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옥연 회고전

권옥연展 / KWONOKYON / 權玉淵 / painting   2015_1211 ▶ 2016_0124

권옥연_기도_캔버스에 유채_118×84.5cm_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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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1211_금요일_05:00pm

후원 / (재)가나문화재단

관람료 / 대인_3,000원 / 소인_2,000원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GANA ART 서울 종로구 평창 30길 28 가나아트센터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상상력의 연금술사, 권옥연의 미술세계1. 상상력의 연금술사 차분한 청회색의 풍부한 질감과 신비한 형태들. 권옥연의 회화하면 금새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그의 그림은 인간의 의식 저 아래서 피어 오르는 꿈의 세계 같기도 하고, 애타게 염원하는 그리움의 풍경 같기도 하다. 사물의 낮고 미세한 흔들림과 그로 인해 번져가는 몽환적 상상이 펼쳐지는 세계이다. 그래서 권옥연의 격조 높은 회화는 인간의 감정 가장 근원적인 부분에 와 닿는다. ● 권옥연의 독특한 회화세계는 화단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1950년대부터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진행하는 '오늘의 작가'로 선정되어 기념 회고전을 열 때까지 끊임없이 변주되며 이어졌다. ● 그는 집안사람이던 조각가 권진규(權鎭圭, 1922-1973)의 작품처럼, 혹은 소박하고 경건한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의 회화처럼 그 만의 독특한 체취를 담은 시정(Poésie) 넘치는 미술을 세상에 남기길 원했다. 1923년 태어나 2011년 여든아홉의 생을 살았던 권옥연은, '옷을 입지 않은 자'라는 자신의 호 '무의자(無衣子)' 에 걸맞게 명성보다는 예술에 헌신하여 자신의 소망을 이루어냈다. ● 그러나 권옥연의 미술세계는 그의 독자적인 회화세계나 한국 화단에서의 분명한 존재감에 비해서 다소 소원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권옥연이 미술세계를 주제로 삼은 학술 논문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작가론이라고 해도 1972년 평론가 오광수와 1976년 유준상이 쓴 글을 포함하여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전시 기획을 맡았던 큐레이터 최은주가 권옥연의 작품세계를 분석한 것이 눈에 띌 정도이다. ●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권옥연의 다소 고립된 위치는 그가 일제강점기 마지막 일본 유학파 세대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김환기(金煥基, 1913-1974), 유영국(柳永國, 1916-2002)과 같은 선배 미술가들의 현대 미술운동인 '신사실파'나 '모던아트'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고, 김창열(金昌烈, 1929), 박서보(朴栖甫, 1931)와 같은 전후 현대미술가 세대와 동행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중간 세대로서의 권옥연의 위치는, 그가 현대적 조형의식을 가졌지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꾸준히 참가하고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사교적 성격이 짙은 경복고등학교 출신 미술가 모임 '이구회(二九會)' 이외에 별다른 동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고립은 거꾸로 보자면 권옥연의 회화가 특정한 집단 미술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인 행로를 밟아 가며 쌓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 권옥연 미술이 한국 화단에서 이례적이라고 할 때, 그 독자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20세기 한국 현대미술가들의 화업을 살펴보건대, 그리움과 관능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환상에 그만큼 충실하게 몰입했던 화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푸른색을 기조로 한 무채색의 화면은 대단히 세련되고 격조가 있어 그 자체의 회화성도 풍부하지만, 무엇보다 관람자들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켜 아득한 추억으로 이끌어가는 마술적 힘이 있다. 권옥연의 회화는 선과 형태나 색채로 '구성'되었다기 보다는, 인간의 의식이 흐르는 몽상의 '과정'과 원초적 무의식의 세계를 시각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의 신화학자 뒤랑(Gilbert Durand, 1921-2012)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권옥연 회화는 제욱시스의 '재현 (representation)'의 거울이나 피그말리온의 '표현(expression)'의 거울이 아닌 '나르키소스의 거울', 즉 상상력의 거울을 사용하여 세계를 비춰보고 있었던 것이다. 풍부한 암시와 비유, 비약과 생략이 살아 숨쉬며 끊임없이 몽상을 유발하는 의식의 상상계. 그래서 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 "상상력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탈근대적 사유를 빌려서 바라본 권옥연의 미술 세계는 예외적으로 추상성이라는 모더니즘 미학이나 한국적 정체성이라는 익숙한 동서문화 융합론의 범주를 벗어나 탈 근대적 영역을 향하고 있었다.

