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기에 관하여

제여란展 / JEYEORAN / 諸如蘭 / painting   2016_0820 ▶ 2016_1003 / 월,화,수요일 휴관

제여란_usquam nusquam_캔버스에 유채_145.5×112.2cm_201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50521e | 제여란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6_0820_토요일_03:00pm

관람료 / 성인(만 19세 이상) 5,000원 학생(만 8~18세),20인 이상 단체,65세이상 노인,군인,국가유공자, 장애인(복지카드 소지자),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4,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화,수요일 휴관 * 행사 일정에 따라 휴관하거나 관람 시간이 변경될 수 있으니 방문 전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MIMESIS ART MUSEUM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253 3층 Tel. +82.31.955.4100 mimesisart.co.kr

올 1월초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골마을의 막다른 길에 승용차 한 대가 도착한다. 블랙 슈트를 입은 남자가 비닐하우스로 들어선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또 다른 거대한 철문이 있다. 철문이 열리자 유화물감 냄새가 남자를 먼저 맞이한다. 그리고 남자의 시선을 압도하는 거대한 그림들이 출현한다. 이글거리는 컬러풀한 물감 덩어리들이 블랙 슈트 남자에게 마치 달려들 것만 같은 그림들이다. 남자는 거대한 그림들 사이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인사말을 건넨다. "(그림들이) 섹시합니다." ● 블랙 슈트 남자는 빅뱅Big Bang의 멤버 탑T.O.P이고, 그림들 사이에 서 있는 여자가 바로 제여란 작가다. 탑은 당시 작업실에서 작품을 보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과 구입한 작품들을 집 안에 설치한 사진들 10여 장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스페이스K 이장욱 큐레이터의 말에 의하면 '이틀 만에 통합 라이크LIKE 2백만 건을 기록하기도 했다.' 미술계 외부에는 비교적 덜 알려졌던 '작가 제여란'은 탑의 인스타그램 사진들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그 이름을 각인시켰다. ● 탑이 구입한 100호 그림은 제여란의 2006년도 작품 「어디든 어디도 아닌usquam nusquam」이다. 흥미롭게도 2006년은, 언더그라운드에서 템포Tempo라는 이름의 래퍼로 활동하던 최승현이 탑이라는 이름의 빅뱅 멤버로 데뷔한 해이다. 또한 2006년은 제여란의 작업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 해이다. 2006년 5월 제여란은 토탈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 개인전은 1994년 인공갤러리 개인전 이후 개최된 12년 동안 야심차게 준비한 개인전이었다. 그런데 이 개인전에서 제여란은 1995년부터의 작품이 아닌 2000년부터 2006년 초까지 작업한 작품들을 전시한다. 와이? 왜 작가는 12년 만에 개최한 개인전에 6년간의 작품들만을 전시한 것일까?

제여란_usquam nusquam_캔버스에 유채_227×182cm_2015

제여란 회화의 특징 중 하나는 실크스크린용 '스퀴지'의 사용이다. 작가는 1990년 초부터 말까지 '붓'과 함께 '스퀴지'를 사용했고, 2000년부터 붓이 아닌 스퀴지만을 사용해왔다. '상투적 표현에서 이탈하기 위해, 붓 대신 스퀴지를 사용한다'고 제여란은 말한다. 15년 넘게 스퀴지만을 사용하고 있으니, 작가에게 스퀴지는 이제 붓처럼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 만약 당신이 제여란의 1990년부터 2006년 전반기까지의 작품들을 모조리 조회해본다면,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작가는 붓과 스퀴지를 거칠게 사용한 어두운 톤의 그림을 그렸다면, 2000년부터 2006년 전반기까지 작가는 스퀴지를 세련되게 사용하여 단색조에 가까운 어두운 검정이나 파랑 그리고 빨강 그림들을 그렸다. ● 2006년 개인전 이후 가을, 제여란은 작업에 커다란 변화를 갖는다. 그 변화는 크게 세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첫째, 작가는 어두운 단색조에서 벗어나 컬러풀한 색들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둘째, 작가는 스퀴지를 세련되게 표현하는 것에서 이탈하여, 몸 전체의 움직임을 사용한 거친 스퀴지의 움직임을 화폭에 담는다. 셋째, 작가는 제 내부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더 이상 억압하지 않고 화폭에 '폭로'해 버린다.

