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GA

흑표범展 / Black Jaguar / mixed media   2016_0213 ▶ 2016_0228 / 2월14일,15일 휴관

흑표범_진도 체육관의 유가족 어머니를_삼베에 펜 드로잉_201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30510d | 흑표범展으로 갑니다.

흑표범 홈페이지_black-jaguar.com

초대일시 / 2016_0213_토요일_06:00pm

홍보 영상 / vimeo.com/151118135

후원 / 서울시_서울문화재단_고요서사

관람시간 / 04:00pm~09:00pm / 2월14일,15일 휴관

공간 해방 SPACE HAEBANG 서울 용산구 신흥로 130 haebang.org

서쪽 건너에 비치는 환시 - 1. 패스워드로 락(LOCK) 걸어두기 ● 이미 지나쳐온 과거의 시간들을 소환해내기 위해 나는 꼬박꼬박 숫자들을 채우며 살아왔다. 유년기부터 채집해놓은 무수한 숫자의 배열 중에는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다. 동네에서 가장 잘 살던 집 앞에 주차된 세단의 차량번호나 십수 년 전 헤어진 옛 애인의 삐삐번호, 수학 능력 시험 수험번호나 처음으로 당첨된 3등짜리 복권 숫자 따위는 애써 외우질 않아도 이미 나라는 사람에게 체화된 암호나 다름없다. 어떤 알고리즘적 개연성 없이 그것들은 여태껏 나의 계좌나 공인인증서, 각종 웹사이트의 패스워드로 쓰이고 있다. 개인만이 알고 있는 숫자의 질서들은 개인의 삶을 영구화시킨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숫자들을 하나둘 더듬는 일일지 모른다. 기념해둘 만한 날짜를 지정해 매년 기리는 것 또한 지나온 시간을 영구히 가둬두는 숫자의 역할일 것이다. 일기의 서두에는 늘 숫자가 쓰여진다. 실제로 겪은 일이나 그날 느꼈던 감정의 소회에 대해 온전히 묶어두고 자물쇠를 단단히 걸어채우는 것이다. 사는 내내 인간은 숫자에게 일정한 책무를 짊어주고 얼마간 그것에 기대어 자신의 생을 쓰다듬는다. 암호화된 기억들이 많을수록 삶이라는 저장고는 풍성해지는 법이다. ● 지나온 과거의 시간을 호출하고 소환해내는 것은 기록이 담당해왔던 일이다. 수많은 비망록과 회고록에 첨부된 도큐먼트들은 비가역적인 시간에 거세게 대항하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이 몸부림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죽어버린 날짜들에 대한 추모이자 애도이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노랫말처럼 우리는 매일 죽음을 향해 앞으로 건너간다. 건너가는 내내 멈춰보려 애를 쓴다. 하지만 물레방아는 멈출 수 없다. 시간이라는 폭포는 결코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은 앞으로 걷는 내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기이한 반동과 충돌 사이에서 발생하는 파편들이다. 모든 비망록에 깃든 정서가 폭발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미국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딘 에치슨(Dean Gooderham Acheson)은 비망록이란 쓰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쓰여진다고 말한다. 정치적인 맥락의 정의라고 할 수 있지만 기록을 통해 보존되는 삶의 영속성을 생각해볼 때, 그의 발언은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기록은 분명 우리의 보호막 내지는 투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 기록 행위는 활자와 이미지, 장면(scene)과 멜로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축적되어지고 있다. 기록된 축적물들, 그러니까 사후 이전에 발생된 유물들은 개인의 생몰이 다할 때까지 계속해서 쌓여간다. 기록의 서두나 표피에는 사는 동안 채집해온 숫자들이 넘버링 되어있다. 그레고리력으로 셈하는 날짜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개인이 지정한 숫자들의 연속일 때도 있다. 너와 헤어진 지 398일째라거나 금연 18일째, 임신 21주차 등의 표제가 붙은 기록은 특정한 테마 속에서 구성 전개의 높낮이를 가지며 진행된다. 특별할 것 없는 날들과 비슷한 모양새처럼 보이지만 기록하고 있는 본인만이 아는 특별한 리듬과 속도의 시기. 아침에 일어나 때때로 한 끼 정도의 식사를 건너뛰고 일정한 시각에 일을 마무리하고 귀가해 잠에 드는 것. 면밀히 살펴보아도 그다지 별다를 게 없는 날들이 지속되고 있는 것 같지만 기록자만이 체감하는 일상의 균열, 기울기의 변화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 시기에 저장되고 있는 기록들은 이전의 날들과는 다르게 서술되어 개인의 유물로 완성된다. 기록함과 동시에 개인의 생에서 유별난 날짜들로 분류되어진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날들은 결코 알 수 없을 세계로의 진입. 망각과 휘발이 없는 장소로의 이행. 그곳에서 기록들은 암호화된 날짜를 자물쇠 삼아 굳게 잠긴 것이다. 되새김질하면 할수록 더욱더 선명하고 견고해지는 므네모시네1)의 샘물처럼. 2. 깊은 물, 깊은 망각 ● 나는 슬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슬퍼하는 것이다.2) 바르트는 2년 4개월 동안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글로 남겨두었다. 