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흘러간다

윤진숙展 / YOONJINSUK / 尹珍淑 / painting   2015_1110 ▶︎ 2015_1121

윤진숙_풀과 바람_한지에 먹, 콩즙, 분채_62×75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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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1114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 일요일_02:00pm~06:00pm

갤러리 자작나무 사간점 GALLERY WHITE BIRCH SAGAN-DONG 서울 종로구 사간동 36번지 Tel. +82.2.733.7944 www.galleryjjnamu.com

풀과 바람, 존재적 사유를 위한 상징 ● 예술은 우리에게 진정한 통일(true unity), 즉 비물질적인 기호의 일치와 전적으로 정신적인 의미의 일치를 가능하게 한다. (중략) 예술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차이,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차이이다. 존재를 구성하게 해주는 것, 존재를 구성하는 것, 우리가 존재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차이이다. (Gilles Deleuze, Richard Howard(trans.), Proust and signs: the complete text,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0, pp. 40-41.)

윤진숙_풀과 바람_한지에 먹, 콩즙_67×143cm_2015
윤진숙_풀과 바람_한지에 먹, 콩즙, 분채_56×107cm_2015
윤진숙_그렇게 흘러간다, 가을_한지에 먹, 콩즙, 분채_63×122cm_2015

윤진숙은 바람에 흔들리는 풀을 그린다. 그림 속 풀들은 바람이 이끄는 대로 유연하게 몸을 움직인다. 너풀거리는 풀들은 때로는 눕기도 하고 꺾이기도 하지만 이내 곧 일어선다. 바람은 풀 사이사이를 지나면서 그것과 하나로 어우러지며 모습을 드러낸다. 넘실거린다. 그리고 흘러간다. 풀과 바람은 존재와 존재가 머무르는 이 세상과 그 속에서의 삶을 사유하고 담아내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기호이다.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미물(微物)인 풀, 눈으로 붙잡을 수 없는 바람은 정신적 기호가 되어 우리를 이끈다. ● 풀이 바람에 어우러져 몸을 눕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또한 바람과 풀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다. 온종일 꼿꼿이 서 있어야 하는 풀은 바람에 의해 잠시 휴식을 취한다. 바람을 동력 삼아 움직이고 모양새를 바꾸기도 한다. 움직일 수 없던 존재인 풀이 바람에 몸을 맡기는 순간 운명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빠르게 불면 차고 매섭지만 천천히 불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바람이다. 그것은 삶과 같다. 그러고 보니 풀의 모습은 사람과 닮아 있다. 바람과 같은 삶은 우리를 눕히기도 하고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누워야 일어날 수 있다는 진실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윤진숙_그렇게 흘러간다, 여름_한지에 먹, 콩즙, 분채_70×37cm_2015

윤진숙은 바람을 삶-시간-의 흐름으로 인식하면서 더욱 의식적으로 바람을 마주하는 풀을 그리게 되었고, 사시사철의 바람을 경험하게 되었다. 겨울에서 시작된 사유는 봄을 맞이하고 여름을 지나 가을을 향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겨울을 기다린다. ● 작가는 스스로 그러할 뿐인 자연에 경외감을 느낀다. 저절로 그러한 자연은 참된 자유의 내재이다. 자연은 특별한 목적이나 의지를 갖지 않는다. 욕망을 따라 행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는 자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하지 않음도 없는 자연,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그 상태는 절대적 균형이다. ● 풀은 인위에 의해 변화되지 않은 순수한 본래의 상태(素)를 함축하고 바람은 흐르고 흘러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자연의 흐름을 은유한다. 자연은 스스로 생기고, 스스로 변화하며, 스스로 발전하고, 스스로 소멸해 간다. 자연은 일정한 정점에 이르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복귀한다. 모든 변화는 본래의 상태-근원-로 되돌아간다. 자연은 인간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왔다. 정점에 도달하면 늘 본래로 돌아가기에 영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원래로 돌아감을 슬퍼하고 두려워한다. 바람에 흔들림을 두려워하며 꺾일까봐 괴로워한다. 꽃이 필 때는 기뻐하고 꽃이 질 때는 슬퍼한다. 열매가 맺힐 때는 환희에 차며 잎이 떨어질 때는 한탄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를 풀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우월감과 소유욕은 불필요한 강(剛)함을 부르고, 자만심은 과시와 과장으로 이어져 자연스러움을 해친다. 집착하면, 종국(終局)에는 잃게 된다.