제여란_usquam nusquam_캔버스에 유채_227×182cm_2014

탑이 구입한 「어디든 어디도 아닌」은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 된 작품이다. 제여란은 컬러풀한 물감덩어리들을 스퀴지로 밀어내며 야생적으로 표현했다. 탑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제여란의 그림을 처음 만나면 압도당한다. 와이? 왜 누구나 작가의 그림을 처음 대면하면 압도당하는 것일까? 물론 작품의 크기가 한몫하겠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작품이 넓고 굵은 획들이 꿈틀거리며 서로 뒤엉켜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끄러지듯 유동하는 유화물감 덩어리들로 표현된 그림은 언 듯 '2%' 부족해 보이기도 하고 어설퍼 보이기까지 한다. 제여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몸은 둥글지만 스퀴지는 직선적인 도구죠. 거기서 나오는 묘한 불편함이 있어요. 엇나가면서 오는 긴장. 어떤 얘기치 않은 빈번한 실수. 순간적으로 단 한 번의 행위를 통해서 완벽하게 팽팽해지는 긴장이 그림 안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게 촉발이 되어 그리다가 어느 순간 그림이 딱 끝나요. 그럼 괜찮은 작업이 되죠." ● 제여란 그림에서 느껴지는 2% 결핍과 어설픔은 '묘한 불편함'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화가의 둥근 몸과 직선적인 스퀴즈의 '만남(묘한 불편함)'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어긋남과 긴장이 바로 그림에서 나타나는 2% 결핍과 어설픔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림에서 나타나는 결핍과 어설픔이 관객에게 묘한 매력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제여란_usquam nusquam_캔버스에 유채_227×182cm_2016

문득 노자의 말들이 떠오른다. '크게 이룬 것은 결여된 것 같다大成若缺.' '위대한 기교는 졸렬한 것 같다大巧若拙.' 훌륭하게 완성된 것은 마치 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훌륭한 기교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완성도가 높을수록 결함이 줄어들고, 기교가 능숙할수록 완성도가 높아진다. 하지만 제여란은 노자의 말처럼 상식을 뒤집는다. 작가는 세련된 기교에서 이탈하기 위해 순간 어긋난 행위를 한다. 하지만 작가의 어긋난 행위로 인해 그림은 조화로움에서 벗어나 '기우뚱'해진다. 그 '기우뚱'은 의식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제 기교를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그것은 인위적인 기교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최상의 기교인 셈이다. ● 어설픈 것처럼 보이는 제여란의 그림은 보는 이들의 시선마다 다르게 보인다. 탑이 '섹시하다'고 말한 그림에서 어느 관객은 '봄꽃들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으로 떠올리는가 하면, 다른 관객은 '남녀의 키스하는 장면'을 연상한다. 그리고 혹자는 '살아 숨 쉬듯 용솟음치는 구름이나 세차게 흐르는 거대한 파도 같은 색채'로 보는가 하면, 어느 미술평론가는 '혼돈의 춤'을 해석하기도 한다. 와이? 왜 사람들은 제여란의 같은 작품을 보고도 각기 다른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일까? 그것은 제여란의 그림에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결핍과 어설픔 때문이 아닐까?

제여란_usquam nusquam_캔버스에 유채_182×182cm_2015

필자는 지나가면서 '그녀 내부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더 이상 억압하지 않고 화폭에 『폭로』해 버린다'고 중얼거렸다. 작가의 그림에는 세실리 브라운의 그림처럼 섹스 이미지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제여란의 그림에서 강렬한 성적 충동과 함께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낀다. 필자가 제여란에게 세실리 브라운의 그림보다 더 '야생적'이라고 말했더니, 제여란은 이렇게 답한다. 「세실리 브라운의 그림이 '살'이라면, 나의 그림은 '뼈'이다.」 ● 미끄러지듯 유동하는 유화물감 덩어리들로 그린 제여란의 그림은 '미지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관객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지의 세계'를 그려놓은 것이라고 말이다. 미지未知는 '아직 모름unknown'을 뜻한다. 작가의 그림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혹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그렸기에, 관객들은 작가가 그린 미지의 세계를 보고 각기 다른 이미지를 연상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제여란의 '미지의 세계'는 단지 열려져 있기만 한 것이란 말인가? 필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제여란의 '미지의 세계'는 일종의 '회화의 근원'을 지향한다. 그렇다고 작가의 '미지의 세계'가 곧 회화의 근원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회화의 근원은 작가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불가능한 회화의 근원을 표현하기보다, 관객이 회화의 근원을 상상할 수 있도록 관객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지의 세계'를 표현한다. 작가가 표현한 '미지의 세계'는 회화의 근원을 표현할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폭로한 것이 아닌가? 작가가 표현한 '미지의 세계'를 통해 회화의 근원을 찾는(깨닫는) 것은 다름 아닌 관객의 몫이 아닌가? ■ 류병학

Vol.20160820c | 제여란展 / JEYEORAN / 諸如蘭 / painting

Gwangju Bienn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