권옥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40×162cm_연도미상

권옥연의 몽환적 상상의 세계는 1950년대 화업의 초기부터 2011년 영면하기까지 끊임없이 변주되었다. 화면 가득한 슬프고 여린 감성은 사실 권옥연이 커다란 체구의 북방 출신 미술가라는 사실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함경남도 함흥 남문리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권옥연의 원래 꿈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로, 애초 음악가를 꿈꾸었던 권옥연이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서울 제2고등보통학교(1938년부터는 경복중고등학교) 시절 미술교사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 1897-1945) 선생의 이끌림이 컸다. 이대원(李大源, 1921-2005), 장욱진(張旭鎭, 1917-1990)과 같은 선배 화가들에게서도 공통으로 나오는 진술이지만, 사토 선생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로서 화가를 꿈꾸는 많은 조선의 학생들에게 야수주의와 입체주의를 가르치며 그들의 꿈을 이끌어주었다. 근대기 화단에서 권옥연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남겨진 이 시대의 작품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일제 강점기 유행했던 향토주의를 바탕으로 유럽의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사조에 영향을 받았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그가 「꽃」으로 입선하였던 194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부 상을 받은 그림은 근대기 대표적인 향토색 작가 김종현(金重鉉, 1901-1951)의 「무녀도」였다. ●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권옥연은 1942년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의 암울한 분위기에서 그의 학업은 1943년으로 끝나고 말았다. 조각가 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 1883-1964)의 화숙에서 잠시 배웠다는 회고 이외에 권옥연의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의 활동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권옥연의 초기 작품으로는 풍경화 「고향」과 부인을 모델로 그린 「여인」이 대표적이다. 1948년 작품으로 알려진 「고향」은 사실 1954년 3회 국전에 출품된 작품으로,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색채가 확연한 작품이다. 검은 피부와 긴 목의 이국적인 여인들이 해안가 숲에 무리 지어 있는 풍경화로, 아득히 멀어지는 짙푸른 수평선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근대기 대표적인 향토색 화가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의 「가을의 어느 날」에 기원을 두고 있는 이러한 이상 풍경화는 특히 6.25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박항섭(朴恒燮, 1923-1979), 박창돈(朴昌敦, 1928- )과 같은 월남 미술가들이 특히 잘 그리던 목가적 풍경화이다. 가난하고 황량했던 시절, 역설적이게도 나른하고 풍족한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미술가들이 저 나름의 스타일로 그려보았던 이상향이었다. 고갱의 영향은 초기의 여인상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이 시기 여성 인물화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무대미술가로서 독보적인 자기 예술세계를 구축한 부인 이병복(李秉福, 1927- )을 모델로 한 초상화였다.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의 도도한 자태는 암울한 폐허를 밝히는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해있다. 권옥연의 미술이 시대에 따라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하고, 풍경화와 인물화, 정물화를 가리지 않고 그렸지만 초기 회화에 나타나는 염원하는 듯한 특유의 푸른 색조와 암시적인 사물의 묘사는 평생 일관되었다.