그는 상실로 인해 파생되는 갖가지 감정들에 대해 무심하게 응대했으며 그것들을 함부로 진단하거나 정리하려 들지 않았다. 삶의 여정 내내 골몰했던 분석적이고 탐구적인 태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글줄의 나열. 그의 문장들은 액체 속에 담겨있는 것처럼 자주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착지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문장들은 멈추지 않고 어딘가로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명백하지 않은, 희미한, 소실점도 마침표도 없는 액화된 문장들. 점성이 하나 없는 그의 기록들은 깊고 고요한 웅덩이가 되어 고여있었다. 어머니에 관한 그의 짤막한 노트들은 애도의 형식을 띤 채 출간되었다. ● 잠식과 수장. '물'이 건네어주는 어떤 이미지들. 기원전 신화에서부터 지금껏 오랜 시간 피력되어온 물의 상징은 죽음이었다. 나의 시원에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영구한 세월 동안 물은 죽음이라는 이미지를 품고 현재에까지 흘러왔다. '망각의 강을 닮은 호수가 의식 있는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결코 눈을 뜨려고 하지 않는다. 로즈마리가 무덤 위에 잠자고 백합은 물결 위에 누워 있다. (중략) 모든 아름다운 잠잔다.'3) 에드거 포를 위시한 수많은 작가들은 물속에 잠겨 눈을 감은 인물들을 그리며 죽음을 표현했다. 바슐라르는 '물'이 가장 아름다움에 충실한 죽음의 물질이라고 했다.4) 물만이 가장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로(보호된 채로) 잠들 수 있는 물질이라고 여긴 그는 훼손이 적은 상태로(보존된 채로) 잠든 이미지가 마지막 기억으로 남겨진다고 생각했다. 물에 비치는 한 개인의 최후의 모습은 그 자의 마지막 시각적 기록이 되는 셈이다. 또한 물의 고요함은 죽음을 연상시킨다. 물의 깊이와 침묵의 부피는 비례한다. 물의 말수가 적어지는 것은 죽음이 조용히 찾아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말이 없어지고 잠에 드는 것, 영원히 깨지 않을 것, 가늠할 수 없는 적막의 무게가 차오르는 것이다. 물이 지닌 속성에 기대어 우리는 자주 죽음을 추억해왔다. 기실 죽음은 추억될 수 없다. 경험해본 적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으로 기인한 상실감을 죽음으로 해석할 뿐이다. 이별하고, 실종되고, 사라지고, 없어지고, 보지 않기로 하고, 보지 않고, 볼 수 없는 그 모든 상태를 우리는 죽음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모든 상실은 모든 죽음에서 비롯된다. ● 허나 나는 더 이상 물이 가져다주는 혹은 물로 인해 연상되어지는 죽음의 이미지들을 떠올리기가 버겁다. 유구한 세월을 지켜낸 물의 고유한 상징적 의미들이 언제부턴가 불편하고 힘겨워졌다. 그런 시기에 내가 떠올린 숫자의 배열은 다음과 같았다. 4-1-6. 사일육. 4월 16일. 2년 전 그날 이후로 물은 더 이상 상징이 아닌 실재한 공포로 다가왔고, 그것은 결코 아름다움이니 고요함이니 따위의 수사를 붙여가며 노래할 수 없는, 일종의 '사어'가 된 셈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조금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헐리우드 제작의 대형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들이 새삼 떠올랐다. 영화를 보는 내내 조여드는 긴장감이 오락적 재미를 최대치로 조성하는 영화들. 문득 무심하게 마우스 버튼을 누르며 보던 기사들 역시 떠올랐다. 내전 폭격으로 죽은 소녀의 시체 이미지, 지진과 해일 등의 재해로 파괴된 도시 이미지들. 클릭, 클릭, 소리를 내며 눈앞에서 스쳐 지나간 모든 이미지들이 자각몽을 일으키며 한동안 나를 불편하게 쫓아다녔다. 지금껏 보아왔던 모니터 화면에 비치는 이미지들은 모두 실재한 참상이자 현실이었다. ● 살갗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갗이 다치는 듯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 보드리야르는 매체를 통해 보게 되는 사건들을 3면 기사(사회면 기사)적 성격이라고 규정한다.5) 매체가 전달하는 정보는 완전히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 매개물에 의해 현실에서 멀어져있는, '기호'로 환원되어지는 실상이라고 말한다. 타국이나 외부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참상과 가난의 비극, 갈등의 현상을 이미지라는 지표로 확인하고 소비한다는 것이다. 매체가 전달하려는 현상의 장소들은 현실이 아닌 현실, 기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장소의 제공, 즉 그것은 현실의 현기증일 뿐이라는 것이다. 416이라는 암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혀져갔다. 쓰는 자를 지키기 위해 쓰이는 것을 비망록이라고 한다면 '패스워드 416'의 기록들은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채 지금도 천천히 수장되고 있다. 레테의 강 속으로 매우 깊게 말이다.

