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극장 Trans-Theatre

정은영展 / siren eun young jung / 鄭恩瑛 / video   2015_0820 ▶︎ 2015_0920 / 월,공휴일 휴관

정은영_전환극장展_아트스페이스 풀_2015_Photo by 김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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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820_목요일_04:00pm

작가와의 대화 / 2015_0920_일요일_04:00pm 대담자 / 안소현(큐레이터)

후원 / 서울시_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Margaret W. Wong & Associates LLC 기획 / 안소현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풀 ART SPACE POOL 서울 종로구 세검정로9길 91-5 Tel. +82.2.396.4805 www.altpool.org

아카이브와 죽음: 『전환극장』의 수행성에 대해 ● 섬찟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정은영이 죽은 작가였더라면 하는 가정을 한 적이 있다. 정은영은 여성국극을 소재로 무려 7년 남짓 영상, 공연, 글쓰기, 강연 등 다양한 매체와 형식으로 변주해왔고 이 소재에서 출발하여 젠더의 수행성이라는 주제를 비디오와 퍼포먼스의 수행성과 연결시키는 연구까지 진행했다. 작가의 굴착은 너비도 깊이도 만만치 않았기에 작가가 아카이브를 전시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나는 가능한 모든 자료를 전시하자고 제안했다. 작가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완전한' 자료를 전시하는 것은 거부했다. 그리고 그 순간 살아있는 작가가 스스로 구성한 아카이브와 작가의 사후 큐레이터가 구성한 아카이브란 것이 얼마나, 그리고 왜 다른지 자문하게 되었다. 어느 죽은 작가의 이름을 건 전시를 만들 때, 거칠기 짝이 없는 일차자료를, 작가는 남기길 꺼렸던 퍼포먼스 영상들을, 온갖 미사여구로 후원자를 설득하려 쓴 편지들을 모조리 전시하면서, 아마도 작가가 살아있었다면 그런 것들을 전시하는 것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굳이 작가의 생물학적 죽음까지 운운하지 않더라도, 아카이브는 여러가지 층위에서 죽음을 불러들일 위험이 있으며, 정은영의『전환극장』의 아카이브도 예외는 아니다. ● 정은영은 2008년부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여 『여성 국극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여성국극은 1950-60년대 크게 유행했으나 쇠퇴한 일종의 창무극으로, 모든 등장인물을 여성이 연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번 전시『전환극장』에서 공개하는 아카이브는 크게 나누어 작가가 '자신의 창작을 위해' 수집한 자료와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창작물'로 이루어져있다. 수집한 자료들은 주로 여성국극 배우들이 간직했던 오래된 사진들, 공연실황 영상, 방송녹화영상, 대본, 신문기사, 관련 책과 논문 등이다. 그리고 거기에 정은영이 수행적 젠더라는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읽은 여러 책과 논문들, 배우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 녹음 파일 및 영상이 더해진다. 그리고 창작물로는 작가가 제작한 비디오, 여성국극을 모티브로 한 공연의 기록영상, 수집한 자료들을 몽타주한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 작가의 '창작'이 개입하는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어렵다. ● 작가가 수집한 자료들은 여성국극에 관한 객관적 자료들도 있지만 작가 개인의 특수한 관심에 따라 선별된 것들이고 인터뷰 과정의 작가의 노련한 질문과 개입은 편집의 기술만큼이나 창작의 성격을 드러낸다. 따라서 정은영의 아카이브에서 창작과 비창작을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정은영_전환극장展_아트스페이스 풀_2015_Photo by 김익현

