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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래展 / NOHHEERAE / 盧禧來 / installation.sculpture   2015_0825 ▶︎ 2015_0831

노희래_N.9_석고붕대, 혼합재료_가변설치_2015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서울시립대학교 환경조각학과 석사학위청구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서울시립대학교 갤러리 빨간벽돌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대로 163(전농동 90번지) Tel. +82.2.2210.2250

사물, 접촉-노희래의 근작들"내 생각에 우리는 접촉이 너무나 그리워서 서로 충돌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거야." (영화 『크래쉬 Crash』(2004) 주인공 그래험 워터스의 대사 중에서) ● '百聞이 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우리가 '눈'과 '시각'을 얼마나 우선시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통상 우리는 회화나 조각 작품을 '시각예술'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화가나 조각가들은 "어떤 것을 가시화하는(눈앞에 출현시키는)" 미술작품의 독특한 능력에 집중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눈으로 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만져본 다음에야 비로소 그것이 "거기에 있구나"라고 믿는다. 그들은 우유병 젖꼭지를 물고 비로소 울음을 그치고 즐거워하는 아기들처럼 촉각적 접촉에 몰두한다. ● 노희래는 '긁기'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시각보다는 촉각에 좀 더 집중하는 작가에 해당한다. 이 작가는 주변의 모든 것을 긁는다. 노희래의 도구는 날카로운 송곳이나 철필, 끌, 톱 같은 것들이다. 그녀는 그것으로 주변의 온갖 사물들-의자, 책상, 책, 상자, 옷, 침대 등-을 긁는다. 이 작가에게 '긁기'는 주변의 사물과 만나는 또는 접촉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전시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노희래의 작품들은 그 만남과 접촉의 기록과 같은 것이다.

노희래_N.9_석고붕대, 혼합재료_가변설치_2015_부분

긁기는 이 작가가 그 사물들에 관하여 알아가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것은 눈을 통해 얻는 지식보다는 접촉을 통해 얻는 지식에 해당한다. '사물의 안內', 사물의 강도, 사물의 질감(또는 사물의 껍질) 같은 것들에 대한 지식 말이다. 물론 여기서 '사물의 안'이란 '내면', '심층' 같은 관념적 개념이 아니라 글자 뜻 그대로(literal)의 '사물의 안'을 지칭한다. 사물의 강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접촉한 사물의 어떤 면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또 어떤 부분은 부드럽다(무르다). 그것은 '단단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단단한 것이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드러운 것이다. 물론 이 작가는 '단단하다'와 '무르다' 사이에 존재하는 사물의 강도들(intensities)에 친숙하다. ● 이렇게 노희래는 가시적인 형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가시적인 형태를 긁는 일에서 작업의 의의를 찾는 작가다. 가령 이 작가에게 종이에 연필로 드로잉하는 일은 '그리는' 일이 아니라 '긁는'일에 좀 더 가깝다. 연필로 종이를 긁을 때 '슥슥' 소리가 난다. 마찬가지로 철필로 책상을 긁을 때 '벅벅' 소리가 난다. 그녀는 이 소리들이 싫지 않다.

노희래_N.9_석고붕대, 혼합재료_가변설치_2015_부분

"사물을 긁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나는 예전부터 뭔가를 긁는 날카로운 소리로부터 자유로웠던 것 같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라든가 차바퀴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면서 땅을 긁는 소리를 내며 멈출 때." (노희래, 2015) ● 노희래에게서 그 소리들은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서로 접촉할 때 나는 진짜 소리들이다. 그것은 간접적인(매개된) 소리들, 이를테면 음악 연주 소리보다 좀 더 생생하고 좀 더 리얼하다. 긁기의 부산물은 소리뿐만이 아니다. 파편들, 가루들이 있다. 그 보슬보슬하고 까칠한 것들! '보슬보슬'하고 '까칠한'이라고 했지만 그 느낌들은 단어들로, 또는 가시적인 형태들로 좀처럼 붙잡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개념화(인식)할 수 없고 다만 몸으로 느낄 따름이다. 과거에 프로이트는 정신적인 행위로는 표현되지 않은 사물표상(Sachvorstellung)에 대해서 말했는데 정신이 아니라 몸으로 바로 육박해 들어가는 노희래의 작업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사물을 '슥슥', '벅벅' 긁으면서 이 작가는 행동중인 상태로 된다. '긁기'란 이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편이다.

노희래_나를이루는것들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5

"무엇인가를 긁고 있으면 내가 뭔가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들뜬다. ...그러니 더 열심히 긁어야지 라고 생각했다." (노희래, 2015) ● 석고와 석고붕대를 사용한 라이프캐스팅은 사물(석고)과의 접촉을 위해 작가가 택한 또 하나의 방식이다. 그 틀(껍데기)안에서 이 작가는 온몸으로 석고의 여러 가지 느낌을 경험했다. 그 온기와 냉기, 무게, 습기 말이다. 그렇게 라이프캐스팅이 완성되자 그 표면을 이 작가는 다시 긁는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노희래가 긁는 사물이 단순한 석고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노희래 자신의 몸의 형태를 지닌 라이프캐스팅이다. 마찬가지로 그녀가 긁기를 위해 선택한 사물들은 그녀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일상의 사물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의 표면을 긁는 일은 어떤 심리적, 정감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일단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물론 '긁기' 행위가 어디서 중단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때때로 이 작가의 긁기는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선에서 벗어나 표면을 더 깊숙이 파내려가는 데까지 진행된다. 이것은 사물과 사물의 형태들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만한 접근이다. 실제로 그녀의 긁기는 사물과 형태의 표면을 파내려가 마침내 구멍을 뚫고 그 텅 빈 내부를 훤히 드러낼 때까지 진행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뚫린 구멍으로 인해 사물의 사물성이 좀 더 명확해진다는 점이다. 노희래의 손길을 거쳐 우리 앞에 제시된 사물들은 훼손되어 더 이상 본래의 그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가령 그녀의 긁기 작업을 거친 책장은 책장 특유의 특성, 분위기를 대부분 상실한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그저 합판(나무판)들을 연결한 구조물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책장'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이런 방식으로 그녀의 작업은 '책장'과 '합판'을 동시에 지시하게 된다.

노희래_나를이루는것들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5_부분

한편 심리적인 수준에서 노희래의 작업은 (실재와의)접촉이 갖는 두 가지 측면을 시사한다. 하나는 사물-세상과의 실질적인 접촉이 주는 신체적인 즐거움(快)이다. '슥슥', '벅벅' 긁는 노희래의 손길은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또는 표면을 쓰다듬는 정다운 손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노희래의 긁기는 사물의 표면을 공격하여 흠집과 상처, 구멍을 내는 파괴와 충돌의 행위로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노희래의 작업은 접촉이 야기하는 어떤 불쾌감을 상기한다. 이렇게 접촉의 쾌와 불쾌를 동시에 지시하는 노희래의 작업은 삶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접촉의 두 가지 양상을 함의한다. 이 글 처음에 인용한 영화 『크래쉬』에서 주인공들은 세계, 그리고 사람들과의 생생한 접촉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들의 접촉은 대부분 공격적인 충돌로 귀결되곤 했다. 우리는 접촉을 꿈꾸지만 동시에 접촉을 두려워한다. 그 양자 사이에서 작업하는 노희래는 세계-사물에 접촉하는 우리의 적절한 마음가짐, 태도에 대해 묻고 있는 것만 같다. ■ 홍지석

Vol.20150825h | 노희래展 / NOHHEERAE / 盧禧來 / installation.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