윤진숙_그렇게 흘러간다, 여름_한지에 먹, 콩즙, 분채_73×56cm_2015

인간만이 귀중한 존재는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아름답다. 잡초의 새싹, 들풀의 꽃봉오리, 찬바람에 누렇게 변한 풀잎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아름답다. 그 소중함을 발견할 수 없음은 본래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본래적인 모습을 지켜내야 한다. 비우면 슬퍼지지 않는다. 비우면 유연해진다. 부드러움은 진실로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생의 기운만이 유연하게 변화하고 흐르기 때문이다. ● 이에 작가는 모든 인위(人爲)를 피하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풀을 본다. 내면을 정화한다. 올바르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살기 위해 자연을 본다. 작가에게 자연은 삶을 아름답게 살아내기 위한 관조(觀照)의 대상이다. 자연을 알아나가는 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삶의 본질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다. 자연과 인간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자연을 읽는 행위는 책을 읽는 행위만큼 중요하다.

윤진숙_풀과 바람_한지에 먹, 콩즙, 분채_65×97cm_2015

윤진숙은 한 단어, 한 단어를 읽듯이 자연을 보고 한 글자, 한 글자 글씨를 쓰듯이 풀들을 그린다. 먹지 위에 화선지를 올리고 꾹꾹 눌러 그리는 방법은 작가가 작업 초기부터 일관되게 고수해온 것이다. 뒤에서부터 스며들어오는 먹의 형상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풀과 같기 때문이다. 근작에서는 여기에 새로운 재료가 사용되고 있는데, 바로 콩즙이다. 작가는 콩을 직접 갈고 걸러내어 아교 물처럼 사용한다. 콩즙은 한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윤기를 내주어 청명한 빛과 따뜻한 기운을 동시에 표현하는 데에 효과적이다. ● 한편 작가는 자연스러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물감이 흘러내리는 현상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평평하고 넓은 붓에 물감을 묻혀 한지에 대고 기다리면 중력의 원리에 의해 물감은 아래를 향한다. 작가는 그 흐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세상을 느낀다. 한지 위에서 일어나는 스며듦과 흘러내림의 오묘한 조화는 봄비가 스며드는 흙, 장맛비에 흠뻑 젖은 풀잎, 겨울비에 살짝 얼은 풀숲을 담아냄으로써 본래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는 자연의 흐름을 보여준다. 봄은 여름에게, 여름은 가을에게, 가을은 겨울에게, 겨울은 다시 봄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준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 그것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다.

윤진숙_그렇게 흘러간다, 겨울_한지에 먹, 콩즙, 분채_27×91cm_2015

궁극적으로 윤진숙의 풀 그림은 우리가 자기 자신-인간-으로부터의 함몰에서 벗어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잊고 있었던 진리를 환기시킨다. ● 진정한 존재의 모습을 지향하고, 스스로 그러한 본래의 모습을 지켜내기 위해 윤진숙이 풀이라는 사유의 상징을 그리기 시작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처음 몇 년 동안은 풀의 주위를 맴돌면서 관찰했다. 도감(圖鑑)을 뒤적이고 식물학 책을 읽으며 지식을 구했다. 드로잉들이 무수히 쌓여갔다. 그러나 이제 작가는 더 이상 분석하지 않는다. 직관(直觀)하기 위해서이다.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진정으로 공감하고 동화할 수 없다. 직관과 통찰로 풀이라는 상징물 안에 존재하는 세계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작가는 스스로 풀이 되어 세상을 바라본다. 바람의 기운과 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다. 그렇게 흘러간다. ■ 이문정

Vol.20151109b | 윤진숙展 / YOONJINSUK / 尹珍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