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ure, Dream, Eternity

김세중展 / KIMSEJOONG / 金世中 / painting   2016_0129 ▶︎ 2016_0710 / 월요일 휴관

김세중_Whisper of nature 자연의 속삭임_캔버스에 유채_7.3×7.2cm_2004/2015

초대일시 / 2016_0129_금요일_04:00pm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Park Soo Keun Museum in Yanggu County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 (정림리 131-1번지) 박수근미술관 내 현대미술관 Tel. +82.33.480.2655 www.parksookeun.or.kr

cm_다른cm_ 시간, cm_다른cm_ 장소 ● 김세중의 작품을 이미지로만 보았던 필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실제로 보았을 때 가장 의외라 생각하게 되는 지점은 작품의 크기일 것이라 생각된다. 디지털 기술과 매체가 발달한 요즘, 작품을 처음 접하는 경로는 흔히 모니터 속 이미지이다. 이렇게 디지털 이미지 때로는 화집 속 사진으로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될 때 언제나 가장 아쉬운 점은 실제 크기나 스케일의 부재다. 대부분의 경우 이미지와 함께 작품의 제목, 크기, 재료 등이 함께 제시된다 할지라도, 실제 크기를 머리 속에 그려보며 감상하기 보다는 작품이 주는 첫 인상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각인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김세중의 경우에도 역시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하늘, 바다, 고대 그리스·로마 석상, 빈티지한 기물과 작품 제목이 주는 느낌만으로, 왠지 작품이 클 것, 적어도 작지는 않을 것 이라는 근거 없는 생각을 갖게 했던 것이다.

김세중_Dream the Eternity 영원을 꿈꾸다_캔버스에 유채_80.7×116cm_2014~5
김세중_Dream the Eternity 영원을 꿈꾸다_캔버스에 유채_97.2×162cm_2015~6

스펙타클의 사회 ● 현대 사회의 특징을 말하는 여러 수식어들 중 cm_스펙타클cm_(Spectacle)이 있다. 스펙타클의 기저에는 눈의 작용을 강조하는 시선의 특화, 범람하는 이미지, 관조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통한 현실의 전도, 가상의 긍정, 삶의 추상화, 환상, 삶과 주체의 분리, 소외 등이 놓여 있다. 기 드보르(Guy Debord)가 『스펙타클의 사회』 (La Société du Spectacle)를 출간 한 해가 1967년 이었으니, 세기가 바뀌고 그 후로도 이미 10여년이 지난 현재의 모습을 보았더라면 스펙타클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라 뭔가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통용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TV, 광고판, 컴퓨터, 다양한 모바일 장치들을 통해 접하게 되는 현란한 가상의 세계들은 우리의 눈을 사로잡아 온 몸으로 살아가며 체험하는 구체적인 삶을 포장하고 때로는 우리 눈을 즐겁게 하기도, 한 템포 쉬어가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cm_눈을 사로잡는cm_ 스펙타클은 몸소 체험하는(vivre) 삶을 위협하면서도 그렇지 않다는 듯 자신을 cm_정당화cm_한다. 이러한 정당화는 삶의 주체들을 수동적이고 관조적으로 전환시키고 결국 소외시킨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는 비단 드보르가 지적한 대로 모든 것을 상품화 시키는 자본주의의 심화, 현대적 생산 조건이 지배하는 시장 체제 및 노동 조건, 정치 상황, 종교적 신념, 대중 문화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cm_현대 미술cm_에서 역시 강하게 감지된다. ● 과거 미술관, 박물관이 해오던 역할을 형식만 달리할 뿐 영화, TV, 오락 게임, 테마 파크 등이 대신하게 되면서, 조금씩 자리를 빼앗겨 오던 미술 전시는 앞 다투어 화제성 높고, 흥행을 보장 받을 수 있는 블록버스터 전시를 기획하고 있으며, 이런 전시에서 단골손님은 스펙타클한 특징을 보이는 작품들이다.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 등의 행사들을 보더라도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지적했듯이, 거대 자본의 수혜를 밑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설치 작품들이 관람객을 압도하는 거대한 스케일과 오브제의 숨 막힐 듯 한 양적 집적(스펙타클의 특징은 이러한 양의 증대, 과잉에 있다)을 보여주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김세중_Dream the Eternity 영원을 꿈꾸다_캔버스에 유채_22×30.3cm_2015
김세중_Dream the Eternity (영원을 꿈꾸다)_캔버스에 유채_43.1×51cm_2015~6
김세중_Dream the Eternity (영원을 꿈꾸다)_캔버스에 유채_50.3×72.9cm_2014
김세중_Dream the Eternity (영원을 꿈꾸다)_캔버스에 유채_27.6×45.4cm_2015

