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Lo Straniero

박찬배展 / PARKCHANBAE / 朴贊培 / photography   2016_0129 ▶︎ 2016_0214

박찬배_China in Prato #1_피그먼트 프린트, 나무프레임_63.5×73cm_2014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8:00pm

갤러리보다 GALLERYVODA 인천시 남동구 논고개로136번길 14(논현동 614-4번지) Tel. +82.32.446.3426 www.galleryvoda.com

낯선 세상 밖에서 찾은 친숙함의 낯섦:박찬배의 '이방인'(Lo Straniero) 들여다보기 나의 주위에 있는 세상, 그리고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모든 학문과 예술의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세상 밖으로!"로 대변되는, 세상에 대한 이 집요한 인간의 호기심은 온 우주에서 인간만이 가지는 특별한 모양새이며 그것으로 인해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이 확연히 갈라지기 때문이다. 하여, 철학적 인간학자(philosophical anthropologist)들은 세계로 향한 열어젖힘, 즉 '세계개방성'(world openness, Weltoffenheit)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질로 간주하고 있다. 학문과 예술은 바로 이러한 중요한 인간 특질로부터 기인한다. ● 그래서 학문과 예술 또한 인간의 "세상 밖으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련을 맺는다. 자연과학자이든 사회과학자이든 인문학자이든 상관없이 어느 누구라도 자기 너머의 세상에 대해 열렬한 호기심으로 무장하지 않은 자가 없으며, 화가이든 음악가이든 어떤 종류의 예술작업을 하는 예술가라도 자기 자신을 초월해 월경(越境)을 일삼지 않는 자는 없다. 한 마디로 "세상 밖으로!" 없이 학문과 예술, 그리고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야 말로 학문을 학문으로, 예술을 예술로, 그리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출발점이다. "세상 밖으로!"는 자기를 너머서려는 인간의 초월적 몸부림이며,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드는 지식욕의 구현이다. 앎이야말로 고도의 지능과 지력을 지닌 인간의 전유물 아니겠는가?

박찬배_China in Prato #2_피그먼트 프린트, 나무프레임_82.5×73cm_2014
박찬배_China in Prato #3_피그먼트 프린트, 나무프레임_82.5×73cm_2014
박찬배_China in Prato #4_피그먼트 프린트, 나무프레임_82.5×73cm_2014
박찬배_China in Prato #5_피그먼트 프린트, 나무프레임_82.5×73cm_2014

그런데 인간의 "세상 밖으로!"의 초월은 철학자 칸트(I. Kant)의 눈으로 보면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세상을 아는 것"(knowing the world)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가짐"(having a world)이다. 무한한 우주의 공간 속에 자신이 위치해 있음을 인간이 알게 되면서 그리고 지구상에 처녀지가 속속 인간에 의해 탐험되면서 바깥세상의 지식은, 즉 "세상을 아는 것"은 획기적인 전기를 맞이하며 그 지식 자체는 폭발한다. 반면 실제로 인간이 그 세상을 자기 것으로 정복하는 것, 즉 "세상을 가짐"은 지지부진해서 양자 간의 격차는 날로 벌어졌다. 그래서 실제로 가지고 있는 세상과 그것과 거리를 한참이나 둔, 그저 알려져 있는 세계는 인간들에겐 저 멀리 거리를 둔 어딘 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확인되지 않은 세상일 뿐이고, 그 세상이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인간의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증폭되고, 호기심은 편집증이 되며 종국엔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향수(nostalgia)로까지 변하게 된다. ● 우리 주위엔 이 향수를 못 이겨 현재의 안온한 일상을 내팽개치고 실제로 그 양자의 격차를 좁혀 보려 애쓰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대표적인 예가 여행객(tourists)일게다. 철학자 헬러(A. Heller)가 날카롭게 지적하듯, 현대인의 여행 광풍은 단순히 심심풀이와 여가활동으로만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세상을 아는 것"과 "세상을 가짐" 사이의 격차를 메우려는 현대인의 지난한 몸짓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딱히 현대의 여행객에게만 적용하려는 것은 심히 부당하다. 왜냐하면 세상을 책상머리에서 단순히 아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탐험하는 자는 단지 여행객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든 될 수 있다. 학자도 될 수 있고, 예술가도 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될 수 있다. 어쩌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이들이 다 그 "세상을 아는 것"과 "세상을 가짐" 사이의 격차를 메우려고 지금의 일상을 살고 있을 터이다.

박찬배_China in Prato #6_피그먼트 프린트, 나무프레임_82.5×73cm_2014
박찬배_China in Prato #7_피그먼트 프린트, 나무프레임_82.5×73cm_2014
박찬배_China in Prato #10_피그먼트 프린트, 나무프레임_82.5×73cm_2014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 살펴 보아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양자의 격차를 메우려 노력하는, 즉 저 멀리의 세계를 오롯이 자기 것으로 만들려 발걸음을 떼 그 미지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자들은 죄다 이방인(stranger)이라는 사실이다. 그(이방인)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낯섦을 발견한다. 때로 진정으로 낯선 곳에서 낯섦을, 혹은 낯선 곳에서 낯익음을 발견하는데서 오는 낯섦을, 그리고 이런 모든 경험을 통해 과거 자신이 낯익었던 곳으로부터 낯섦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모든 경험을 통해 비로소 그의 것으로 체화된 그만의 세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방인은 냉철한 시선과 뜨거운 눈물로 세상을 자신의 가슴으로 품을 수 있다. ● 박찬배의 예술 작업 또한 이들 이방인의 삶의 일환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찍어낸 피사체가 이국적이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그가 단순히 이탈리아에 여행간 여행객이나 유학생이어서가 아니다. 우선, 그는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알려진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정복한 결과물을 사진 속에 담았기 때문에 그의 작업이 이방인의 시각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사진을 보면 이탈리아라고 하는 이국적인 냄새를 전혀 맡을 수 없을 정도로 단조로움을 일견 맛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국적인 곳에서의 평이함을 사진 속에서 담아내는 그의 시각은 매우 이방인적이다. 그래서 그 단조로움이 작가의 고도의 계산이라는 추정이 나올 법 하다.

박찬배_China in Prato #12_피그먼트 프린트, 나무프레임_82.5×73cm_2014
박찬배_China in Prato #17_피그먼트 프린트, 나무프레임_62.5×73cm_2014

다음으로 박찬배의 작업이 이방인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가 밟은 이탈리아는 분명 그에겐 낯선 곳이지만 그곳에서 그는 그가 떠나온 세상에서 볼 수 있었던 낯익음을 발견한다. 때론 작가 자신과 같은 황색을 띤 중국인의 얼굴과 살림살이에서(『China in Prato』), 때론 이탈리아 반도 백인들의 얼굴에서조차(『A Year in Italia』)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 두고 온 고향의 사람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피사체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낯섦이다. 낯선 곳에서 전혀 낯설지 않음(친숙함)을 발견한 낯섦, 그것은 분명 이방인만이 경험하는 낯섦이다. 박찬배의 작업이 바로 이것을 교묘히 은폐하며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 속의 인물 군상들은 이제는 세계화로 죄다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모습을, 그 이방인의 모습을 이방인의 시선에서 담아낸 작가의 찰나적 포착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 결국 박찬배의 "세상 밖으로!"는 낯선 곳에서의 친숙함을 발견하는 낯섦으로 귀결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진전이 '이방인'(Lo Straniero)의 이름을 달게 된 이유다. ■ 김광기

Vol.20160129a | 박찬배展 / PARKCHANBAE / 朴贊培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