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전(傳)

서양화가 6인展   2015_1030 ▶ 2015_1231 / 월,공휴일 휴관

강경구_미시령_캔버스에 유채_117×80cm_2015 김보희_towards_천에 채색_91×117cm_2015

초대일시 / 2015_1030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선두_강경구_정종미_류근택_김보희_이동환 황재형_서용선_정정엽_홍범_강석호_공성훈

기획 / 복합문화공간 에무 기획위원회 후원 / 사계절출판사_AGI Society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공휴일 휴관

복합문화공간 에무 Art Space EMU 서울 종로구 경희궁1가길 7 B2 Tel. +82.(0)2.730.5514 www.emuartspace.com

전시관에서 그림을 관람할 때'흐름'을 읽는 즐거움은 작지 않다. 작품을 따라 걸으면서 리듬감을 느끼고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감지한다. 작품이 픽션이듯이 허구의 세계를 유영하면서 흐름에 따른 '현실'을 조각한다(sculpt). 그'현실'을 통해 관계성의 회복을 감지한다면, 현대의 질병인 외로움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기쁨을 얻는다. 지난달 『바보전』과 비교할 때, 디스플레이의 규칙이 확연히 달라진 게 눈에 띈다. 작가별로 작품을 묶었던 것과는 달리 뒤섞어 놓았기 때문이다. 흐름이 변했다. 경쾌하며 감각적이다. ● 서로 다른 이미지 세계가 부딪치면서 작품들 '사이'가 중요해졌다. '사이'는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교환을 하려면 등식이 성립되어야만 한다. 그 때문에 monologue가 아닌 dialogue가 이루어진다. 성공적인 디스플레이라면, '사이'들이 다각으로 접촉하는 전시장은 소란하고 흥미진진한 '가치의 시장'이 된다. 전시관은 세 구역으로 나뉜다. 전시 작품의 배치는 『도면』을 참조. 입구에 들어서면 포스터에서 본' 두 사람의 얼굴'(도면②)에 시선이 간다. 반갑지만, 전시가 시작되는 벽면으로 몸을 돌려 공성훈 「불꽃놀이」와 마주한다. ● 어두운 하늘을 향해 치솟아오르면서 터지는 불꽃이 한 그루 나무 같다. 연록색 불꽃은 그 색깔 때문에 감정선을 건든다. 희망도 반항도 허탈도 아닌, 정체불명의 억눌림을 쏘아올리고 있다. 철석이는 바닷가 모래톱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두 청소년. 연록색 불꽃 주위로 마치 유리물체가 꽝 부딪쳐 깨어지기 직전 같은 격한 스크래치가 흰색으로 표현돼 있다. 파열된 그 흰색의 스크래치를 좀 떨어져서 바라보면 사람의 옆 얼굴 같다. 이것은 하늘이 아이들의 불꽃놀이에 조응하는 이변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변을 차단하려는 듯, 아니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 아래에 같은 스크래치 기법으로 구름을 길게 그려놓았다. ● 관람객은 전시 순서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포스터에 있는 서용선의 「희생자들3」(도면②) 이다. '갈색의 장막 속에서 우리를 향해 보고 있는 두 사람'은 어떤 사건의 희생자일까? 이 작가의 「대치」(도면⑩)라는 작품 때문에 분단의 산물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남과 북의 군인이 대치하고 있는 그림이다. ● 「불꽃놀이」의 두 청소년과 「희생자들」의 두사람. 이들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 두 청소년 또한 희생자일까? 만약 그렇다면 무엇의? 작품이 제작된 2014년을 생각하면, 내 귀에 모래톱이 있는 바다 저 멀리에서 자꾸 어떤 청소년이 울부짖는 랩이 들려온다.

