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품

윤예제展 / YOONYEJE / 尹乂帝 / painting   2015_0825 ▶ 2015_0921 / 주말,공휴일 휴관

윤예제_품 Spring in winter 1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15

초대일시 / 2015_0827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주말,공휴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루 ART SPACE LOO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110번지 Park110 빌딩 B1 Tel. +82.2.790.3888 www.artspaceloo.com

심경(心境)이 있는 자연(自然)과 사랑의 아우라(aura)1. 여기 소소한 자연의 풍경에서 존재의 심연을 보아내는 도저한 풍경주의자(風景主義者)가 있다. 누구도 잘 눈여겨 보질 않는 일상적 풍경의 한 대목에서 실존(existence)의 감정과 품성(品性)을 유추해내는 젊은 화인(畵人)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느 자연에 부여하는 고루하고 범박한 산수적(山水的) 풍경 해석에서 비켜나 자기만의 안목으로 풍경의 속내를 들여다보듯 그려나가는 윤예제의 심리적 풍경 이해는 골똘하고 신선하다. 풍경에도 소위 겉(The Appearance) 풍경과 속(The Bottom) 풍경이 있다. 그녀는 그 풍경의 겉과 속, 그 표리(表裏)를 하나로 결속하는 심미적인 결단으로 대다수가 외면한 풍경의 속내를 냅뜰성있게 화폭에 안칠 줄 안다.

윤예제_품 Spring in winter 2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15

절경(絶景)이나 명승(名勝)이 아닌 현장의 무심하게 지나치는 지점이나 대목, 그 풍경의 여줄가리에 오히려 본원적인 응시(凝視)의 끌림을 부여하고 내면을 선사하는 화폭이 선득하니 자자하다. 그것은 경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험적(先驗的)인 구석이 자자하다. 마치 그의 풍경들은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다음 순간 데자부(deja vu)의 영역, 그 기시감(旣視感)의 분위기로 은근히 보는 이의 마음에 새뜻하고 소슬한 내면의 벌물이 번지게 한다. 그것은 풍경을 외물(外物)이나 단순히 경치(景致)의 완상적(玩賞的) 차원을 넘어 내면(內面)에 드리우는 또 다른 심경(心境)으로 보아내는 미적 가리사니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윤예제_짙은 품2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15

윤예제는 분명 풍경의 일상을 통해 일상적 풍경이 감추거나 드리우고 있는 심정적 아우라(aura)를 직감적으로 혹은 직관적으로 보아내는 눈썰미가 있다. 그리고 그런 얼얼한 영혼의 감각이 내민 팔래트에 붓끝을 찍어 여실히 풀어낸다. 그래서 그의 풍경들은 먼저 이해되는 그림이 아니라 나중에 이해되고 현재는 깊이 느껴져야 할 그림이다. 어떤 막연한 데자부의 감각은 선험적(先驗的)인 것이지만 그녀가 말한 '품'의 이미지들은 인간의 영혼이 이해하는 어떤 품성이나 깊이를 추체험하게 하는 묘한 뉘앙스를 품어낸다. ● 겨울에서 봄으로, 그는 어슬한 현장 속에 초목(草木)들이 가지런히 스러지고, 서로 엇갈리고, 고민하듯 기대고, 연좌하듯 잇대인 산야(山野)나 늪지대의 어눌하고 소슬한 분위기에서 보다 근원적인 정서(情抒)를 건네받는다. 마치 샤먼(shaman)이 망아(忘我) 상태에서 어떤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듯이 화가는 풍경이 지닌 소슬한 분위기나 사소한 기미(機微)에서도 예전에 없던 초자아(超自我)적인 영성(靈性)의 분위기를 감지할 줄 안다. 그것은 대단히 특별한 사람만이 접할 수 있는 교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도시화와 천민자본주의의 그늘 속에서 잃어왔던 본래적 감수성의 일종으로 봐도 좋으리라. 그런데 윤예제는 그런 자연과의 교감능력을 하나도 훼손하지 않은 채 어딘가 낯설고 때론 쓸쓸하고 소슬한 형태로 우리 앞에 자연의 한 얼굴을 복원시켜주기에 이르렀다. 윤예제는 그런 현장이 왠지 쓸쓸하지만은 않고 따뜻하다고까지 한다. 여기에 윤예제의 또 다른 감수성의 원천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연을 외상(外相)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깊이와의 연결고리로 보고 있다는 감수성의 측면이다. 기후에 따른 변화하는 자연 현장을 웅숭깊게 보는 그 직관적인 감각은 결국 실존적 인간이 지닌 심정적 결여(缺如)와 관계된 모색의 풍경과 조우함을 보여준다. 사람에게서 다 찾을 수 없는 어떤 본원적인 심성을 현장의 자연 속에서 실감있게 공여받고 있다는 증거가 그녀의 화폭에 적나라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가 아니라 결락됐던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인 연대를 모색하는 일종의 공생적(共生的) 자연주의 경향이 낳은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자연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기존에 있던 것을 배척하는 행태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만상(萬像)들을 공생(共生), 공유(共有)하는 형태로 무한한 관계를 열어놓는다. 그러기에 자연에는 세속의 사리분별이나 시비곡직(是非曲直)이 의미있게 작용하지 않는다. 현상으로서의 자연은 인간의 가치를 뛰어넘는 무위(無爲)의 도(道)에 부합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감성에 부합하는 무명(無名)의 자연에서 자기만의 유명(有名)의 자연을 보아내는 기질을 지녔다. ● 풍경은 그 풍경이 아름답다거나 추하다는 일반적인 경험이나 가치판단으로부터 이미 그 풍경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화가는 풍경을 미추(美醜)의 관념이 아니라 마음이 닿거나 열리고 위무되는 또 다른 심연으로 볼 때가 더 소슬하고 오롯했고 절실했을 터이다.

