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림 창작 스튜디오 프로젝트

김윤정_김화선_임해랑_장상원展   2016_0412 ▶︎ 2016_0417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6 청림 창작 스튜디오 1기 레지던시 결과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청림갤러리 CHEONGRIM GALLERY 경기도 광명시 철산로 36 알렉스타워 9층 Tel. +82.2.2687.0003 www.gcr.kr

청림갤러리는 4월 12일부터 4월 17일까지 『청림 창작 스튜디오 프로젝트』展을 개최한다. 청림갤러리는 문화를 공공재차원에서 지원함으로써 동시대 미술전시와 유망작가들을 발굴, 양성하는 창작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지역문화예술의 대중적 지반을 넓혀가고 있다. 본 전시는 이에 입주한 김윤정, 김화선, 임해랑, 장상원이 1년이라는 창작활동기간을 거쳐 작업한 성과물을 공개하는 결과보고전이다. ■ 청림갤러리

김윤정_The Girl who has a thousand of pearls_장지에 분채_60×60cm_2015
김윤정_BariBariBaridegi 1_장지에 분채_60×60cm_2015
김윤정_BariBariBaridegi 2_장지에 분채_60×60cm_2015

나는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 나는 형태가 존재 하지 않는 죽음을 부모님을 통해서 경험한 적이 있으며, 보이지 않는 그 존재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 깨달았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현재의 내 영혼과 정신은 내 육체를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 나는 감각을, 감정을, 인식하기 때문에 존재함을 느낀다. 그 경험을 통해 '내가 존재함'과 내가 가고 싶다고 해도 그 무언가 보이지 않는 밧줄 같은 것이 나를 묶고 있어서 내가 '갈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서운 경험이고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역시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죽음'의 반대편에 있는 '삶'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오랜 병환을 지켜보며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이해는 스스로를 현실로부터 분리시켜 '재미'와 '웃음'을 찾게 만들었다. ● 이것에 부합되었던 매체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즐기는 수준을 넘어서서 프로만화가로 7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철저히 시장경제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대중예술을 직접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본인의 감각을 시각화함에 있어 대중예술의 한계성을 느꼈기에 Fine Art로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 작품의 내용에 있어서 대중예술인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은 캐릭터의 우스꽝스러움을 통해 인간 감정과 감각적으로 느끼는 비극을 희화화 시키며 있는 사실을 비꼬아 유머러스함을 주고 '재미'를 준다. 이러한 특징은 무거운 주제를 풍자와 조롱을 통해 한없이 가볍게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내용과 더불어 만화의 또 다른 특성 중 하나인 평면 속에 시간을 흐르게 만드는 서사적 구조를 갖춘 스토리텔링을 차용하여 평면작업 안으로 가져왔다. 평면작업 속에 흐르는 시간으로 인해 다차원적인 구조를 갖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플랫(Flat)함은 두드러진다. 이러한 특징들은 현실과 분리되어 가상 속 동화적 환타지 세계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 2012년도 작업과 2013년도의 작업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2012년도의 작업은 자화상작업이 대부분이었으며, 그것을 통해 나와 관계하고 있는 내 주변 환경의 모든 것-가족, 친구, 애완동물, 환경, 사회-을 조망하며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떠한 존재의 이유에 관해 다소 무겁게 작업을 진행했다. 2012년도의 작업에서 나라는 존재와 주변 환경 시스템 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 하지만 2013년도에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 한국 전통의 재료를 사용하여 인생이 가진 희,노,애,락이 무엇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끊임없이 흐르는 인생의 사계절 속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나는 나의 모습을 팝 아트로 재해석했다. 작업에서 보여 지는 캐릭터들은 한국 전통신화와 설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동시대의 세상을 보는 나의 모습일 수도 있고, 너의 모습일 수 있도록 한국적인 팝아트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표현하려 노력해왔다. ● 현재는 내가 감각하며 느끼는 세계를 평면 작업과 함께 '뉴미디어 아트'(영상, 3D 홀로그램 및 사운드 작업) 라는 다른 성격의 매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중이다. ■ 김윤정

김화선_Mosquito-pOp_종이에 혼합 재료_54.5×75.5cm_2015
김화선_Mosquito-pOp_종이에 혼합재료_54.5×75.5cm_2015

