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Past Future

박민展 / PARKMIN / 朴玟 / installation   2016_0114 ▶︎ 2016_0229

박민_오래된 미래 #01_혼합재료, 전광판_900×1900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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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0115_금요일_06:30pm

장소 / 고디바 광화문점 서울 종로구 세종로 202-1번지 3층

관람시간 / 06:00am~12:00am / 하루 약 70회 송출

광화문 동아일보사옥 전광판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사옥

오래된 미래 ● 박민 작가는 다채로운 형식의 미디어 작업을 매진해온 작가이다. 설치미술의 형식이 가미된 독특한 배열과 양면거울을 이용한 인물 사진들의 뒤섞인 이미지는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우리시대에 대한 정신의 풍경을 시적으로 나타낸 매우 깊은 은유이다. 2009년부터 시작된 박민 작가의 관심은 한마디로 글로벌이라는 단어의 정체일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증가하면 인간의 재화는 증가될 것이니 행복에 이른다는 글로벌리즘의 주인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며 무한경쟁으로 사람들을 내모는 자본주의자들이다. 이 자본주의자들은 무한경쟁이야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가장 효율적 시스템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참으로 문제가 많다. 일단 이들의 주장은 역사가 선적으로 발전하여 어제보다 오늘이,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이 낫다는 주장인데, 사실 거짓말이다. 역사는 선적으로 발전하지도 않으며, 역사를 통해 배우는 진실은 어제보다 내일이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니라고 말해준다. 다만 역사가 좋아지든 나빠지든 권력을 손에 넣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을 통제하고 유도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찾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정치 ∙ 경제 시스템이자 문화 시스템이다. 전자를 우리는 하드 파워라고 하고, 후자를 가리켜 소프트 파워라고 한다. 문제는 우리나라와 같은 후발주자가 하드 파워의 대열에 끼는 것은 가능해도 소프트 파워를 누리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소프트 파워는 마치 종교처럼 관념적인 것이다. 수치로 분석하거나 돈으로 사고 팔 수도 없다. 그것은 순전히 믿음의 체계이다. 이 믿음의 체계를 서구사회가 독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열리지 않는 굳건한 틈을 벌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래서 서구사회로 유학을 가고 그곳의 인맥들과 연결되려고 상상할 수도 없이 노력하고 있다.

박민_오래된 미래 #02_혼합재료, 전광판_900×1900cm_2016

박민 작가의 작품 자체도 역시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이러한 어려움과 억울함, 어리석음을 다루고 있다. 서구는 과개발 사회이다. 나머지 제 3세계나 우리나라와 같은 신흥공업국은 저개발 사회이다. 과개발 사회가 세계를 인식하고 다루는 방식은 유희(play)이다. 저개발 사회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은 투쟁(struggle)이다. 우리 미술가는 서구에서 인정 받기 위해서 관념적 ∙ 형식적 ∙ 내용적 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그 서구인들은 우리의 투쟁을 가리켜 유희적 눈으로 대상화할 뿐이다. 여기에서 둘 다 문제가 되겠지만, 특히 우리 미술가들의(문화계 전반의 사람들의) 태도가 더욱 문제일 것이다. 우리의 문화를 스스로 서구의 문화보다 하위 카테고리에 두었던 당사자는 과연 누구였던가? 그들이 그러한 인식을 주입시켰는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 정신의 옷을 갈아입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누가 잘못되었건 과개발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서 장구한 시간 동안 축적시켰던 소중한 가치 영역을 복원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시킨 것은 완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다. 스스로 부정한 자는 더 낳은 가치를 외부에서 찾게끔 되어있다. 우리의식이 서구 • 백인 • 남자라는 삼각편대에 에워싸여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특정한 가치에 매몰되었을 때 그 가치 카테고리 밖의 영역의 가치는 모두 몰살당한다. 비서구 • 유색인종 • 여성이 창출한 가치가 그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치를 분별하고 비판해주는 것이 바로 철학이나 미학일 것이다. 그런데 철학이나 미학 역시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인 것이 대부분이다. 가령, 가장 순수한 철학을 가리켜 전문가들은 칸트 철학이라고 한다. 주체인 내가 바라보는 외부대상은 객관적 질 • 량 •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고, 나의 인식이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우리내부의 산물이라는 구상력(representation)의 이론은 18세기에 칸트가 최초로 생각해낸 철학적 설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4 • 5 세기 불교 유식학에서 이미 끝난 논의이다. 세계는 우리의 오온(五蘊)이 만들어낸 환영(maya)일뿐이라는 논의로서 칸트보다 1400년이나 앞서 동양사회에서 진리로 통용되어왔다. 이 논의의 대가는 세친 보살이다. 그러나 서구에서 세친 보살의 논의를 바라보려 않고 칸트만을 추앙하는 경향이 있다.

