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구도-평면편

쉰스터展 / Schinster / installational photography   2016_0202 ▶︎ 온라인 상설전시

쉰스터_Curtain Wall_잉크젯 프린트_226×197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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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스터 홈페이지_www.schinster.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온라인 상설전시

이 작업의 이름은 「최종구도-평면편」이다. 사진으로 평면을 대하는 시각적 태도의 끝을 보여주는 것이 이 작업의 목적이다. 다시 말해, 평면일 수밖에 없는 사진의 본질을 극단적으로 반영하여 평면미학의 사진적 최종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영상 속에는 총 세 점의 작품이 있다. 첫 번째 작품은 이번 작업의 대표 작품으로서 벽면 전체를 원본 비율로 촬영하여 프린트 한 것을 벽면 위에 그대로 다시 붙이되, 상단만 고정시켜 나머지 부분은 손으로 들춰서 실제 벽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두 번째 작품은 벽면의 일부분을 원본 비율로 촬영하여 프린트 한 것을 액자로 만든 후 바로 근접하게 설치하여 피사체와 사진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쉰스터_Tilted Patch_잉크젯 프린트와 디이섹_68×51cm_2014

세 번째 작품, 「The White Wall」은 미술 갤러리 벽면의 일부를 원본 비율로 촬영하여 프린트 한 것을 액자로 만든 후 바로 그 벽면 위에 설치하였다. 「The White Wall」은 이 작업의 추상적 종착점에 해당한다. 수없이 많은 미술 작품들이 걸렸던 흔적이 남아있는 갤러리 벽면은 풍부한 형식이 살아있는 극추상 피사체라고 판단했다. 여기서 추상적 종착점의 대상으로서 완벽하게 스무스한 단색 평면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러한 대상은 개념적으로만 추상성을 극대화시킬 뿐, 최소한의 사진적 식욕(Photographic appetite)조차도 당길 수 없을 정도로 형식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로지 개념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와 같은 대상을 피사체로서 정당화시키는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다.

쉰스터_The White Wall_잉크젯 프린트와 디아섹_67×100cm_2014

이 작업의 최종 결과물은 대상과 원본 비율의 이미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실제와 이미지 간의 가역적 관계를 성립시킨다. 이것을 나는 '사진-시각적 가역반응(Photo-visual Reversible Reaction)' 또는 '사진-시각적 평형(Photo-visual Equilibrium)'이라고 부르겠다. 실제와 가상이 미묘한 물질적 차이를 두고, 거의 유사한 시각적 상태로 존재함으로써 두 존재 간의 긴장감이 형성된 공간을 완성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 작업에 대한 본질적인 설명, 즉 존재론적인 틀 안에서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설명은 인식론적 또는 의미론적인 내용에 있을 터인데, 작가로서의 설명은 끝까지 존재론적인 틀을 견지하고자 한다. 왜냐면 이 작업을 하게 된 최초의 동기가 내용(주제, 의도, 내러티브 등등)을 배제한 채 사진이 가진 형식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욕구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용 아닌 내용적 설명을 하자면, '내용이 아닌 형식으로부터의 출발을 통한 본질로의 회귀'와 그것을 통한 '예술적 자연스러움의 회복'이라 하겠다. ■ 쉰스터

