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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_1215 ▶ 2015_1230

김수정_그집앞_캔버스에 혼합재료_45.5×33.4cm_2015

초대일시 / 2015_1215_화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령_김수정_김연규_김영자_김일해_김재관 박용인_서승원_송용_심재현_양화정 이정지_이태현_제정자_주태석_황찬수

관람시간 / 10:00am~06:00pm

이브갤러리 EVE GALLERY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114길 5 이브자리 코디센 빌딩 5층 Tel. +82.2.540.5695 www.evegallery.co.kr blog.naver.com/codisenss

김수정 ● 이 화가는 거창한 소재를 화폭에 옮기려 하지 않으면서 심정적 차원의 자연과 달동네 같은 풍경을 끈질기게 조형세계로 파고 드는 작가이다. 애정이 있는 곳에 반드시 생명력이 부여 되듯이 그의 구상회화의 내면은 따듯하고 굴절되지 않은 심상독백을 대할 수 있어서 좋다. 그간, 미술대전에 출품한 작품들도 일련의 소박하면서 과장되지 않은 그의 예술세계가 심화된 작품이다. 무한한 신비와 아름다움을 찾아서 제작에 몰입하는 것은 또한 무거운 침묵이 화필로 옮겨지는 기도의 소리이기도 하며, 화가들이 찾고 있는 정면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 깊숙한 자연의 품을 뒤지려는 듯도 하다. 예술의 길이란 엄숙하고도 험난한 길이며 그것은 결코 어느 형식을 통한 자연형상의 표출이 아니고 독자적인 생명으로 이어지는 작업이기에 그의 앞날이 더욱 기대된다. 서구미술에서 자연의 물상으로부터 그 신비한 미의 근원을 추구한 작가처럼 언제인가 우리 화단에 주목을 받게 될 것으로 믿는다. 새로운 창조란 사치가 아닌 인간에게 주어진 추구의세계이며 높은 의미의 조형사상이란 높은 미의식의 성장, 다시 말해서 미적가치의 발견없이는 성립이 안된다. 예술은 정신적 육체적 인간고뇌를 극복하는 참인생으로부터 생산된다는 사실을 말해 두고 싶다. 그의 집요한 작가적 자세에 신뢰가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화가 김수정의 보다 진보된 세계를 기대하며 이 같은 기대를 그는 흔쾌히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 홍종명

김령_生의 환타지아_캔버스에 비즈, 혼합재료_22×27.3cm_2012

生의 Fantasia ● 예술과 삶, 자연과 인간은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독립된 개체들이 모여 Harmony를 이루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生의 Fantasia를 체험하고 이 경험을 통해 새로운 오늘을 시작하게 된다. 본 작품은 인간의 生을 자연 중에서도 덧없이 시들어버리는 꽃(花)에 투영하였다. 그러나 작품 속 메시지는 꽃과 같이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삶은 동심원이며 이는 작은 감정의 알갱이들이 모여 이뤄진다. 그래서 한 알 한 알의 비즈알갱이로 표현된다. 생명이란 본래 소립자들이 모여 이뤄진 것이며, 우주에서 보면 작은 알갱이에 불과하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함께 담았다. 생의 시작, 우리는 설레임을 안고 기다린다. 그리고 개화. 꽃이 피는 동아 내적인 아픔과 동시에 치유될 수 있는 기쁨을, 빛나는 희망과 같은 감정을 체험한다. 또한, 꽃은 결실을 예고한다. 열매는 다시 자신을 버리고 나눔으로서 또 다른 삶을 얻는다. 고통과 아픔이 없다면 내재된 욕망 에너지도 없는 법. 내면의 소리는 언제나 아름다움과 희망으로 향하게 된다. ■ 김령

김연규_Botanical Subject-1507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스톤파우더_45.5×53cm_2015

나의 회화는 기본적으로 자연예찬을 위해 바쳐진다. 생명을 노래하고 또한 온갖 자연이치를 직관적으로 명료화한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가로놓인 상상적 공간의 제시하며 상징적 표상들을 나타낸다. 구체적인 생명의 현상을 통해 새롭게 나타내고 사라지는 존재들과 남겨진 흔적들을 내 스스로를 반추하면서 내 자신과 주위의 여러 현상과의 관계를 환원하고 싶다. 무한의 절대적 세계 자연과 이미지, 생성과 소멸, 시간과 공간 등 생명을 바탕으로 미로의 체계가 구축되고. 끊임없이 자연 이미지는 생명이며, 정신으로 절대적 질서 속에 자연 이미지 표현으로 소통하고 싶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비정형의 이미지인 꽃잎이나 꽃, 줄기와 씨앗, 열매 등의 형태는 자연의 생성과 소멸, 죽음과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의 이미지는 마치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기도 하고, 숨 쉬는 생명체로 보여 지기도 한다. 형태의 입체적 명암이나 사실묘사는 없고 점이나 가늘고 굵은 선으로 외곽만 나타난다. 둥근 구근이나 포도송이처럼 매달린 열매들, 솜털처럼 펼쳐진 꽃들이 생명의 자연 이미지들을 열거한다. 자연의 외적 아름다움이 아닌 내면에 감춰진 예술세계 탐구,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이미지 변화 속에 내 자신의 내면을 드려다 보고자 하는 표현으로 이미지들이 탄생되고 소멸한다. 형태와 이미지, 그리고 물질과 정신은 독자적 조형언어로써 교감의 소통으로 이야기 하고 싶다. ■ 김연규

김영자_꿈_캔버스에 유채_53×45.5cm_2013
김일해_I love you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11
김재관_Multiple cube 2015-07_한지에 아크릴채색_46.5×63cm_2015

