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STOP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초청 기획展   2016_0426 ▶︎ 2016_0515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6_0430_토요일_05:00pm

장백순『부유하는 삶 Floating Life』展 박영학『풍경너머로 beyond the scenery』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CHEOUNGJU ART STUDIO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로 55 Tel. +82.43.201.4056~8 www.cjartstudio.com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는 지역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을 위해 미적 시공간의 플랫폼으로써 창작의 안목을 재생시키고, 창조적 미래를 꿈꾸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에 2016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는 입주경험을 한 작가를 대상으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면서, 활동 무대를 넓혀 해외 및 수도권 지역까지 지역미술 소개 및 창작스튜디오를 알리는데 노력하는 작가들을 선별하여 『NON STOP』 멈추지 않는 이란 타이틀로 기획전을 개최합니다. ● 이번 초대작가로는 4기 입주작가인 장백순『부유하는 삶』, 박영학『풍경 너머로』작가이며, 이 작가들의 전시를 통해 새로운 오브제에 대한 실험적 이행과 함께 관람객들에게는 현대미술에 대한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할 것입니다. ■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장백순_부유하는 삶_마_가변설치_2016
장백순_부유하는 삶_마_가변설치_2016

부유하는 유령들의 웅성거림 ● 어느 추운 겨울 밤, 덴마크의 호화로운 궁궐에 나타난 죽은 햄릿 왕의 유령은 실재일까 환영일까? 아니면 그 유령은 죽은 왕의 동생이자 햄릿 왕자에게는 삼촌이며, 어머니의 남자가 된 현재의 왕에 대한 햄릿 왕자의 절망과 분노가 만들어낸 허상일까. 햄릿 왕자는 자신에게 드리워진 고뇌가 워낙 컸기 때문에 독살당한 아버지의 혼령이 명계로 가지 못한 채 방황하며 아들에게 복수를 부탁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정신분석학에서는 가능한 해석일 수 있지만 이 글의 핵심은 아니다. 나로서는 이미지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 햄릿의 환영을 떠올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 사전적인 의미에서 이미지는 '물질적이거나 관념적인 대상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재현해 낸 것'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적으로 표상된 것이든 상상된 것이든 이미지는 우리의 심적 장치(mental-set)에 투영된 것이다. 투영이란 무엇인가? 어떤 대상이 마음속에 나타나도록 원하는 우리의 기대심리가 영상(影像)으로 떠오른 것을 말한다. 이미지가 '모방하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 '이미타리(imitari)'로부터 파생된 것이란 점에서 재현과 밀접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햄릿 왕자에게 나타난 부왕(父王)의 망령처럼 이미지는 사물의 부재로부터 탄생한다. 따라서 이미지란 재현하는 사물의 현존이 비어있다는 의미에서 비어있는 상태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이미지란 개념의 어원으로 돌아가 보자. 그 기원은 상(像), 초상, 조상(造像), 모습, 영상, 환영, 유령, 죽은 사람의 그림자, 꿈, 착각, 환상, 상상, 표상, 재현 등의 뜻을 지닌 '이마고(imago)'와 연결된다. 이마고는 또한 모양, 형상, 겉모습, 그림, 죽은 사람의 그림자, 유령 등의 뜻을 지닌 '피구라(figura)'와도 연결되며 실재의 모사(模寫)인 '시물라크룸(simulacrum)'과도 의미를 공유한다. 말하자면 이미지는 현존이자 부재인 것이다. ● 첨단 영상매체에 포위당해 있는 오늘날, 우리는 실재의 부재를 더욱 실감나게 보여주는 이미지의 세계에 살고 있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지에 의해 포획당하고, 이미지의 설득에 중독돼 있기 때문에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가상실재(simulation)를 실재보다 더 실감나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형예술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실재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실재의 재현에 매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오래 전에 플라톤(Plato)이 동굴감옥에 수감된 채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재로 착각한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가 실재세계를 목격한 사람을 살해한다는 비유를 들어 모방의 문제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현의 기술에 의존한 유사성의 실현은 이 그림자를 실재처럼 보이도록 유혹하는 덫이자 최면이고 마술이었다. 그런데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재현의 마술이 풀리고 재현의 원리를 위반, 전복, 파괴,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아마 그것을 극단으로 몰고 간 예술가는 원근법을 해체한 피카소(Pablo Picasso)가 아니라 뒤샹(Marcel Duchamp)일 것이다. 회화에서 마그리트(Rene Magritte)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을 통해 사물을 낯설게 만들어 놓았으며, 그려진 파이프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란 글을 적어 넣은 「이미지의 배반」을 통해 재현된 대상을 실물로 착각하는 우리의 관습적 사고를 뒤흔들어 놓았다. 오펜하임(Méret Oppenheim)은 1936년 「오브제(털 위의 점심식사)」란 이상한 작품을 통해 이미지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신랄하며 유쾌한 전복을 시도했다. 제목부터 마네(Edouard Manet)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오브제는 실물의 찻잔과 받침, 그리고 티스푼을 털로 감싼 것으로서 찻잔의 기능을 박탈한 대신 페티쉬(fetish)가 전면으로 부상하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즉, 매끈한 도자기의 표면에 털이 풍성한 피부를 이식함으로써 딱딱함과 부드러움, 안과 밖, 돌출과 함몰 등의 상반된 속성을 지닌 이상한 오브제가 불러일으키는 에로틱한 상상력까지 자극한다. 페티시즘과 연결된 에로틱한 상상력은 이 오브제에 새로운 이미지를 덧씌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마실 수 있는 기능은 사라졌지만 만져보고 싶은 사물, 물질의 경계를 가변적인 것으로 바꿔놓은 이 오브제는 원본이 아니라 그것의 유령이다.