쉰스터_창경궁 한 조각_잉크젯 프린트와 디아섹_38×55cm_2014

The Final Composition 2D ● The project is to ultimatize the two-dimensional aesthetics of photography to its extremity by photographing a surface, printing the image in original scale, and superimposing the print right on top of the surface to reach a visual equilibrium. ● In this project, I am interested in the visual essence of photography independent from theme and narrative. In other words, I am examining the ontological aspect of photography and its artistic value through form apart from content. ● One of the elements that constitute the ontology of photography is that it is, by and large, in the form of 'two-dimension.' I chose 'surface' as main subject to directly correspond to the cause of the project. Since final representation of photography is in two-dimension, surface can naturally reflect formal essence of photography in the most undistorted and straightforward manner. It is the only subject one can photograph with an absolute composition, the perpendicular angle. Pushing such a two-dimensional quality of photography to the most extreme degree, one can photograph a flat surface at perpendicular angle and print it in 100 percent scale as identical to the original surface. Limiting the composition to one perspective calls attention to what photography can do in terms of its primitive and quintessential function, photocopying. ● Photocopying is a mere visual reproduction of planar surface where there is little room for subjective artistry because compositional variations are completely limited to only one extreme angle. Ironically, however, such detachment from subjectivity provides a better chance to evaluate the subject's photographic visual power per se rather than semantic contents. ● As the composition necessary for photocopying is the one that allows no variations in angle, I call it, “Final Composition 2D” which refers to the ultimate degree of composition to express the visual essence of two-dimensional subject through photography. It is the simplest as well as the most extreme composition that photography can resort to when portraying a flat surface with minimum visual distortion. Therefore, simplicity and extremity are the two most important virtues of 'Final Composition 2D' as extremity helps simplify the subject to its essence. ● The next step is to install the print right on top of the original surface. The installation is a straightforward translation between real and copy at the same time and place to manifest what it means to exist as photography in bold presence of the actual subject. The original and copy create a surreal interaction as they reflect each other back and forth, which not only challenges the perception of real in confrontation with its exact copy, but also brings out the aesthetic value of the copy in face of its original. The subtlety lies in the fact that no surface in reality is perfectly two-dimensional. All surfaces are technically three-dimensional when looked closely. Accordingly, the installation is an illusive contrast between technical reality(3D) and virtual image(2D). ● The installation can vary depending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subject. Besides the most basic one, superimposition of copy on original, other methods such as juxtaposition, arraying multiple copies, partial or divided superimpositions are also available. ● 'Final Composition 2D' also plays a role as a medium for the reversible reaction between two-dimensional subject and photography. The reversible reaction is a concept borrowed from the area of chemistry. Since 'Final Composition 2D' photocopies a two-dimensional subject, the represented photograph can also be cognitively re-translated back to the original subject as they are both installed together in the same space. Thus, the original and copy exist in the 'Visual Equilibrium' although they are technically two different entities.