스펙타클의 대척점에서 ● 위와 같이 우리는 스펙타클이 난무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런 와중에 비교적 아담한 사이즈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김세중의 작품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렇게 축소된 스케일은 2014~2015년에 이르는 근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2008년, 20160130d년 개인전을 통해 선 보였던 작품들 중에는 제법 큰 것들도 있어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이유가 궁금해진다. 물론 작품의 크기가 소위 말하는 예술성, 미적 가치 등을 가늠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세상 무엇이던 어떤 결과물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생각과 선택의 순간들을 거치기 마련인 바, 게다가 예술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숙고의 시간을 거칠지는 그저 짐작만 할 뿐으로 그의 어떤 생각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지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다. 고대 조각상, 하늘과 바다를 극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소요되는 절대적인 시간과 이에 따른 제약 또한 고려될 수 있는 요소이기는 하겠으나, 작가는 굳이 거대한 스케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작가가 느끼는 이러한 불필요는 차치하고, 보는 이의 입장에서 그는 왜 한 없이 펼쳐진 광활한 하늘과 바다, 내가 지금 사는 시간과는 너무나 떨어져 있어 실제감이 전혀 없는 시공간에서 만들어졌던 조각상 등 넓은 화면에 어울릴 법한 것들을 작은 화면으로 옮겨 오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은 작품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 보도록 이끈다. 일반적으로 작품의 크기가 인체 사이즈를 넘어서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 보기 마련이다.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해 보기 위해 자연스레 뒤로 물러나 작품과 멀어지며, 수동적인 관조의 태도를 갖게 되곤 한다. 관조는 이렇게 본질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 두기를 통해 성립하며, 이를 통해 작품은 cm_수용cm_되게 된다. 그러나 김세중의 작품은 그와 반대로 보다 가까이 가까이 불러들인다. 작품 코 앞에 서서야 그의 화면에 펼쳐진 하늘, 바다가 무한대로 열리는 것을 cm_몸소cm_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은 스펙타클의 대척점에 서있는 것이다. ● 무한히 열리는 공간에는 사실 하늘, 바다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지도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의 작품에서 대지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그나마 대지와 근접한 것으로 오랜 시간 바닷물의 들고남에 깎이고 매끈해진 돌맹이들 뿐이다. 돌맹이 하나하나는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와는 거리가 멀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크기 하나하나는 아주 별 볼일 없기 짝이 없지만, 이 돌맹이들은 김세중이 천착해온 영원이라는 주제를 촉발시킨 소재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상당히 의미있는 대상이다. 백령도 바닷가에서 처음 만난 돌맹이들과 그 사이를 스치고 지나는 파도의 잔물결 소리에서 영원한 시간을 느꼈던 것을 시작으로, 돌이 주는 촉감과 파도의 청각적 심상이 주는 cm_지금, 여기cm_를 초월하는 영원성이 하늘과 바다로 확장된다. 해변 가까이 낮게 몸을 숙이고 바라본 돌맹이들은 멀리 보았을 때 볼 수 없었던 저마다의 크기와 모양, 색깔을 드러냈을 것이다. 작은 돌맹이가 품고 있는 듯 보였던 무한한 공간성과 초월적 시간성은 이후 작품의 주요 모티브로서 작동하고 있다. 마치 조그마한 돌 덩어리가 온 세계와 시간을 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작가는 굳이 거대한 스케일의 화면이 아닌 작은 화면을 통해, 본인이 몸을 숙여 돌맹이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만져 보았던 것처럼, 작품 가까운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작품 속 장소로 들어가게 한다.

김세중_Nature, Dream, Eternity展_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_2016
김세중_Nature, Dream, Eternity展_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_2016