권옥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98×162.6cm_연도미상

2. 목정(木精), 흙과 불의 시대 ● 본격적인 권옥연의 화업은 크게 프랑스 체류기와 1960년대의 마티에르가 풍부했던 토속적 추상화 시기와 1970년대 이후 초현실적 경향의 구상화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56년 서울 동화화랑에서 도불전람회를 치르고 파리에 막 도착했을 때 권옥연의 화풍은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나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를 연상시키는 장식적인 후기 인상파 양식이었다. 실내 정경이 경쾌하게 그려진 1957년 「몽파르나스의 내 화실」은 푸른 바닥에 잔잔한 꽃무늬의 벽지, 율동적인 난간과 노란 의자의 구성이 인상적인 소품이다. 부드러운 크림색 분위기에서는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의 성공한 일본인 화가 후지타 쓰구지(藤田嗣治, 1886-1968)의 느낌도 묻어난다. 몽파르나스 골목이 내려다 보이는 창문 옆 벽에 걸린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풍의 누드는 권옥연 만의 체취가 가득한 여인상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만 같다. 작지만 프랑스로 건너갈 당시 권옥연이 품었던 회화적 지향점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에콜 드 파리의 정서는 같은 해 제작된 「절규」나 1958년 작품 「우화」에서 단절에 가까운 급격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 1958년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와 레알리테 누벨전(Salon des réalités nouvelles)에 출품되었던 작품 「절규」 (Le Hurlement)는 이후 권옥연 회화세계의 근간이 되는 결정적인 작품이었다. 야생의 동물과 거칠고 마른 나뭇가지와 같은 형상들이 두텁게 발린 무채색의 유화 얼룩들 사이에서 흐릿하게 떠오르는 이 추상 풍경화는, 제목이 암시하듯 절규하고 울부짖는 생명체를 의도한 작품이었다. 권옥연 회화의 이 같은 변화는 분명히 195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접한 전후 앵포르멜(Informel) 미술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세계 2차대전 이후의 반(反)문명 정서를 반영하였던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 1898-1964)의 「인질」과 같은 거칠고 잔혹한 느낌과는 달리 권옥연의 회화는 오래된 퇴적물의 흔적처럼 풍부하고 운치가 있다. 권옥연의 관심은 단말마의 고통이 아니라 오래된 것들이 불러 일으키는 정서적 뉘앙스였던 것이다. 그는 1982년 미술잡지 『화랑』 지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 그때 파리 화단은 1954-55년부터 액션 페인팅이 시작되어 전후의 제일 큰 변동기를 겪고 있었다. 고갱 같은 그림을 그렸는데 가자마자 그런 것에 부닥치니까, 나는 나대로 도서관에 가서 갑골문 등을 뒤적이면서 그 사람들과는 다른 일을 하고자 했다. ● 동물의 뼈나 껍질에 금을 긋고 홈을 내어 만든 갑골문은 그 자체로 형상이자 기호이다. 재현에서 비재현으로 넘어가는 인류사적 기원을 지닌 유물로, 사실 갑골문에서 유래한 한자는 '의미 (meaning)'와 '조형(form)'이라는 기호의 두 가지 상대적인 범주를 애초부터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문자였다. 1950년대 국제미술계로 진출하려는 의욕이 컸던 권옥연이 새삼 자신의 동양적인 정체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려서 조부에게 필묵으로 한자를 배웠던 권옥연에게 서예는 몸에 각인된 익숙한 표현 방법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대 화단을 둘러보면 한자를 차용하여 미술의 현대화를 모색했던 미술가가 비단 권옥연 만이 아니었다. 1950년대 파리에는 일군의 한국 미술가 그룹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전쟁 중에 건너간 이성자(李聖子, 1918-2009)를 비롯하여 남관(南寬, 1911-1990), 김흥수(金興洙, 1919-2012), 이응노(李應魯, 1904-1989)가 차례로 도불전을 치르고 파리로 건너왔다. 1955년 파리에 도착한 남관은 한자의 상형성을 유화에 도입하기 시작했고, 1960년에 조금 늦게 온 이응노 역시 전통화가로서의 배경을 살려 문자 콜라주 추상을 시도하였다. ● 그러나 남관이나 이응노의 시도와는 달리 권옥연은 문자의 형태를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컴포지션보다는 예기치 않은 형태의 변형과 풍부한 질감에 이끌렸다. 그는 무기물이 생명체로 변화하고 이미지가 기호로 변모하는 유장한 신화적 시간의 흔적을 화면에 포착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권옥연이 그려낸 이 시기 환상적 추상 풍경화는 다분히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적인 요소가 강했다. 실제로 권옥연이 파리에서 초현주의 미술운동의 지도자였던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을 만나 그로부터 동양적 초현실주의라 평가 받았다는 일화는 화가 김병기(金秉騏, 1916- )와 같은 당대 지인들의 회고담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권옥연_환상적인 입상_캔버스에 유채_192.3×164.5cm_1970