This project becomes location-specific as it comes into effect when the image is installed exactly where the actual surface exists. Such location-specificity can naturally unfold various semantic contents as each installation will develop its own narrative in relation to the context of the location. This proves that the project not only is an ontological approach to photography, but also contains epistemic elements based on narratives of the location beyond the artist's intention. ● In conclusion, 'Final Composition 2D' is to go all the way back to the basic as well as to push to the extreme to reveal the primary aesthetics of photography inherent as a two-dimensional medium. It also creates a space where original and copy co-exist to generate a magnetic field of artistic confusion, separation, and interaction. ■ Schinster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존재에 대한 시선 ● 필자는 '시각과 언표, 공간 속 기억되는 삶의 원형과 복원'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통해 쉰스터의 작업, 그 중에서도 「스트리트 드라마(Street Drama)」(참고: youtu.be/F18CE6DQ9iQ)를 중심으로 한 사진작업이 갖는 의의에 대해 분석한 바 있다. 특히 그의 구성 연작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스트리트 드라마」에서 적기와 읽기, 읽으면서 적어나가는 독특한 방식을 짚었으며 일종의 '무대'인 공간 특정적인 작업을 통해 유심하지 않으면 좀체 노출되지 않는사물이나 상황 따위를 찾아내 이미지화 한 이 사진 작업들은 쉰스터 식 해석의 실체적 배경이 된다고 적었다. ● 물론 당시에도 서술했지만 그의 작품을 접하는 다수는 마음으로 읽고 정신 위에 적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화자의 의중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홀로 자위하는 예술이 아니라 공감을 바람으로 하는 그의 작업의도에 부합하는 결과인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왜냐하면 쉰스터의 작업이 내면으로 침잠하는 개인적 미학만을 쫒는 경향이 강한 것은 아니라는 점, 질서와 균형이 엄밀한 선(先) 형식을 취하고 후(後) 내용을 담는다는 사실에서 그 실체에 대한 접근이 분리된 직관과 이성을 통해 예술성이 무엇으로부터 발현 될 수 있는지 진득하게 되묻는 탓이다. ● 어쨌든 시간을 거슬러 오늘에 재소환해 봐도 그의 작업은 공간 속 알 수 없는 등장 배우들의 삶이 제공하는 리얼리즘을 순간의 집합 아래 복원하는 것이자 궁극적으론 저장된, 공히 익숙한 사실성을 재생산함으로써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음엔 틀림없다. 그것은 '전달해야 할 것이지만 전달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것들'의 지속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익숙해 발견되지 못한 것의 발견 또는 기록'을 통해 삶의 지층을 덮고 있는 사고를 확장하기 위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고의 확장이란, 표피적인 현상의 적시가 아닌 존재성에 대한 고찰이라 해도 그르진 않다. ● 필자는 지난 파일을 뒤지며 "그의 작업들은 분명 이야기가 있고, 그렇기에 드라마처럼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는', 하나의 층위에서 유동한 채 존재 너머의 존재까지 열람하게 한다."는 표현으로 그의 예술이 지닌 가치를 정리한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지상적인 어떤 형상과의 결합 속에서 위치를 구성하는 방식으로써 자리하는 그의 작품은 기록의 재구성을 거쳐 리얼리티를 상정하고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프로세스는 사진 속 피사체의 형상만으로는 확인 불가능한 쉰스터만의 특별한 예술언어라고 할 수 있다고 갈무리했다. ●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후, 흥미롭게도 다시 한 번 쉰스터 작업에 대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 원래는 지난해 8월 비평에 포함되었어야 했으나 본의 아니게 누락된 영상작품을 재고찰할 수 있는 기회가 당도한 것인데, 이렇듯 옛 비평을 언급하는 건 같은 듯 다른 쉰스터 작업의 변별지점을 확인하고 읽는 이의 이해편의 차원에서 다시 기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 그의 영상작업들은 어떠한 의미부여가 가능할까. 사실 작가 쉰스터의 영상작품은 '영상작품'이라는 표현이 꼭 적절한 것은 아니다. 위 기술된 사진 작업과 시기를 같이하는 이 영상은 분명 렌즈라는 매체를 통해 형성된 이미지라는 점에선 동색을 유지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작품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는 게 옳고, 비현장적인 '상황'을 가시적 상황으로 치환한 감이 크다. 특히 「최종구도-평면편」에서도 쉰스터가 추구해온 사진미학의 본질, 즉 옛 비평에서도 언급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는', '하나의 층위에서 유동한 채 존재 너머의 존재까지 열람하게 하는 방식'은 유효하다.