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LL REMEMBER

김지현展 / KIMJIHYUN / 金知賢 / painting   2016_0318 ▶︎ 2016_0410 / 월요일 휴관

김지현_STILL REMEMBER展_안상철미술관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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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0318_금요일_02:00pm

작가와 함께하는 전시연계 프로그램 1차 / 2016_0330_수요일_11:30am 2차 / 2016_0409_토요일_02:00pm 장소 / 안상철미술관 1층 교육실 문의 / Tel. +82.31.874.0734 에듀케이터 박지하

관람료 / 성인 3,000원 / 8~19세,경기도민,군인 1,000원 미취학 아동 및 65세 이상 무료관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안상철미술관 AHNSANGCHUL MUSEUM 경기도 양주군 백석읍 권율로 905 Tel. +82.31.874.0734 www.ahnsangchul.co.kr

불완전함이 만들어내는 완전함 ● 김지현의 'still remember'전의 그림들은 그려졌다기 보다는 만들어졌다. 그리기는 뭔가 자연스러운 것, 만들기는 뭔가 인공적인 것을 떠올리므로, 자연에 가까워야 할 예술은 제작되기 보다는 그려져야 할 것처럼 생각된다. 또한 작가가 오랜 시행착오와 실험 끝에 창안한 제작과정은 나름의 매뉴얼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물은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질 것이 예상된다. 제작이라 함은 해당 작가가 아닌 그 누가 해도 비슷하게 나올 수 있는 투명한 방법론을 말한다. 그러나 김지현의 경우,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단계별 제작 과정이 확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결과를 내기는 힘들다.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도. 그 이유는 작가가 각 단계마다 우연의 요소를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그림의 판을 뺀다면 거의 손 안간 데가 없다는 작품의 옆면을 보면 얼마나 많은 층위가 섞여 있는지 알 수 있다. 대개 예술가는 자기가 올라간 사다리를 치우면서 신비주의 전략에 골몰하지만, 김지현은 굳이 그 과정들을 숨기지 않는다. ● 색칠하는 정도가 아니라 염색하기, 지우는 정도가 아니라 빨기 등이 개입되는 과정은 의도와 결과의 편차를 낳을 수 있다. 작가는 중간 중간에 물을 뿌리는 과정에 대해서도 식물을 키우는 듯한 마음으로 임한다고 한다. 그것들은 작가가 촉발하지만 스스로 자라나는 국면도 있는 작품인 것이다. 작품들은 우연을 더 많이 개입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작업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복잡하다. 과정이 많을수록 시간이 길수록 변수는 많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작품에 내재된 수많은 층들은 한층 씩 볼 때는 매우 불완전해 보인다. 각 층들은 명확한 색채와 온전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단지 차이를 지닐 뿐이다. 이 차이들은 계열을 이루면서 여러 시리즈를 낳는다. 불완전한 층들이 상호작용하여 만드는 전체가 작품이다. 부분과 전체가 시계부품이 맞춰지듯 작동하는 '유기적 총체가 아닌, 집합된 전체'(들뢰즈)를 말한다. 그것은 한 번에 휙 가는 것이 중요한 동양화에서 그다지 장려되지 않는 방식임에 틀림없다.

김지현_The place where you were_천에 혼합재료_170×200cm_2016
김지현_The place where you were_천에 혼합재료_100×80cm_2016