윤예제_겨울 늪_캔버스에 유채_24.2×33.4cm_2015

2. 도시적 사물이나 자본에 홀린 자와 삶 저변의 자연풍경에 홀린 자의 황홀(恍惚)의 정도와 깊이, 그리고 그 지속성은 분명 차이가 있다. 문명적 관심은 자본이 만든 세속적 쾌락의 기획 속에서만 가능하게 조작되고 제어돼 있지만, 자연 풍광의 소소하고 또 독특한 분위기는 보다 근원적인 심성과 정서적 끌림 속에 영혼을 안치고 그 심정을 다양하게 번져낸다. 그 번짐은 확장하는 정신으로 변주될 본원적인 힘을 갖는다. ● 그런 의미에서 윤예제는 사물이 갖는 정태적(情態的)인 인상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인 맥락에서 화폭에 옮김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인상적 끌림의 정서반응을 거쳐 일종의 데포르마시옹( Deformation)의 효과를 창출하곤 한다. 그것이 의도적 기법상의 왜곡이든 의도와 상관없는 자기몰입의 결과이든 상관없이 그에겐 나름의 효과적인 분위기의 추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그가 대상 풍경과 교감하는 남다른 몰입의 상태에 누구보다 두드러진 자세를 견지한 작가임을 예견하는 대목이다. 작가의 말처럼 남들은 심상하고 때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현장이 자신에겐 편안하고 심원한 영감(illusion)의 장소로 끌린다는 말은 자연 대상과 교감하는 그의 남다른 교감을 담보하는 언술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그림들이 사실적 구상(具象)에 집중하면서도 추상적 뉘앙스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런 영감(靈感)의 서술에 끌리는 붓놀림이 도저하기 때문이다. 화폭 속의 풍경에는 별다른 장치적인 혹은 의도적인 오브제(objet)를 극도로 배제하는 것도 화가가 대상 풍경과의 충분하고 심원한 교감이 선행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뉘앙스만으로도 그것은 이미 넉넉히 대상과의 섭외가 진행되었다는 조짐이자 징후다. 외향적인 역동성의 이미지가 가라앉은 반면에 화가 자신이 정중동(靜中動)의 정서적 소요(逍遙)를 통해 이미 풍경의 내면(內面)과 서서히 갈마들고 소슬하게 번져내는데 자연스럽다. 풍경을 단순히 자연친화적인 것 이상의 영혼의 결(texture)로 환치하는 이런 일련의 작업은 파격의 이미지 조합과 색출에 열중하는 선정적인 작금의 일부 미술 경향과는 류(類)를 달리한다. 그는 서양화의 표현적 기법 속에 동양화의 화의(畵意)을 결합하는 화가다.