(영상 중 'SUPER'라는 단어를 들추는 장면을 그리드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듯 싶다) 대상에 관여하는 듯 직접적이진 않으며, 오히려 사진 속 대상이 실제 존재했다는 사실을 은폐하지 않는 정도의 냉정함만 있을 뿐인 지점도 거의 동일하게 엿보인다. ● 물론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는', '하나의 층위에서 유동한 채 존재 너머의 존재까지 열람하게 하는 방식'은 「최종구도-평면편」에 앞서 제작된 「최종구도-평면편: 낙엽」 (참고: neolook.com/archives/20120325a)에서도 읽힌다. 다만 「최종구도」라는 제목 아래 일련의 작품을 소개하게 되는 첫 시작인 이 작품은 철저히 '구도'에 방점을 찍는 작품이라는 점,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즉 구도자체가 하나의형식(피사체에 대한 응답이 아닌 그것을 보는 시각에 대한 응답)이라는 논리를스스로 확립시키는 초기 작업에 해당한다는 차이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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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낙엽이라는 자연물 하나로 존재성을 환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평한 바닥 위 낙엽, 금이 간 바닥에서의 낙엽, 노랗게 페인트가 칠해진 바닥의 낙엽 등은 구도가 사물에 대입되고 사물이 직관에 의해 구도에 대입되었을 때의 사물 존재감, 내용에 앞서 형식-형식이 곧 내용을 갈음한다는 작가의 논리가 물씬한 작업으로 손색이 없었다. 적어도 사진이 사진으로써 미메시스에 충실하던 것과는 거리감이 있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인식의 틈을 메우는 깊은 잔상과 보다와 읽다, 시공에 관한 새로운 복기, 사유의 울림이 강했다는 점에서 「최종구도-평면편: 낙엽」은 앞서 거론한 「스트리트 드라마」와도 맞닿는 측면이 있었다. ● 이어 발표된 「최종구도-평면편」은 다시 원류로 회귀하여 "사진으로 평면을 대하는 시각적 태도의 극한"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라는 작가의 발언을 증좌 한다. 이곳엔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본질을 탐구하려는 작가의 집요한 태도와 연구가 이입되어 있다. ● 작가는 「최종구도-평면편」이라는 제목의 범주에서 모두 세 개의 하위 연작을 보여준다. 우선 첫 번째 작품은 어느 낡은 건물의 실내 한 벽면 전체를 원본비율로 촬영하여 프린트한 것을 벽에 그대로 붙이되 상단만 고정시켜 나머지 부분은 손으로 들춰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각각 특정 장소를 찍은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층위의 시간이 중첩되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인 이 작품은 함축된 시간의 계층을 담고 있을 뿐더러 원본과 복제가 구별되지 않는 영역 속에서 존재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를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시공의 콜라주를 통해 다차원적인 시간성, 시간성으로 인해 희석되어버린 가시성, 실체와 이미지의 교란, 흔적과 교류되는 세월의 간극, (불특정한 누군가로부터의)공간 기억 속에 존재해온 이미지와 공적인 기억이 공유되면서 하나의 장소성마저 평평하게 만드는 것 모두를 아우른다. ● 이는 시각적으로 각인되는 공간이 시간의 흔적과 매우 강하게 교류한다는 점, 시점이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물리적 환경 자체를 전복하는 과정의 포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원 부재한 복제물이 새로운 원본으로 작동할 수도 있음을 엿보게 한다. 그 둘 사이에 놓이는 건 알 수 없는 긴장과 교류이며, 이는 결국 평형과 평면이다. 작가 역시 이에 대해 "대상과 원본비율의 이미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라며 "그 공간은 실제와 이미지 간의 가역적 관계를 성립시키고, 이를 '사진-시각적 가역반응' 또는 '사진-시각적 평형'"이라 칭하고 있다. "실제와 가상이 미묘한 물질적 차이를 두고 거의 유사한 시각상태로 존재함"으로써 두 존재 간의 이완을 좁히는 공간이 완성된 것이다. ●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본이 되는 게 아니라 어느 것이 원본이고 복제물인지 구별할 수 없는 이와 같은 구조는 벽면의 일부분을 원본비율로 촬영하여 프린트한 것을 액자로 만든 후 근접하게 설치, 피사체와 사진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한 두 번째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갤러리(그림손 갤러리) 벽면 일부를 역시 원본비율로 촬영하여 프린트한 것을 액자로 만든 후 바로 그 벽면 위에 설치한 세 번째 작업도 매한가지다. 이 모든 작업은 일종의 위장 혹은 고의적 의도인 카무플라주(camouflage)처럼 언제나 그 곳에 있었던 듯 위장한 원래의 장소성을 재발견하게 하며, 기존의 마티에르와 색, 얼룩, 흔적을 아우른 사물의 존재성과 그 존재성을 함의하는 시공간 등을 관통한다. ● 나아가 교묘하게 균형을 맞춘 채 배치된 사진은 또 다른 시간의 표식으로 앞선 '관통'된 것들을 끌어안으며 평면성과 존재성에 새로운 자문을 구한다. 