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화展 / PARKMIWHA / 朴美花 / sculpture   2016_0401 ▶ 2016_0413

박미화_헌화_종이에 목탄_108×73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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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040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 cafe.daum.net/gallerydam

아래로부터의 숭고 ● 2016년에 담 갤러리에서 전시된 박미화의 작품들은 최근 몇 년 새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마치 오랜 세월의 더께를 둘러쓴 사물의 면모가 있다. 바닥과 벽, 계단 위, 창턱 등에 배열된 크고 작은 것들은 새로운 것만이 진리인 세상에서 '오래된 미래'같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여러 겹 가해진 시간의 흔적은 예술작품이라는 독특한 인공물에 우연과 자연을 포함시킨다. 지상의 작은 피조물들을 닮은 그것들은 어떤 논리와 전략, 노동과 솜씨의 결과물이 아니라, 오래 전에 익명의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거의 자연의 산물로 변해 버린 듯한 모습이다. 그것들은 오래된 벽이나 바닥, 바위나 나무껍질만큼이나 단순하게 다가온다. 미학은 단순함을 '기교 없는 합목적성'(칸트)이라고 정의한다. 장 뤽 낭시에 의하면, 그것은 다른 것을 형태화하는 대신, 대상을 갖지 않은 채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의 형태를 갖추는 형태이다. ● 그것은 스스로를 이미지화하는 이미지, 다른 것의 형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형태를 구성하는 형태이다. 봉헌은 그저 단순하게 그 모든 것이 우리 앞에 제공되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박미화의 작품에서 단순함은 미가 아닌 숭고와 연결된다. 아이가 빚은 송편처럼 소박한 형상이 종종 등장하는 작품들이 숭고하다면,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숭고에 해당될 것이다. 초자연과 인공 그 중간쯤에 있을 법한 사물들의 이름과 의미는 불확실하다. 우연히 발굴된 유물같은 사물에는 막 생산된 것 특유의 날카로운 윤곽이나 뻔지르르한 표면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양한 재료가 사용된 입체와 평면 작품들은 대부분 변색되어 있고, 닳아있고, 더럽혀져 있으며, 손상되어 있다. 또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서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들과 느껴지는 분위기는 주체와 타자, 여성과 아이, 식물과 동물, 희생과 봉헌, 상념과 애도, 삶과 죽음 등이다.

박미화_어머니_잣나무, 목탄, 아크릴채색_154×42×30cm_2016

한 공간에 놓여진 존재들 사이에는 심연과도 같은 불연속성이 있다. 흙과 나무, 합판과 종이, 목탄과 아크릴 등의 재료가 사용된 테라코타, 조각, 드로잉, 회화 등 여러 장르와 재료가 사용된 각각의 작품들을 가느다랗게 이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성이다. 「어머니」라 이름 붙여진 기념비적 작품 외에도 모성은 편재한다. 모성은 보이지 않는 중심을 이루면서 전시장 여기저기에 띄엄띄엄 놓여 있는 존재들의 내적인 관계를 만든다. 그 모성은 그 기원을 가늠할 수도 없는 오래된 여성상에 가깝다. 엘렌 식수는 '여성 속에는 늘 많거나 적거나 간에 약간의 어머니가 있다'고 말한다. 흙으로 형상화한 근원적 여성은 인간 뿐 아니라, 미소한 식물과 동물 등 지상의 모든 타자들을 포용한다. 작품 속 여성은 이 지상에서 벌어진 경악할 만한 사건들에 반응한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그다지 극적이지 않다. 박미화의 작품에서 여성은 초월적이지 않다.

박미화_감모여재도_종이에 목탄, 아크릴채색_106×78cm_2016

그녀는 좋은 의미로든 아니든 지상에 얽매여 있다. 작품 속 여성은 슬픔을 어루만져주기 보다는 슬픔을 배가한다. 거기에는 재현하기 힘든 슬픔이 있다. 미학자들이 말하듯, 아름다움은 재현될 수 있지만 숭고는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니까. 물론 박미화의 작품에는 슬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성이라는 실로 포괄적인 실재를 제외한다면 어느 하나로의 환원은 그녀의 작품과 거리가 멀다. '헌화' 전에는 애도와 추모가 있지만 무겁지만은 않다. 전래의 문화에서 간편한 제사를 위한 사당도(祠堂圖)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는 화병에서 폭발하듯 튀어나온 부스스한 꽃다발과 저 멀리 보이는 촛대가 장중한 추모의식을 대신한다. 이 전시에서 많이 사용된 매체인 목탄은 새까맣게 타버린 마음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매체로 다가온다. 그러나 박미화의 작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우리가 죽음을 잊는다면 그것은 진짜 끝이다.

