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한 1주기 추모

고진한展 / KOJINHAN / 高鎭漢 / painting   2016_0409 ▶︎ 2016_0507 / 일요일 휴관

고진한_흐린-그림_캔버스에 유채_50×50cm_201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0822g | 고진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6_0409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빛뜰 bdgallery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226-5번지 Tel. +82.31.714.3707

고진한 작가 1주기(4월 8일)를 맞아 분당 빛뜰 갤러리에서 『고진한 추모전』이 4월 9일부터 5월 7일까지 열립니다. 이번 전시는 일반에 공개된 적 없는 고진한 작가의 초기 작품부터 갤러리 개인소장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습니다. ■ 갤러리 빛뜰

고진한_흐린-그림_캔버스에 유채_80×80cm_2012
고진한_흐린-그림_캔버스에 유채_72×72.5cm_2012
고진한_더듬은-그림_캔버스에 유채_117×73cm_2011
고진한_곡선적인-그림_캔버스에 유채_72.7×72.7cm_2010

사과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던 때가 7년 전 즈음인 것 같다. 왜 사과를 선택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못하겠다. 아마도 전시를 앞둔 심리적 상황과 맞물려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탁자에 놓여있는 사과가 눈에 띠였던 것 같다. 처음엔 작은 사물을 크게 그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손에 쥔 사과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어떻게 그려볼까 고민하던 중 문득 실내를 꽉 채운 르네 마그리뜨(Rene Magritte)의 사과그림 하나를 떠올렸다. 「The Listening Room」이란 제목의 그 그림은 사과 하나가 벽돌로 지어진 실내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 데, 익숙한 사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 대하는 듯 생소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림 속의 사과 이미지는 단조로운 색상과 평범한 형상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것이 낯설게 느껴진 이유는 사물의 크기를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습관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때 마그리트의 그림 속 실내공간에 있는 사과가 너무 크다는 불안감을 경험하면서 내가 사물이나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이 특정한 틀 속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틀 바깥에서 바라본 사물은 어떻게 보일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내가 사과를 그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 고진한

고진한_빠른-그림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8
고진한_깊은-그림_캔버스에 유채_80×80cm_2007
고진한_빠른-그림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2
고진한_65×91cm_1998
고진한_어머니_포장지에 수성_61×40cm_1999

흐린 시선은 어떤 것도 구체적으로 또는 잡힐 듯이 그리지 않는다. 마치 말끝을 흐리듯 아니면 웅얼거리듯 그림이 들려주는 작가의 발언은 어떤 것도 특정하지는 않는다. 보는 우리는 그려진 대상이 그것이라고 아련하게 파악하지만, 작가는 그것에 시선을 집중하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그렇게 사물과 세상을 본다는 것을 나는 본다. 포커스를 비껴간 시선은 사물에 정착하지 않음으로써 세상과 작가와의 관계를 설정한다. 가까이 있거나, 가까이 가려고 하지만 절대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그의 흐릿한 그림은 부단하게 말한다. 그가 본 세상은 그래서 허상(시뮬라크르)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도 허망하다. 이 허망함은 비관이 아니라 낙관적인 정서로 뭉친 세계관이었다. 하지만 이런 낙천주의는 타자에게는 간혹 원인모를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욕망의 치밀한 관계망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그런 낙천성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자유가 낯설기 때문이다. ● 욕망의 관계망에서 감각만으로 추출해 놓은 형상들은 너울거린다. 형상은 명칭으로 부르기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서, 색과 형의 얇은 막이 된다. 그 막의 두께는 때론 두텁게 시선을 막아서거나, 때론 유혹하면서 욕망을 희롱한다. 오히려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분명해 보이는 형상들은 그런 회화적 전략의 결과다. 가까이할 수 없는 사실이란 관념보다도 견디기 힘들다. ● 고진한의 작품에서 나의 관심은 항상 그 너머와 다가올 그 무엇이다. 그의 스푸마토는 보는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욕망을 충족시켜주지도 않지만, 나아가 조각난 세계를 추론으로 재구성하려는 의도도 붕괴시켜버린다. 그가 프레임 안에 흐릿하게 고정시킨 것이 목적(지)가 아님을 나는 안다. 그렇다고 그 뒤에 혹은 이후에 다가올 어떤 것을 짐작할 수도 없다. 그림이란 프레임은 - 그것이 개개의 사물이든 풍경이든 상관없이 - 그래서 무한한 스푸마토(Sfumato)의 조각난 편린이다. 그러니까 프레임 속에 그려진 것보다, 그 밖의 것이 궁금해진다. 그것을 말해 줄 사람은 이제 스푸마토의 저편으로 가버렸다. ■ 김정락

Vol.20160409a | 고진한展 / KOJINHAN / 高鎭漢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