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totype-2015

김성진展 / KIMSUNGJIN / 金成珍 / sculpture   2015_1128 ▶︎ 2015_1214 / 월요일 휴관

김성진_Prototype-111_스틸_40×30×35cm_201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830h | 김성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5_1128_토요일_07:00pm

후원 / 부산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월요일 휴관

유진화랑 YOOJIN GALLERY 부산시 해운대구 해운대해변로298번길 24 (중동 1124-2번지) 팔레드시즈 2층 Tel. +82.51.731.1744 www.yoojingallery.com

현재라는 공간으로 엮어 낸 미래의 시간 새로운 조형언어로써 프로토타입 ● 1996년 상영된, 도시의 상공을 직경 550km의 거대한 외계전함이 뒤엎음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되는 인디펜던스데이(Independence day), 그 영상은 내게 기묘한 이질감을 주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받았던 이질감에 대한 원인은 비교적 최근에 해명되었는데, 그것은 동일한 공간과 시간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한데 있음으로부터 오는 이질감이었다. 김성진의 작업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작업 앞에 선 나는 그때와 같은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한데 있음으로부터 오는, 더 정확히는 그의 작업이 놓여있는 곳을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의 퍼즐이 어긋나 있는 듯한, 바로 그러한 이질감이었다. 그는 현재라 이름 붙은 공간에 미래의 시간을 엮어 놓는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글의 마지막을 읽기도 전에 포기해버릴 감상자 혹은 독자들을 위한 작은 배려로 궁금해 하는 것들을 결론으로부터 먼저 끌어들여 이야기 하자면, 김성진의 작업들은 매체적인 측면에 있어서 철, 방법론적인 측면에 있어서 조형의 단위와 단위를 결합시키는 건축적인 질서를 그리고 그것들을 전체적인 전시로 드러냄에 있어서 조형언어로써 추상을 사용하고 있다.

김성진_Prototype-102_스틸_30×10×10cm_2015
김성진_Prototype-103_스틸_20×25×25cm_2015

1. 건축적 질서: "구조를 보라" ● 조각은 건축으로부터 출발했고 건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조각이 건축의 한 부분으로써 그에 종속되어 건물의 기둥을 장식하던 예전과 다르게 오늘날은 그 연결이 느슨해지기는 했지만, 또한 지나온 역사 가운데 '순수'라는 이름으로 분리를 시도했고 따라서 장르의 구분이 명확해지기도 했지만, 현대에 와서도 그 관계는 여전히 유효하며 유의미하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잠시 언급하자면, 이 지면을 빌려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조각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내가 조각의 출발점이 건축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조각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원론적인 답변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성진의 조각이, 그의 작품의 방법론이 전통적인 조각 일반의 방법론, 즉 덩어리에서 깎아 내거나 덧붙이는 것이 아닌 조형의 단위와 단위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건축의 구조물과 같은 것에 있음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다. ● "구조를 보라", 작업의도와 작품의 해석방향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 작업을 마주할 때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대한 김성진의 답이다. 구조(structure)의 어원이 '쌓다', '축조하다'라는 Sustema에 있다고 할 때, "구조를 보라"라는 말은 그의 작업을 봄, 그리고 읽어냄에 있어서 건축적 요소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김성진의 드로잉 혹은 에스키스(esquisse)들은 건축의 설계도면과 유사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조형의 단위들을 결합시키는 '구축'이라는 건축적인 질서가 김성진의 작업에서 중요한 방법론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건축이라는 광의의 개념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조각의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각이라는 범주 가운데 건축적 질서를 포함하여 새로운 작업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김성진_Prototype-105_스틸_40×25×25cm_2015
김성진_Prototype-109_스틸_36×35×45cm_2015