어디에도 없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 김세중의 작품에서 하늘과 바다로 확장된 배경에 눈에 띠는 형상은 서양 고대 조각상들이다. 교과서나 미술사 서적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조상들이 바다 위를 부유하고 하늘을 날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을 떠도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을 기초로 작업한다. 조각상들이 있는 지역을 여행하면서, 이미지 상으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직접 보고 교감할 수 있는 특별한 각도나 상황을 사진에 담는다. 사진에 담기 전 조각상을 직접 만져보는 가운데 느낄 수 있는 촉감이 영감이 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해안가 돌맹이들에서 느낄 수 있었던 매끈하고 몽글몽글한 감촉에서 비롯된 돌의 물성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도 지속된다. ● 만진다는 직접적인 신체적 행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촉감의 감각적 수용을 통해 시각에 특권을 부여한 스펙타클에서 다시 한번 벗어난다. 다분히 시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회화 평면에 촉각적 요소를 끌어들이는 것은 김세중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자그만 화면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그렸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몸을 움직여 작품에 다가가게 만들고, 비록 화면을 직접 만질 수는 없지만 작가가 조각상들을 만지면 느꼈을 감각을 비록 눈을 통해서라도 따라가 보면서 만지게 되는 것이다. 다가가는 행위를 통해 작가에게도 보는 이에게도 작품은 대상화에서 벗어난다. 나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시대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화면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소외도 일어나지 않는다. ● 이렇게 직접 체험하기를 초대하는 그의 화면 속 공간과 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의 것과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고대 서양 어느 먼 나라에서 제작된 작품은 우리에게 영원성을 시사하는 점이 있다. 소재가 주는 견고함과 끊임없이 회자되고 현대 문화 속에서 되풀이되는 등장으로 인해 결코 소멸할 것 같지 않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바다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영원성을 사진을 통해 찰나의 순간으로 포착하고 캔버스 화면 위에 재구성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여기서 시간은 조각상이 제작되었던 먼 과거, 사진을 촬영한 시점, 그것이 화면에 재구성된 시간, 완성된 화면을 바라보는 지금의 시간,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시간 등이 중첩되어 있다. 과거는 현재로 회귀하고 현재는 과거를 참조하며 미래는 영원의 이름으로 지속된다. ● 공간 또한 이러한 중첩을 심화시킨다. 화면에 펼쳐진 하늘과 바다 또한 작가가 촬영한 사진에 기초한 것으로 그것을 배경으로 하는 조각상들이 놓여 있는 현실의 공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가 살고 있는 서울 하늘, 대한민국 서해 바다 위 또는 전혀 관계없는 공간 위를 조각상이 떠다니고 날아다닌다. 이런 비현실적인 시공간을 제시하는 이유로 그의 작품에 종종 cm_초현실cm_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곤 한다. 그러나 그가 화면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장소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Utopia)로 보인다. 변화하는 공간, 직선으로 흘러가버리는 시간, 그 속에서 세상 모든 것의 마모와 소멸, 이 모두가 발생하지 않는 cm_영원cm_이 지속되는 유토피아 말이다. 영원이라는 개념은 시간이 인간에 의해 사회적으로 점유되지 않은 개념이다. 시간표(time table)위에 짜여진 대로 생산, 노동, 휴식 등이 구분되고, 이것의 되풀이되는 순환과는 거리가 멀다. 일종의 유크로니아(Uchronia) 시간성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유토피아, 유크로니아는 현실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고 시간성이다. 그런 이유로 유토피아는 황당하거나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백일몽과 같은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세중의 이런 백일몽에서 멈추지 않는다. ● 유토피아적 장소가 김세중에 의해 화폭 위에 구현될 때 화면은 일종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즉 현실화된 유토피아로서의 장소가 된다. 헤테로(Hetero)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헤테로토피아는 cm_다른 장소cm_로서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립 불가능할 수 밖에 없는 여러 공간이 한 장소에 겹쳐져, 복수의 배치를 하나의 장소에 나란히 구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cm_정상cm_이라고 생각하는 공간과 시간의 배치를 거스르는 장소인 것이다. 인간이 역사를 통해 인공적으로 구획해 놓은 국가별 영토, 영해, 영공을 표시한 지도 속 어느 곳도 아니고, 인간이 부여한 단선적 질서 속에 묶여 있는 시간도 흐르지 않는 전혀 cm_다른 곳cm_. cm_헤테로토피아cm_ 말이다. 이렇게 헤테로토피아에서는 당연히 전통적 시간과 단절된 헤테로크로니아(Heterochronia)가 지배한다. 이 역시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시간성, 즉 유크로니아(Uchronia)가 현실화된 시간성이다. 낯선 것들, 낯선 장소들, 낯선 시간들이 한 곳에 모여 서로 관계하는 헤테로크로니아가 흐르는 헤테로토피아로서의 김세중의 화면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반(反)공간이다. 이 반공간은 때로는 열려있다가는 닫히고 닫혔다가는 열리는 것으로 작가의 초대에 흔쾌히 응한 자들은 들어갈 수 있지만, 머뭇거리며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열리지 않는다. ■ 김재도

Vol.20160130d | 김세중展 / KIMSEJOONG / 金世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