강석호_무제 1_2003 공성훈_나무_종이에 아크릴채색_109×78.8cm_2014

관람객은 「희생자들3」(도면②)과 나란히 걸려있는 황재형의 「가출」(도면③)로 눈길을 옮긴다. 뿌리를 하늘로 뻗은 것처럼 보이는 큰 나무가 화면 중앙을 점령하고 있다. 산속에서 가방을 든 사내의 어께에 여자가 머리를 기대고 서있다. 가출한 남녀다. 이들의 상황을 암시하는 듯, 그 나무엔 금속 물질로 낸 상처가 선명하게 나있다. 작가가 민중의 삶을 살기 위해 광부가 된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의미의 울림은 커진다. 작가는 탄광촌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가출을 사회적 관점에서 인식했음이 틀림없다. ● 「가출」을 『바보전』에 출품한 이유를 생각해본다. 가난, 불평등으로 인해 상처난 인생을 '일반성/사회'의 시선에 머물지 않고 '개별성/구원'의 시선으로 따뜻하고 깊숙이 보고 있어서일지 모른다. 어쩌면 1988년 작 「가출」은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나이만큼 구원의 비밀에친숙해졌을 수 있다. ● 『바보전』타이틀 옆에 자리한 강석호 「무제3」(도면④)부터는 전시의 리듬감을 서서히 체감하게 된다. 흑백 그림 속 인물은 60년대 전후를 연상시킨다. 연설로 포효하는 인물의 얼굴은 윗입술 끝 부분부터 잘려나갔다. 괴이한 느낌과 함께 궁금증을 더해준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포즈 따위에서 어떤 정치인을 떠올린다. 잘린 얼굴은 그를 따르는 대중을 표상할 수 있다. 여기서 대중이 묘하게 이 정치인의 이름과 겹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옆에 걸린 정정엽의 「마을-왕고들빼기」(도면⑤)는 연설가가 그려진 이 그림(도면④)에 염화시중의 미소로 응답하는 것 같다. 작품의 크기가 작아서 그 미소의 위력은 반대로 더 커 보인다. 그 시대 대중이 사는 마을은 대체로 달동네다. ● 왕고들빼기의 보라색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살아있는 것은 공존하는 벌레들이고, 죽어있는 것은 공존하지 않은 인간, 통신수단, 단지, 기계, 피라미드질서 등이다. ● 기억자로 꺾인 벽면(도면⑥)에 공성훈의 「나무」가 있다. 여기서는 넓게 펼쳐진 제2의 전시공간을 한번 쳐다볼 수밖에 없다. 왼쪽 벽면엔강석호 「무제2」와 서용선 「희생자들1」, 오른쪽 벽면에는 황재형 「새벽에 홀로 깨어」와 서용선의 「대치」, 그리고 정면에 공성훈의 「돌던지기」와 강석호의 「무제1」, 그 옆으로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홍범 「unexpected1,2,3,4」 연작이 시작되면서 그 연작은 또 다른 전시 공간으로 이어진다.

