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술된 풍경_흐르는 언어

주랑展 / JURANG / painting   2016_0323 ▶︎ 2016_0329

주랑_부안_변산반도_캔버스에 유채, 연필_130.3×162.2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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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032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여행의 세 가지 기술: 파편적 풍경들의 유희 ●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여행은 곧 예술이다. 기차역이나 항구와 같이 떠남과 돌아옴이 있는 장소를 사랑했던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작품을 통해 남프랑스를 보여주고 싶었던 반 고흐(Vincent van Gogh), 데생을 여행의 살핌과 같은 것으로 보았던 존 러스킨(John Ruskin) 등.. 많은 이들이 여행을 통해 삶속의 예술을 보여주고자 했다. 작가 김현주(주랑)의 여행도 그러하다. 역사 속에서 무수히 떠났던 선배들처럼 주랑은 떠나고 만나며 여행의 기억을 그림으로 옮겨나간다. ● 그러나 주랑의 여행은 과거의 아날로그식 여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가의 여행은 직접 체험한 여행과 화면 여행, 다른 사람의 여행을 대신하는 세 가지 풍경으로 그려진다. 주랑은 이 세 가지 여행의 기술을 통해 풍경에 내재하고 있는 기억의 이미지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흔적을 드러내고자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선형적 시간을 그려 내기보다 어제와 오늘, 역사적 사건과 현재가 겹쳐지는 중첩된 시간을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풍경 속에서 익숙하지 않은 것, 가능하지 않은 것, 그래서 새로운 어떤 것들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다. 때문에 주랑에게는 여행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멋진 곳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역, 『여행의 기술』, 청미래, 2011, p.308.)는 점을 말하고 싶어 한다.

주랑_안개 자욱한 하루_캔버스에 유채, 연필_130.3×162.2cm_2016
주랑_서술된 풍경_공존_캔버스에 유채, 연필_193.9×390.9_2016

첫 번째 여행의 기술: 체험 여행 ● 주랑의 작업은 직접 체험한 여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상주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부안과 군산을 처음으로 여행하면서 받았던 인상을 풍경으로 담아낸다. 「어수대 호랑이」는 바위와 폭포, 짙은 초록의 나무들, 길 가다 만난 꽃 등 부안에서 만난 여러 대상들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화면 안에서 개연성 있는 연속된 풍경을 찾아보기 어렵다. 풍경은 파편적 요소로 흩어져 있으며 모두 제 각각 말을 걸어온다. 마치 전통 민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호랑이는 작가가 느꼈던 산의 형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꽃의 줄기처럼 보이는 푸른색의 선들은 강줄기를 형상화한 것이다. ● 이처럼 작가의 표현과 관람자의 해석은 빗겨나간다. 최초의 발화자(작가)로부터 전송된 메시지는 수용자에 의하여 다르게 해석된다. 하지만 주랑은 이러한 혼돈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조작하면서 "이상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때문에 작가의 풍경은 하나하나 재현된 것이면서도 결코 재현된 풍경으로 읽히지 않는다. 흩어진 기억의 퍼즐처럼 주랑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 또한 군산 여행을 통해 그려진 작품들은 역사의 흔적들 위에 현재의 시간을 중첩시켜 놓은 작업들이다. 조선군이 임진왜란 때 명량대첩에서 승리하고 처음 선착했던 고군산진의 지도나 1870년대 군산의 옛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전라우도 임피현지도' 등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해 작가는 옛 군산의 모습 위에 현재의 풍경을 겹쳐 그린다. 이처럼 주랑의 여행은 현재의 시간과 공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체험적 사실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주랑_삼봉산_삭제된 영역_캔버스에 유채, 연필_91×116.8cm_2016
주랑_그 너머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6

