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 Suddenly one day

김수진展 / KIMSUJIN / 金守眞 / painting   2015_1201 ▶ 2015_1208

김수진_걸어간다._장지에 먹_150×40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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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5:30pm

갤러리 한옥 GALLERY HANOK 서울 종로구 북촌로11길 4(가회동 30-10번지) Tel. +82.2.3673.3426 galleryhanok.blog.me www.facebook.com/galleryHANOK

붓 끝에 생동하는 존재의 변주 ● '예술'에도 국적이 있는 것일까? 이는 '신(神)들에게도 국적이 있을까'하는 의문과 어쩌면 닮은꼴의 우문(愚問)이리라. 그러면서도 이에 대한 현답(賢答)을 누군가에게 몹시 듣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전지구적 차원에서 '국가' 개념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이를 중심으로 근대 국민-국가사회가 출현한 이래, 일부 예술시장에서는 예술에도 국적을 입히고 거기다 가치를 부여하여 가격과 순위를 매기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보니, 사실 위와 같은 우문(愚問)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다.

김수진_사람이 나무를 가꾼다. 나무가 사람을 키운다._장지에 혼합재료_192×388cm_2015

한편, 유한한 것에서 무한성을,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성을, 우연적인 것에서 법칙성을, 하찮은 것에서 위대함을 보고자 했던 서양고전예술의 미학적 범신론 경지라든가, 조선후기 말년 추사(秋史)가 불계공졸(不計工拙,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음), 대교약졸(大巧若拙, 크게 솜씨가 좋은 것은 마치 서툰 것처럼 보임), 허화(虛和, 글씨에 자연스러움이 배어나와 일점의 속된 기운이나 기교가 없음) 등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선비의 지고한 예술정신, 이러한 정신들이 진정 낯설 정도로, 우리시대는 탈·이념, 탈·가치, 탈·중심, 탈·장르를 지향하는 추세가 지배적이다. 그러면서도 일부 화론(畵論)이나 예술교육정책에서는 이를테면 '한국화', '일본화', '중국화'와 같은 표현처럼 국적과 함께 저마다 각국 현대예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기류를 탄 미적체험은 창작(작가정신, 재료)면에서나 감상(미적경험, 취향)면에서 편협한 국가주의 내지 어설픈 예술적 역설 정도로 귀결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화가'라는 직함을 걸고 작품 활동을 하는 젊은 작가들 사이의 고민이 더욱 깊어지는 듯하다.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화'의 맥을 찾는 동시에 그것의 현대적 변용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재료혁명, 구도혁명, 소재혁명을 주도하며 부지불식간에 '한국화'란 틀을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수진_□에 있는 나무2_장지에 혼합재료_36×23cm_2015
김수진_□에 있는 나무3_장지에 혼합재료_32.5×24cm_2015

이번 김수진 작가의 작품과 화력(畵歷)을 접하면서 다시금 가다듬게 되는 생각들이다. 작가는 우리나라 전통한지의 한 종류인 장지(壯紙) 위에 먹과 분채로 늘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닮고 자신을 지켜주는 자연을 담담하게 초대해 왔다. 그 자연은 가령 조선시대 문인화, 사군자 등에서 등장하는 이념화되고 양식화된 자연과는 거리가 멀다. 과거 선비들은 덕(德)과 학식을 갖춘 사람의 인품을 매(梅)·난(蘭)·국(菊)·죽(竹)에 비유했었다. 조선사회에서 식물세계의 이념적 서열은 이렇게 하며 탄생했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이런 맥락에서 김수진 작가의 화폭 속 자연엔 식물들의 이름도 없고, 이들 사이엔 이념적 서열도 없고, 덕(德)과 학식으로 무장되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선비의 높은 기상도 없다. 도리어 이에 반발하듯, 그의 화폭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유명한 시구(詩句)가 떠오를 정도로 고뇌하고, 방황하고, 스스로 치유하고, 끊임없이 모색하는 무수한 '자아'가 '자연=나무'와 어우러져 등장하고 있다.

김수진_□에 있는 나무4_장지에 혼합재료_40×23.5cm_2015
김수진_□에 있는 나무5_장지에 혼합재료_29×16.5cm_2015

어찌 보면 이들 '자아=자연=나무'는 파울 클레(Paul Klee)의 작품 '고속도로와 샛길들(Highway and Byways)'(1929년)에서 기하학적으로 배열된 무수한 '샛길' 풍경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잘 정비된 고속도로가 화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반해, 그 주변으론 제각각 크기의 삐뚤삐뚤한 샛길들이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함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이들 우수(憂愁)어린 샛길들은 도시의 후미진 골목의 이름은 없되 꿋꿋하게 늘 그 자리를 지켜온 김수진 작가의 자연=나무들과 닮았다. 하지만 큰 문명이란 기둥에 매달려 미미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잔가지 무성한 나무들=샛길들이 언제까지나 나만의 아늑하고 익숙한 귀가길이 될지는 미지수다. 그런 작가의 내면을 장지(壯紙)위에 여러 색으로 열 겹이고 스무 겹이고 담으려 했음일까, 작가의 이러한 추상화 공정은 매우 진솔하면서도 소중하다 할 수 있겠다.

김수진_ 윤회_장지에 먹, 수간채_150×40cm_2015

그 어떤 화력(畵歷)을 밟았건, 그리고 그가 한국인이건 서양인이건, 화가는 대상세계에 대한 자신의 감성적 인식을 화폭에 재현(representation)하기 위해, 색채와 필선, 점, 면이라는 조형언어를 끊임없이 연마하고 이들을 서로 구성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한편,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재료를 끊임없이 발굴하고, 이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전문인이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유파(流派)가 형성되고, 이념과 재료의 성질에 따라 '한국화가' 또는 '일본화가'와 같은 호칭이 붙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어디까지나 편의상 일반인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정작 화가들 자신은 이러한 틀에 자신을 가두기보다 그 틀을 넘나들며 자신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조형세계를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다고 본다. 김수진 작가 또한 이 흐름에 일찍이 뛰어든 젊은 작가라 할 수 있겠다. '틀'을 만들고 깨 가는 반복 속에서 우리시대 회화적 형상화의 진정한 가치와 희열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작가로 더욱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 고영자

Vol.20151204c | 김수진展 / KIMSUJIN / 金守眞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