파리에서 달라진 권옥연의 회화는 1960년 서울, 국립도서관에서 열린 귀국전시회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의 회화는 당시 기성의 모든 가치를 거부하고 거세게 일어났던 국내 한국 전후 세대 미술가들의 거칠고 추한 앵포르멜 미술과 전혀 다른, 격조 있고 절제된 앵포르멜이었다. 권옥연이 파리에서 그려 온 풍부한 뉘앙스의 추상화가 당시 서울의 젊은 미술가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실제로 1960년대 들어서 앵포르멜 미술운동은 한풀 꺾이고 캔버스 자체의 질감과 동양적 분위기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반대로 권옥연 역시 국내 전위 미술운동의 영향을 흡수하며 발전하였는데, 1962년 국전에 출품한 「우화」는 화가의 파리 시절 경험과 격렬했던 국내 앵포르멜 미술이 절충된 기념비적 작품이었다. ● 1960년대 중반 권옥연의 화면에는 토기나 목기, 청동기, 마을의 오래된 장승이나 한옥의 일부, 또는 목조 건물과 같은 익숙한 토속적 이미지들이 들어오며 더욱 다채로워졌다. 토속적인 그림 속 오브제들은 건축적인 구조물처럼 확대되어 화면을 가득 채우기도 하고, 기이하게 마치 원시 부족의 제의에 쓰이는 샤먼의 방울이나 종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시 이러한 소재의 변화는 권옥연이 이즈음부터 몰두했던 골동품 수집과 관련이 있었다. 특히 권옥연은 전통 고건축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경기도 남양주시의 금곡에 옛 궁집을 보존하고, 전국에서 고택을 허문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달려가 건물을 해체한 후 그곳으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궁궐을 복원하고 한옥의 가치를 다시 되살리는 일들이 200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상기해 보면, 옛 것에 대한 권옥연의 관심과 오래된 것을 알아보는 그의 심미안이 시대를 훌쩍 앞서가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 이 시기 화면에 등장하는 오래된 물건들은 화가가 자신의 제의적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수호물이자 관람자를 화가의 상상력의 세계로 진입시키는 매개물처럼 보인다. 이 시기를 지배하는 권옥연의 질료적 상상력은 단연 불과 흙의 연금술적 환상이었다. 이러한 감각에 대해서 1965년 도쿄 니혼바시 개인전에 대해 평론을 했던 우에무라 다기지요는 일본 미술월간지 『미즈에(みずえ)』에 권옥연의 작품을 평하며, "한국의 흙이 불란서의 불에 의해 구워진 도자기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라 했다. 이 같은 연금술의 영토는 매우 가변적이고 원초적 관능성의 이미지로 충만해 있었다. 예를 들어 1965년 작품 「목정」에서 보듯이 거친 청동기의 구멍 난 표면에는 씨앗이 포자처럼 박혀있고, 깨진 균열에서는 식물의 줄기와 잎 같은 생명체들이 돋아나기도 했다. 그 곳은 불모의 영토가 아닌 공기를 호흡하고 물을 머금으면 금방이라도 싹이 돋을 생명의 잉태지였다. ● 한편 1960년대 이후 일련의 「우화」 시리즈는 권옥연 개인의 독특한 비전이기도 했지만 한국적인 현대미술을 모색하던 당시 한국 문화계의 요구에도 부응한 시의 적절한 작업이었다. 민족주의가 점차 사회의 중심 이념이 되면서 한국 문화의 원형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어느 시기보다 커졌다. 전통 문화와 생활양식이 채집되었고 민속학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도 성과를 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1960년대 후반 상황에서 권옥연의 토속적인 회화는 한국미를 구현한 현대미술이라는 고무적인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권옥연의 1960년대 국내 화단에서의 입지도 확고한 것이어서, 매년 열리는 세계 문화자유회의 전시회에 초대되었고, 1965년에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출품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권옥연은 이 시기, 1968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 참가함으로써 다시 한 번 국제미술계와 만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권옥연_부인 초상_캔버스에 유채_91.5×59cm_1951