"예술이라는 것은 좀 더 인간적인 좌절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힘에 겨운 삶의 존재와 경험을 통하여 비로소 신념과 회의와 겸허함을 배우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 속에 있는 허상을 끄집어내어 새로운 이미지로 만들어 내기도 하고 철학적 이치와 개념을 지닌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다고라스는 수(數)로서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피천득 선생은 수학을 '크리스털 뷰티(beauty)'라 하였다. 기하학은 가시적 실체는 아니지만 추상적 실체이다. 그리드와 방형에서 출발한 나의 작품세계는 몇 단계의 변화를 거쳐 최근에는 '왜곡된 기하학'의 아름다움에 함몰되어 있다. 나의 추상세계의 아이콘이었던 정방형의 세계를 해체하고 '왜곡된 입방체'(destorted cube)와 멀티플 큐브(multiple cube) 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2015. 4.) ■ 김재관

박용인_청색정물_캔버스에 유채_22.7×15.8cm_2015
서승원_동시성 03-82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33cm_2003
송용_붉은 장미_캔버스에 유채_27.3×19cm_2015

송용 ● 산이나 나무 여울의 흐름이나 집들, 그리고 꽃이나 과일 등은 그것들이 화면위에서 단지 색채나 형태의 가치로서만 병열 될 뿐 아니라 그 때 그 시간의 그 분위기를 나타내려는 전체 속에서만 각기의 단위가 두드러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법적인 운영이 그의 경우 강한 감정적 해석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그의 화면은 과학처럼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표현태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개인전 화집 서문에서) ■ 유준상

심재현_Eve's Diary 014_C 프린트_45×45cm_2007
양화정_생명의 빛으로-꽃. 피어나다_캔버스에 혼합재료_24.2×24.2cm_2015
이정지_「○」-1215_캔버스에 유채_24.2×33.4cm_2015
이태현_SPACE 20156P1_캔버스에 유채_27×41cm_2015

물과 기름이 반발하는 원리에 의한 공간표현으로서의 marbling과 우주공간의 음과양이 지구중력에 의해 형성된 생성과 소멸의 현수곡선을 출몰시키기도 하지만 팔괘를 인위의 정점으로 정착시켜 이를 삼라만상의 개념으로 조형화하는 것이 나의 작업이다. ■ 이태현

제정자_정과동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나무_37.5×37.5cm_2014
주태석_자연·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53cm_2015

주태석 ● 朱泰石은 최근 몇 년간 「自然·이미지」란 명제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이 「自然·이미지」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나무와 숲이다. 하나의 나무를 크로즈업시키기도 하고 여러 나무가 겹쳐지다가 종내는 숲으로 이어지는 정경이 등장되기도 한다. 나무나 숲을 그린다는 것은 도무지 새롭지 않다. 그것도 싱거울 정도로 담담하게 포착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하가 잘린 나무둥치만 크로즈업되어 오는가 하면, 크로즈업된 몇 그루의 나무를 전경으로 하고 실루엣이나 숲이 배경을 이루는, 극도로 단순화된 설정이다. 싱거울 정도로 어떤 특별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나무는 나무일뿐이다란 주장이 전면으로 부각된다. 나무란 무엇인가. 어떤 자연대상에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라고 명명했기 때문에 나무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무란 실은 나무란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무의 실제는 언제나 그 너머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시 관념으로서의 나무를 보는 것인지 실체로서의 나무이전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朱泰石은 「관념적인 자연의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 보일 때」를 포착할려고 한다. 말하자면, 그는 실체로서의 나무이전보다 관념으로서의 나무를 어느 시각에서 더욱 실체에 가깝게 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나무라든가 숲이라고 명명하지 않고 「自然·이미지」란 이원적 명제를 즐겨 쓰고 있다. 이 이원적 명제는 그의 작품이 지니는 이원적 구조를 아주 간명하게 시사해보인다. 그의 화면은 대부분 이원적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실체와 그림자, 한 그루의 나무와 배경의 숲, 그리고 이질한 단명의 설정(부분적으로 화면일부를 분절하는 구성상의 특성)등이 그것이다. 가까이 있는 나무와 멀리 있는 나무, 극명하게 묘출되는 나무그루와 뿌엿케 흐려지는 배경의 그림자 등, 자세히 보고 있으면 화면은 이원적 구조의 대비로 인해 극적인 탄력으로 충만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하나의 정경이 어느덧 숨가쁜 경이로움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朱泰石의 화면이 주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 오광수

황찬수_Space and Memory-1509_종이에 아크릴채색_20×20cm_2015

황찬수 ● 황찬수의 그림은 색채의 향연이다. 다양한 색채는 자연스런 붓놀림에 실려 시시각각 변화하는 톤을 보여주며 화면 전체에 펼쳐진다. 대부분의 비구상회화에서처럼 원근법 등을 통하여 묘사하는 illusion을 배제하고 있지만 황찬수의 화면은 절대회화에서 강조된 평면이나 로드코의 색면추상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다만 공통점이라면 그림에서 구사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절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절제성은 단순한 외양을 만들기 위한 것이기 보다 그의 정신적 태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가 색채를 구사함에서도 깊이감을 찾는 것도 단순한 색채의 가시적 효과만을 위한 것이 아닌 정신적 차원에서 접근할 일이다. 또한 여러 색채가 조합하여 한 tone을 형성함으로써 보여지는 화면도 화면이지만, 그 화면 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연한 붓질 행위는 시간적 의미를 내포하는 음악적 연주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황찬수의 그림에선 화면 전면에 동일한 리듬으로 균질의 색채들이 춤을 춘다. ■ 최승훈

Vol.20151215k | Thanks for Everything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