회고적 아카이브와 작품의 죽음 ● 오늘날 작가가 아카이브 자료를 하나의 창작물처럼 전시하는 것이 새로울 것은 없다. 할 포스터는 이미 2004년에 발표한 논문 "아카이브적 충동"에서 차용한 오브제나 이미지를 사용하고, 목록화 하고, 시리즈의 형태로 전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 문제는 정은영의 아카이브는 자료와 본인의 '작품'을 뒤섞어 전시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자료와 작품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낡은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며, 아카이브 작품들이 바로 그런 위계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은영이 차용한 이미지로 전시를 구성하는 것은 크레이그 오웬스(Craig Owens)가 말했던 알레고리적 충동, 즉 폄하되었던 알레고리의 방식으로 이미지들을 부분적으로 대체함으로써 어떤 '전복'을 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자료와 그 자료를 바탕으로 완성된 작품들을 같이 모아놓은 정은영의 아카이브 방식은 원로 작가나 작고한 작가에 대해 구성하는 회고전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자료와 함께 전시된 작품들은 자연스럽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라는 의미를 얻는다. 작가들이 미완의 작품이나 작업을 위해 수집한 자료들을 같이 전시하기를 꺼려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들은 단순히 완성도를 문제삼는다기보다는, "친필 원고", "미완성 유고"같은 말이 생산해내는 신화를 두려워하는 것일 수 있다. ● 다른 말로 하면 회고전의 아카이브는 작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작품을 희생시킨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작품과 작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모든 읽기는 작품을 작품 자체로, 그 익명의 현전으로, 있는 그대로의 격렬한 비인칭의 긍정으로 돌려주기 위해 작가를 무효화시키는 놀이이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작가에게 인칭을 부여하고 작품들을 '그/그녀'의 작품들로 재배열하는 순간, 작품은 작품 자체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저자의 죽음'을 강조하는 현대적 텍스트 이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작품이 아니라 작가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복수의 작품들의 일관성과 동일성을 확인하고 인과관계를 확정지으려는 회고전의 아카이브 방식에서, 작품은 작가의 뒤로 밀려난다. 정은영은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동안 카메라를 통해 장면을 바라보거나 공연의 기획자로 무대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다. 2014년 수행한 일련의 렉쳐 퍼포먼스에서도 정은영은 직접 무대에 섰지만 철저히 준비된 대본을 바탕으로 작품의 일부로 무대 위에 올라갔다. 반면 이 아카이브 전시는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회고한다"는 제스쳐로 읽힐 경우 작품들은 작가 정은영의 뒤로 배열된다. '저자'의 죽음 대신 '작품'의 죽음이라는 위험을 끌어들인 것이다.

정은영_정동의 막_단채널 비디오_00:15:36_2013

그런데 정은영의 아카이브 전시는 회고전의 방식을 취하긴 했지만 일반적인 미술관에서 아키비스트가 자료를 모으고 큐레이터가 전시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미술관의 아카이브 전시에서는 작품의 의미를열어놓기 보다는 지금까지의 생산된 작품들의 의미를 확정하고 환원하려 하며, 그런 경우 자료들은 대부분 작품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선별하여 유기적으로 구조화한다. 반면 정은영은 자료들을 명확한 기준에 따라 구조화하기를 원치 않았다. 할 포스터는 아카이브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물리적으로 눈 앞에 보이는 설치를 선호하고 흔히 "비위계적 공간성"을 활용했음을 언급했는데, 정은영 역시 연대기나 창작자 같은 객관적 정보에 따라 분류하지 않은 채 자료를 비정형적으로 전시한다. 실제로 이 자료들을 보여주는 방식을 의논하면서, 작가는 어떻게든 이 자료들을 유기적 체계로 만들자는 나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작가는 이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자료들을 빠짐없이 망라하고 정확한 연도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그것들이 사라져가는 여성국극을 '증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미술관 아카이빙의 관성에 따라) 아카이브 자료라는 것이 원래 완전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유기적으로 구조화를 해야 하며, 그렇게 구조화 하지 않고 전시할 경우 7년동안 모은 자료들과 작품들을 단순히 모아 놓은, 일종의 방임 상태로 전시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정은영은 강경했고, 그 강경함의 이유를 나중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정은영_사랑이 넘치는 신세계_퍼포먼스_00:50:00_2014