흑표범_영만이 어머니가 모으신 소년의 물건들_2016

3. 멀찍이 서서 응시하기 ● '패스워드 416'의 기록들이 담긴 종이박스는 광장 한복판에 버려진 채 눅눅해져갔다. 습하고 더운 장맛비에 흠뻑 젖은 박스 표면은 쉽게 허물어졌다. 볼품없게 변한 외관 덕에 사람들은 구석에 몰아두어야 할 문젯거리로 보기 시작했다. 단풍잎에 쓸리고 눈길에 얼다 녹길 반복하며 박스는 찢어진 구멍의 너비를 넓히다 못해 조금씩 내부의 기록들이 유실되기도 했다. 갖가지 프레임이 막무가내로 씌었다 벗겨졌다 하면서 박스 중심부에 단단히 고정돼있던 것들마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고속도로를 지나며 흘깃거리다 마는 전광판 위 숫자들. 이달의 교통사고 사망자 수 00명. 분명히 누군가는 죽었는데 누군가는 멀거니 쳐다보다가 마는 일. 그러한 무의식적인 치환들이 끔찍하게 일어나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는 일상. 개별자의 윤리관이나 성품과는 아무 관계없이 벌어지는 이러한 일상적 체험은 나의 문제도, 너의 문제도 아니지만 우리의 문제인 일들로 멀찌감치 떨어져 희석되고 있다. 그렇게 구석으로 몰아두고 기화시키는 날짜들 속에 2년 전, 그날의 일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 용산구 해방촌 인근에 위치한 공간 해방에서는 거세된 애도의 불씨를 살려보려는 예술가들의 기록들을 꾸준히 전시해왔다. 올해 2월에 전시된 흑표범의 展 역시 그날의 상실과 죽음의 상흔을 꺼내든 전시였다. 작가 흑표범은 광주항쟁과 관련한 전시를 준비하는 중에 세월호 사건을 맞닥뜨렸다. 죽음에 대해 슬퍼할 '겨를'조차 없이, 참사와 관련된 외부적인 논쟁들이 시시각각 매스컴을 장악했고, 그로 인해 정작 들여다보아야 할 상처의 중심부는 쉽게 잊혀졌다. 작가는 개별적 존재의 고유한 세계를 부정, 훼손 당한 상흔들, 끝내 어루만져지지 못 했던 그들의 상실에 착안해 작업을 진행했다. ● 전시장 내부에 앉은 관객들은 길 건너에 있는 작가를 본다. 검은색 옷차림의 작가는 진도 팽목항 체육관에서 가져온 담요를 덮은 채 앉아 있다. 전시장 내부의 통창은 TV 브라운관의 테두리를 연상시킨다. 창 너머에 보이는 작가의 행색은 체육관에서 쪽잠을 자며 아이들을 기다리던 부모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전시장 내부의 빔프로젝터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작가와 관객들은 인터넷 방송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교감한다. 준비된 퍼포먼스와 영상은 전시장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실시간으로 생중계된다. 작가와 관객 사이에 난 찻길로 차들이 움직이고 행인들이 지나다닌다. 작가의 모습은 마치 브라운관 속 영상처럼 멀리에, 너머에, 비현실적인 현실(3면 기사)처럼 느껴진다. 퍼포먼스를 알리는 작가의 인사말이 끝나고 유가족 어머니들의 육성이 시작된다. ● 세 명의 어머니들은 차례로 자신의 아이에 대한 추억을 되짚는다. 아이에 대한 추모의 육성이 들리는 동안 영상에서는 아이와 함께 거닐던 학교, 공원, 아이의 방 등이 비친다. 오디오와 비디오가 공감각적으로 맞물리면서 관객은 이윽고 장례적 행위에 동참하게 되고, 전시장 내부의 관객은 창 너머, 길 건너편의 작가를 응시하게 된다. 남겨진 사람, 상실을 안게 된 자가 저 너머에 실재해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멀찍이 서서 바라본다는 것. 결코 그들이 겪고 있는 슬픔의 정도와 타격을 알 수는 없지만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 그 깊은 침몰 속에 남겨진 사람들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 전시장에는 삼베 천 위에 유가족들이 그려져있다. 팽목항 체육관을 수놓은 오방색 담요들, 그 위로 넋을 잃은 채 구부정하게 웅크려있던 부모들이 있었다. 전시장 내부에 가득 차오르는 남겨진 자들의 목소리. 자전거를 처음 타던 아이를, 어렸을 적부터 몸이 약하던 아이를, 여행에 설레어했던 아이에 대한 육성 기록. 비망록은 쓰는 자를 지키기 위해 쓰인다고 했다. 죽은 아이를 잊지 않기 위해 진술하는 담담한 어머니의 목소리는 작가에게도 전이된다. 작가는 어머니들의 육성 사이에 자신의 자전적인 진술을 의도적으로 집어넣는다. 아이가 없는 작가 자신이 꿈속에서 아이를 만나게 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임에도 마치 실제로 자식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작가는 아이와의 대화를 들려준다. 