3. 만월(滿月), 물과 공기의 정념 ● 1970년은 권옥연에게 큰 의미가 있는 해였다.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 엑스포 한국관 전시에도 초대 출품되었고 신세계 화랑에서 여섯 번째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 개인전에는 「사랑」, 「녹색의 태양」과 같은 작품이 출품되었는데, 특히 1970년 작품 「사랑」은 이 시기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매끄럽게 처리된 화면은 물이 흐르듯 공기가 숨 쉬듯 더없이 유동적이다. 1960년대 거칠게 메말랐던 토양이 수분을 머금고 갑자기 만개한 것 같은 풍경이었다. 짙푸른 하늘에는 나비가 너울거리고 신비한 흰 달이 둥실 떠올랐다.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한 초현실적 풍경화였다. 이러한 원초적인 풍경화의 관능적 연상 작용을 더 고조시키는 것은 여성 누드와 한껏 부풀어 오른 만월의 이미지였다. ● 1970년대 권옥연 회화의 중요한 특징인 관능적 정염은 1980년대 풍경화에 여성 누드가 들어오면서 더 밀도가 높아졌다. 1986년 「달맞이꽃」은 그런 점에서 매우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화면에는 형형색색의 알 수 없는 도형들이 첨가되고, 아득한 공간에서 새들은 바다 생물처럼 날개를 접고 유영하며 공간을 응시하였다. 부푼 달은 여체의 은밀한 부분에 맞닿아 있고, 땅에서는 달맞이꽃이 아련하게 피어 올랐다. 깊은 그리움의 이미지였다. 시인 김용택은 「달맞이 꽃」이라는 시에서 그리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 적이 있다. ● 그리움 가득 채우며 / 내가 네게로 저물어 가는 것처럼 / 너도 그리운 가슴 부여안고 / 내게로 저물어 옴을 알겠구나. / 빈 산 가득 풀벌레 소낙비처럼 이리 울고, / 이 산 저 산 소쩍새는 저리 울어, / 못 견디게 그리운 달 둥실 떠오르면 / 징소리같이 퍼지는 달빛 아래 / 검은 산을 헐고 그리움 넘쳐 / 내 앞에 피는 꽃 달맞이꽃 ● 서로 시대도 다르고 교류도 없었던 화가와 시인의 시상의 유사함이 놀라울 정도이다. 익히 느껴지는바, 이러한 에로스적 환상은 충만함과 동시에 깊은 상실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래서 어떤 이들은 권옥연의 달빛 속 에로스의 이미지에서 비극적인 오필리아(Ophelia)의 죽음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사실 이러한 상실감은 초기의 「신당동 풍경」이나 1968년에 남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하며 그린 사생적 풍경화에서조차 드러나는 권옥연 특유의 심상이었다. 풍경은 주변의 마을과 지도에서 적막하게 고립되어 언덕에 신기루처럼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실감은 권옥연의 여인 초상화에서 더 집약적으로 나타났다.

권옥연_좌상(坐像)_캔버스에 유채_91×73cm_1968

4. 여인, 상실의 풍경 ● 1970년대는 권옥연이 여성 인물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73년 미국 여행 중에 우연히 다시 만난 고갱의 누드는, 그로 하여금 자신만의 체취가 분명한 누드화를 그려보겠다는 의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나 권옥연에게 여인상은 1951년 부인의 초상화나 파리 유학 시절에 그린 파리지엔의 이국적인 누드소묘에서 보듯이 처음부터 권옥연 회화에서 중요한 주제였다. 그래서 권옥연은 여인을 '심상의 총화'라고 하였다. ● 평생 그림을 그리면서 누드 하나 제대로 그린다는 일이 무척 어려운 것 같다. 추상적인 그림이나 변형된 형태의 작업은 세부적인 결함이 어느 정도는 용서되는 것 같다. 같은 구상이라도 풍경은 또 풍경의 일부인 나무라든가 산 같은 그런 것은 결함이 조금은 용서될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은 도저히 그것이 안 된다. 지난 5년 동안 인물을 몇 백 점 그리면서 비난도 받았지만 얼굴을 제대로 하나 그리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톤, 자기 나름대로의 바리에이션, 자기 나름대로의 콘트라스트를 가지고 해야 한다. 그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 권옥연은 그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지루할 때면 여인초상을 그리곤 했다. 그렇게 그린 인물화는 권옥연의 머릿속에 있는 환상이 빚어낸 가상의 인물일 때가 많았다. 그가 그린 여성 외모의 특징은 분명하다. 귀여운 들창코에 풍성한 머리, 짙은 피부의 톤, 아직 소녀 티를 벗지 못한 청순한 모습이다. 때로는 수줍게 몸을 가리는가 하면, 때로는 관능적인 자세로 유혹하는 여인들이다. 여인은 그에게 있어 어떤 집요한 향수와 같은 것으로, 반복해서 거듭하는 소묘의 흔적들은 그 열망의 집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권옥연의 회화에서 이러한 상실감을 강화하는 요소는 특유의 푸른 색조이다. 슬픔으로 이어지는 그리움은 우화이건 인물화이건 풍경화이든지, 장르 불문하고 권옥연의 회화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정서였다. 사실 파리에 체불했던 많은 미술가가 있었지만, 권옥연처럼 평생 에콜 드 파리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그림을 그린 미술가는 많지 않다. 누구나 공감하듯 그가 토속적 소재를 다루더라도 그 효과는 늘 이국적이었다. 그의 미술세계는 본질적으로 '파리'라는 도시로 상징되는 유럽 모더니즘의 미학에 닻을 내리고 있었고, 그 열망은 이국적 여인으로 의인화되고 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권옥연이 평생 집착했던 여인상은, 아시아라는 지역의 미술가가 쉽게 성취할 수 없었던 중심을 향한 욕망의 기호였다고 할 수 있다.