장백순_부유하는 삶_마_가변설치_2016
장백순_부유하는 삶_마_가변설치_2016

장백순이 삼으로 만들어놓은 온갖 일상적인 오브제 또한 탈기능의 맥락에서 오펜하임의 찻잔과 만나고 있다. 그는 침대, 소파, 의자, 전등, 모자, 전화기 등의 삶과 밀접한 대상을 석고나 스티로폼을 이용해 실물의 형태대로 만든 다음 그 위에 삼을 부착한다. 때로는 실물을 그대로 주조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가구나 사물의 형태를 제작한 후 삼을 부착하므로 안경, 숟가락, 목이 긴 도자기의 경우 실물보다 터무니없이 크게 확대된 경우도 있다. 최종적으로는 속의 재료를 제거하고 삼으로 만든 거푸집만 남겨놓기 때문에 작품의 중량은 가벼울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조소기법의 순서를 따르지만 딱딱한 물질로 형태를 떠내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삼을 붙인 표면은 성긴 삼실들이 얽힌 피부처럼 보인다. 심지어 그의 작품은 공중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 때문에 중력의 법칙조차 위반하고 있다. 탈기능, 탈중력은 그의 작품을 사물의 유령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삼이 지닌 특유의 색상과 얇은 피막, 속이 비치는 성긴 섬유질은 실물의 하중을 박탈당한 껍질이자 실재의 외양만 갖춘 피구라이며 이마고이다. 물론 줄에 매달아 놓았기 때문에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공중에 떠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현존과 부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자극한다. 바닥에 놓인 작품은 오로지 측량기뿐이다. 카메라 옵스큐라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측량기는 내부에 각각 거울과 돋보기를 장착하고 있는데 구멍을 통해 속을 보면 우리의 눈이 거울에 비친다. 말하자면 이 측량기는 관람하는 우리 마음의 깊이를 재는 장치인 것이다. 맞은편의 구멍으로는 얽혀있는 삼의 구조가 돋보기에 의해 확대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백순이 만든 사물이 단지 조각의 재료로 사용되지 않았던 삼으로 만든 것이므로 새롭다거나 재료의 확대란 차원을 넘어서 어떤 의미를 생성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왜 그가 삼이란 섬유질을 재료로 선택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그는 2000년의 첫 개인전에 나무뿌리로 만든 큰 구를 매달고 그 아래에 거울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놓은 설치작업을 발표한 바 있다. 생명체의 발아, 탄생과 소멸, 윤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이 설치작업의 매달기가 삼작업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그는 석조인 꿈꾸는 새, 곡식을 담아놓은 바구니 속으로 침투하는 개미를 브론즈로 제작한 단계를 거쳐 2012년에는 속을 비워낸 석조를 발표한 바 있다. 숟가락 속에 도깨비풀 열매를 담아놓은 레디메이드 경향의 작업도 했지만 삼작업과 직접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속을 비워낸 석조작업일 것이다. 그는 채우려고만 하는 인간의 속성, 즉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비우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 작업 속에 담고자 했다. 그 후 부유하는 삶을 주제로 작업하기 위해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고민하다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상주인 아버지와 친지들이 삼베옷을 입고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기억한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면서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까지 새삼 확인했다. 인간은 권력이나 명예, 여러 욕망에 사로잡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하지만 결국 죽음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가볍고 얇게 주형할 수 있는 재료로 사물을 떠낼 수 있는 물질을 찾다 미술대학 재학 중 소조시간에 석고를 뜰 때 보강재로 썼던 삼을 생각해낸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식 때의 기억과 석고보강재로 사용했던 삼에 대한 기억이 중첩되면서 그는 먼저 자신의 주변의 평범한 사물을 삼으로 떠냈다. 그런데 사물들을 떠내기 위해서는 대량의 삼이 필요했고 침대의 매트리스에 삼을 넣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버려진 매트리스 수집에 나섰다. 그렇게 삼을 찾아 수집, 해체한 매트리스가 이백 여개에 이를 정도였다. 매트리스를 수집하면서 그는 또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매트리스를 수집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특히 부유한 동네의 경우 상태가 좋은 가구나 인테리어소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버려진 물건들을 보면서 그는 부의 편재에 의한 사회적 불평등까지 발견했다. 이 버려진 사물들은 그로 하여금 부와 권력을 좇는 인간의 삶도 부유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 사물들에게 삼으로 만든 새로운 피부를 제공하기로 했다.

장백순_부유하는 삶_마_가변설치_2016
장백순_부유하는 삶_마_가변설치_2016

삼은 자연섬유 중에서 섬유질이 가장 길고 뻣뻣하며 질길 뿐만 아니라 신축성이 강해 밧줄, 카펫, 가방 등을 만들 때 사용된다. 또한 특유의 광택이 있으며 물에도 강하므로 옛날부터 대마의 줄기껍질로 짠 천으로 적삼, 조끼, 요, 홑이불 등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삼베로 만든 수의(壽衣)가 가장 익숙하기 때문에 삼은 죽음과 연결될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장백순의 사물은 용도폐기된 사물의 주검에 입혀놓은 수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이 사물들의 내부에 조명을 장치해 놓았기 때문에 사물의 혼령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조각은 자연 상태의 재료를 문화적 재료로 바꾸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의미의 생성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저 죽은 물질에 불과하다. 볼륨, 형태, 마티에르 등은 조각의 조형요소이자 의미를 발생시키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접착제에 의해 결박당한 삼의 성긴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피부와 수북하게 자란 털을 가진 사물은 실재로 위장된 유령이자 박제이며 주검 그 자체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욕망의 공장인 우리 모두의 신체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나옹화상(懶翁和尙)의 누님이 동생인 나옹에게 읊었다는 선시(禪詩)의 한 구절인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다소 허무적인 이 시는 여전히 인간중심적인 사념(思念)을 담고 있다. 나로서는 그의 작품이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상념을 넘어선 현존과 부재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의 침대는 침대가 아니라 '닮아 보이는 것(phantasma)', 즉 실재의 껍질이자 그림자이다. 부유하는 유령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침대인가? 실재란 무엇인가? 우리는 특정한 사물의 외피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특정한 사물이라고 믿는 우리 마음에 대한 '사물의 배반'이 현존과 부재의 진자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의 작품이다. 부유하는 사물의 유령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들도 우리처럼 허깨비에 불과하다'고 웅성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최태만