작가는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노출시킴으로써 이입과 공감의 정서 쪽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면서 이국의 내전, 전광판 속 사망자 수, 타인의 고통이라고 단정 짓는 것으로부터 그들이 멀어지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유도를 통해 작가는 관객들에게 무심한 고요, 무서운 침묵에 대해 묻는 것일지 모른다. 공동체 속의 개인, 개인에게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서 우회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만나본 적 없는 팽목항 체육관의 부모들과 단원고 학생들, 아프리카 항구도시에서 성매매를 하는 십대 소녀들, 대한민국 영토에서는 볼 수 없던 종교적 갈등과 인종간의 불화. 유리창 너머에, 차들과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찻길 건너편에 앉아있는 '실재하는' 작가의 모습과, 그를 보고 있는 관객들, 또한 앞서 열거한 사람들은 병렬구조로 놓여있다. 작가는 아마도 이러한 공동체적인 의미의 스왑(swap)을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4. 서쪽 하늘에 비치는 환시 ● 직녀성(vega)은 한반도 지형에서 여름밤에 가장 잘 보이는 별 중에 하나다. 작가는 영만이 어머니의 자택 베란다에서 본 별의 이름으로 전시 제목을 택했다.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봄에서 여름으로 절기가 바뀌었다. 어머니는 매일 밤 베란다에 나가 한참 동안 직녀성을 쳐다보았다고 한다. 석 달이 넘은 기간 동안 밤마다 베란다에 서서 보았던 것은 별이 아닌 별에 비치는 아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영만이 어머니의 기록을 통해 그들의 소소한 일상을 가늠할 수 있었다. 매일 학교에 다녀오는 아들을 마중하고 배웅했을 자리. 그곳에 서서 아들에 관한 아주 세밀하고 촘촘한 기억들을 하나둘 꺼내는 어머니를 보면서, 작가는 추모는 기실 시간을 꼼꼼하게 되짚어가는 일임을 느꼈을 것이다. 바르트는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중개자가 된다고 말했다.6)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의 나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전기작가가 되고, 가장 넓은 영토의 유적지가 되는 것이다. ● 오늘도 나는 나의 죽음을 상상한다. 죽는다는 건 뭐지,라는 호기심과 공포는 매일의 동력과 허무를 반복해서 실어다 주었다. 죽음은 일상에서 가장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단어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살갗에 볼을 부대끼는 유일무이한 근거이기도 했다. 무자비한 살상의 풍경은 사는 내내 도처해있을 것이고, 가까운 지인의 부고를 대비해 나는 검은색 정장을 갖춰놓게 되었다. 우리는 매일 상실하고 있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잊혀졌고, 오늘도 하루만큼 죽음에 가까워졌다. 문제는 죽음이 아니다. 죽음 후에 남겨진 유품과 그들과 얽혀있던 사람들, 상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들, 그들이 겪을 시간들이다. 애도라는 감정의 반응에 기본적으로 수반되어지는 건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몸부림의 시간이다. 바르트는 애도를 회복이나 원상태로 복원해야 할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애도라는 감정, 혹은 애도 속에 머무는 자들의 상태는 아마도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는 것, 상실 그 이전의 시간으로 역행하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정상적인 반응일지 모른다. 잊지 않기 위해 쓰여지는 기록들, 기억이 많을수록 풍성해지는 삶. 우리는 상실 후 남겨진 자들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고, 지인은 나의 부고를 대비해 검은색 정장을 맞춰놓았기 때문이다. 입을 다물어버린 물이 아직 우리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7) 우리는 아직 온전히 애도하지 못 했다. 어쩌면 영영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차현지

