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꿈 : 이동의 시간 Midday Dream : Time of Movement

김온환展 / KIMONHWAN / 金溫煥 / painting   2016_0622 ▶ 2016_0628

김온환_여행자 ; 꿈, 의문, 성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데칼_각 24.2×40.9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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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0625_토요일_04:00pm

PROJECT420 Performance 「당신의 1초와 21분」 서선영, 이미광_안무 / 김두이_영상 / 김광연_연주 x Ginger Brown_작곡 '1분의 물결'

관람시간 / 10:00am~07:00pm

유나이티드 갤러리 UNITED GALLERY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102길 41(역삼동 616-12번지) Tel. +82.2.539.0693 www.unitedgallery.co.kr

프루스트가 꾸는 한낮의 꿈예술 덕분에 우리들은 단 하나만의 세계, 즉 우리의 세계만을 보는 대신 그 세계가 스스로 증식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7권 되찾은 시절」 중 1. 속지 않는 자 ● 자크 라캉은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Les non dupes errent"라고 말했다.(Seminar XXI) 그의 말에 의해 이제 '방황'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종착지가 정해진 틀에 박힌 여행을 넘어서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진정한 여행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속지 않는 자는 진정한 여행자다'라고 바꿔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김온환 작가는 속지 않는 자라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정주定住를 택하지 않았다. 그녀의 기존 작업은 고전적 회화의 범주에서 서정성을 담보로 굳건히 멈춰 서서 '대중적'이라는 세례를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작가는 느슨한 사유 속에서 대중성이라는 미덕을 품고 벽에 걸리기 좋은 장식성과 편안한 미감으로 마치 풍파 없는 지중해의 햇살을 받는 편안함을 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온환 작가는 방황을 택했다. 농부 카인Cain의 정주보다는 양치기 아벨Abel의 유목(노마드)을 택한 것이다. 성경의 창세기 4장에서 농부인 카인이 신이 그의 남동생인 양치기 아벨의 제물만 받자 화가 나 들에서 아벨을 죽인다.

김온환_Object_Messenger Bike 1978_캔버스에 유채_40.9×53cm_2015

기름진 땅의 풍요로움(대중성)에 속지 않고 메마른 땅(작품성)의 치열함에 뛰어들어 진정한 여행, 방황을 선택한 것이다. 분명 작가도 카인의 칼날이 아벨을 향하고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여전히 대중성의 칼날이 작품성의 등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방황을 택했다. 그녀는 예술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에 "속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리라. ● '방황'은 불안과 자유를 끌어안고 있다. 종착지가 없어 불안하고, 그래서 어쩌면 자유로운지도 모르겠다. 김온환 작품들의 다양한 레퍼런스는 표면적으로 즐거운 사유의 여행으로 읽힐 수도 있다. 자유롭게 흘러가고 퍼져나가는 작가의 사유로 직조한 작품은 사유의 기쁨을, 변신의 쾌락을, 자유의 선언을 발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그것이 진의眞意일까? 아니다. 이는 작품을 한 쪽 눈을 감고 단안시單眼視로 보는 것이리라. 김온환의 작품을 양안시兩眼視로 본다면 사유의 기쁨은커녕 탐색의 고통을 끌고 가는 작가의 고뇌가 너물거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여행(방황)하는 사유가 자유로 점철되어있을 리 만무하다. 결국 사유의 밤이 찾아오면 종착지가 없는 여행(방황)은 불안을 등에 업고 야행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온환_Object_SIRONVAL Sportplex 1939_캔버스에 유채_65.1×90.9cm_2016

2. 여행하는 현재 ● 김온환의 여행은 방황이며, 진정한 여행이다. 그리고 이 여행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라는 거대한 사유의 세계를 따라 걷는 것으로 보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대표되는 프루스트의 세계는 김온환의 사유와 긴밀하다. 비단 '마들렌'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소환, 혹은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1913년부터 1927년까지 쓴 일곱 권의 장편 소설로, 어머니가 성인이 된 화자(저자 본인으로 보이는)에게 마들렌과 보리수 차를 주었을 때 그 미각의 체험이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유년기의 기억을 전부 떠올리게 한 '마들렌의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이것을 '비자발적인 기억'이라 한다.