각각이 완전하다면 물리적으로는 얇으면서도 깊이 있는 효과를 낼 수 없을 것이다. 완전함은 하나의 중심과 통일된 체계를 요구한다. 한때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는 완전한 평면을 뽑아내기 위한 논리적 경쟁이지 않았는가. 그것이 결국 또 다른 의미의 완전함을 요구하는 공예적인 것으로 귀결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벽 또는 벽지와 잘 어우러지는 또 다른 벽 또는 벽지 장식 말이다. 모더니즘은 작가의 미학적 의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결정적 관점을 요구한다. 모더니즘에서 이러한 분석적 순간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시간성을 억압하곤 하였다. 그리고 시간성에 따른 서사 또한 억압되었다. 『형이상학』의 저자 리처드 테일러가 말하듯이, 시간성의 억압은 영원한 것에 고착되어 있는 형이상학의 특징이다. 그러나 김지현의 작품은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 중심들이 서로 '대리 보충'(데리다)하면서 표층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관객이 그 작품들을 볼 때의 지각과 기억은 매번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작가가 자연에서 느꼈던 바를 작품에 표현하는 방식이다. ● 자연은 하나의 고착된 장면이 아니라, 유동적인 장면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참조대상은 자연이지만, 원근법 같은 관념적 방식도 아니고, 사진과 같은 기계적 방식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세부가 정확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때와 그곳에서의 지각에 대한 기억의 풍경이다. 염색이 작업과정 중의 하나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김지현의 작품은 그 속에 한 번 푹 담궈졌던 것을 꺼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온전히 자기 안에 담아두지 못한 것을 꺼낼 수는 없다. 시간성이 억압되는 현대 문화에서, 넣기도 힘들고 빼기도 힘들다. 최초의 영감이 어떻게 구체화 될지는 불확실하기에 예술은 막막하다. 이러한 막막함을 걷어내기 위해서 개념이나 관념에 기대어, 여기 있는 것을 저기에 옮기고 저기 있는 것을 여기에 옮길 뿐인 편리한 '작품'들이 양산되곤 한다. 그런 것들은 대개 눈과 손만 움직여도 된다. 디지털 시대가 개막되면서 손도 아니고, 손가락만 부지런히 움직여도 대충 그럴듯한 이미지가 출력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것들은 분주하게 스크롤을 넘기는 손가락들에 의해 스쳐 지나갈 것이다.

김지현_Emerge_천에 혼합재료_112×145cm_2016
김지현_Emerge_천에 혼합재료_112×145cm_2016

그러나 예술은 소비문화와 달리 담갔다 꺼내는 과정을 요구한다. 즉 마음과 몸을 온전히 구한다. 도시에 살던 작가가 인근의 자연을 찾았던 이유도 몸과 마음의 안식을 위해서였다. 사고에서 사고로 이어지는 것보다, 안식 이후의 사고는 신선하고 활달할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서 얻은 선물, 즉 안식과 사유를 작품에서도 얻는 다면 좋을 것이다. 작가는 멀리서 숲이나 나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숲 안으로 들어간다. 숲 속에서 하늘을 본다. 작품 이미지는 나뭇가지 그물망 사이로 보이는 하늘과 비슷하다. 잔가지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그 사이의 공간에서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나무의 옷이 여러 빛깔로 드러난다. 무채색인 경우는 꽃과 잎이 다 떨어진 나목의 배경일까. 그 위에 떠있는 땡땡이 무늬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비쳤던 햇빛으로부터 왔지만, 그곳에서 들려왔던 소리, 냄새, 촉감 등등을 함축하는 도상이 되었다. 원형이라는 완전한 이미지는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 대개는 하얀색이지만 작품에 따라 색을 달리하며, 작품에 따라 외곽선도 번져 보이기도 하는 작은 원들은 풍경의 잠재적 원근감을 상쇄하고, 그것이 화폭 위에 그려진 평면임을 강조한다. 평면은 회화가 회화이기 위한 자기 지시적 조건이다. 김지현의 작품들은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투명한 창이면서도 자체를 가리키는 불투명한 창이다. 동시에 그것들은 작품의 복잡한 층에 한 층을 더 추가한다. 같은 크기와 형태의 이미지들의 편재는 동감, 특히 공기방울처럼 떠도는 느낌을 준다. 동감은 변화의 징후이다. 실재로서의 자연은 깊이와 두께가 있지만, 동시에 자연이라는 존재는 과정 중에 있기도 하다. 풍경에 내재된 잠재적 원근법이 수직의 움직임을 가진다면, 원들은 수평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여러 방향에서 밀고 당기는 힘이 작동하는 김지현의 작품은 부침(浮沈)과 표류(漂流)가 함께 한다. 맨 처음 바람의 길을 표현하던 타원형으로부터 온 원형은 다시금 그 내부에 풍경을 담고, 복잡한 외곽선 확장 또는 축소되며 변모를 거듭한다.