박미화_새_조합토 산화소성 1220도_47×25×19cm_2015

그러나 예술이라는 방식을 통해 다시 불러들여진 죽음은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직접적인 도상은 식물이다. 낙엽이 져도 매해 어린잎을 다시 내는 식물은 부활하는 존재이다. 죽음은 단순히 삶에 대한 경고이기 보다는, 진지한 삶에 필요한 균형추이다. 죽음을 잊고 사는 삶은 가볍다. 삶과 죽음의 긴밀한 관계설정이라는 점에서, 예술은 이전 시대에 종교가 맡았던 역할을 세속적인 사회에서 수행한다. 작품 속 인물은 작가를 닮았다. 일종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그림이라는 거울 속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을 위한 빈 거울이 아니다. 많은 칼집이 나 있곤 하는 박미화의 작품에서 거울은 이미 금이 가 있다. 작가는 금간 거울에서 희미하게 등장한다. 자기인지도 모른 채. 지극히 현세적인 현대사회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애써 잊으려고 한다. 그저 살아생전에 열심히 생산하고 쓰고 죽는 것이 목표일 따름이다. 그것이 '풍요의 사회'를 견인하는 원동력이다.

박미화_피에타_조합토 산화소성 1220도_45×43×19cm_2015

작품 「화분」에서 칼로 그어져 그려진 여성은 평화롭고 소박한 일상을 영위하는 여성상과는 거리가 있다. 테라코타로 만들어진 여성상은 입체작품이지만, 얼굴은 선으로 그어져 있다. 힘주지 않고 쓱쓱 지나간 선들은 볼 때 마다 달리 보이는 미묘한 표정을 남긴다. 마치 모래사장 위에 그린 동그란 얼굴처럼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는 빈 서판 같은 얼굴이다. 전적으로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이전의 것이 흔적으로서 남아있는 박미화의 작품은 지금 막 새기고 있는 것 역시 하나의 흔적이 될 것임을 인식한다. 전통은 물론 자연으로부터의 분리와 자율화를 꾀했던 문화가 낳은 비극들이 줄을 잇고 있는 현재 타자들과의 관계망을 다시 구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서 사회를 다시 발견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장과 달리, 예술과 사회는 반대 항에 놓여있지 않다. 예술과 사회는 꽃과 뿌리의 관계다.

박미화_화분_나무판에 목탄, 아크릴채색_61×41cm_2015

작가는 홀로 작업하지만, 작품은 타자의 것이다. 타자들과 함께함은 독백의 문화에서는 낯선 것이다. 시작은 박미화가 하지만 작품을 이끄는 주체는 타자(자연, 무의식, 몸, 신)들이다. 모성은 주체 내에 타자를 포함하는 대표적 존재이다. 또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타자의 영역에 있는 최초의 언어를 배운다. 박미화의 작품에서 타자와의 대화는 미소한 사물이나 자연은 물론, 죽은 이들까지 포함한다. 물론 그것이 타자인 한 재현되기 힘들다. 그것은 숭고처럼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주체가 중심이 되는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독백이라면, 타자는 대화를 통해 점차적으로 확실해질 뿐이다. 박미화의 대화적 작품은 독백의 세계가 구축해 놓은 아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피부 빛 합판 위에 수많을 칼질과 함께 새겨진 것은 말과 사물이 하나가 된 텍스트로서의 육체이다. ● 여러 흔적들로 중층적인 표면들은 기의와 분리된 기표와 같다. 박미화의 작품에서 '기표와 기의는 대응하여 기호를 형성'(소쉬르)하지 않는다. 욕망을 표상하는 대상은 기표이다. 그 대상을 포착하는 순간, 욕망은 완전한 충만감을 못 느끼고 다른 대상을 열망한다.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욕망하는 주체는 불행하다. 라깡은 주체를 통일하는 특성을 오로지 기표와 욕망의 영역 내에 둔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라깡의 기표와 욕망 뒤에 있는 모성과 충동에 주목한다. 결핍보다는 타자를 향한 과잉, 즉 사랑을 강조하는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금지와 억압에 근거하지 않는 윤리의 가능성을 말한다. 사회적 관계는 이미 주체에 내재하므로 외적인 법은 필요 없게 된다. 타자를 품고 있는 모성은 이미 주체에 내재하는 법을 대변하는 것이다. 박미화의 작품 속 모성은 이러한 내재적 법에 호소한다. ■ 이선영

박미화_이름_나무에 조각_182×206cm_2015

이번 전시는 2015년 4월의 『마음의 기록 Docu-mentally』展의 연장선상에 있다. ● 전시를 위한 마무리 작업 중이던 초봄, 여전히 내가 어쩌지 못하는 야만의 시간이 있었다. 겨우 일곱 살에 이미 여러 해 학대받다 주검이 되어서야 그 집에서 나와 시원한 산바람 속에 눕게 된 원영이, 평생 자본과 인간으로 부터 자연을 지키려다 이권업자에 의해 살해당한 베르타 카세라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다 회사를 떠난 후 자신은 고독하게 고시텔에서 눈을 감은 이상구. ●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저 내 마음을 기록하는 일 밖에 하지 않았다. 달리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2016년 4월 1일) ■ 박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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