권옥연_나부(裸婦)_캔버스에 유채_84×104cm_1965

5. 마무리 글 ● 1980년대는 권옥연이 화가로서의 성공과 명예를 모두 거머쥔 절정기였다. 1983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85년에는 예술원 미술부분 상을 수상하였다. 이러한 예술가로서 자족감은 1980년대 마을 풍경 연작에서 잘 드러난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에서는 그 동안 권옥연이 추구했던 도상과 주제들이 종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림 속 고즈넉한 마을에는 깃발이 꽂혀 날리고, 화가의 또 다른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고목의 이미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이어서 권옥연은 1990년 보관문화훈장을, 1994년에는 3.1 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 권옥연은 2001년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시행하는 '올해의 작가상'에 선정되었다. 이 전시회는 명실공히 권옥연의 화업을 정리하는 첫 회고전이었다. 덕수궁 근대미술 분관에 전시된 화가의 작품들은 초기의 것부터 2000년 근작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프랑스 체불 시절의 추상화로의 변화와 1970년대 이후의 구상화 화풍으로 변화는 있었지만, 운치 있는 무채색의 몽환적 화풍은 그가 좋아했던 바이올린의 음조처럼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살펴보면 권옥연의 작품 중에는 제작 시기가 3년이나 5년, 길게는 10년이 넘는 것이 허다하다. 그는 작품의 완성 앞에서 늘 망설였고, 이미 서명이 끝난 작품도 곁에 두고 덧칠하였다. 1968년 시작한 「마드무아젤 C」는 10년이나 걸려 1978년에 완성되었다.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전시에 맞추어 붓을 뗀 많은 그림 중에는 1960년대에 시작했다가 그제야 완성한 작품들도 많았을 것이다. 화가는 이렇게 고백했다. ● 그림을 그리다가 울고 싶은 때가 있다. 금년 정월에도 25점을 다 지워 버린 일이 있다. 그림은 처음 스케치 했을 때가 가장 새롭고 좋은 것이다. 그것을 더 그리면 그릴수록 죽어간다. 제일 처음의 감동은 점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여자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처음의 감동이 내처 계속되는 것은 아니고 정열도 어느덧 식는다. ● 일필휘지 하기보다는 오래 묵히고 발효한 그림들, 권옥연의 회화세계는 인간의 상상력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과정'의 시간을 모두 담아 낸 완숙미 넘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각적 상상력은 그의 미술을 한국 현대미술 어디에도 쉽게 위치시키기 어렵지만 동시에 그의 미술에 독자성을 부여하는 요체였다. ● 토속적 식민지 시대 일본 유학의 마지막 세대이기도 한 권옥연은 해방 이후 어떤 사조나 단체 활동에 크게 연관됨 없이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를 펼쳐 나갔다. 당당한 겉모습 안에 숨어 있는 권옥연의 자아는 때로는 성장하지 않은 소년처럼 순진하고, 때로는 그가 그린 상상의 소녀처럼 내밀하다.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시스트'라는 별명답게 더없이 부드러운 그의 성정에 대해서 부인 이병복은 "그이는 만년 다섯 살 소년이었다"며 그리움 섞인 푸념을 하곤 한다. 이러한 아름다운 서정은 화가가 캔버스의 질료와 형상에 집중하며 평생을 쉼 없이 매진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성취였다. 권옥연의 미술세계는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유례 없이 풍부한 회화소(繪畫素)였다. ■ 김미정

* 참고문헌 『권옥연』,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 선집, 금성출판사, 1976 『한국현대미술전집 17, 상징과 조형』, 한국일보사, 1990 『권옥연 1947-2000, Ⅰ. Ⅱ』, 미술저널사, 2001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 2005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76 권옥연』, 국립예술자료원, 2006 유준상, 「권옥연의 예술, 신비주의적인 세계」, 『권옥연』,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 선집, 금성출판사, 1976 오광수, 「권옥연의 예술 또는 환시적 조형」, 『권옥연 1947-2000, Ⅰ. Ⅱ』, 미술저널사, 2001 유준상, 「작가론」, 『권옥연 1947-2000, Ⅰ. Ⅱ』, 미술저널사, 200. 최은주, 「권옥연의 회화-이미지와 상징성」, 『권옥연 1947-2000, Ⅰ. Ⅱ』, 미술저널사, 2001

Vol.20151212e | 권옥연展 / KWONOKYON / 權玉淵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