* 각주 1)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기억의 여신. 2)『애도일기』, 롤랑 바르트, 2012, 이순출판사. 3)『이렌느』, 에드거 포. 4)『물과 꿈-물질적 상상력에 관한 시론』, 바슐라르, 2004, 문예출판사. 5)『소비의 사회』, 보드리야르, 1992, 문예출판사. 6)『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2012, 이순 출판사. 7)『물과 꿈-물질적 상상력에 관한 시론』, 바슐라르, 2004, 문예출판사.

흑표범_VEGA展_공간 해방_2016

VEGA ● 추위가 한창이던 몇 개월 전, 흑표범 작가를 만났다. 공간 해방을 통해서 세월호와 관련된 프로젝트에 꾸준히 기획하고 참여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직접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할 예정이라 하였다. 얘기를 나눈 후, 안산에서 약속이 있다며 총총 떠났다. ● 그리고 몇 달 후, 개막 퍼포먼스 소식을 받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토요일 오후 퍼포먼스가 열렸다.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갔던 나는 퍼포먼스를 보고 싶었지만, 졸리고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쏟아지는 비를 맞게 할 일이 엄두가 안 나 작가에게 겨우 눈인사만 건넨 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거의 도달했을 즈음, 비는 거짓말같이 그쳤다. ● 혼자서 다시 찾은 공간 해방. 작은 공간에는 교복과 양말, 양치컵 등 소소한 물건들이 걸려 있었고, 한쪽 벽에는 영만이, 시찬이, 예진이가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이야기가 정리돼 있었다. 삼베와 종이 위에 작가가 어머니들의 모습을 그린 드로잉이 벽면과 천정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세 어머니가 들려주는 세 아이 이야기와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모습은 미술의 역사에서 고전적인 주제 중 하나이다. 아들 예수를 잃은 마리아는 실신하거나 누군가의 부축을 받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혼자서 바로 서거나 설 수 없는 지친 상태의 모습으로, 참담한 표정으로 애통함을 표현한다. 독일의 화가 케테 콜비츠는 18세였던 둘째 아들 페터가 세계 대전에서 참전 20일 만에 전사한 후, 아이를 잃은 슬픔과 막막함을 그림으로 표현했고,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흑표범이 그린 진도 체육관에서의 어머니들의 모습은 그와 같은 고통의 도상이었다. 흘러나오는 눈물에 얼굴을 가린 어머니와 그녀를 감싸 안으며 지탱하는 다른 어머니,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어머니, 바닥에 엎드려 몸을 낮추고 간절히 기도를 하는 어머니가 거기 있었다. 그 처연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힘이 빠지고 눈물이 흘렀다. 이어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세 아이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과정을 읽으며 그 잔인한 마지막 만남의 순간에 분노가 치밀었다. 영상 속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웃다가 울다가 했다. 가슴 아픈 장면을 보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읽으며, 또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작업들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누구에게 의미를 가질까 생각했다. 어머니들에게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작가를 만나는 시간이 어떻게 남았을까. ● 주디스 허먼에 따르면 갑작스런 충격과 상처는 심리적 외상을 남기며,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해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사람은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로 고통받게 된다. 따라서 긴장감, 피로감 등을 느끼며 늘 위험을 경계하는 '각성' 상태를 유지한다는 '과각성',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마치 계속 그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게 체험하며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 일시적인 기억 상실처럼 억제시키는 상황 등 여러 증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세월호 유가족뿐 아니라 세월호 사고를 지켜본 사람들 중 다수가 느끼는 무력감, 공포, 그리고 외면하고자 하는 마음 등은 모두 이러한 증상과 일치한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안전한 환경 속에서 점차 조금씩 언어로 표현해내는 과정을 거쳐, 조금씩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안전한 환경이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안전하고 위협이 가해지지 않는 공간이라는 뜻도 포함하지만, 심리적으로 안정을 느낄 수 있는 환경, 즉 그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공감해주는 심리적 환경으로도 볼 수 있다. 그곳에서 조금씩 이야기를 시작할 때 충격으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지나 분노하고 슬퍼하는 여러 단계를 지나면서 상실과 상처를 돌아보면서 점차 치유의 단계로 나아갈 가능성을 갖게 된다. 흑표범이라는 낯선 예술가, 타인에게 가장 소중하고 친근했던 분신과 같은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과정이 어머니들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흑표범뿐 아니라 문인들이나 언론인들에 의해 4.16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여러 활동들이 펼쳐져 왔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이런 일들은 가족들에게 몸도, 마음도 힘들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것이고, 때로는 하고 싶으면서도 힘들어서 피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세상에서 잊혀질 것 같은 사고, 세상에서 잊혀질 것 같은 아이에 대해서 증명하고 증언하는 일이기에 그 어떤 일보다 시급하고 급박한 일이면서도, 때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사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아이라는 그 냉정한 현실이 무겁고 끔찍해서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할 것이다. ● 하지만 어머니들은 흑표범에게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관객에게도 전해진 그 이야기에는 엄마가 무섭지 않도록 사이좋게 저녁 운동을 가는 마음 따뜻한 아들 시찬이가 있고, 급하게 서서 아침을 먹는 엄마에게 제발 앉아서 먹으라고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하는 착한 딸 예진이가 있고, 가족들에게 요리를 해주는 자상한 막내아들 영만이가 있었다. 담담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 영상이지만, 그 속에는 꿈을 가졌던 아이들 각자의 고유성, 귀한 한 존재로서의 존엄이 담겨있다. 지금,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렵겠지만, 흑표범의 전시를 통해 확신한 것은 예술이 차가운 통계와 뉴스 속에 묻힌 이런 고유한 이야기를 살려내는 것, 즉 인간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라진 아이들을 고유한 존재로 되살려내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머니들의 삶에 잠시나마 기운을 불어넣고, 무심하거나 잔인하게 외면한 이들의 시선을 잡고,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것. ● 전시 마지막 날, 시찬이 아버님, 어머님, 영만이 어머님, 그리고 관객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그러한 확신이 더 강해졌다. 다 함께 모여서 흑표범 작가가 반대편 건물 주차장 바닥에 앉아서 펼치는 퍼포먼스를 보고 듣고 난 후, 긴 시간 대화가 이어졌다. 그 자리에서 궁금했던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낯선 예술가가 와서 이러한 일을 함께 하자고 했을 때의 소회가 어떤 것이었는지, 어떤 이유에서 참여하셨는지를 물었다. 돌아온 답은 단순했다.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라고. 이 답변은 중의적이다. 첫째는 '세상을 떠난 우리 아이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이고, 둘째는 '다들 세월호와 희생된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줄어든 상황이라 이 비극과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이다. 아이가 생전에 즐겨 먹던 음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변을 하던 부모님들은 간간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아들이 만들어주었던 두부 크로켓, 여느 10대들처럼 좋아했던 치킨, 이런 얘기와 함께 웃었다. 연극이나 전시, 문학과 방송을 통해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작업을 해온 관객들은 그간의 경험을 나눴고,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현장을 지켜왔다는 자원봉사자와 여고생의 활동에 그간의 무관심을 미안해했다. 자식을 잃은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지겹다고 악담을 퍼부을 만큼 우리 사회가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언론을 통해서 갖게 되었던 오해도 풀었고, 생각보다 꿋꿋하게 잘 버텨나가시는 모습에 응원도 이어졌다. 그래서 그 시간을 마치고 오는 길에 생각이 정리되었다. 공간 해방에서 머물렀던 2월 마지막 토요일 저녁의 순간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에게 기꺼이 감당해야 할 부담으로 남았다. 감정에 대한 공감이나 지원일 수도 있고, 관심을 지속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함께 그들이 찾고 있는 답을 찾는 여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나와 내 가족, 내 아이들을 위해서 기꺼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 무게를 생각하게 했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치유되기 위해서 정말 중요한 요건 중의 하나는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명확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자책하거나, 잘못된 사람에게 문제의 원인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스스로가 설득될 때 비로소 강박적으로 매여 있던 고통스러운 기억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어쩌면 '예술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부터가 틀렸을지 모른다. 지금 해야 할 행동이 예술일 필요도 없고, 예술로 무엇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더 중요한 질문은 지금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이다. 그것이 예술이든, 운동이든, 정치든 상관없다고. 그저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면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한다는 시찬이 아버지의 말씀처럼, 우리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해야 할 것이다. ■ 이수정