김선두_반편_옥수수_장지에 먹_97×66cm_2015 서용선_대치 Confrontation_종이에 아크릴채색_63×93cm_2010~2

반복이 만든 새로움, 그것은 충분히 음악이다. 이제 1/3을 관람한 관객은 이 음악을 즐길수 있다. 관람자는 리듬을 탄 기분으로 다시 눈앞에 있는 공성훈의 「나무」(도면⑥)를 바라본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그 쓸쓸함, 앙상한 가지 위새들, 심상치 않은 하늘. 하늘에는 나무를 따라 '빛의 나무'가 번쩍인다, 심지어 그 하늘마저 '바다'같다. 그게 공성훈이 2014년에 「나무」를 그렸을 때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전시의 리듬이 만들어낸 심상일까? ● 강석호 「무제2」(도면⑦)는 담배를 물고 있다. 나란히 걸린 서용선의 「희생자들1」(도면⑧)이 '사이'의 대화를 건낸다. 「무제2」 속의 이 도회인은 '희생자들'의 다른 모습이다, 이 도회인의 의식 무의식엔 분단과 공포가 각인돼 있을 것이다, 이것은 회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라고. 서로 다른 작품이 표면과 내면인 양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황재형 「새벽에 홀로 깨어」(도면⑨)가 이채롭다. 큰 그림 안에 별도로제작해 붙인 작은 액자가 있다. 그 액자 속 여인이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먼저 거꾸로 봐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그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늙은 왕이 왕좌에 앉아 있는, 커다란이 역상(reverse image)의 배경그림은 이 작품에서 무엇을 뜻할까? 왕의 허벅지에 위치한작은 액자 속 여인은, 새벽에 홀로 깨어 방바닥을 붙잡고 애원하는 얼굴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 하늘을 향한 여인의 애원은 실제로 왕의 옷자락에서 맴돌뿐이다. ● 옆의 서용선 「대치」(도면⑩). 관람객은 「새벽에 홀로 깨어」가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이 두 작품 '사이'의 대화에 의존하고 싶다. 『바보전』과 관련해 남북 대치 상황을 생각해보면서, '새벽에 홀로 깨어있는 여인'은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고 묻는다. 그러나 관람객은 추상 수준을 높이기에 벅차다. 불협화음을 느낀다. 긴장감을 품은 불안정한 화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이것은 회화의 현대성, 전시리듬의 현대성을 강화한다. 이 두 작품 사이에, 나아가 다른 작품들과의 사이에서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개별 작품들의 메시지가 서로 만나는 '지점'을 훨씬 상승시킨다. 그 지점에 해당하는 '바보'는 모든 항해자가 방향을 잡기 위해 기준으로 삼는 북극성이 될 수도 있다.

정정엽_마을-감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5 유근택_한강_한지에 수묵채색_104×133cm_2013

이어지는 다음 벽면(도면⑪⑫)은 편안하다. 다시 어울림화음으로 돌아간다. 「돌던지기(소년들)」(도면⑪)는 장쾌한 장면이다. '불꽃놀이'(도면①)의 청소년들보다 훨씬 어리다. 아직 내면이 없는 소년들인 듯, 훼손되지 않은 낙천성이 고전적인 선율 속에서 빛난다. 이 회화의 하부를 절단하면 손색없는 추상화인데, 솜씨 좋은 작가의 터치로 인해 하부의 구상 또한 현대적 감각으로 가득하다. 이것과 나란히 전시된 「무제1」(도면⑫)은 이 「돌던지기(소년들)」 때문에 그(강석호)의 다른 두 작품과 달리 관람객이 내면이 아닌 외면에 충실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다. 60년대 흑백영화에 나올 법한 이 도회인은 사롱 같은 데서 맥주를 마시며 긴장을 풀고 있다. 아니, 아직 그것까지는 알 수 없다. 넥타이 매듭을 잡고 있는 인물의 손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관람객이 그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어쨌든 테이블 위의 옛날 맥주컵과 그 컵에 떨어진 불빛, 그림 우측의 인조식물이 풍속화처럼 정겹다. '돌던지는 소년들'이 이 도회인에게 자신의 어린시절 같기도 할 것 같다. 관람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 낙천성은 '바보들의 일생'에서 파토스를 일으키는 에너지이다. 다음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격심한 또 한번의 불협화음이다. 이미 관람객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감지하고 있었겠지만, 홍범의 「unexpected1,2,3,4」 연작(도면⑬)을 막상 대하는 순간 그 생소함과 이질적 미감 때문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가로로 긴 액자(150×60cm) 네 개의 연속된 나열, 검은 종이에 잉크를 찍어 만든 흰점들로 이루어진 불가사의한 이미지들, 우선 현대적이다. ● 이 작품은 우주의 일이" unexpected" 즉, 예기치 않게 혹은 우연히 벌어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 ; 탄생에서 죽음, 영혼 여행, 또 다른 탄생이라는 영원회귀가 모두 우주적 사건이다 ; 별들뿐 아니라 수많은 생명체들이 예상치 않게 관계를 맺고 있듯이 그 관계망 속에서 정자와 난자도 그렇게(unexpected) 만난다.