죽음 충동과 아카이브의 수행성 ● 정은영은 왜 회고전 같다거나 자료를 무책임하게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고, 긴 시간 매달려온 작품들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이런 전시를 감행하는가? 정은영은 이 전시가 지금까지 작업에 담고자 노력해온 "수행적 젠더"의 "아카이브적인 실천"이라고 대답한다. 이 간결한 대답에는 간단치 않은 설명이 필요하다. ● 수행적 젠더란, 개념을 제안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를 참고하자면, 정체성을 하나의 환상으로 간주하고 오로지 수행성(performativity)을 통해 젠더를 정의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젠더를 비롯한 수많은 정체성의 규정들은 사회적인 관습에 의해 각인되어 반복적 수행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에, 역으로 반복적 수행은 모든 견고한 통념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수행성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예술장르가 비디오와 공연이었다면, 정은영은 아카이브를 그에 못지 않은 수행성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 아카이브는 어떻게 수행적이 되는가? 이미 여러 아카이브 전시의 모티브가 되었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아카이브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모으고 또 모으는 반복적 행위 자체에 주목하였다. 그는 『아카이브의 고통: 프로이트의 인상』(1995)이라는 책(강연 기록)에서 아카이브는 이미 어떤 다른 장소, 혹은 바깥으로의 이전/보관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구성되는 그 순간 자료의 원래 흔적을 상실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아카이브의 반복적 수집 행위는 죽음 충동과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복적으로 무언가를 모으되, 그것이 근본적으로 이미 구성되고 있는 대상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거나 기원을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프로이트의 아카이브의 핵심이다.

정은영_개인적이고 공적인 아카이브_디지털 프린트_59.4×84.1cm_2015

데리다가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프로이트의 아카이브적 충동은 결과물의 정체성과 완전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즉 모든 시대의 주요 작품을 빠짐없이 포함하는 컬렉션을 만들고 싶어하는 미술관 큐레이터의 물신적 강박과는 구분된다(큐레이터는 단번에 모든 작품을 수집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혹은 미술관 큐레이터의 수집은 데리다가 비판하는 아카이브를 선점하여 권력을 얻는 행위에 해당될 수 있다. 반면 정은영은 회고전의 아카이브처럼 보일 수 있는 위험과 그로 인해 작품의 현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정체성을 위한 구조화를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 정은영의 아카이브는 죽음 충동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만일 큐레이터가 회고전을 하거나 컬렉션을 구성하기 위한 스크립트를 쓴다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e)를 근거로 한 스크립트이겠지만, 정은영의 스크립트는 그 완결성에 조금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작가는 꽤 많은 자료를 여전히 전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부정확한 연도나 사실관계를 굳이 확인하려들지 않는다. 또한 작가는 특정한 역사적 관점을 자료에 덧씌워 정렬하거나 공고히 하지 않는다. ● 흥미로운 것은 데리다가 이런 아카이빙 행위를 "아카이빙 행위의 무대화(une mise en scene de l'archivation)"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아카이브에서 의미를 갖는 것은 결과물의 상태가 아니라 그 반복적 행위 자체이며, 그 행위는 무대에 연극을 올리듯 일시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버틀러가 수행성을 강조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재)무대화((re)staging)"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영속적인 어떤 전체를 구성하려는 의지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마찬가지 관점에서 보면 정은영이 원한 아카이브는 완성은 없고 오로지 끊임없이 모으는 수행만이 일시적으로 상영되는 극장이다. ● 그러나 이런 수행이 반드시 무차별적 방임은 아니다. 정은영의 전환극장에서는 자료들이 하나의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료들 사이에는 창작과 비창작의 한계선을 긋기 어려울만큼 자료들을 계열화하고, 조금씩 관계에 침투해가는 정은영의 개인적 해석들이 엿보인다. 이것은 마치 아비 바부르크(Aby Warburg)가 므네모시네 아틀라스(Mnemosyne Atlas)에서 이미지들만을 늘어놓았을 때 서서히 어떤 해석의 구름이 응결되기 시작하는 지점과 비슷하다. 자료들의 비정형적인 연쇄는 명확한 연대기나 증언에 비해 모호하고 개인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만일 관객들이 그 개인적인 것에서 어떤 경향성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 경향성은 대부분 특정한 사회적 관습이나 규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정은영의 아카이브는 할 포스터가 주목한 토마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의 아카이브와 유사하다. 허쉬혼은 개인적인 관점으로 오브제와 책들을 늘어놓지만, 그것들에 주목한 이유들은 어떤 사회적 위기와 관계가 있다. 포스터는 허쉬혼을 언급하면서 아카이브 예술을 "가져왔으나 구축되고, 사실적이나 허구적이며, 공공적이지만 개인적"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점에서 정은영이 이미지 몽타주에 붙인 "개인적이고 공적인 아카이브"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이 제목은 버틀러가 개인적 특성이 사회적 헤게모니에 의한 반복적 기입을 통해 형성된 것임을 주장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명확한 중심을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읽히는 이미지들의 경향성은 사람들에게 기입된 (혹은 기입을 강요당한) 어떤 사회적 관습에 의지하거나 그 관습을 전복시키는 데에서 드러난다는 것은 젠더형성과 아카이브 전시의 공통분모일 것이다. 따라서 중심 없는 아카이브는 수행의 자리가 되며, 그 수행 안에서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구분되지 않는다.

