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숲 Carved Grove

김유정展 / KIMYUJUNG / 金維政 / painting   2016_0505 ▶︎ 2016_0525

김유정_숨(Breath)_라이트 박스, 인조 식물_180×600×30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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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7:00pm

인천아트플랫폼 INCHEON ART PLATFORM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218번길 3 B동 Tel. +82.32.760.1000 www.inartplatform.kr

회색성, 흑백 사이의 가능성(Grayness, the Possibilities between Black and White) ● 들뢰즈는 책의 시작은 첫 페이지가 아니라 중간부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시작을 '0'으로 놓고 계속 한 방향으로 전진하는 인생과 미래를 꿈꾸기를 즐기는 편이다. 이러한 생각을 놓고 나무랄 사람을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전진하는 인생이야말로 바람직한 삶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한눈 팔지 않고 앞으로, 더 나은 미래로, 더 밝은 꿈을 향해서. 그러나 삶은 늘 꿈을 배반한다. 전진만을 거듭하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들뢰즈는 이처럼 전진하는 또는 발전하는 삶이라는 일방적인 세계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책의 중간이 시작일 수 있는 이유는 전진하는 삶보다 자신과 주변과의 맥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자는 의견으로 보아야 한다. 그가 꿈꾸었던 미래가 '천개의 고원'으로 비유됐듯이 말이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회색은 특별하다. 이념의 방향 때문에 논쟁이 심했던 시절에는 이분법적 사고관이 팽배했다. 옳거나 틀린 것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회색은 이중적이고 모호하고 불확실하기에 비난의 화살을 맞아야만 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 회색이 바로 시작이라고 말한다. 회색으로부터 검정색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반대로 흰색으로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회색은 의미나 이념을 드러내기보다 모든 것의 중간에서 가능성이 생성되도록 돕는 공터와 같다.

김유정_숲(Grove)_회벽바른 집형상의 조형물, 스투키식물 설치_176×180×152cm_2016
김유정_숲(Grove)_2016_부분

김유정의 회화는 익숙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낯설게 다가온다. 낯섦은 검은 화면 안에서 꿈틀대는 식물의 움직임이 자아내는 몸짓으로부터 기인하는 듯하다. 이는 회화가 이국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흑백 사이 어디 즈음에서 꿈틀대는 식물의 모습이 마치 열대의 자연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에서 수묵화와도 비교할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수묵화라고 무조건 이국적인 것은 아니니 김유정이 그린 식물, 정원,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색채만의 이유는 아닌 듯하다. 또 다른 가설로는 그녀만의 특유한 작업 방식인 프레스코 기법과 관련을 살펴볼 수 있겠다. 알다시피 프레스코는 교회 건축물 내부의 벽화를 그리는 방식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일반 가정의 실내 벽화를 그리는 상당히 대중적인 기법이다. 김유정은 견고하게 제작된 캔버스 형태의 나무 패널 위에 여러 단계(벽체조성-모르타르-초지-화지)를 거쳐 최종적으로 발라진 화지의 표면 위에 검정색을 도포한 후 석회(회벽이)가 마르기전에 음각을 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이 쌓여 단순한 흑백회화로 규정 내리기보다는 화면을 만든 후 화면에 흠집을 내어 형상을 찾아가는 과정에 의해 풍경이 나타난다고 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가는 흑과 백의 공간 혹은 음영 사이에서 '회색풍'의 풍경 또는 세계를 발견하는 것을 아닐까?

김유정_온기_프레스코, 회벽에 스크래치_113.5×162cm_2015
김유정_온기_프레스코, 회벽에 스크래치_90×140cm_2016
김유정_온기_프레스코, 회벽에 스크래치_113.5×162cm_2015

어차피 풍경은 이미 존재하는 자연과는 다른, 그러니까 인간의 탄생 이전부터 존재했으리라 믿고 있는 세계의 바탕인 자연의 존재와는 다르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풍경은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낸 자연의 형상이 아니다. 풍경은 이처럼 야생으로서의 자연을 인간이 사는 도시에 맞도록 크기와 형태를 재단한 상태이며 네 벽 안에 배치된 자연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인공화된 자연 또는 도시화된 자연이라 부르는 게 더욱 올바른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풍경이야말로 대자연이 인류에 선사한 큰 선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잔연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천임에 분명하지만 시각적인 장관으로서의 자연 그리고 정동(affect)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인간중심의 관점으로 생성된 개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풍경의 생성에는 자연의 해체가 전제된다. 자연적인 것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다. 자연을 인간이 사는 세상의 축척에 맞도록 재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풍경론은 서구적 세계관에 보다 가까운 개념이다. 그렇다고 동양은 자연을 존중했기에 축척을 재단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을 재단하는 문화는 동일하게 존속되고 있다. 현대사회는 자연을 절대적 이상으로 대안적 미래로 생태학적 이념으로 소비한다. 그 중에서도 산업화된 풍경의 가장 작은 단위인 화분과 근대기의 식민주의적 성격으로 탄생한 식물원은 오늘의 시점으로 볼 때 인간의 욕망, 문명의 이기심, 도시주의 안에서의 자연관 등 다각적인 관점의 해석을 유추할 수 있다.