박영학_풍경너머로1601_장지에 방해말, 목탄_194×390cm_2016

미지의 세계를 향한 기억 ● 박영학의 작품 속 흑백의 스펙트럼은 광대하다. 총천연색으로 이루어진 실제의 세계에서 무엇인가 빠졌지만, 잘 찍힌 흑백사진이 그러하듯이 결핍감은 없다. 오히려 세계는 선택되고 조율된 조형 언어 덕분에 어떤 독특한 질과 분위기를 유지한다. 회화 자체가 일종의 감축이지만, 여기에 가세하는 또 다른 감축은 세계를 또 다른 풍부함으로 되비쳐 준다. 또는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를 실제의 세계에 추가한다. 그의 풍경은 이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것이 향하는 것은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는 대안의 세계다. 현실과 상상은 나뭇가지와 뿌리처럼 역전된 상의 관계를 가지기에, 현실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릴수록 상상은 더 힘차게 뻗어날 것이다. 백보다 더 밝아 보이는 백, 흑보다 더 어두워 보이는 흑은 흑백 사이를 최대한 벌리고 그 사이에서 무한한 무채색의 계열을 펼친다. 그의 작품은 선 또는 면의 대조에 의해 흑백의 영역이 직접 맞대고 있는가 하면, 미세하게 펴 바른 목탄이 수묵화같은 섬세한 농담의 변화를 구현한다. ● 장지가 붙어있는 캔버스 위에 돌가루를 여러 번 칠해 견고한 표면을 만든 후에 목탄으로 그어 만든 힘이 있으면서도 유려한 선, 그리고 '풍경 너머로'(2010) 전을 비롯한 이전 작업에서 공간 일부를 뒤덮는 숯 조각들은 자연에 투사된 동양적 이상화와 시각적 강렬함에 호소하는 현대적 감각을 중첩시킨다. 박영학의 풍경에는 지금 여기와 다른 저 멀리로 빠져 나가는 정신적 공간이 있는가 하면, 장면들을 눈앞으로 강하게 당겨오는 물질적 실재감이 있다. 대조되는 것들 간의 관계는 지각과 기억이 뒤섞인 방식에서도 발견된다. 이 모든 대조 항들이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 작품의 매력이다. 자연스러움은 종이, 목탄, 숯 같은 자연적인 재료로 자연을 묘사한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직접 본 것, 기억한 것, 상상한 것, 배운 것, 실험한 것, 장기간 연구되어 고안된 것 등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박영학의 작품은 인공적 언어이면서도 자연을 닮으려는 예술의 궁극적 지향이 있다. ● 자연스러움이란 근대의 새로움과 충격의 미학이 지배적이 된 이래 희귀해졌다. 대부분 미술계라는 제도적 장치의 보호를 받고 있는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일상적 삶의 근본적 변화에 큰 도움을 주지 않는 동화되기 힘든 생경함, 즉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에 대한 찬가가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지 않았나 반성해 볼 일이다. 박영학은 자연스러움을 위해 현대의 화가들에게 스케치 대용으로 편리하게 사용되는 도구인 카메라의 사용도 자제한다. 기계적으로 길들여진 눈으로 보면 그의 풍경은 원근법도 맞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진정한 경험이 아닌 사진으로 대체된 경험, 또는 사진만 남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사진으로 찍기 힘든 것들이 있다. 가령 박영학의 작품 속에서 숯으로 꼴라주 된 미묘하게 촉각적인 부분은 둔탁한 평면으로 재현되기 일쑤이다. 사진으로 코드화된 정보들은 컴퓨터 등을 통해 많은 조합을 만들지만, 실재와 유리된 코드들의 유희는 금방 싫증이 나는 진부함을 낳을 뿐이다.