두 번째 여행의 기술: 화면 여행 ● 주랑의 또 다른 여행인 '화면 여행'은 디지털 매체를 통해 경험하는 일종의 가상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가상 여행은 광학 테크놀로지가 출현하기 시작했던 19세기의 시각문화로부터 시작해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확대되고 있다. (주은우, 『시각과 현대성』, 한나래, 2008, pp. 413-422.) 시각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신체로부터 시각 경험을 분리해냈으며,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부재한 장소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작가 역시 자신이 부재한 장소로의 여행을 시도한다. 그는 우연히 접하게 된 다큐멘터리 '위대한 알프스'를 보고 미디어 안의 풍경에서 오는 감각 작용을 옮기고자 하였다. 카메라의 각도와 효과로 실제보다 더 스펙터클하게 보여 지는 알프스의 풍경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숭고한 풍경이다. 그러나 그러한 풍경은 작가 내면의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지각대상 주위에 모여드는 연상 작용" (발터 벤야민, 김영옥, 황현산 역,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길, 2010.)을 통해 보다 능동적으로 구축된다. 다시 말해, 작가의 무의지적 기억과 카메라의 의지적 기억의 영역이 뒤섞여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 「서술된 풍경_공존」은 작가가 디지털 매체의 수용자가 되어 잠재된 이미지를 표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림 안에는 알프스 산을 비롯해 등반가, 비행기, 말을 탄 사람, 그리고 영상의 자막 등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서술되어 있으며, 그 사이사이 기억되지 못한 의식의 틈(무의식)이 그라데이션으로 표현된다. 주랑의 그림에는 이처럼 그라데이션으로 표현된 색면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작가는 그것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 지점, 혹은 상실된 기억과 재생된 기억의 틈을 보여주고자 한다.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말대로, 어쩌면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현실보다 훨씬 더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알랭 드 보통, 앞의 책, p.26) 그런 면에서 작가에게는 화면 여행만큼 미지의 장소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미디어 여행 안에서 작가는 타자의 시선을 체험하고 그것을 자신의 시선과 중첩시킨다.

주랑_소방관 C-문장대_캔버스에 유채, 연필_145.5×112.1cm_2016

세 번째 여행의 기술: 타자의 여행을 여행하기 ● 이제 세 번째 여행으로 떠나보자. 다른 사람의 여행을 대신하는 이 여행은 SNS, E-mail 등을 통해 섭외된 사람의 여행 기록(글, 사진, 블랙박스 영상 등)을 모으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작가가 그들의 여행을 대신 한다는 내용이다. 대신하는 여행에는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동경이 담겨져 있다. 여행자의 시선, 여행자의 취향 등이 기록된 자료들은 여행자의 루트를 알아가는 단서를 제공하며, 타자의 사생활을 지켜보는 듯한 묘한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상상 속에서 제약과 자유의 경계를 노닐며 그곳을 여행한다. 이렇듯 대신하는 여행은 오늘날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소셜 미디어로 인해 가능한 것이며, 미디어를 통해 확장된 공간은 다양한 관점을 소통할 수 있는 공유의 장이 된다. ● 「소방관 C-문장대」는 소방관 C가 여행하면서 촬영한 사진을 보고 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최대한 소방관 C의 시선에 따라 절제된 풍경을 보여주고자 한다. 사실 평면의 사진으로 접하는 타자의 여행은 보는 사람에게는 분절된 기록이며, 때문에 어떤 긴장이나 감정 이입이 쉽게 일어날 수 없는 건조한 풍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분절된 기록 틈틈이 여행자의 열정, 희망, 즐거움, 여유 등을 찾아내고 드로잉을 통해 사이사이 보이지 않는 틈을 채워간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작가는 다른 사람의 여행에 투영된 작가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다.

주랑_플라스틱 산수_캔버스에 유채, 연필, 3D 프린팅 펜_45.4×53cm_2016

그리고 또 다른 여행을 향하여... ● 그런데 2016년 이번 전시에서는 새로운 작업들이 눈에 띈다. 주랑은 지금까지 연필을 사용해 부드럽고 지워지기 쉬운 기억의 흔적들을 드로잉하고 채색해 왔는데, 「플라스틱 산수」에서는 3D 프린팅 펜 작업을 통해 보다 강렬하게 응축된 심상을 보여준다. 첩첩이 쌓인 산은 마치 검은색 바윗덩어리처럼 뭉쳐져 있고, 그 위로 도로와 길, 현대의 구조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우주의 어느 소행성 같아 보이지만 한국의 풍경이다. 하지만 이 풍경은 실존하는 어떤 곳의 모습이라 할 수는 없다. 작가는 여행의 기억을 뭉뚱그려, 경험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풍경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주랑은 우리가 말하고 기억하는 모든 것이 어떤 총체적 감정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의 새로운 풍경은 기억의 덩어리, 망각의 덩어리, 감정의 덩어리들이 혼재된 총체적 공간이 된다. ●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대로 여행을 통해 실험을 해나가는 주랑의 작업은 분명 바깥을 통해 내면을 탐사하려는 시도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여행이라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황야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속의 황야를 탐색하는 것"이며, 주랑의 작업 역시 현대 문명의 이기와 욕망들, 다층적 관계 속에 내던져진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고자 하는 사유의 작업인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경험과 기억, 망각, 타자의 시선, 과거와 현재 등 나를 둘러싼 풍경들을 마주하게 된다. 주랑의 작품을 들여다보며 우리는 '숨은 그림'을 찾듯 나만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볼 수 있지 않을까. 현대의 미디어와 여행, 그리고 사유의 접점에서 앞으로 펼쳐질 주랑의 작품을 기대해 본다. ■ 안영주

Vol.20160323d | 주랑展 / JURANG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