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線을 찾아서

소원 문은희展 / MOONEUNHEE / 少園 文銀姬 / painting   2016_0511 ▶︎ 2016_0531 / 일요일 휴관

소원 문은희_무제_한지에 수묵_62×40cm_198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나무아트 만사作통 프로젝트-2 展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일요일 휴관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이번 나무아트의 '만사作통 Project'는 소원 문은희선생의 대표적 작품으로 점점 소멸되어 가고 있는 동양화의 필력에 기반한 필선을 전시의 포인트로 집중해서,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인 線에 대해 현재의 조형적 시각에서 되돌아보며 접근하고자 한다. ● 소원 문은희 선생의 '수묵 누드' 작품은 197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다. 인체를 모필로 단번에 파악하고 그리면서 붓의 강약, 선의 유연함과 단단함, 그리고 붓의 필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이럴 경우 작품은 일체의 덧칠이나 두 번 조차 덧그은 선 없이 단 한 번의 호흡으로 결정된다. 인체라는 대상의 구조와 형태에 응물(應物)하면서도, 동시에 붓의 힘을 동반한 아름다운 默線의 결정은 유려하면서도 견고한 긴장을 남긴다.수묵누드 초기인 7, 80년대엔 크로키 하듯 인체를 단 몇 개의 선으로만 견고하게 구성하면서 최소한으로 환원되는 자아의 한 단면을 남겼다면, 2000년도 이후부터는 꼴라쥬기법으로 인체를 중첩과 집적하면서 자아, 대상성, 필선들의 해체를 시도하는 올오버(All over)의 화면을 연출한다. 이는 불교적 연기론에 바탕한 세계관의 반영임과 동시에, 조형적으로도 무언가를 구축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작업태도를 취한 것이라 하겠다. ■ 나무화랑

소원 문은희_무제_한지에 수묵_140×70cm_1990

작가의 선은 분명 선에 대한 전통적인 덕목들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분방하고 개성적인 것이다. 즉 곧고 빠르며 거친 작가의 필(筆)은 중봉 원필에 의한 유려, 섬세, 감각적이며 느린 것을 미덕으로 삼는 전통적인 필선들과는 다른 것이다. 오히려 전통적인 필묵관에서 꺼리는 둔탁하고 둔중하며 빠른 요소들을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구사된 필선들은 모난(方)것이며, 이는 바로 작가의 작업이 양강적인 것으로 각인되게 하는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모필이 가지는 심미적 기능은 질감, 입체감, 리듬감, 운동감 등 다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중 필요에 의한 몇 가지, 혹은 전혀 개인적인 기호와 취향, 그리고 목적에 따라 자신만의 독특한 필선들을 확보,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양강(陽剛)과 음유(陰柔)-그 상생의 세계』중에서) ■ 김상철

소원 문은희_무제_한지에 수묵_140×70cm_1989

문화백의 線描가 극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단연 그의 누드크로키에서 발견된다. 그의 누드는 해부학적으로 관찰되는 신체가 아니다. 그 자체가 작가의 몸부림이며 표정이다. 두 번째의 기회가 허용되지 않는 검도인의 칼끝처럼 그가 붓으로 그어낸 묵선에는 숨을 몰아쉬게 하는 생명의 긴장이 느껴진다. ----중략---- 문화백의 近作인 꼴라쥬 기법의 누드회화에는 독특한 구조가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누드의 형태가 개별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 고리를 이루듯이 연결되어 있다. 어느 형태도 중심을 이루거나 대표적인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저것에 의존하고, 저것은 이것에 의존하여 생명의 교향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평소 실천해온 佛敎的 명상으로부터 이끌어낸 緣起의 파노라마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상호괸계에 의해서만 그 존재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無常한 것이고 그 바탕은 아무런 성질도 형상도 지니지 않고 오직 연기의 그물로 몸을 싸고 있는 空인 것이다. 이들 근작에는 확실히 輪廻의 環이 엿보인다. (『自然·人生·藝術』 중에서) ■ 김구산

소원 문은희_무제(Moving nude)_한지에 수묵_70×140cm_1988

그러면 그 박진성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욕망에서 우러나오는 것일까? 박진성, 특히 더 할 수 없는 찬미와 더불어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젊은 모델들의 누드들을 담은 소원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박진성은 우연히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예술에서 그러하듯이 욕망은 색정적이거나 성적이라는 함축된 의미를 담으면서 작품속에 포함되기 마련이다. 짙은 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욕망은 화면으로 옮겨지면서 유혹에서 벗어나 정도가 약해지면서 화면 전체에 자리잡게 된다. 34미터에 달하는 힘이 넘치는 화면 위에 먹으로 그려진 인체들은 화가의 강한 감수성과 같이 범상치 않은 공간에 에로틱한 분위기를 부여해 준다. ● 소원의 작품을 대하면 마티스의 기법과 완전하게 합치된 느낌을 갖게 된다. 마티스의 작품은 그 그림을 보는 즐거움은 물론, 인체 속에 갇혀 스스로 고독하게 만드는 벽을 허물고 "자연스럽고 부드러움"을 느끼게 해준다. 소원의 작품은 육체를 소유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제한된 공간을 열어 보이고자 하는 작가적인 표현의지를 구현하고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구성의 시작도 끝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 소원의 누드들은 서술적인 형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가 창조해내는 누드들은 바로 우리 내부의 가장 깊은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욕망이 화면이라는 회화공간에 가장 자유롭고도 원초적인 모습으로 자리하는 그런 것이다. (『아라베스크의 박진성(迫進性)-소원 문은희의 누드화』중에서) ■ 장 뤽 샬리무