흑표범_VEGA展_공간 해방_2016

절망과 애도 사이에서 ● 『VEGA』가 열린 공간해방에 들어서자마자 세월호 참사 당시 진도 체육관에 계셨던 어머니들이 그려진 삼베 천들을 볼 수 있었다. 삼베 천들 앞뒤에는 이영만 학생의 어머니가 평소에 수집했던 아들의 물건들과 그 물건들에서 영감을 받아 작가가 만든 뼈 모양의 작업 몇 개가 어우러져 있었다. 삼베 천 반대편에는 흑표범 작가가 광주 민주화 항쟁 희생자들과 관련하여 제작한 낡은 시계와 영만 학생이 어릴 때 주어온 조약돌에 큐빅을 붙인 작업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시계와 조약돌 아래 창가에 붙은 작은 종이 위에는 어머니들의 육성과 작가의 자전적 기억이 교직된 영상이 맺혀 있었다. 이처럼 『VEGA』가 열린 공간해방은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고요히 공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공명은 가시적 요소에 한정되지 않고 흑표범의 퍼포먼스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공동체 상영 및 대화의 자리 같은 비물질적 요소들로도 이어졌다. 덕분에 『VEGA』는 좁은 공간에서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VEGA』를 통해서 직조된 관계만큼 외부로 확장될 가능성을 가질 수 있었다. ● 종이 위에 맺힌 영상에서는 세월호 참사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아이들에 관한 추억이 어머니들의 육성을 통해 재구성되었다. 곁에 없는 아이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어머니들의 비통한 육성을 들으면서 국가의 무능과 무책임으로 인한 재앙이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떠넘겨졌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 영상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어머니들의 육성 사이에 흑표범 작가의 꿈이 틈입한 것이다. 흑표범의 꿈속에서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아들은 그녀의 몸 안과 밖을 넘나들며 아이나 어른의 모습으로 연이어 나타난다. 흑표범의 꿈속에서 침묵을 지키는 이 아이는 불안한 여운을 남긴 채 그녀의 곁을 떠나려 하고 그녀는 그런 아이를 끝내 붙잡지 못하고 "아들! 아들!"이라는 외마디 절규만을 남긴다. 어머님들의 육성과 흑표범 작가의 자전적 기억의 교직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영역 밖에 있는 수많은 개인에게도 깊은 상흔을 남겼음을 다시금 되뇌게 했다. ● 우리는 한 가정의 소박한 일상을 빨래건조대에 매달린 이영만 학생의 유품과 삼베 천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교복, 어버이날 편지 같은 물건들을 통해서 반추할 수 있다. 본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머금어갔어야 할 이 물건들은 한 개인의 죽음과 함께 시간이 멈춘 유품들이 되어버렸다. 이 유품들은 세상을 떠난 아이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겨진 가족들의 붕괴된 일상과 그에 따른 절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전시장 벽면에 걸린 편지들과 교복이 맨몸으로 애원하고 울부짖는 어머니들이 그려진 삼베 천과 서로 맞닿지 않고 평행하게 배치된 것도 그러한 절망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아이를 상실한 절망은, 그것도 억울한 상실로 인한 절망은 그 어떤 것으로도 메꿀 수 없는 공백이다. 이 공백 속에서 가족들의 시간은 제자리를 맴돌 뿐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 위를 미끄러지며 일상을 쌓아가는 이들과 세월호 유가족의 괴리감은 점점 깊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흑표범이 빨래건조대에 자신이 만든 뼈들을 유품들과 함께 매달아 놓은 것은 공백 속에서 맴도는 유가족들의 시간을 기꺼이 타인의 절망을 함께 마주하고자 하는 개인, 공동체와 연결하고 이들의 존재를 거듭 확인하는 이정표 중 하나로 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 다음으로 광주 민주화 항쟁 희생자들과 관련하여 제작한 낡은 시계와 큐빅이 박힌 이영만 학생의 조약돌을 보자. 이 낡은 시계와 조약돌은 이영만 학생의 어머니가 베란다에서 매일 보셨던 직녀성 방향에 맞춰 배치되었다. 시침과 분침이 없는 낡은 시계는 흑표범이 광주 희생자의 사진을 5.18 재단에서 얻어서 시계에 붙이고 희생자의 훼손된 신체 이미지에 큐빅과 유화를 염하듯이 얹은 것이다. 이 두 작업은 세월호 참사와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연결 지었다는 점에서 홍성담 작가의 『세월오월』을 떠오르게 한다. 홍성담의 『세월오월』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5·18 광주정신으로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보듬고 치유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홍성담이 말하는 광주정신은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정신이다. 그러나 흑표범의 손길을 거친 낡은 시계와 조약돌은 홍성담의 말하는 광주정신 같은 거시적 측면 보다는 개인들의 고유한 미시사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흑표범은 5.18 희생자의 사진에서 어떤 거대한 담론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한 개인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침과 분침이 없는 낡은 시계는 초침만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초침 뒤에는 상흔을 물감과 큐빅으로 보듬은 광주 항쟁 희생자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초침만이 돌아가는 시계는 분명 어떤 시간을 재현하고 있지만, 시침과 분침이 없기 때문에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시간을 재현한다. 