김온환_Object_SMITH&CO.Long John 1983_캔버스에 유채_65.1×90.9cm_2015

눈앞의 마들렌(현재)이 과거의 마들렌을 불러오듯이, 프루스트의 세계는 현재에 발을 딛고 과거를 소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온환 작가의 서정적 회화 작업이 과거의 소재를 중심에 두고 있기에 과거를 향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현재에서 과거를 보는 모습, 현재에서 굳건히 발 딛고 있으려는 의지는 프루스트 세계와 무척 닮아있다. 어떤 이는 과거의 자전거나 자동차, 비행기가 소재인 「Object_SIRONVAL Sportplex 1939」(2016)나, 「Object_SOLLING Pedersen 1978」(2015), 「Object_Pony 1976」(2012) 등의 구상 회화 작업에서 노스텔지아(향수)의 욕망이 표현되어 있다고 너무도 쉽고 간편하게 단언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가?'라는 인간과 삶의 의미를 되묻는 것에서 시작해 작업하고 있다"(작가노트)는 작가의 발언으로 노스텔지아의 욕망으로 구상 회화 작업을 묶으려는 사유가 얼마나 짧고 단순했는지 깨닫게 된다. 그녀는 단순히 (혹은 간단히) 과거에 기대어 평면적으로 향수에 안온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끌고 와 입체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닌) 현재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결국 과거의 소환은 '지금 여기'를 위해 필요한 장치가 된다. 그렇다고 '과거는 아름다웠지만 현재는 괴롭다' 식의 부정적 접근을 보이려고 과거를 끌어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노스텔지아의 욕망이 아니겠는가.) 이 사실은 구상적 작업을 벗어난 추상적 작품, 상징적 작품에서 명확히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얼굴의 구멍들로 인류를 연결하고(「내가 받은 7개의 선물」 연작(2016), 「너, 나, 우리」(2016)), 현재의 좌표를 묻는(「여행자;꿈, 의문, 성찰」(2016)) 상징적 행위로, 더 나아가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류 보편의 문제(「삶과 죽음 ; 1764」(2016))에 접근하는 것으로 노스텔지아의 헌 옷을 벗는다. 이것은 김온환이 구축하려는 현재가 단순히 과거의 향수에 기대어 있는 초라한 현재이거나, 미래의 '합合'을 위해 과거를 '정正'으로 만들어 현재를 '반反'으로 희생하려는 변증법적 현재가 아닌 것을 보여준다. 김온환의 현재에 '집단 무의식'(카를 융)의 체취가 묻어 있는 것은 그녀의 작업이 노스텔지아를 넘어서 인류 보편적 가치와 사유에까지 닿아있기 때문이다.

김온환_너, 나, 우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 흑연_각 45.5×37.9cm_2016

3. 순수한 지속durée, 아이온aiôn, 그리고 '낮 꿈' ● 김온환은 여행을 이동이며 시간의 흐름이라고 말한다. 여행에 대한 작가의 사실적/수치적 기술記述, 즉 시간과 거리라는 측정 가능한 여행의 방법론은 다양한 작품으로 변주되는 흐름을 타고 철학적 기술로 이어진다. 과거도 현재였던 적이 있고, 현재도 금세 과거가 되며, 미래 또한 현재가 되고 과거가 되는 시간관에 도착한 작가는 이제 더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얼굴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에 개입한 프루스트의 '마들렌'(비자발적 기억)이 비선형적으로 과거를 소환하여 현재의 자리(시간)에 과거(기억)를 놓는 것처럼, 김온환의 시간은 등질적等質的이고 순차적인 물리적 시간에서 벗어나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인 시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마들렌으로 인해 과거의 마들렌이 자연스럽게 소환되는 '비자발적 기억'은 '순수한 지속durée'(앙리 베르그송)을 가능케하는 의식의 고유한 시간이다. 그리고 순수한 지속은 연대기적 시간과 달리 과거를 '상실'시키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현재로 흘러들게 한다. 이러한 시간관은 김온환의 작품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으며 깨어서 꾸는 '낮 꿈'이라는 개념으로 연결된다.

