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바라보다

백지혜展 / BAEKJEEHYE / 白智惠 / painting   2015_1209 ▶ 2015_1216

백지혜_손 안에 머무르다_비단에 채색_56.5×45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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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혜 홈페이지_www.baekjeehye.com 백지혜 블로그_blog.naver.com/silvine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5:30pm / 12월9일_11:00am~07:00pm

갤러리 한옥 GALLERY HANOK 서울 종로구 북촌로11길 4(가회동 30-10번지) Tel. +82.2.3673.3426 galleryhanok.blog.me www.facebook.com/galleryHANOK

현실만큼이나 상상이 필요한 재현 ● 전통 가옥 구조가 남아있는 공간에서 열리는 백지혜 전은 마치 그러한 공간에서 나고 자랐을법한 아이와 소녀들이 등장 한다.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가 그 중성적인 배경과 대조되는 형태로 작품의 존재감을 두드러지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 달리, 일상, 또는 얼마 전까지 일상이 영위되었던 공간 속 그림은 원래 있던 붙박이 가구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작가는 그림에 여백을 충분히 주어서 마치 그림의 공간이 현실의 공간과 이어지는 것 같은 환영을 제공한다. 그래서 아이는 실제와 환영이 복합된 공간에서 나오고, 그 공간에 머물고, 다시 그 공간을 통하여 저편으로 사라질 듯하다. 백지혜의 그림에는 환경과의 단절이 아닌 연결, 더 나아가 주어진 환경과의 완전한 동화가 있다. 관객에게 요구하는 바도 교감이다. 이제 전통, 자연, 순수 등은 발굴과 조명의 대상이지 자명하게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들을 애써 발굴하고 조명해도 별로 표도 안날 정도로 자극적인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현재, 그것을 자신의 미션으로 삼고 작업하는 작가들이 있다. 그 중 한명인 백지혜는 자연 그자체인 아이가 자연과 교감하는 모습을 섬세하게 재현한다. ● 자연과 교감하는 아이는 아마도 자신의 모습이 투사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 모델을 가지는 타자이면서도 동일자이고, 지금 지각되는 것이면서도 과거의 기억이다. 아이가 자연인 것과 달리, 자연스러운 그림은 단순한 자연의 결과가 아니라 철저한 기법 연마의 결과이다. 1975년생인 작가는 2002년 첫 개인전 이후, 동양화과를 나오고도 채색화와 재료기법을 더 연구하기 위해 진채를 또 전공하고, 초상화 모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문화재보존연구소에서 조선시대 중기 초상화를 모사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이 후 전통 초상화 기법을 살려 인물화와 화조화 작업을 병행했다. 작가도 그림을 그렸겠지만, 그림도 작가를 그렸을 것 같은 긴 배움의 시간이 있다.

백지혜_스쳐가는 여름_비단에 채색_108×84cm_2015

비단 위에 그려진 은은한 채색은 그들의 오동통하고 투명한 피부를 그대로 살려낸다. 빈 배경을 포함하여, 더불어 등장하는 자연도 따스하고 부드럽다. 햇볕이 잘 드는 마당, 미풍, 신록...심지어 작품 「첫 눈」(2015)에 나타나 있듯, 눈발이 흩날릴 때조차도 그림은 화사함과 온기를 잃지 않는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들이 곱다. 그것은 반투명한 얇은 비단 뒤에서 발색하고 앞에서 세밀하게 그린 기법과 무관하지 않다. 종이나 캔버스 천처럼 표면 위에서만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수놓듯이 표면과 이면이 연동되는 작업이다. 자연스러운 발색이란 2차원적 표면을 뛰어넘는 또 다른 차원을 주요한 변수로 포함시킨 결과가 아닐까. 비단에 천연 재료의 물감으로 채색하는 방식은 색의 깊이를 잘 드러낸다. 색감을 제대로 발현하기 위해 인물보다 먼저 그린 것은 꽃이었다. 전통 화조화로 마당과 동네 어귀의 꽃들을 그린 그림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 '우리 주변의 꽃으로 한국의 색을 알리자'는 기획으로 「꽃이 핀다」는 제목의 베스트셀러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7년 '손에 담긴 이야기' 전을 계기로 다시 인물화로 돌아왔다. 꽃만으로는 작가가 어릴 때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충분히 만들 수 없어서였다. 백지혜에게 인물화는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는 장르였고, 여성인 자신과 친숙한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이다.