박영학_풍경너머로1602_장지에 방해말, 목탄_194×390cm_2016

박영학의 작품에서는 단순히 목격한 것이 아니라, 기억의 필터로 걸러진 것만이 살아남는다. 오감을 통해 들어온 정보들이 그의 몸을 통해 출력되는 것이다. 작품 제작에 있어 스케치의 비중은 높고 거의 그 단계에서 90%이상 결정된 후 큰 화면에 옮겨진다. 낱장의 종이는 좀 더 견고한 종이판으로, 연필은 목탄과 숯 등으로 옮아간다. 이러한 이행이 성공적이기에 목탄의 강렬함에는 연필의 섬세함이 내재되어 있다. 2010년부터는 숯을 깨서 화면에 직접 붙이기 시작하면서 농담의 폭은 더욱 커졌다. 특히 풍경의 윗부분에 붙은 숯은 재료와 결합된 짙은 검은색과 은은한 반사면을 통해, 화면의 자율성을 위해 필요한 촉각성, 그리고 세계를 반영하는 환영(가령 밤하늘 같은)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많은 재료의 실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종이와 그 위에 그려지는 연필, 목탄, 숯 같은 재료는 그가 전공했던 한국화의 느낌을 보존한다. 돌가루로 처리한 바탕 면 위에 날렵하게 그어진 선들은 농담이 없지만 수정이 안 되기 때문에 일획을 중시하는 동양화의 방식이 관철되어 있다. ● 그러나 새로운 재료로 그린 수묵화를 닮은 풍경화는 관념의 지평선으로 아련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얀 여백을 가르는 간결한 선과 그 사이사이에 나무숲 등으로 자리 잡은 촉각적 부분들은 선택한 매체의 가능성을 최대한 살린다. 목탄의 터치의 결을 달리해서 그려진 부분들은 타피스티리 같은 미묘한 질감으로, 보는 것을 넘어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뭉글뭉글하거나 뾰족뾰족한 형상으로 등장하는 식물군들은 나무숲의 신선한 기운을 뿜어내는 듯하다. 털실로 짠 뭉개구름 처럼 보이는 식물들 사이의 바위들은 그 무게감을 비워낸다. 풍부한 부피감과 중력에 순응하는 주름만을 남긴 채 그렇게 솟아 있는 바위산들은 하얀 천을 뒤집어 쓴 유령 같다. 껍데기를 들어 올리면 그 안에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 면봉으로 비벼서 표현한 부드러운 식물군이 털의 느낌을 준다면, 하얀 봉우리들은 살이나 뼈 같다. 그 내부가 아무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가벼운 느낌을 주는 바위산은 가변성과 연결되어 여러 개가 어울려 마치 자라나거나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 작가는 반석 같은 사물에 생물체에 비견되는 (잠재적)동감을 부여한다. 길이나 계곡처럼 보이는 지역은 공백으로 처리되어 있고, 바닥을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떨어지는 폭포수같은 물길로 이어지기도 한다. 올해 그림에 새로이 추가된 요소인, 거대한 나무처럼 솟아있는 사슴뿔은 작품에 따라서 오른쪽에, 가운데에, 왼쪽에 자리한다. 