윤예제_품 Spring in winter_캔버스에 유채_91×116.7cm_2014

3. 윤예제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분명 늪가의 초본(草本)을 묘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는 소슬한 경험을 갖는다. 가량 그것이 풀들의 모임이 아니라 일종의 파도라든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너른 둥지 같은 이미지(image)로 전이되는 감각말이다. 또 그것은 보는 이의 감성적 편차에 따라 다른 색다른 이미지로 확장될 가능성을 종종 보여준다. 지극한 사실성의 포착 속에 깃든 이런 일루션(illusion)은 그의 그림이 재현의 동기보다는 화가의 심정적 발현의 동기에 더 기울어 있음을 보여준다. 동양화론(東洋畵論)의 관점에서 보면 화의(畵意)에 경도된 경물(景物)인식이 두드러져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화가의 태도와 상통한다. ● 그것은 애초에 화가가 사실적으로 포착하고 감성적으로 특화한 대상 자체가 심리적(心理的) 요소와 심미적(審美的) 인상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구상적(具像的)인 추상성(抽象性)이 얼비친다. 반대로 추상적인 구상미(具象美)로 보더라도 앞서 말한 부분과 두동지지 않는다. 이런 아이러니는 풍경을 단순한 외물(外物)이나 외경(外景)의 차원이 아닌 심정적 절실함이 갈마드는 주관적인 풍물로 소화해내려는 작가의 지극한 응시(凝視)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일찍이 중국의 현대 화인(畵人) 중 하나인 이가염(李可染)은 '산수화란 지리책이 아니다. ...이른바 경물(景物)을 보고 정을 느끼는 것이며, 경치를 그린다 함은 정(情)을 그려내는 것으로 사물을 빌미로 정을 기탁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윤예제의 풍경들은 현대 동양화적 관념으로 보면 비록 서양화의 본위(本位)가 완연하지만 선(線)과 점(點)과 면(面)의 자연스런 융합과 조화가 풍미되는 동양화적 분위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녀의 화면속 풀들이 지닌 원초적인 선묘(線描)는 현장의 풍경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하며 그녀가 풍경에서 받은 심정의 아우라를 대변하는 인상적 패턴(pattern)이나 심미적 질감(texture)을 소요하듯 옹립하는 정감이 감돈다. 세필(細筆)을 통한 촘촘한 초본류(草本類)의 가만히 잇대고 서로 얼크러지고 기대인 풀들의 기후적 생태는, 그것이 심정을 이끄는 한 징후적 뉘앙스로 받아들이는 화가의 눈에 의해 영혼의 생태로 전환되는 모색의 상관물이 된다.

윤예제_품 Spring in winter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15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그녀의 화폭엔 그간 짙은 회색 톤의 무채색이 주조였던 풍경에 화사한 화염처럼 연분홍이 번지듯 피어나고 있다. 지상에선 듯 낮은 천상에선 듯 그것은 꽃보다 오래 개화하고 잎보다 질기게 흔들리며 열매보다 오래 매달린 채 자연의 생기(生氣)와 장차 다가올 소멸조차 낙락하게 받아안을 기세다. 그것은 극명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실적인 본색(本色)을 드러낼 기미나 숨탄것으로서의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만큼 윤예제가 그리는 자연의 인상은 모호하면서도 구체적인 심경(心境)으로서의 자연이다. 이 찬란하고 소슬한 그로테스크 속에서도 그녀는 안온한 정념을 구축할 줄 아는 힘과 자기 눈을 가지려 한다. 남들은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내는 이 밝음의 눈을 가지고서 그녀가 궁극적으로 그리려는 자연의 섬세한 윤곽은 범벅하게 말해 사랑의 아우라다.

윤예제_Flow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13

지금도 그렇고 항차 사랑을 위한 방황과 모색의 자연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상이 모두 사랑이라 부르더라도 그녀에겐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려지는 풍경이 아니라 그렇게 그려질 수밖에 없는 어떤 절박한 자연의 심정을 그녀는 사랑의 근사치라 부르며 그리게 될 것이다. 품이 있는 그 사랑의 근사치(近似値)를 영혼이 호흡하는 사랑의 절대치(絶對値)로 가기 위한 지난하지만 기꺼운 붓-터치는 쉬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연을 모르는 사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예견하듯 윤예제의 이번 그림들은 하나의 배경과 중심이 너나들이하는 풍경을 통해 독특하고 서늘한 존재의 심연을 불러내고 있다. ■ 유종인

Vol.20150825b | 윤예제展 / YOONYEJE / 尹乂帝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