김지현_Still Remember_천에 혼합재료_100×830cm_2016

『The place where you were』 시리즈는 마치 오롯한 원에 들어간 풍경이 시간에 따라 점점 자라서 부풀어 올라 터지고, 또 다른 부분들로 분열하는 듯한 양상이다. 이 잔여물들은 또 다른 세계를 형성할 것이다. 작품 『emerge』처럼 풍경을 품은 물방울 같은 형상은 풍경 위에 있던 것들이 풍경을 담는 형국이다. 전체와 부분은 유기적 관계를 이루기보다는, 프랙털 도형처럼 자기상사적이다. 나뭇가지 자체가 나무를 축소한 자기상사적인 형태이듯 말이다. 출발은 자연이었지만, 김지현의 작품에는 나무나 숲의 온전한 모습은 안 보인다. 작가는 풍경의 한 장면이 아니라, 모든 방향을 겨냥한다. 사방팔방을 떠도는 그림 속 입자들처럼, 한 장면에 여러 방향을 담으려 한다. 그것은 그 풍경이 저 멀리에서의 관조적 시선이 아니라, 그 안에 있었던 지각과 기억의 표현이다. 여기에서 지각과 기억은 상호적이다. 기억이 지각을 깊게 하고, 지각은 기억을 생생하게 한다.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순간 어떤 기억이 떠오르고, 어떤 기억은 무엇인가를 지각하게 한다. ● '공간적 개념인 지각에 비해 시간적 개념인 기억'(베르그송, 들뢰즈)의 범위는 무한하다. 기억은 얼마 전의 것부터 계통발생학적 시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나뭇가지들은 비록 땅에 뿌리를 둔 계통수의 이미지와 거리가 있지만, 리좀처럼 끝없이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미시에서 거시에 이르는 시간의 그물망이 탐지된다. 다양한 선, 형, 색이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좌표는 기억이 활성화될 때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신경망부터 저 머나먼 우주에 떠있는 별자리까지 걸쳐있다. 생명에게는 일일이 경험하지 않아도 유전적으로 입력되어 있는 기억도 있을 것이다. 저 머나먼 별자리는 지금 여기의 좌표를 확실하게 해주기도 한다. 지각이 앞면이면, 기억은 뒷면이다. 김지현의 독특한 화면은 공산품인 광목을 사다가 물에 불려 빨고, 기름기 없애는 등의 작가가 직접 정련한 천 앞뒤로 모두 작업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지각과 기억을 모두 작품에 담으려는 의지가 형식적으로 관철된 것이다.