그 사이사이에도 나무숲이 있기에 뿔은 거대한 나뭇가지나 숲 사이의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무나 뿔의 가지들처럼 연상의 사슬은 무한히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박영학의 작품은 재료나 소재 면에서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의 상상 역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상상은 흑백의 계열로 제시된 형태(gestalt)의 구조적 동형성에 바탕을 둘 것이다. 청주미술 창작스튜디오에서 열리는 올해 전시는 13회째 개인전으로, 첫 개인전을 청주에서 연 작가의 주요 동 선은 청주 외에 진천, 제천, 충주 등, 중부 내륙 지방에 있다. 작가는 그곳들에서 터의 골이 살아있는 야트막한 풍경을 발견했다. ● 인공과 자연이 결합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 밭고랑이 있는 풍경은 실제에서 따온 것이지만 생략된 부분 또한 많았다. 그것은 이후 지각되는 순간부터 걸러지고 편집되는 기억의 풍경을 낳았다. 충청 내륙지방 뿐 아니라 서해와 남해 쪽의 바위산이나 섬도 주요 소재이다. 누군가는 그의 작품에서 지리산과 북한산 계곡의 물줄기를 발견할 수도 있다. 특히 대청호와 충주호가 있는 지역의 풍경은 작가에게 큰 감흥을 준다. 달 밝은 밤에 호숫가 풍경은 명암의 극적인 차이를 연출했을 것이다. 하늘은 칠흙같이 어둡지만 달빛이 반사되어 밝게 빛나는 풍경은 낮과 밤을 공존시키는 초현실성을 자아냈을 것이다. 계몽의 빛으로 환한 고전주의가 낮의 세계라면, 어슴푸레한 꿈과 환상을 중시하는 낭만주의는 밤의 세계이다. 그러나 타자가 배제된 각각은 불완전한 반쪽에 불과하다. 어떤 시인이 노래했듯이, 낮에 밤이, 밤에 낮이 지나가도록 해야 한다. ● 알베르 베갱은 「낭만적 꿈과 영혼」에서 '새벽은 한밤의 짙은 어둠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낮의 아름다움은 밤의 어둠으로부터 형성된다'고 하면서, 진정한 빛이 실존의 밤의 양상들 속에서만 진정한 빛에 도달될 수 있음을 강조한바 있다. 한 화면에 빛과 어둠을 병렬시키는 박영학의 풍경에는 환한 밤 같은 역설적인 시공간이 발견된다. 밤과 낮의 결합의 결합을 꾀하는 상상력을 찬양하는 베갱은 '영감은 밤의 충만함과 낮의 명료함을, 무의식의 신비와 의식의 규칙을 결합시킨다'는 헤르더의 싯귀를 인용한다. 셸링은 낮과 밤의 이러한 결합에 달빛에 흠뻑 젖은 이미지를 부여한다. '밤 속에서도 빛이 떠오른다면, 밤과 같은 낮과 낮과 같은 밤이 우리 모두를 껴안을 수 있다면, 결국 그것은 모든 욕망의 최고의 목표일 것이다. 그래서 달빛으로 환한 밤은 우리의 영혼을 그토록 신비스럽게 감동 시킨다'(셸링) 박영학의 작품은 언뜻 하얀 눈에 덮인 풍경처럼도 보이지만, 어떤 한 시 공간 대에 고정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재 기억으로 그리고 있는 풍경의 부분들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온 것과 마찬가지다.