김유정_틸란드시아(Tillandsia)_식물_가변설치_380×450cm_2016
김유정_축적(In stratum)_13×100×7cm_2016

그렇다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풍경을 생성한다는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 김유정의 프레스코 풍경은 자연을 재현한 회화로 볼 수 없다. 그녀가 선택한 대상들은 환유로써 자연을 대신하는 셈이다. 그것은 절대로 대자연을 대신할 수 없지만 자연을 우리의 삶 안으로 끌어들이는 대상이다. 다시 김유정의 작업으로 되돌아가보자. 버려진 화분들이 한데 모여 군을 이룬 Incubator-ownerless(2015), 건물의 창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들고 있는 식물을 다룬 Incubator 연작(2014-2015)은 작가가 발견한 환유적 자연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이 가엾은 생명들은 인간의 변덕으로 버림받은 소모품-자연인 셈인데, 생명을 유기한 인간에게 도전이라도 할 것처럼 울창하게 나타난다. 자연이 인간과 문명에 던지는 경고이자 찬란한 생명력이 주는 두려움이 동시에 드러난다. 동명의 작업에서는 버려진 소파 곁에서 가지를 뻗은 상당한 크기의 화분은 생물과 비생물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보여준다. (Incubator-ownerless, 2015) 수평이 강조된 화면이 인상적인 작업 "공생"(2015)은 위아래로 화면을 분할해 수족관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수중식물의 관계를 포착한다. 수면을 뚫고 나온 식물의 생명력에 비해 수족관의 물고기는 마치 도감에 나오는 이미지처럼 형식적이다. 작가는 식물의 번식력을 통해 무엇을 질문하는 것일까? 아마도 전시 표제가 이 질문에 관한 답을 어느 정도 가늠케 한다. 「생존조건」은 순전히 야생에서만 필요한 생명유지의 수단은 아닐 것이다. 근대문명이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여 이를 지배하려는 노력이었다면, 현대는 자연과의 공생을 추구한다고들 말한다. 이렇듯 이성적이고 정당한 미래에 대한 전망과 실천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모순적으로 세상은 무한경쟁을 요구한다. 세계화 시대에서의 도시의 삶은 냉정하고 위생적이며 이성적이고 세련됨으로 치장되지만 이러한 외연의 이면에서는 더 이상 치열하기 힘들 정도의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온기"(2015) 연작은 식물원의 흔한 장면을 재해석한 작업이다. 무럭무럭 울창하게 자란 식물원의 자연은 인공적으로 완벽하게 조절된 기후와 정원사의 각별한 배려로 생명을 유지한다. 장소는 더 이상 무의미한 것 같다. 세계화는 무역장벽과 언어의 차이만 없앤 것이 아니라 각 장소가 갖는 고유의 이야기, 발자취, 미래마저 잠식하고 있다. 식물원의 등장이 식민주의의 씨앗이자 제국주의자들의 권위를 보여주는 수단이었듯이, 이 속에서 살아가는 자연은 연구의 대상이고 전시 가치로 채워진 소비사회의 또 다른 단면이다.

김유정_Labyrinth_타일프린팅_가변설치_2014
김유정_조각난 숲展_인천아트플랫폼_2016

김유정의 작업이 발산하는 이국적인 낯섦은 표현기법과 작업의 대상이 주는 "회색성" (grayness)으로 기인하는 듯하다. 여기서 회색성이란 흑과 백의 사이, 이분법의 경계, 가장자리이자 중간을 가리킨다. 프레스코 기법을 이용한 캔버스 회화라는 모순, 자연과 인위적인 상품 사이에 위치한 화분, 대지에서 자라는 식물이 아닌 콘크리트 벽면 사이에서 자생하는 식물, 그리고 생명의 기원(origin)에서 이주한 식물의 전시장인 식물원의 장면 등은 이중적 위치에서 삶을 유지하는 생명체에 관한 작가의 시선을 대변하고 있다. 이 회색성은 나약하지만 위험한 존재이고, 하찮은 존재이기에 늘 전복의 가능성이 잠복하는 상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정현

Vol.20160506i | 김유정展 / KIMYUJUNG / 金維政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