그래서 이 초침은 광주 항쟁 희생자라는 거대한 틀만으로 봉합될 수 없는 한 개인의 고유한 시간을 은유한다. 아마도 흑표범은 국가의 무책임과 무능으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한 생명의 유품인 조약돌도 5.18 광주 민주화 항쟁 희생자의 사진과 동일한 맥락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거대 담론이나 통계치, 보상금 몇 푼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개인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으로 말이다. ● 전시 기간 중 두 차례 진행된 흑표범의 퍼포먼스(영상 링크)는 공간해방 맞은편에 있는 빈 창고에서 진행되었다. 퍼포먼스가 시작되면 관객들은 공간해방에 마련된 작은 의자에 쭈그려 앉아 창가에 맺힌 영상과 흑표범의 모습을 동시에 바라보게 된다.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흑표범과 관객들의 시선은 흑표범과 공간해방 사이에 놓인 찻길 위를 무심하게 지나가는 자동차와 사람들로 인해 이따금 끊기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과 흑표범은 영상과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음성만은 계속 공유할 수 있었다. 흑표범은 팽목항에서 가지고 온 이불을 덮고 앉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관객들을 약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봤다. 그녀는 왜 그곳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흑표범은 자신이 몸으로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은 것이 몸을 비움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몸을 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나는 흑표범의 빈 몸에서 재현으로 채워진 몸과는 다른 차원으로 희생자와 유가족의 기억과 절망을 담아냈음을 그녀의 날 선 눈빛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이번 퍼포먼스에서 흑표범이 몸으로 무언가를 재현했다면 그만큼 희생자와 어머니들의 심신은 희석되거나 왜곡될 여지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퍼포먼스에서 흑표범이 자신의 몸을 담담하게 비운 것은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재난 앞에서 예술이 불능일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흑표범의 이번 퍼포먼스는 타인의 절망을 미력하게나마 기꺼이 품에 안아보는 예술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순환을 염원하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세월호 참사 같은 거대한 절망 앞에서 예술은 정말 불능일 수밖에 없을까. 나는 예술이 결코 어그러진 사회의 구조와 규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영역은 예술이 아니라 시민사회나 정치, 언론을 통해서 끊임없이 조율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율 속에서 우리는 거대한 절망에 대한 사회적 애도를 조금씩 이끌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가 사회적 애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성역 없는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참사 재발을 막기 위한 안전사회 구축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거대한 절망 앞에선 예술은 무엇으로 자신의 몫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거대한 참사 앞에 선 예술이 소집단이나 개인 같은 미시적 차원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망에 빠진 삶 곁에서 더불어 존재하는 예술은 사회적 애도가 흘려버린 수많은 개인의 고유한 삶을 온전히 보존하는 데 큰 힘을 보탤 수 있다. 이에 관한 사례 중의 하나가 바로 『VEGA』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VEGA』는 영만이 어머님, 예진이 어머님, 시찬이 어머님 곁에서 함께 상실을 애도하고 기억을 구술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애도와 미시적 애도 사이에 우열은 없다. 두 가지 애도는 각자의 역할을 신실히 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한 사회 안에서 이 두 가지 애도가 함께 발을 맞춰 앞으로 나갈 수 없다면 세월호 유가족의 절망은 애도의 과정에 진입할 수 없다. 세월호 유가족이 애도의 과정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숨을 거둔 아이에게 두고 온 삶에 대한 의지와 감정을 되찾지 못하고 계속 위태로운 상태에 빠져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사회적 애도와 미시적 애도가 각자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실조차 상실해 버려 상실 자체가 부재하거나 있다손 치더라도 무가치해진 비참한 세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흑표범의 『VEGA』는 분명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절망이 애도로 진입하는데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나는 흑표범의 『VEGA』에 감사의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또한 『VEGA』와 함께 해주신 어머님들과 관객에게도 깊은 감사의 마을을 전하고 싶다. ■ 홍태림