박영학_풍경너머로1603_장지에 방해말, 목탄_181×339cm_2016
박영학_풍경너머로1508_장지에 방해말, 목탄_122×180cm_2015

그래서 2015년의 개인전 제목은 그냥 풍경이 아니라 '풍경너머로'로 정해졌다. 실제의 자연을 많이 찾아다녔지만,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작년부터는 보고 그리지 않았다. 특히 기억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사진은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동시에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게 하므로 가급적 배제한다. 하나의 관념적 시점을 전제하는 원근법도 해체되어 있다. 몸이 자연 속에서 시시각각 움직일 때 원근법은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시점들이 복합되어 있는 박영학의 작품 속 토포스에서 고정된 외눈박이의 시점은 상대화된다. 풍경에 새로이 등장하는 사슴뿔은 십장생의 하나라든가 대지의 기운을 대변한다든가 하는 상징 외에, 가지를 치는 상상력을 표현한다. 시간의 시험을 살아남은 기억은 실제로부터 온 상상의 풍경을 낳는다. 풍경에 이질적인 규모의 사슴 뿔 이미지가 섞여 들면서 더욱 농후해진 이상적인 풍경이다. 현실과 상상을 뒤섞는 유토피아적 풍경들은 지금 여기와는 다른 매혹적인 다른 곳을 시사한다. ● 욜렌 딜라스-로세리외는 유토피아 사상의 역사를 다룬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위치한 완전한 세계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을 소개한 바 있다. 저자는 오늘날 그러한 유토피아는 웹싸이트같은 가상공간 속에서 새로운 전망을 찾는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유토피아는 16세기의 「유토피아」 저자 토마스 모어가 처음으로 제시한 원칙, 즉 아무데도 없는 나라로의 여행이라는 원칙으로 되돌아간다. 20세기에 이미 일어난 정보혁명을 통한 가상현실의 거센 도전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물감이라는 실재와 육감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화가에 의해 구성된 장소와는 차이가 있다. 화가는 추상적인 공간을 구체적인 자리로 만든다. 강제로(또는 실수로) 지워지기 전에는 데이터가 그대로 남아있는 컴퓨터가 불망(不忘)증 환자라면, 그러한 도구들에 비해 인간은 기억용량이 턱도 없이 적다. 그가 무엇인가를 기억하려면 무엇인가는 망각해야 한다. 흑백의 대조에 의해 더욱 하얗게 보이는 부분들은 무엇인가 지워진 자리일 것이다.