흔히 더운 여름날만 되면 나를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있다. ● 참을 수 없는 윙윙거리는 소리로 단잠에 빠진 나를 깨우는 건 바로 '모기'다. 매일 밤 나의 공간에 '모기 귀신'이 찾아온다. 모기는 단순하게 나의 밤잠을 깨우는 훼방꾼이 아니다. 매년 10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주범이기도 하다. 모기는 말라리아 외에도 일본뇌염, 뎅기열 등 치명적인 질병을 옮기는 독충(毒蟲)이다. 이처럼 크기는 작지만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진 괴물이 내 방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와 같은 공간에 모기가 존재하면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그것을 죽일 때까지 잠에 들지 못하였다. 깊은 밤, 잠에 빠진 나를 깨우는 귓속을 파고드는 모기의 윙윙거리는 소리, 모기에게 피를 빨아 물린 후의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 핑크 빛으로 점점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살, 가려움을 참지 못해 긁어 버린 후에 오는 피 묻은 상처 등은 그것을 죽이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크기에 상관없이 살아있는 모든 벌레는 무서워하면서 왜 모기는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 없이 손바닥으로 한 번에 죽일 수 있었던 걸까? 그냥 단순히 단잠을 깨우는, 귀찮게 하는 '너'로 부터 시작된 사소한 복수(復讐)인 것일까? 복수의 사전적 의미는 원수를 갚음 이라는 뜻이다. 본인이나 같은 집단의 사람(형제, 부모 등 가족, 친척, 친구, 같은 부락 소속의 사람)등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에서 육체적, 정신적, 재산적, 사회적 피해를 받았을 때, 받은 것만큼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 모기에게 고통을 당한 만큼 되돌려주는 과정의 끝은 그것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모기에게 복수를 했다는 쾌감에 가득 차 미친 듯이 통쾌 할 지라도 되풀이 되는 두려움과 공포, 미안함과 허무함에 대한 고통이 따른다. 현실에서는 당한 만큼 되돌려주는 복수의 끝인 무언가를 죽이는 일은 법의 지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살면서 그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고 싶은 순간이 찾아 올 때도 있다. 단지 그러한 마음 자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 우리 주변에서도 모기처럼 내 주변을 빙빙 돌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내 몸에 빨대를 꽂으며 필요한 것들만 쏙쏙 빼 먹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모기로부터 확장된 피 터지는 통쾌한 복수를 새빨간 비눗방울을 통해 터트린다. ●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죽음의 복수를 모기를 통해 느끼면서부터 나의 작업은 시작 되었고 그 안에서 느끼는 통쾌한 쾌감과 그 끝의 허무함의 근원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물음 안에서 작업이 반영되었다. ■ 김화선

임해랑_편집된 일상-#drowing_종이에 연필_40×47cm×8_2014
임해랑_편집된 일상#D1_drawing_종이에 연필_73×91cm_2015
임해랑_편집된 일상#D2_drawing_종이에 연필_73×91cm_2015

너와 나의 다른 시간, 공간을 스치는 빛 ●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간이란 '한정된 수 의 운동'을 나타낸다. 운동의 양이 곧 시간의 양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물리적 시간의 개념과는 달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본질적인 시간의 개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근원적이고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하늘의 공간운동을 통해 측정되는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고대의 철학자의 시간에 대한 사유에서 임해랑의 작업이 드러내는 고민의 한 축을 발견한다면 너무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평범하고 일상적인 주제가 또 있을까. 핵심은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다. 19세기 화가 터너가 경험한 속도와 감각 ● 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풍경화를 대표하는 윌리엄 터너(J.M.Turner, 1775~1851)의 한 작품에 주목해보자. 「비, 증기, 그리고 속도- 대 서부 철도 Rain, Steam, and Speed The Great Western Railway」(1844)라는 다소 긴 제목의 유화이다. 일흔이 거의 다 된 나이에 제작된 이 작품은 언뜻, 희뿌연 색채로 가득한 추상화처럼 보인다. 아마도 당시 이 작품을 처음 본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내 화면 중앙으로부터 뚫고 나오는 검은색 굴뚝과 함께 다리 위를 내달리는 증기기관차의 모습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빛과 대기의 표현에 관심 많았던 터너임을 감안하더라도, 이 희미한 형체와 휘날리는 색채, 아스라한 분위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달되는 강한 현실감은 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1825년 영국에 첫 철도가 개통된 이래 대중은 전과 다른 놀라운 속도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터너 역시 1840년경에 만들어진 최신형 증기엔진이 장착된 기관차를 타고 템스 강을 건넜다고 한다. 이때 그는 열차의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10여 분 동안이나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달리는 열차의 경이로운 속도와 그로 인한 시각 세계를 체험할 수 있었다.「비, 증기, 그리고 속도 – 대 서부 철도」는 바로 이러한 화가의 감각적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21세기 작가의 편집된 시간과 공간, 빛 ● 굳이 19세기 화가 터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엄청나게 향상된 속도와 발달된 과학으로 인해 변화된 우리의 일상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비행기와 KTX, 인터넷과 실시간 채팅, 온라인 게임 등을 통해 우리는 극도의 시간과 공간을 압축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이러한 경험은 같은 시공간 안에 있더라도 천차만별의 시간과 공간을 누리는 개인들의 삶을 뜻하기도 한다. 임해랑이 이제까지 보여준 「애매한 풍경」(2012) 시리즈, 「사물의 시간」(2012) 시리즈 「편집된 일상」(2013) 시리즈와 같은 작업들이 공유하고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각자의 다른 시간, 공간에 대한 지각으로부터 관점의 차이가 생기고 또 그것이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 대한 다른 해석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이를 일컬어 편집적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편집된 시간과 공간, 해석은 개인마다 고유하다. 그것이 각자의 현재를 이룬다. 임해랑의 작업에서 그 고유한 현재, 저마다의 현재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빛이다. 은근한 빛으로, 색색의 빛으로 비추는 이미지는 미묘하게 표정을 달리해가며 잔상을 남긴다. 누군가의 현재는 보는 이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과거가 되고 그것은 또 다시 현재로, 엄밀히 말하면 과거의 현재로 꺼내진다. 익숙함과 낯섦 사이, 경계적 일상 ●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를 둘러싼 일상과 그 안의 사물들 역시 누군가의 시점에서는 다르게 보일 수 있고, 내가 보는 것과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라는 데에까지 이르게 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무수한 개인의 감각적 경험이 각자의 현재를 이룬다는 가정 하에서라면, 나와 이들의 일상에 대한 지각 역시 다를 것이다. 아니면 애초부터 편안하고 당연하게 여겨왔던 많은 것들이 실은 어떤 이에게는, 더 나아가 나에게조차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이러한 의구심은 임해랑의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는 그의 작품 속 형태들이 비교적 똑 떨어지는 가운데 왠지 모를 어색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것과도 관련된다. 아마도 작품들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어긋나는 느낌을 주는 반전적인 요소들이 포진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첩되는 이미지와 선들 사이로 비추는 여러 가지 색깔의 빛이라든지, 또는 직선적인 형태들을 에워싼 식물의 형태 혹은 해조류와 같은 모티브가 그런 예이다. 상대적으로 가변적인 인간의 시간, 공간, 사물들이 있는 반면 동이 트고 노을이 지는, 순환하는 자연의 한결 같은 시공간 또한 어김없이 존재한다. 임해랑은 이를 두고 '경계'라고 표현한다. 경계에 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지닌다.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도모하는 이를 선택의 국면, 그것이 바로 경계에 서 있는 이의 입장이 아닐까, 그렇기에 경계적 입장이란, 비난과 방관의 사이, 또는 비판과 대안모색의 사이, 아니면 그 자체로 비판적 대안의 역할이 될 수도 있다. 임해랑이 앞으로 그가 행할 다양한 실험들 가운데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아찔하지만 멋진 외줄타기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이민수

