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숲 The Mourning Forest

류현욱展 / RYUHYUNWOOK / 柳賢旭 / painting   2016_0229 ▶︎ 2016_0319 / 일요일 휴관

류현욱_애도의 숲_캔버스에 혼합재료_252×194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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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0229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 Gallery Bundo 대구시 중구 동덕로 36-15(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53.426.5615 www.bundoart.com

이토록 그가 기다려온 슬픔 ● 이젠 더 이상 나올 것도 없고, 나오더라도 마음 쓰일 일도 아닌데, 예전에는 종종 그랬다. 서재 여기저기에서 과거의 여자가 쓴 편지가 툭 튀어나오곤 했다. 이런 난감한 기록물은 비밀 장소에 옮겨두거나, 태워서 재로 만들거나, 아니면 찢어 버리는 게 상례일 거다. 나는 딴 방법을 쓴다. 편지에 적힌 글자 하나하나를 펜으로 덧칠 하듯 선을 그었다. 이처럼 쩨쩨한 내 행동은 편지라는 사물을 남긴 채 텍스트는 소멸시키는 짓이었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꽤나 익숙해진 개념으로 '팔림세스트'가 있다. 종이가 없었던 오랜 옛날에는 양가죽(palimpsest)에 글자나 부호를 썼는데, 이 또한 흔한 물건이 아닌 탓에 사람들은 썼던 글자를 지우고 또 쓰길 반복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전에 썼던 글은 눌려진 자국으로 흐릿하게 남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후기 구조주의 입장에서 우리 의식을 이처럼 덜 지워진 텍스트에 비유했다.

류현욱_광야의 구원자_패널에 혼합재료_72.5×72.5cm_2015
류현욱_Pieta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130.5cm_2015~6
류현욱_박쥐의 비행_캔버스에 혼합재료_193.5×130.5cm_2015~6

나는 화가 류현욱의 최근작을 팔림세스트라는 징후로 읽고 싶지만, 내겐 그럴만한 지적 깊이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단지 몇 안 되는 전공의사, 불문학자, 심리학자들만이 오독 없이 라캉을 이해한다. 미술 평론에서 가끔 보이는 라캉 인용문은 용감하고, 또 꽤나 유려한 시도였다. 하지만 나까지 그런 비평을 따라 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작가 류현욱의 회화가 뭘 덮었다가 지우는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본인의 퍼스낼러티가 매우 복잡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전시를 합작해온 여러 작가들 가운데, 그는 나와 비교적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이다. 그렇지만 난 류현욱의 회화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난 그가 살아온 이력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 이번 전시 제목이 『애도의 숲 The Mourning Forest』이다. 이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2007년에 연출한 영화 『너를 보내는 숲』에 덧붙여진 부제와도 같다. 주인공이 일본 시골의 어느 한 요양소에서 겪은 일을 담은 이 영화가 화가의 직접적인 레퍼런스는 아니다. 류현욱의 그림과 이 영화가 공유하는 것은 커다랗게 제시된 상황과 감정일건데, 떠나간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 맥락이 영화나 그림에 들어있다. 그는 지금껏 본인이 겪었던 감정을 자신의 관찰력으로 지우고 덮고 다시 그리면서 변증법적인 이미지를 생산해왔다. 내가 변증법이란 단어를 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스스로 펼쳐놓았음으로 인하여 소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자신의 도상을 새로운 감정의 요동에 기꺼이 내어 놓는다. 거기에는 새로운 이미지가 겹겹이 기다린다.

류현욱_위로의 숲_캔버스에 혼합재료_145.5×112cm_2016
류현욱_정박지에서_캔버스에 혼합재료_117×91.2cm_2015~6

작가는 현재 작업을 일종의 '우회로'라고 표현한다. 나는 우회로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지름길이 아니라, 생각을 다잡기 위해서 일부러 돌아가는 길이란 뜻으로 이해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값을 드높이게끔 해주었던 붓에 관한 집착을 버린다. 그는 붓질 이외에도 물감을 뿌리고 긁어내는 등 여러 방법을 섞는다. 잡아 찢거나 오브제를 붙이는 행위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데, 그가 생각하는 개념을 실현하기에 지금이 최적점이다. 레이어, 즉 물감을 겹을 쌓아 올리는 그리기가 류현욱의 예술을 설명하는 유력한 단어다. 하지만 그저 한 마디로 모두 담아낼 수 없는 여러 미적 차원이 「애도의 숲」에 드리워진다. 그러나 관객인 우리들로서는 그 제목에 이끌려 캔버스 안에서 경건한 숲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하면 곤란하다. ● 그가 그린 숲은 작가가 한 말을 빌자면, '형태가 없는 것에 형태를 부여'한 상징이다. 이 말은 역설적인 맛이 있고, 따라서 예술의 수사법으로 쓰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과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작가가 그리고자 한 인과관계가 해체되어 덧없는 흔적들은 매우 건조하게 설명된다. 작가가 표상하는 박쥐의 비행이나 뱀이 지나간 자취와 같은 일련의 스트로크들, 그리고 내가 덧붙인 몇 가지 예들, 가령 재즈 악상에서 블루노트와 프레이징의 전개, 대규모 하천 토목공사에 따른 강물 흐름의 변화, 경매회사와 화랑과 공공미술관의 결탁에 따른 특정 미술품 가격 상승 따위에서 관찰되는 파동(fluctuation) 현상은 설명과 기술과 예측이 가능하다. 낱낱의 움직임이 반복되면서 그 크기와 빈도수 또는 확률 사이에서 종형 곡선으로 설명되는 수학적 관계가 이를 증명할 수 있다. 이런 수식 패턴을 물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은 자기 조직하는 체계(Self Organizational System)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과학적인 절차와는 별도로, 하나의 개체가 전체를 지향하는 류현욱의 예술적 기획은 온당한 의미를 가진다. 추상에 엮인 조형성의 정도를 넘어 과잉 담론으로 단색화 경향을 포장하는 현 시점에서 류현욱의 추상성 시도를 나는 지지하고 존중한다.

류현욱_형태_캔버스에 혼합재료_53×72cm_2015

갤러리 분도에서 벌어지는 전시는 작가가 불안의 문턱을 막 넘어서려고 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가 함축해서 보여주려는 애도는 단지 슬픔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세계와 자아가 자유롭게 충돌하는 파동을 체험하는 일은 슬픔보다 환희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가 하나의 정전(canon)으로 삼는 작품이 「십자가 발치 아래에 있는 인물에 관한 세 습작」(프란시스 베이컨, 1944)이다. 이쯤이면 류현욱이 그처럼 그리고 뿌리고 긁어내기를 거듭하며 나타내려는 형상에 대한 결론이 나올 단계다. 그는 이 세계의 실체가 부조리와 공존하길 원할지도 모른다. 알베르 까뮈나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는 글의 문법으로 확정되어 있지만, 류현욱이 그려낸 부조리는 글로 된 개념으로 도저히 바꿔 설명할 수 없는, 선과 색과 면과 그리고 해체의 재조합이다. 이 글이 있건 없건, 그의 회화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애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정의 내리게끔 유혹하는 애매함에 닿아있다. 그래서 팔림세스트, 자기 조직하는 체계, 부조리 같은 개념이 불려 나왔다. 그 모든 보완적인 태도가 여전히 깃들어있는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의 그림은 기쁨과 슬픔에 스스로 통달한 경지에 다가섰다. ■ 윤규홍

Vol.20160229a | 류현욱展 / RYUHYUNWOOK / 柳賢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