박영학_풍경너머로 beyond the scenery展_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_2016
박영학_풍경너머로 beyond the scenery展_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_2016

박영학의 풍경에는 무엇이 남아있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그가 풍경을 위해 여기저기 많이 다녀본 실제의 시골에는 지저분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는 굴곡진 자연을 따라 파인 밭고랑이나 길 같은 인간의 흔적만 남겨 놓을 뿐, 인간 자체도 등장시키지 않는다. 거기에는 풍경 속을 이리저리 거닐었을 법한 인간의 육감만이 남아있다. 흔히 동양화의 여백으로 표현되는 비워지거나 지워진 영역, 하이데거가 '토대 없는 심연'이라 불렀을 법한 그 영역이 작품의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내는 부분이다. 바닥이 없는 장소들은 연속성을 단절시키지만, 동시에 또 다른 연결의 시작이 된다. 허공이 생성의 자리인 것처럼 말이다. 그의 풍경에는 입력된 연산법칙을 따라가야 할 정해진 길이 없다. 길인 줄 알았는데 나무였고, 나무인줄 알았는데 사슴뿔인 그의 길은 미로에 가깝다. 거기에는 분리하면서 연결한다는 역설이 있다. 이처럼 유연하며 열려있는 장소에서 재현이 아닌 생성이 야기된다. 그것은 '진정한 시작은 항상 도약'(하이데거)임을 알려준다. ● 기억은 상당부분 망각에 빚지고 있다.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작품의 주요 테마로 삼은 저자 보르헤스가 말하듯이, '망각은 기억의 한 형식'이며, '동전의 비밀스런 뒷면'이다. 하랄트 바인리히는 「망각의 강 레테」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 속에서 문학과 기억은 비슷한 성질이라고 지적한다. 프루스트는 작가에게 실제란 기억 속에서야 비로소 형태를 얻게 된다고 확신한다. 이를테면 꽃은 기억의 대상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꽃이 된다는 것이다. 프루스트에 의하면 이 기억의 형태는 시간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치유해주며, 이 기억을 믿고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들은 이 기억이 선사하는 행복을 체험한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예술은 망각의 심연에서 솟아나온 회상의 시학이라고 평가된다. 박영학의 풍경(너머)에 자리하는 것은 어느 농부가 대지에 파놓았을 밭고랑, 어떤 물줄기와 길, 어느 순간 보았을 구름과 풀숲 등이다. 기억이지만 재현은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것을 다시 표상(re-presentation)하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 작가의 기억으로부터 발굴된 것들은 이를 지각하는 관객의 기억과 공명한다. 또는 그들의 기억에 새로이 추가 된다. ■ 이선영

아티스트 프리젠테이션 ○ 1차 / 2016_0430_토요일_02:00pm~03:00pm    박영학_미지의 세계를 향한 기억 / 이선영 ○ 2차 / 2016_0430_토요일_03:00pm~04:00pm    장백순_유령들의 웅성거림 / 최태만 ○ Q&A_2016_0430_토요일_04:00pm~05:00pm

Vol.20160426a | NON STOP-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초청 기획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