홍범_title unexpected 3_검은 종이에 흰 잉크, 미디엄_60×150cm_2008 이동환_인생1_장지에 수간채색_42×30cm_2003

각 화면에는 생명의 잉태를 축복하는 부부가 있고, 관 속에 누워 우주적 사건을 체험하는 망자가 있고, 고요히 우주적 사건을 맞이하는 살아있는 인간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이 우주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문명인이 만든, 빛과 어둠의 이분법적 대비는 우주에서는 진실이 아니다. 흰 점들은 우주 공간에서 진동하는 원자들로 작용한다. 빛은 선악의 주관자가 아니라 이처럼 생명의 에너지원인 게 맞다. '바보'는 바로 여기에, 선악의 저편에, 우주의 수용성에, Clear and distinct가 아닌 unexpected에 존재한다. 이미 관람객은 제3의 공간에 들어와 있다. 뒷 벽(도면⑭)에 걸린 그림을 대하면서 다시 어울림화음에 휩쓸린다. 정정엽 「마을_감」(도면⑭)은 편안하다. 그의 마을 시리즈는 '왕고들빼기'(도면⑤)와 '감' 그리고 '취'(도면⑮)다.'상처속에 우주가 있다'는 말이 있다. 화면의 '감'은 한가운데가 벌레 먹어 썩어있다. 마트에서는 사지 않을, 벌레 먹은 감이 먹음직스럽고 아름답게 보인다. 보라색 배경은 마을 시리즈`에서 공통인데, 아마도 우리 신체의 두정부(백회)에 있는 차크라의 보라색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벌레 먹은 감'으로 표상된 마을은 기계가 아닌, 사람 사는 마을이다. 이 마을을 둘러싼 우주가 보라색으로 표현되어 있어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 실제로 상처 없는 완벽한 마을은 우주와 관계가 없어 불안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회색이 어울릴 것 같다.

황재형, 가출_캔버스에 유채_90.9×65.1cm_1988 정종미_소녀_한지에 염료_65.5×54.5cm_2007

전시가 끝나는 막다른 벽에 「마을_취」와 황재형 「회모」(도면⑯)가 나란히 걸려있다. 전자는 「마을_고들빼기」의 반복이다. 이 반복은 생소한 「회모」와 어울려 미궁 앞에 선 관람객을 불안하지 않게 한다. 그만큼 마을 시리즈는 정신적인 보호 기능을 한다. 「회모」는 미궁이다. 작품은 화면 귀퉁이에 있는 화투짝 비광을 크게 확대한 것이다. 작가는 화투짝의 '우산 쓴 시인 오노노 미치카제'의 자리에 최치원을 모셔놓았다고 말한다. 작가의 설명을 보면, X자의 중앙에 '제가야산독서당'(최치원이 가야산 독서당에서 지은 시)의 싯귀를 써놓고 나비 한 마리가 조용히 내려앉아 있게 해놓았다고 한다. 나비를 그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작품 제작연도인 2014년 이후, 노란 나비의 의미는 무엇일까? 합의된 사회적 비유로 읽으면 알레고리이고, 개인적으로 읽으면 상징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작가는 그분을 통해 최치원의 시처럼 시비로부터 벗어나길 ● 원하는 것일까? 작가는 인간의 존엄을 되찾기 위해 그분을 영접하고 있다. 탈시비와 존엄의 회복 사이에 미궁이 있다. 작가의 설명을 듣지 않은 관람객에게 이 작품은 그 자체로 미궁이다. 화면 좌측 상단의 연속된 XL과 우측 하단의 비광, 화면 대부분을 차지한 거대한 X, 그 한가운데 뜻 모를 한시, 그리고 거기에 내려 앉은 노란 나비. 지금까지 본 전시의 연장선에서, 비와 탐욕과 영혼이 키워드로 읽힌다.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를 듣는다. ● 선율은 무거워졌지만 공포스럽지는 않다. 구원의 소리에 화합하는, 여러 빛깔의 음률과 협화음, 불협화음을 이미 들어서 마음이 밝고 아름다워졌기 때문이다. 픽션으로 조각된 '현실'이 거꾸로 가치 있는 현실로 와 닿은 관람객은 예기치 않게 낙관적인 에너지를 얻는다. 실제의 현실이 가짜라는 인식 속에 사는 것이 그래서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2015.12) ■ 김영종

Vol.20151029l | 바보전(傳)-서양화가 6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