김지현_Traces_천에 혼합재료_89.5×89.5cm_2015
김지현_Traces_천에 혼합재료_130×130cm_2015

작가에 의하면 앞 뒤 작업은 거의 반반씩 소요된다. 농도로 친다면 앞면이 높지만, 물감이 쌓이는 과정이나 손이 가는 빈도수나 시간으로 친다면 뒷면이 높다. 뒷면에서 올라오는 색은 같은 색도 여러 뉘앙스로 변주된다. 시간이 걸러내는 만큼 공간도 걸러낸다. 먹지로 그어진 선들은 선명하지 않다. 구김이나 염색의 정도도 다르다. 공산품이 시간과 노동의 흔적을 지운다면, 작가는 또 다른 시간과 노동을 투여하여 그 흔적을 복귀시킨다. 바탕에서 일어나는 일은 본격적인 작업에서도 반복되어, 작품은 거듭된 시간의 켜를 덮어쓴다. 작품은 그자체가 흔적들의 연속이다. 그것은 같은 경험도 상황에 따라 기억의 강도는 같지 않음을, 기억의 강도에 따라 현재의 지각도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사각형 틀을 가진 작품들은 마치 단자(單子)처럼 어떤 시공들을 완전한 형식의 상자 안에 담아놓은 듯한 모습이다. 가로로 긴 작품은 풍경화의 틀을 갖췄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풍경의 요소들이다. ● 가로로 긴 작품이 여러 개 붙어 길이만 8미터가 넘는 작품 『still remember』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소요하듯이 작품을 보게 함으로서, 자연 안에서 있었던 체험을 작품 안에 있는 체험으로 변형시킨다. 여기에서의 공간감은 무엇을 담는 그릇으로서가 아니라, 자취를 따라 이동하는 시간으로 감지된다. 이를 통해 추상적 공간감은 구체화 된다. 작가가 지각한 것을 일일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필터를 거친 형상들은 외적으로는 부정확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정확하다. 기억될 수 없는 것들은 사라진다. 시간의 시험을 거친 것만이 실재의 계열에 속할 수 있다. 층층이 다른 결이 덮이고 지워지는 순간에도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에서 시간성은 감지된다. 기억의 판에 한 번 그려졌던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언제고 다시 활성화될 수 있다. 지진과 같은 격변은 저 깊숙이에 있던 층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강하게 지각되는 것도 다른 작품에서는 흔적이 되어있다.

김지현_Traces_천에 혼합재료_89.5×89.5cm_2015
김지현_STILL REMEMBER展_안상철미술관_2016

한 작품에서도 시간의 흐름이 있고, 동시에 놓여있는 여러 작품들 간에도 시간의 흐름이 있다. 강한 기억이 지각이라면, 흐릿한 기억은 망각이다. 기억은 지각이나 망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하랄트 바인리히는 『망각의 강 레테』에서, 기억과 망각의 관계를 재미있는 예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사랑 잊기 기술의 첫 단계는 애인의 온갖 단점과 그 때문에 자신이 겪어야 했던 사랑의 고뇌를 가능한 한 또렷이 기억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새로운 사랑, 새로운 불꽃이다. 모든 사랑은 나중에 오는 사랑에 지는 법이니까. 예술은 잡다한 기억이 아니라, 사랑처럼 강렬한 기억을 담는다. 그러한 기억들은 이성이 애써 잊으려 해도 몸과 무의식, 꿈속에 남아있으며, 의식의 헐거워진 틈을 타고 다시 떠오른다. 작업이 야기하는 깊은 몰입은 의식의 틈을 벌린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잘 묘사되어 있듯이, 의미심장한 기억이 계기는 우연적일 때가 많다. 그러나 기억이 온전한 형태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 기억을 이루는 요소들은 주체의 욕망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편집된다. 그것은 상상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같다. 그래서 기억은 예술의 수많은 소재나 주제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 핵심에 놓여있다. 기억은 김지현의 작품에서 수많은 방향으로 갈라지는 나무의 잔가지들처럼 미로적 양상을 띈다. 벤야민은 여러 저서에서 기억과 미로의 관계를 언급한 바 있는데, 기억이라는 시간적 현상이 회화라는 공간적 현상으로 번역될 때, 미로는 실로 적절한 이미지가 아닐 수 없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우리는 즐겨 길을 잃으며, 그 길 아닌 길, 그 수많은 우회로 속에서 더 풍부한 것들을 발견한다. 여러 화면에서 그물망을 이루는 잔가지들은 시간이 공간화 된 것이다.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잔가지들은 기억이 과거로만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은 김지현이 표현하고 있는 나무가 중력이라는 하나의 방향을 극복하고, 또 다른 양태로 펼쳐있거나 주름잡혀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위에 떠있는 원들은 더욱 유동적으로 움직인다. 닫혀있으면서도 열려있는 존재 그것은 예술이 닮고자하는 바로 그 자연의 속성이다. ■ 이선영

Vol.20160319f | 김지현展 / KIMJIHYUN / 金知賢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