2. 짜깁기된 퍼즐: 현재의 공간과 미래의 시간 ● 조형에 있어서 구축이라는 건축적인 방법론을 가져 온다고 말했을 때 당장 제기 될 수 있는 물음은 그 단위와 단위의 결합으로 나타난 작업들이 즉, 작가가 이야기 하고 있는 '구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물음에 대한 가장 손쉬운 이해는 인위적이긴 하지만 김성진의 작업을 잠시나마 영화의 범주에 놓고 보는 것인데, 그렇다면 SF(science fiction)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 김성진의 작업들은 흔히 SF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미래에 있음직한' 혹은 '미래로부터 왔을 것만 같은' 것들이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미래의 것이라는 이미지로 알고 있는 로봇이라든가 비행물체라든가로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와 같다", "~처럼 보인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 그것들을 "~이다"라고 명확하게 지칭할 수 없다. 그의 작업이 우리 외부의 어떤 것을 재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동시에 지금 여기의 것으로부터 '거리두기'의 작용으로 나타내진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세계 혹은 자연의 재현이기보다 그것에 대한 거리를 두고자 하는 욕망과 사고의 작용으로부터 나온 그의 작업은 추상적이다. 이러한 추상은 사회 이데올로기적인 분쟁으로 물들어 있는 이념들로부터 예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으로써 그린버그(Clement Greenburg)가 그토록 찬양해 마지않았던 것이기도 하다. ● 외부의 재현이 아니기에 그 작업들은 지금의 것이 아니다. 앞으로 올, 미래에 대한 것이 주가 된다는 점에 있어서 그의 작업은 SF영화와 유사한 지점을 점유한다. 그러나 SF영화가 주로 현재의 것이 미래의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현재→미래, 김성진의 작업들은 미래의 것을 끌어들여 현재를 이야기 한다 현재←미래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앞서 나는 김성진의 작업을 "현재라는 시간에 엮어낸 미래의 시간"이라 명명했다. 여기서 나는 분명하게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키고 있는데, 그의 작업은 '과거-현재-미래'라 구분되는 물리학적인 시간 위에서 미래에 올 것이 '여기'라는 우리가 발로 딛고 서 있는 '내-몸이 속한 구체적 공간 위'에 놓여 있다. 그는 바로 여기에 응축시킨 미래의 시간을 짜 넣어 놓은 것이다.

김성진_Prototype-110_스틸_30×35×35cm_2015
김성진_Prototype-112_스틸_20×60×60cm_2015

3. 새로이 제시된 표본: 구축된 프로토타입 ● 구축이라는 건축의 방법을 통해 물리적 시간의 미래에 있는 것을, 여기라는 현재의 공간에 짜 넣은 것, 이것이 바로 김성진의 개별적 작업들이다. 그렇다면 다시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한다. 개별 작업의 군집화로 드러내는 전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우리는 김성진의 작업들이 모두 프로토타입(Prototype)이라는 범주 안에 놓여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작품의 표제는 [ Prototype + □ ]로 표기되며, 개별 작업들은 프로토타입이라는 동일명을 갖는다. 프로토타입은 하나의 범주에서 회상의 형태를 대변한다. 어떤 범주에서 가장 훌륭한 표본이 프로토타입인 것이다. 김성진이 가장 훌륭한 혹은 가장 좋은 표본이라는 이름으로 작업들을 내어 놓았을 때, 그가 겨냥하고 있는 범주가 무엇인가가 다시 중요해지는데, 역시나 그것은 미술현장, 조금 더 명확하게-여전히 미술 가운데 장르를 구분할 수 있다면-는 조각이라는 범주이다. 김성진은 새로운 조형언어로써 조각에 대한 프로토타입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써의 조각을. ● 전시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작품이지만 우리는 그 너머의 것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다. 특히 사회와 연관하여 사회의 문제들을 드러내는 예술들, 물론 그러한 작업들의 넘쳐나는 매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작업, 작품, 해석의 경향들 속에서 김성진은 자신의 작업이 시각적으로, 조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따라서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 추상을 통해 작업들을 구축하며, 작업들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써 놓는다. ● 조각에 있어서 '표본(Prototype)을 제시하는 김성진의 작업들을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산업혁명이후 개발된 단단하고 탄성이 강화된 철은 현대의 상징물이자 새로운 소재로써 조각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이 러시아의 구축주의나 안토니 카로(Anthony Caro)의 작업들에서 건축적인 방법론은 이미 시도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새로운 조형언어"의 제시라고 이야기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우선 아서 단토(Arthur Danto)적 의미에서 지금 우리 시대의 예술은 이전에 나와 있는 것들을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언급'하는 가에 따라 새로운 의미 혹은 새로운 시도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린버그가 예술이 예술 밖의 정치나 사회에 의해 물들지 않고, 예술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추상을 옹호 한 것과 같이,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 가운데, 작업의 시각적 이미지보다도 담고 있는 내용에 중점을 두는 작업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조각의 시각적 부분에 더 무게를 두고자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조각의 조형적인 미를 드러내는데 강조를 두게 되며 '구축'이라는 건축적 질서가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를 재현하지 않기 위해, 미래의 시간을 떼어내 지금에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박은지

Vol.20151128a | 김성진展 / KIMSUNGJIN / 金成珍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