흑표범_VEGA展_공간 해방_2016

하나의 죽음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사랑과 기쁨, 고통과 슬픔, 체험과 인식 등, 아무하고도 닮지 않은 따라서 아무하고도 뒤바뀔 수 없는 그만의 소중하고도 고유한 세계의 소멸을 뜻한다.(박완서,『한 말씀만 하소서』,세계사,2004,54쪽) ● 2013년 나는 낡은 시계에 광주 항쟁 희생자의 사진을 붙이고, 그 훼손된 신체 이미지에 유화 물감과 큐빅들로 상흔을 메꾸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사진 속 얼굴을 보았는데 극단적인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낸 그 얼굴은 더 이상 얼굴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게 그 사람에 관한 어떤 정보나 연관도 없었지만 그 얼굴이 본래 지녔을 고유의 모습이 그리웠다. 그것은 같은 인간으로써 느낀 상실감이었고, 입 밖으로 쉽게 꺼낼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 다음해 4월 여객선을 탄 수백 명의 아이들이 천천히 수장되는 과정을 미디어로 지켜보았다. 수많은 의혹들만 남긴 채 아이들은 죽었고, 시스템은 무능했을 뿐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의미 없이 죽었다는 것을 애도할 기회조차 제거했다. 아이들의 죽음은 온갖 감정(혐오)정치와 자본논리로 희화화되고 왜곡되었으며, 죽음에 대한 슬픔은 무감 혹은 비공감, 반애도 속에 내쳐지고 있다. 결국 프레이밍된 논쟁만 남고 정작 아이들의 얼굴은 사라진 현 상황에서 광주와 세월호는 생명체에 잠재된 인간의 얼굴을 감지하지 못하는 국가에 의해 얼굴이 강제적으로 지워졌다는 점에서 매우 닮아있다. 그것은 각 개별적 존재의 고유한 세계를 부정당하고 훼손당하는데서 오는 차마 언어화되지 못하는 상실감과 그리움, 비애를 포함한다. ● 전시명 『VEGA』는 세월호 유가족인 영만이 어머니가 여름내 자택 베란다에서 보았던 별, 직녀성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매일 아침과 밤마다 학교에 다녀오는 영만이를 배웅하고 마중했었던 베란다에서, 별은 그리운 아들을 대신하는 위안이다. 지난 몇 달간 나는 그녀를 포함한 세 분의 유가족 어머니를 만나며 그녀들의 목소리를 녹음하면서, 거대한 사건 밑에 가려져 있던 평범하고 일상적인 기억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새겨진, 아이가 자주 가던 장소를 거닐고, 영상 속 아이의 몸짓을 따라하거나, 그 아이들과 같은 나이였을 때 내가 머물렀던 그리운 장소들을 되짚는 여정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꾸었던 꿈속 아들과의 이별이나, 이십년 만에 찾아간 고향집의 황량한 모습과 과거의 기억은 세 어머니들의 기억 사이를 백일몽처럼 유영하였다. ● 찻길을 사이에 두고 전시장 안팎에 마주한 관객과 나는 멀리 떨어져서 같은 목소리를 듣고 있다. 두 공간을 가로지르는 어머니들의 목소리는 아이와의 온갖 기억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나는 팽목항에서 가져온 이불을 덮고 유리창 안의 관객들을 바라본다.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는 유가족들의 몸짓을 수행하면서, 상실을 애도하고 그 기억을 함께 구술하는 그리움의 제의로써 무너진 공동체를 호출한다. ■ 흑표범

행사 2월 13일 18:00 퍼포먼스 『VEGA』 (50분) 2월 20일 18:00 젊은 작가 프로그램, 『나쁜 나라』상영과 토크_진행 / 홍태림(크리틱-칼) (180분) 2월 27일 18:00 퍼포먼스 『VEGA』 (50분) 2월 27일 19:00 관객 토크_진행 / 이수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영만이 어머니, 예진이 어머니, 시찬이 어머니, 시찬이 아버지(90분) * 공간해방 페이스북 페이지에 전시 후기를 올려주시는 5분과, 전시장에 비치된 노트에 세 어머니들께 응원의 메세지를 적어주시는 5분을 추첨하여 도서 "엄마, 나야."를 증정해드립니다. (후원 고요서사) * 퍼포먼스 시간에 맞춰 아프리카 TV에서 "공간해방"을 검색하면, 퍼포먼스에 흐르는 세월호 유가족 어머니들의 음성과 영상을 실시간으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Vol.20160213a | 흑표범展 / Black Jaguar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