쉰스터의 이와 같은 미적 태도는 사진을 통한 이미지에 대한 원형의 우위를 부인하는 것과 다름 아니며, 장소와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시간과 공간, 작품 사이에서의 긴장과 물질성 및 비물질성, 오브제와 텍스트, 실제와 사진 사이의 틈에서 평면성과 존재성, 실체와 이미지 간의 균열과 합일을 숙고하는 작가의 고민이 깊이 투영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 흥미롭게도 이 과정은 계산이라기 보단 일종의 직관작용으로, 순간의 직관작용은 작가가 사전 촬영하는 그 순간에 형성된다. 「스트리트 드라마」에서의 어느 임의적 장소, 「최종구도-평면편: 낙엽」에서의 외부적 상황, 「최종구도-평면편」의 공시성 모두 직관구조에 의해 현재의 기록과 과거의 기억이 교차하는 장으로 지정된다.그리고 결과적으로 사진이 지닌 형식의 프레임, 우연성의 기록, 자연스럽게 생성된 퍼포먼스적인 요소까지 시간성과 공간감을 통해 사진이라는 명사가 지닌 이전의 고착된 언어를 벗어나 쉰스터 식 예술성의 한 페이지를 열람케 한다. ● 그렇다고 위와 같은 쉰스터의 언어가, 그 언어를 최대한 풀어내려는 필자의 기술(記述)이 누구에게나 쉽게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혹자에겐 논리성만 부각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진, 영상, 예술 등을 비롯해 흔히 관심을 두는 나이, 경력, 화업 등등, 미술계 내부에 들어서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규정과 편견을 억누르고 본다면 뜻밖의 다른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 이처럼 쉰스터의 작품은 객관적 묘사가 아닌, 주관적 조작의 흔적과 과정을 통해 사진의 재현적 기능을 오브제로 대체해 실제와 층위를 접합시키고, 시공을 개입시킴으로써 각각의 특질을 존재화하지만, 결국 사진의 평면성을 통해 예술을 다시 대체하고자 하였던 사진이 '스스로 예술화'되는 단계를 명료히 드러내 보인다. 그런 점에서 구도의 실질적 시작을 알린 「최종구도-평면편: 낙엽」에 이은 「최종구도-평면편」은 사진의 본래 목적, 즉 눈에 보이는 것의 모방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 촉발시킴을 넘어 인식론적인 측면을 상당히 부각시키는 작업이랄 수 있다. 그리고 이 작업들은 그 남다른 차이를 지닌 채 순수한 원형적 모범의 기준에서 이탈하여 존재와 허구, 눈과 사물, 재현으로서의 기록과 인식으로서의 기록 아래 끝없이 순환하고 있다. ■ 홍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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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작업 예고展 ● 아직 젊거나 경력이 길지 않은 작가의 한 작업이 전시나 언론 등을 통해 공개되면, 그 작업에 대한 감상과 논의에 집중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다음 작업'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긍정적인 기대감의 표현일 수도 있으나, 일단 정형화된 호기심에 가깝다고 본다. 모든 호기심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특히 정형화된 호기심만큼 경박한 것도 없다. 그래서 작가로서 그런 질문은 구태의연하고 재미없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단순히 감정적으로 치부하지 않고, 진지하게 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경박한 것도 다루기에 따라 묵직한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그 질문이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 작업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입으로 그것을 논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형식이 없는데 머리 속으로 구상한 내용만으로 작품을 논했을 때, 말한 만큼의 퀄리티가 있는 형식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실존적인 문제다. 이것은 내가 '선(先) 형식, 후(後) 내용'의 작업방식을 엄수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다음 작업'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면 상황이 다르다. 완전한 body로서 완성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몇몇 작품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면 그것을 공개 또는 비공개하는 것은 전략적인 선택의 문제가 된다. 그런 식의 전략적인 고민은 참 싫다. 나는 지금 실제로 다음 작업이 몇 점 만들어져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식적인 공간에서의 텍스트를 통해 전략적인 고민을 또 하나의 미니 전시로 환기시켜보고자 한다. 이 세상 모든 구태의연한 것들은 예술적으로 건드려서 달리 표현해볼만하기 때문이다. ● 호기심은 시간을 당긴다. 삶을 더 바쁘게 만든다. 무언가 더 많이 하게 만든다. 그것이 바람직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사실상 한 개인이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작가로서 그러한 호기심에 대해 작가적으로 대응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도전이다. 그 대응이 지속가능한 것이라면 결국 적응이 될 수도 있다. 다음 작업에 대해 간단히 덧붙이자면 「최종구도-평면편」의 미시적 접근이라 하겠다. '공간'에서 '물질'로 연구의 시선을 옮겼다. 이제 「최종구도-평면편」은 거시적인 공간에서의 설치와 함께 미시적인 물질에 대한 표현까지 포괄하는 여정이 될 것이다. ■ 쉰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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