a so-called 'window into eternity' (fenestra aeternitatis), along with his own inspiration and intuition regarding the dawn of creation, leads the artist to a trance-like state of Nacherlebnis, a German term which literally means 'after-experience.' Woo's hermeneutic aesthetics is based in both foundationalism and vertical ontology, and finds expressive form through such sacred trees. This is inherently akin to some pre-Christian religious doctrines conceived by the ancients as a way to assuage anxieties regarding the origin and ancestry of existence. It can even be found in the primitive consciousness of shamanism, where it serves as an imperative of the spiritual. Woo's practice of hermeneutic after-experience, when applied to trees, approximates Gadamer's 'fusion of horizons' wherein the artist attempts a dialogue with time and permanence. Perhaps this is why Woo's project, which lacks a clear ending point, feels all the more mysterious. ● The physicist Prigogine proposed that "the distinction between what exists in time, what is irreversible, and, on the other hand, what is outside of time, what is eternal, is at the origin of human symbolic activity. Perhaps this is especially so in artistic activity. Artistic activity breaks the temporal symmetry of the object. It leaves a mark that translates our temporal dissymmetry into the temporal dissymmetry of the object." Woo's traces of after-experiences aim at a number of diverse forms yet do not reject a feast of shamanic possession, as seen asymmetrically in double images. We see in Woo's tree-based works a moment in deep time when chaos became cosmos. This is why Woo attempted to free himself from the easel and its tendency to isolate images within a fixed, two-dimensional plane, a notion which resonates with art critic Clement Greenberg's pronouncement of the death of easel painting after seeing a solo exhibition by Jackson Pollock one month earlier (TheNation,February1947).AsWoo's after-experience approaches the moment of ecstasy (ekstasis) or no-self (anātman), he must work with the same vigor and pace as a shaman. As a result, Woo's practice is more dynamic than any other kind of process art, both in speed of immersion as well as spontaneity of inspiration. The speed of his visual realization alone breaks all sorts of presumed taboos, demonstrating that the artist meant to violate the rules just as the primal cosmos dawning out of the darkness was a violation of chaos. Therefore, Woo's infinite abstraction toward the beginning is poised to surpass any speed, cross any border and break any rule. This is in line with Jean Louis Pradel's impression that today "artists have won every right, adopted every medium of expression, and violated all taboos. They have overturned cultural assumptions of nobility, breached every border and expanded into new realms." ● 4. By immersing oneself in Woo's experiential offering, one can awaken from the ennui of sensation. The dynamic movement that energizes Woo's work arouses viewers' defenseless sensibilities and forbids any slumber of the spirit, serving as a vehicle of spiritualism for a vicarious journey to the emergence of the cosmos. ■ Lee Gwang-rae

Vol.20150808a | 우종택展 / WOOJONGTAEK / 禹鍾澤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