소원 문은희_무제_한지에 수묵_70×70cm_1987

문은희에게 있어서 색채, 형태, 공간(여백)은 현상(現象)으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본적이고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회화적 요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이의 성질과 먹과 물의 가감에 의한 운필의 묘를 살려 자기의 내면을 선묘할 수 있는 먹색의 다채로운 운용과 일획이야말로 - 여기서 먹속에 다섯가지 색이 있다는 말을 인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녀에게는 이 세상에서 찾아 낼 수 있는 궁극의 표현양식이라 생각된다. 또한 공간 구성도 중요시했기 때문에 흰 공간 속에 마음 먹은대로 포즈를 취하게 하고, 배치할 수 있는 나부에 착안한 것도 이치에 합당하다고 하겠다. ● 한국화단의 동양화 원로 김기창화백이 나에게 써준 메모로 문은희의 수묵누드에 관한 전체가 요약되리라 생각하며 이것을 인용함으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나에게는 수백명에 이르는 제자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언제나 주시하고 있었던 제자가 바로 문은희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첫째로 쉬지 않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성과는 연일 모델을 써서 그리는 수묵누드에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모필에 의한 누드화는 세계에서도 문은희가 유일할 것이며 또한 그 선의 맛과 힘찬 에너지 또한 따를자가 없을 것이다. (『융합되는 서양의 형태와 동양의 선묘(線描)』중에서) ■ 와시오 도시히코

소원 문은희_회귀-넋_한지에 수묵, 콜라주_180×180cm_2000년대
소원 문은희_회귀-무아_한지에 수묵, 콜라주_90×90cm_2000년대

소원선생의 수묵누드 작품은 거기에 내재한 작가의 표현어법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의 특성을 보인다. 우선 1970~80년대 후반까지의 작품들로 작가의 심리나, 감정, 기질이 그대로 그림에 이입되는 표현적 성격이다. 강열한 힘의 분출, 쓸쓸한 내면이나 실존적인 자아 등이 필획의 분방한 운용에 의해서 화면의 성격을 결정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중봉의 단아한 필획보다는 거칠고, 속도감 있고, 호방한 필획의 운용이 돋보인다. 이 철골과 같은 장봉(藏鋒)의 필선이 견인해내는 여체의 뉘앙스는 고통이나 슬픔과 같은 포우즈와 어울리면서 간략하게 하난의 화면을 구축한다. 그것은 마치 검기(劍氣)와 같이 견고한 긴장감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여체의 형태를 따라 부드럽고 유려한 선의 흐름으로 조형적인 맛을 동시에 보여준다. 단 몇 개의 선으로만 구성되는 이 절제된 화면은 작가의 정서나 심리를 더욱 응축해서 최소한의 언어로 다가온다. 철저하게 최소한의 대상성을 취하는 선은 그 자체로 비움의 형식을 취하는 조형성이지만, 한편으로는 작가의 열정이나 감정이 더 예리하게 배어나오기도 한다. 이 드라마틱한 감정이입과 순간적 표현의 절대성, 그리고 다시 절제된 선으로의 환원이 동시에 존재하는 화면은 언어를 배제한 채 더 견고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90년대 중반 이후의 작품인 누드꼴라주에서는 이런 감정이입보다는 삶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통찰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화면 가득하게 집적된 숱한 인체들과 그 공간에서 기인하는 큰 단색조의 흐름과 동세, 팽창하는 올 오버(All over)의 화면은 여전히 작가의 기질과 개성을 드러내지만, 그토록 집착하던 고독과 자아, 필선의 힘으로부터 벗어나 오히려 어떤 여유를 풍긴다. 물론 화면은 가득찬 형상의 집적으로 여백을 아예 없애 버렸지만, 역설적으로 거기에서 삶과 미술에 대한 담담한 거리두기와 관조가 보인다. 형상을 가득 채움으로 오히려 날카로운 표현을 중화 시키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생각을 "담아내고 흔적화" 하는 것이다. 거기엔 고희와 팔순이 지나면서 삶과 미술을 어떤 입장과 태도로 맞을 것이가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근거한다. 작위성을 배제하고, 검기어린 필선들을 중화시키고, 형태를 해체하며, 마음 가는대로 붙이고 흘리고 뿌리면서 삶에 대한 관조를 이미지화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거기엔 삶을 거치면서 체험했던 일체의 현상이 모두 찰나적이고, 그것은 영원히 변화하는 무상(無常)이자 모든 인연과 존재는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라는 불교철학적 인식적 사유가 담담하게 펼쳐진다. 초기작에서 보이던 강한 자신에게로의 집착과 그로인한 표현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뜨거웠던 심장의 자리에 채워진 여유로움은 화면을 동(動)적이되 그 성격은 정(靜)적으로 만들고, 치열했던 실존 대신 관념을 드러냈다. 이런 형식과 내용의 반어적인(수묵누드에서는 간결한 형식에 자아를 가득 채워 내고, 꼴라주 작업에서는 화면 가득한 이미지에 오히려 자아를 비워버리는) 역설적 어법이 견인해내는 것 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고전적인 장르인 동양화 개념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이다. 그것은 소재, 재료, 기법 등의 외피적이고 상식적인 '틀'에 대한 거부이면서, 동시에 주체적이고도 자유로운 작가의 발성법에 의한 내용에의 모던한 접근이다. (『자아와 회화, 그 변증의 정직성』중에서) ■ 김진하

Vol.20160511h | 소원 문은희展 / MOONEUNHEE / 少園 文銀姬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