백지혜_思春期_비단에 채색_70×54cm_2015

물론 아이들은 2002년 첫 개인전부터 등장하는 소재였지만, 최근의 작품은 작가 자신의 기억을 소환하는데 방점이 찍혀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두 여자아이들이고, 점차 나이대도 높아져 궁극적으로는 중년인 자신을 포함하여 여성의 생애주기를 모두 포함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현대의 작품이 괴로운 실존적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지나치게 어두운 면이 있듯이, 백지혜의 작품도 지나치게 밝은 면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 아니어도 어두운 그림은 많이 그려진다고 말하며, 그림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우리가 꽃이나 아이들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이유를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만약에 세계를 정/반/합의 관계로 본다면 백지혜의 작품은 정(正)에 해당된다. 백지혜의 지향이 담긴 작품들은 사실이면서 당위이다. 현실이면서 허구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작가의 경력에서 찾아진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자신의 주변을 그려왔지만, 동시에 전통에 대한 학습과정에서 초상화 모사를 해왔다. ●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옛 그림을 모사하고 때로는 훼손된 문화재를 복구하는 작업은 그림에서 그림, 기법에서 기법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모델에서 모델로 전사되는 시뮬라크르는 현실에 우선권을 주는 재현의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기법은 그대로 전수되기도 하지만 당면한 현실에 의해 변형되기도 한다. 그것은 변형을 위한 변형이 아니라, 현실과 근접하려는 예술의 욕망이 낳은 변형이다. 현실과 현실의 재현은 다른 차원이며 재현은 시대의 관습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이 관습이고 역사인 한 바뀔 수 있다. 백지혜의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곱디고운 모래 같은 느낌이 거칠고 선정적이며 단절적으로 다가오는 현대의 이미지들 사이에서 신기해 보이는 이유다. 백지혜의 그림은 빛바랜 옛 사진첩에서 꺼낸 이미지 같으면서도, 지금 여기에서 숨 쉬는 생생한 색을 입고 현전하는 엇갈린 시공간 감각이 있다. 그것은 현재이면서도 기억이다. 작가는 지금도 끝없이 사라지고 있는 기억을 그린다. 사라지는 현재를 기록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달리, 기억하고 싶은 현실은 생생해야 한다.

백지혜_쉬어가다_비단에 채색_80.5×125cm_2015

물론 백지혜 역시 현대를 살아가는 작가이기에 사진이나 컴퓨터 같은 매체적 경험을 반영한다. 현실을 재현하는 대표적인 매체가 된 사진조차 대상을 제대로 재현하고 작가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장치들의 동원과 작가의 선택을 기다린다. 사실에 충실한다 해도 그것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인 것이다. 재현은 상상을 요구한다. 그리고 상상은 현실화될 것을 요구한다. 백지혜는 자연과 일상과 예술을 한데 모은다. 그것도 매우 담담하고 은은한 방식으로. 그러나 백지혜의 작품에서 허구와 상상의 몫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허구와 상상의 측면은, 그녀의 그림이 지금은 희귀해진 전통기법에 의해 그려졌다든가 작품 속 인물이 너무 밝고 긍정적이라든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위아래로, 또는 좌우로 여유 있는 공간의 처리방식에서 찾아진다. 그림은 오랫동안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주체 앞에 마주 선 거울은 투명하지 않다. 그것은 조각난 신체를 가상으로 봉합하는 장치이다. 봉합부분이 터지면 분열이 야기된다. 그것을 다시 온전히 봉합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섬세한 장치가 요구된다.

백지혜_첫눈_비단에 채색_93.5×75.5cm_2015

백지혜의 경우에는 화면 밖에 또 다른 거울을 설정한다.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 거울로서의 회화는 바깥에 있는 또 하나의 거울에 의해서만 자신의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재현에 필요한 것은 현실만큼이나 상상인 것이다. 현실과 상상은 서로를 요구한다. 백지혜의 작품에서 여백은 아이와 여학생의 상상이 글로 씌여져야 할, 또는 관객이 써 넣어야할 빈 서판처럼 다가온다. 작가가 인물화를 통해 담고자 했던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남아있다. 백지혜에게 그림이라는 거울은 현실적인 만큼이나 상상적이다. 거울은 총체적인 모습이 아닌, 불완전하게 잘려진 단편을 반영할 뿐인 상상적인 장치다.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움직임은 불가피하게 재현의 경계를 맞딱뜨리게 한다. 우리의 옛 그림이 존재하는 방식은 근대에 성립된 분과로서의 예술과는 차이가 있었다. 미술작품이 보여지는 대상으로 한정된 것은 서구에 있어서도 짧은 전통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오늘날 지속적으로 도전받고 있는 관습이다. 일상으로부터 영감 받은 작품들은 일상에서도 소통되어야 한다. 그것은 출판이나 방송 등 미술제도 바깥으로의 확장성을 가지는 백지혜의 방향성과 닿아있다. ■ 이선영

Vol.20151212d | 백지혜展 / BAEKJEEHYE / 白智惠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