김온환_삶과 죽음 ; 1764_패널에 아크릴채색, 흑연_80×60cm_2016

작가는 깨어있는 낮에 꿈꾸길 원한다. "밤에 자면서 꾸는 꿈이 아닌 깨어있는 낮에 꿈을 꾼다는 것은 삶 속에서 항상 희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작가노트) 작가에게 깨어있는 '낮'(현재)은 부동의 '잠'(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지의 '꿈'(미래)을 꿀 수 있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작가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삶이 현재로 정지해있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작가가 '낮'이 아니라 '낮 꿈'을 말하는 것은 현재(낮)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를 확장(꿈)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현재가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된다"는 질 들뢰즈의 말은 김온환이 확장할 수 있다고 믿는 시간성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단서를 제공한다. 현재가 과거와 미래의 양방향으로 탈주하는 시간, 바로 들뢰즈가 언급했던 '아이온aiôn'의 시간은 「삶과 죽음 ; 1764」의 '生'(과거)과 '死'(미래)로 구성되는 모습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생生'과 '사死'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현재는 잡을 수도 잡히지도 않는 시간이다. 단지 들뢰즈의 말처럼 "무한히 분할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작품에서 현재는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작품에서 현재는 없다.) 여기에 더하여 작가는 '生'과 '死'를 한 글자처럼 이어놓음으로써 과거를 미래로, 미래를 과거로 만들어버린다. 실로 아이온이 활성화되는 '영원한/무한한 순간'에 접어드는 것이다. 현재가 무한히 분할되고 영원히 지속(순환)하는 모습은 '프렉탈fractal' 이미지 작업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는 '낮 꿈'이란 은유를 통해 이미 이러한 시간성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온환이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과 '순환성recursiveness'을 특징으로 하는 프렉탈 이미지를 작업에 도입한 것은 명백히 영원/무한히 순환하는 반복적 시간을 시각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김온환_생존, 그리고 생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데칼_각 27.4×27.4cm_2016

이러한 김온환의 순환적 시간성은 시작과 끝이 이어져 있는 원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바로 자전거 바퀴로 상징되는 시간이다. (물론 얼굴을 추상적으로 그린 「내가 받은 7개의 선물」 연작과 「너, 나, 우리」 등도 원형이 나타난다.) 그녀는 자전거를 소재로 그린 서정적 구상 작품뿐만 아니라, 자전거 바퀴 잔상을 데님denim에 추상적으로 표현한 「cycle cycle」(2016)과 「cycle I」(2016), 「cycle II」(2016) 등에서 영원/무한히 순환되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특히 숫자와 함께 표현된 「cycle」 연작은 작가가 시간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명확히 알려준다. (이 작업이 시계로 오인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 김온환은 과거와 미래가 이어져 반복되는 '영원회귀永遠回歸'의 궤도를 돌고 있다. 그렇다고 생生이 동일하게 영원히 반복된다는 니체의 허무주의적 사유의 궤도는 아니다. '낮 꿈'을 통해 희망을 노래하는 그녀는 반복 속에서도 '차이, 그 자체'를 더 중요시하는 들뢰즈의 사유와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작가가 현재하고 있는 여행은 '순수한 지속'이 가능한 의식의 여행이며 영원/무한하면서도 차이를 갖는 아이온의 여행이다. 그렇기에 이 여행은 선형적으로 종착지를 향해 가는 약속의 여행이 아니라, 종착지 없이 비선형적으로 미지의 꿈(미래)을 찾는 '방황'의 여행인 것이다.

김온환_cycle I_탈색 데님_40.9×53cm_2016

4. 7개의 구멍 ● 프루스트의 세계에서 벗어나길 갈구하던 사르트르는 "결국 우리 자신까지도 우리의 외부에 있고, 모든 것은 세계 속에 있으며 인간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하며 프루스트로부터 해방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 선언 또한 얼마나 프루스트적인가. 우리 '내부'에 있는 '비자발적 의식'이 촉발되는 순간은 우리의 '외부'에, 인간들 사이에 놓여 있는 '마들렌'과 같은 사물이 아니던가. 사르트르의 말대로 "우리 자신까지도 우리의 외부에 있"다면 외부는 더 이상 외부가 아니라 내부일 것이다. 결국, 외부와 내부는 연결된 '하나'를 향해간다.