박민_오래된 미래 Past Future展_광화문 동아일보사옥 전광판_2015

생각, 즉 사고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생각에도 종지가 있다. 생각을 비유하자면 혜성과 같다. 혜성은 머리와 꼬리 부분으로 구성된다. 혜성의 머리는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를 향해서 질주하면서 자기를 불사른다. 그런데 꼬리가 방향을 잡아준다. 꼬리는 타오르면서 축적되었던 과거의 역사이다. 과거의 꼬리가 방향을 잡아주기 때문에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를 향해 돌진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꼬리를 자른 혜성이다. 그래서 방향타가 없다. 방향타가 없는 대신 좌충우돌 막무가내며 다이나믹하고 빠른 처신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우스꽝스러움(absurdity)이다. ● 박민이라는 인격은 우리정신의 우스꽝스러움을 염려하며 아파하고 대안을 찾고자 노력하는 작가다. 박민의 내재된 인격은 꿈틀거리다 2013년 작품 「수용 유희」에서 싹으로 터진 것 같다. 모두가 양면 거울로 감싸인 200명의 인격은 거울과 거울이 서로를 반사시키고 수용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반사시키고(거부, 부정) 받아들이는(사랑, 긍정) 화엄의 세계를 메타포로 연출했다. 그것은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면서 형성시키는 관계가 그들의 본질이라는 인드라의 그물을 연상시켰다.

박민_오래된 미래 Past Future展_광화문 동아일보사옥 전광판_2015

2014년도의 「케미컬 비너스」 역시 인간의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유도해낸다. 인간은 원래 세계와 분리되었던 존재가 아니다. 세계와 하나되었던 존재이다. 외부대상과 내가 분리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먹이가 나타나면 배부르고 배고프면 배고픈 대로 내일을 인식하지 않았다. 이를 우리는 파라다이스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우리를 언젠가부터 세계로부터 분리시켰다. 그것은 얼굴을 찢어내 내가 얼굴을 바라보는, 그런 고통이었다. 나를 인식한 것이다. 나라는 주체가 세계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그것을 '탈존(脫存, ex-sist)'이라 부른다. 탈존은 잃어버린 천국, 즉 실낙원(lost paradise)의 다른 이름이다. 탈존이 일어난 후에 내 앞에 나타나는 대상을 직접 부딪히기 시작했다. 넘거나 우회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손으로 가공하고 조작하기 시작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은 그렇게 3차원적인 입체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그 증거이다. 그런데 여기서 스스로를 마주치는 대상으로부터 떨어져서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2차원의 그림이다. 그런데 2차원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마술적 의식을 불어넣었다. 객관세계와 이미지의 세계를 구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 것이 문자의 세계이다. 문자는 이미지를 비판하기 위해 태어났다. 수메르 쐐기문자가 그것이다. 문자가 생기고 역사적 의식이 생겼다. 역사적 세계는 시간을 인식하는 사고방법이다. 인간이 벌였던 무수한 사건들을 기록하면서 합리적 사고방법이 생겼다. 합리적 세계가 탄생하면서 알파벳과 숫자로 세계를 이론화하는 방법이 생겼다. 알파벳과 숫자의 세계(alpha-numeric code)는 과학을 만들었고 산업사회의 생산력을 가능하게 했다. 빌렌도르프 비너스의 메타포는 풍요이다. 일단 양적 풍요의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정보화 세계까지 발전된 것이 문제다. 정보화의 세계는 역사의 세계가 아니라 다시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다. 다시 이성적 비판이 세계를 조정하는 힘을 잃고 마법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알타미라나 라스코에서 동굴벽화를 그리던 사람들의 마법은 걱정 없는 빈곤의 마법이었다면 지금의 마법은 걱정 많은 풍요의 마법이다. 박민 작가는 이러한 인간 역사의 과정을 「케미컬 비너스」에서 12분만에 표현해냈다.