장상원_9개의 화분, 2개의 화분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5
장상원_10개의 육면체, 2개의 사각형_종이에 연필_48×65cm_2015
장상원_위장한 역원근법과 시간2_종이에 연필_39.4×54.5cm_2015
장상원_역삼각형 화분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5
장상원_Double Screen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5

문학적 서사구조의 한계 ● 지난 작업은 일련의 사건들을 서사구조로 표현하는 것이 주요한 동기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한동안은 문학적 서사구조에 주안점을 두고 작업을 진행하려 하였으나 일정한 지점에서부터는 작업이 더 이상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문학적인 서사구조라는 것이 주로 그러하듯이 흔하디 흔한 인물 중심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그러한 인물간의 관계에서 기인하는 이야기로 진행되는 장르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 고민은 자연스럽게 소실점에 대한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각 사람의 시선을 선형화 한다면 그것에도 소실점이 생기게 마련인데 방향성을 가진 개개인이 향하고 있는 소실점에는 차이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그러자 그때부터 인물은 배제되었고 그 대신에 현재 우리가 시선으로부터 형성된 새로운 형태의 소실점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 요즘은 물리적으로는 평면으로 구성된 대상을 바라보면서도 평면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입체적으로 대상을 인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완벽한 재현이 이루어져야 하는 아날로그표현방식에서는 일반적인 인지과정이 진행되지만 이와 달리 일정한 공백을 가진 채로 재현되는 디지털표현방식에서는 인지자가 대상 속의 공백을 암묵적인 전제에 기반하여 스스로 채워서 인지하게 된다. 디지털표현방식에서의 공백은 날이 갈수록 더 줄어들어 인지자가 채워야 하는 부분도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컨텐츠 소비자들 가운데 디지털표현방식의 태동기를 경험한 세대들은 아날로그표현방식과 디지털표현방식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서로 다른 인지과정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들곤 한다. ● 이번 작업을 통해서 이러한 중간세대가 인지하는 새로운 형태의 소실점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어쩌면 신세계를 맞이해야만 했던 입체파의 시각일 수도 있으며 전쟁과 종전을 모두 경험한 전후 세대의 시각일 수도 있다. 그 새로운 소실점의 표현을 위해 1점 투시도법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앞서 언급한 문학적 서사구조를 배제시키기 위하여 상징적인 형식의 황금비율(1/3)을 이용하여 조형적 서사구조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플랫 하다 못해 그 안으로 무한대로 펼쳐지는 작금의 상황을 역 원근법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 장상원

장상원_원기둥:구:원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72.7×90.9cm_2015

이번 전시를 통해 입주 작가 4인이 청림 창작 스튜디오라는 여정에 마침표를 찍지만, 1년간 이곳과 관계를 맺으며 만들어낸 다양한 양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1기라는 유의미한 표제로 꾸준히 나아갈 것이다. 관람객의 해석에 따라 달리 전개될 테지만, 그것이 현대미술사의 편린일지라도 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청림갤러리

Vol.20160412a | 청림 창작 스튜디오 프로젝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