김온환_cycle cycle_탈색 데님_65.1×100cm_2016

김온환은 얼굴에 있는 7개의 구멍을 통해 유기적으로 하나인 인류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각자의 피부를 막으로 철저히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외부와 내부의 경계는 무너진다. 바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그 순간이다. 작가는 '눈 2개, 콧구멍 2개, 입 1개, 귀 2개'가 자신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해주는 통로라고 공언한다. 이 통로들은 안이면서 밖이고, 밖이면서 안으로 존재한다. 사르트르의 선언처럼, 프루스트적으로 "모든 것은 세계 속에 있으며", 세계는 개인 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김온환은 「내가 받은 7개의 선물」 연작과 「너, 나, 우리」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나'와 '너'는 연결되어 있다는 신념, 너와 나는 같은 공기를 마시고 내뱉으며, 네가 보는 것을 나도 볼 수 있고, 네가 듣는 것을 나도 들을 수 있다는 확신, 작가는 이것을 '소통'으로 전이시킨다. 그리고 더 큰 관점으로, 사르트르의 선언을 다시 빌려, "모든 것은 … 인간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인간의 외부에 대한 믿음, 그리고 외부는 내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으로 지구라는 단일 유기체를 떠올리게 한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소통'을 넘어선 '하나'라는 실체에 직면하게 되고, 김온환 작가가 말한 "나와 타자가 다르지 않"다는 철학적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김온환_내가 받은 7개의 선물-셋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_130.3×97cm_2016

5. 낮 꿈 ≦ 420 ● 감각이 사유를 건너뛰고 가슴에 부딪히면 마음을 흔들지만, 사유를 뚫고 가슴으로 다가온 감각은 마음뿐만 아니라, 머리에까지 파란을 일으킨다. 김온환은 사유를 건너뛰고 감각만으로 표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래서 작가는 정적이고 평면적인 예술을 넘어 동적이고 공간적인 예술로 자신의 개념을 확장한다. 김온환은 벽면에 박제되어 있던 '낮 꿈'을 공간의 구석구석에 몸짓과 소리로 풀어놓는다. 현대무용가와 시각예술가, 영상예술가, 음악연출가로 구성된 'PROJEC 420'의 일원인 그녀는 그들과 협업을 통해 전시 공간에 새로운 현재를 구축한다. 김온환의 '낮 꿈'은 project 420으로 인해 더욱 거대한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 또한 김온환이 보여주고자 한 '낮 꿈'의 개념이기에 그녀가 추구했던 작업세계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결국 project 420은 김온환 개념의 확장인 동시에, 그 자체로 다시 김온환 개념의 본체로 수렴된다. ● 재현해야 할 세계가 존재하고 그것을 평면에 투명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느슨한 믿음은 얼마나 광신적인 모습인가. 김온환은 자신의 사유를 담는데 평면을 넘어서려는 성실한 믿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알고 있다. 성실한 믿음이 우리 삶을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 안진국

PROJECT 420 ● 프로젝트 420은 시각예술가(김온환)와 현대무용가(서선영, 이미광 ; '춤서이'), 영상예술가(김두이 ; '열다섯번째 태양 스튜디오'), 음악연출가(이지정 ; '진저 브라운')로 구성된 콜렉티브 예술가 그룹이다. '우리 사이의 공간 속 이야기'를 담고 있는 프로젝트 420은 '420'이라는 숫자를 통해 작업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이'로 읽히는 '42'는 관계성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로 '너'와 '나', 혹은 '우리'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래서 프로젝트 420에서 관계는 작업의 중요한 주제이다. 그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공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42의 뒤를 잇는 '0'은 그런 의미에서 '사이'의 의미를 완성한다. '0'은 '공空'으로 '공간'이 되고, '0'의 위에 늘임표를 붙임으로써 더욱 확장된 공간을 사유하게 한다. 프로젝트 420은 너와 나, 우리 사이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각과 청각, 몸짓, 영상을 통해 시·공간을 넘나드는 예술로 담아내고 있다.

Vol.20160622b | 김온환展 / KIMONHWAN / 金溫煥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