정은영_개인적이고 공적인 아카이브_디지털 프린트_59.4×59.4cm_2015

이제 우리는 "전환 극장"이라는 제목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전환극장』은 작가 정은영의 전시극(展示劇)이다.장면은 여성국극의 무대, 무대 뒤편의 분장실, 노배우들의 집을 넘나들다 마침내 작가의 작업실로 전환된다. 모든 장면의 한 구석에서 노트와 카메라를 들고 여성국극 배우들의 모습을 담던 성실한 기록자가 이제 무대로 올라와 자신의 개인적 주제를 위해 연기한다. 그 연기에는 그 동안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 했다는 선명한 대사 대신 자료를 복사하고, 벽에 붙이고, 책장을 뒤적거리고, 반복해서 영상을 보는 수행의 동작들만이 있을 것이다. ● 나는 정은영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아카이빙의 수행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을, 모든 오해의 위험에도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정은영은 정체성이 없어도 정치성이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한 버틀러처럼 아카이브의 자료들을 통해 중심 없이도 의미를 생산함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자신이 7년동안 반복해 온 수집의 과정을 무대화 함으로써, ● 여성국극에 관한 새로운 무대가 꾸려지기를 기대하는 동시에, 스스로도 7년간의 프로젝트를 무대에서 내리고 다시 새로운 무대를 꾸리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이 아카이브 전시는 사후 작업(postproduction)이지만 사전작업(preproduction)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일시적으로 구성된 무대임을 확인시키는 과정이다. 나는 정은영의 아카이브가 "그냥 모아놓은 것", "시기 상조의 회고전" 같은 비판을 실제로 피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다. 그러나 아카이브를 하나의 수행으로 보는 과감하고 진지한 작가의 관점과 자신의 작품에 대해 조종(弔鐘)을 울릴 수 있는 용감한 수행이 공감을 얻기를 기대하며, 다시 블랑쇼를 인용한다. ● "많은 작품들은 우리가 거기서 끝내지 않으면 낮의 대기 속으로 되돌아 올 수 없다는 두려움에서 빨리 끝내려는 조바심 속에서 지나치게 서둘러 작품으로부터 떠나버린 작가의 흔적을 여전히 볼 수 있기에 우리를 감동시킨다. (…) 훌륭한 작품들 속에는 언제나 최상의 순간이, 작가가 그 순간에 머문다면 그는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중심에 가까운 지점이 예감되고 있다." ■ 안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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