박민_오래된 미래 Past Future展_광화문 동아일보사옥 전광판_2015

문제는 2016년 현재 전시할 「오래된 미래」이다. 엄청난 스펙터클을 현시할 이 작품은 신사임당의 「초충도」, 장한종의 「책가도팔폭병풍」을 지금 현재 우리 삶을 반영하여 재구성하고 변형한 이미지이다. 「초충도」나 「책가도팔폭병풍」은 지고하게 순결한 조선인의 삶을 반영한다. 그런데 그 순수로 가득했던 삶을 우리는 이어받지 못하고 퇴락시켜버렸다. 쥐들이 수박을 갉아먹었고 책들은 서구의 도상에 물들었다. 아무튼 전시 장소는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아니다. 광화문 전광판이다. 전광판은 TV • 잡지 • 컴퓨터 온라인과 함께 현대인을 사로잡는 이미지 마술의 대명사이다. 여기에는 비판적 의식이 허용되지 않는다. 비판적 의식은 역사적 의식이기 때문이다. 전광판은 무조건적인 일방향의 수용만을 강요하는 폭력적 기제이다. 그곳에 미의식이나 성찰과 같은 가치는 침투할 여력이 없다. 전광판은 정치적 캠페인이나 정부 선전, 아니면 관공서의 포장된 선전만을 나열한다. 그것은 의식 있는 비판 • 합리적 토론을 불허한다. 무의식에 안심과 만족, 아니면 욕망을 남모르게 불어넣을 뿐이다. 박민 작가는 여기에 우리시대 정신의 지도를 펼쳐놓으려 한다. 제 민족 모두를 비하하면서 민족이 살아가는 현재를 무덤이라고 인식했던 때가 1920년대 식민지 시대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우리의 터전을 무덤을 넘어 지옥이라고까지 인식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우리를 궁지로 내몬 주체가 외세가 아니라 내부의 일원이라는 데 있다. 투쟁의 대상이 있으면 투쟁의 의지가 살아난다. 그러나 우리는 투쟁의 대상을 망각하도록 길들여졌다. 전광판 • TV 광고 • 영화 • 드라마 • 잡지에 등장하는 화려한 삶과 여기서 보았던 상층부에 대한 동경이 나도 언젠가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갈 수 있다는 꿈을 부지불식간에 심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여성 사상가이자 작가인 제니 홀저(Jenny Holzer)가 파토스적 문구로 미술계를 사로잡았듯이, 박민 작가 또한 "돈이 계급을 만든다. (Money creates class.)"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너를 성공으로 이끈다. (Lying leads you to success.)" 아니면 "꿈은 환상이다. (Dream is fantasy)."라는 파토스적 문구를 이용해서 센세이션에 불을 지핀다. 그런가 하면 "겸손하라. (Be humble.)"는 문구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Everyone is not equal.)"는 진부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가 우리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전광판이 있는 건물 아래 조그만 상업 공간에서도 레디컬한 전시가 병행될 텐데, 이 문구들은 포스터나 유인물 혹은 책자의 형식으로 관객과 대면할 것이다. 더구나 박민 작가는 이 전광판 작품에서 공존 • 풍요 • 다산 • 근면의 전통적 가치가 파괴된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제니 홀저가 느꼈던 심정보다도 처참한 현재 우리상황을 가시화시킨다.

박민_오래된 미래 Past Future展_광화문 동아일보사옥 전광판_2015

앞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는 과개발과 저개발 사회의 어중간한 틈새에 놓여있다. 그래서 유희도 못하고 투쟁도 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비관하고 모멸할 분이다. 그때 찾을 수 있는 돌파구는 언제나 내부여야 하는데, 우리는 외부에서 무언가를 찾도록 훈련 받았다. 서구 • 백인 • 남자라는 힘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박민 작가가 뉴욕에서 바라보고 체득한 문화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작가는 여기서 문제점을 찾았을 것이다. 「오래된 미래」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문화 • 예술 • 사상이란 나의 뿌리인 실존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꼬리를 잃은 혜성이 다시금 현재를 불태워 방향타를 잡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나로부터, 나의 토대였던 이 사회와 모든 관계망으로부터 생각 • 감정 • 오온(五蘊)의 실상이 발현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이 전시는 매우 실험적이며 진취적인 생각들이 결정을 맺고 있다. 언젠가 박민의 생각 실험이 무르익으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처한 실정에 대한 작가의 고민도 우리의 마음을 만들어내는 실상이 무엇인지 바로 보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 이진명

Vol.20160114c | 박민展 / PARKMIN / 朴玟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