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hemeral Lines in Life

박창서展 / PARKCHANGSEO / 朴昶緖 / mixed media   2016_0902 ▶ 2016_0930

박창서_Ephemeral Lines in Life展_갤러리 신라_201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831e | 박창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6_0902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_01:00pm~06:00pm

갤러리 신라 GALLERY SHILLA 대구시 중구 대봉로 200-29 Tel. +82.(0)53.422.1628 www.galleryshilla.com

선은 단명하고 흐릿한 생은 경계에서 흐른다 ● 시각적 이미지는 그 자체 현존(presence)인바 형이상학적 이념이나 인식론적 실체, 혹은 실천 이성 개념에 비해 이차적이거나 보충적이었고 그렇기에 이미지는 정확한 혹은 올바른 재-현(re-presentation)에의 임무란 견지에서 평가되었다. 이미지가 가리키는 보편적 실재나 즉자적 현실, 혹은 객관적 대상을 보존/보증하려면 이미지는 더 정확하고 더 올바른 것이어야 했다. 속일 수 있는 이미지의 위험이나 틀릴 수 있는 이미지의 한계는 이미지의 검열과 추방을 제기하는 철학자나 종교인들을 정당화했지만, 이미지가 없으면 일상적 경험 자체가 불가능해지기에 그럴수록 이미지의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형이상학과 기독교의 헤게모니는 쇠락한게 분명하고, 덕분에 오늘날 어떤 지적, 의식적 통제도 없이 심지어 정확하고 올바른 재현에의 임무에서 자유로워진 채 시각적 이미지들은 '스펙타클'로서 '외설'로서 '시각적 체제'로서 우리의 전부이자 한계가 되었다. 지시체 없는 이미지들, 지성의 개입이 차단된 이미지들, 감각이라기에는 마비에 가까운 이미지들이 범람한다. 동시에 그런 이미지들이 가리키는 실재, 세계, 대상이 있다는 무의식적이고 기계적인 '믿음'이 이미지의 표류, 쇄설(碎屑)을 은폐한다. 부유하는 이미지, 고정점을 갖지 않은 이미지들의 시대에 사람들의 문제, 고통은 보이는 것들 너머가 존재한다는, 진실/진리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거두어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을 즐길 수 없기에 믿으려는, 보이는 것을 판단하려는, 보이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붙들어 매려는 약함인 것이다. 원본 없는 이미지들에서 원본을 찾으려는, 무한한 이미지들의 연쇄를 의미화하려는 관성이 시뮬라크르의 시대를 도덕화하고 '근대화'한다. 퇴행이고 강박이고 무비판적 관성이다. ● 여전히 정확한 지시를 이미지의 기능이라고 믿는 사람들 사이를 이미지는 감추지도 가리키지도 않으면서 떠다닌다. 시각적 이미지를 의심하는 부류 중 하나인 성찰적 예술가들의 문제의식은 그 사이, 일상적 경험방식과 이미지의 (탈)존재론 사이에서 작동한다. 세계의 자명성을 감각적 이미지들을 고정해주는 대상이나 세계 자체로부터 찾으려는 기계적이거나 의식적인 관성/태도가 이미지의 자율성을 배제한다면, 과잉의 이미지들, 아무 것도 담지하지 않은 채로 우리를 속이는 이미지들에 대한 현혹이 생에 대한 감각을 죽인다. 바로 이런 시대에 이미지란 무엇인가,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여진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이들이 있고, 그들의 예술적이고 일상적인 실천은 경화된 개념에서 이미지를 떼어내는 것이고 무의미한 이미지들을 다시 생에의 감각과 연결하는 것이다.

박창서_Ephemeral Lines in Life展_갤러리 신라_2016

십 수 년의 유학생활을 뒤로하고 2014년에 귀국, 이번에 귀국전을 겸한 개인전을 여는 작가 박창서의 20대 이후의 궤적은 변화무쌍할뿐더러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는 1990년대 초 대학에 들어가 학내외 시위에 느슨하게 가담해 있던 사회과학도였고, 동아리 멤버로 민중미술패의 걸개그림 제작에 참여했고, 뒤늦게 미대로 전과해 당시 한국 미술계의 주도적 담론이었던바 형식주의 모더니즘에 어정쩡하게 매달려 있게 된다. 졸업 후 유학을 가기 전까지 그는 일본 모노하의 영향 하에 미니멀한 물성(物性)에 경도된 대구 미술계를 잠시 맛본다. 말하자면 그는 문민정부 하에서도 잔존한 학생 운동의 정치적 태도와 정치적 미술로서의 민중미술의 서사적 이미지들을 배경으로 좀 더 자율적이고 자기-지시적인 선진미술의 문법을 습득했고, 그만큼 정치와 예술의 관계를 재조직해야하는 긴급한 문제에 봉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리로의 유학은 바로 그 문제, 정치적 예술과 예술의 정치라는 동시대 성찰적 예술의 화두를 그가 그만의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유학생인 그를 맞이한 것은 제도로서의 예술을 비판하고, 예술과 비예술(일상), (자율적)예술과 정치를 구분하는 비가시적 전제들을 가시화하면서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벼리고 정교화 하는 데 천착한 개념미술이었다. 작가는 그곳에서 (모더니즘)회화 이후의 미술, 동시대 예술을 연구하고 '제작'하고 기획하는 데 자신의 30대를 오롯이 바쳤다. 그의 40대의 연구와 작업은 이제 모국을 배경으로 할 것이고, 이곳에서 보고 느낀 것들, 문제들에 대한 것이 될 것이다. ● 이번 전시 제목 『Ephemeral Lines in Life』은 파리의 작업과 신작을 아우르는 그의 주제이면서 특별하게는 신작의 제목이다. 삶에 그려진 일시적인 혹은 단명하는 선들, 이란 제목은 엄청난 시간을 노동으로서의 예술제작에 할애하는, 작업실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전형적인 작가 이후의 작가들, 즉 생각하고 의심하고 비틀고 문제를 제기하는 (개념미술)작가들의 작업을 이해하는 단서일 것이다. 실제로 전시작에서 우리는 선들, 직선이나 곡선이나 비가시적인 선들을 만나게 된다. 이 선들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우리는 예의 '감상'을 통해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작가가 제출하는 선에 대한 새로운 '정의', 선에 대한 기성의 통념이나 개념을 해체하는 작가를 이제 따라가야 한다.

박창서_Ephermeral lines-N38-003_혼합재료_65.1×90.9cm_2016
박창서_Ephermeral lines-N38-005_혼합재료_65.1×90.9cm_2016

작가의 작업은 그의 문장대로라면 "한계와 간극"에 대한 것이다. 그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사물이나 세계가 만나고 차이를 드러내는 경계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선택'한다. 그곳은 내적 일관성을 갖는 자아가 최소화되고 거의 무화되는 곳이고, 타자가 이쪽으로 거의 밀려들어오는 곳이고, 쉴 새 없이 정치적 긴장과 충돌이 일어나는 곳이고, 감각적 연속성을 보증하는 개념화를 생성과 차이가 차단하는 곳이고, 그렇기에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제3의 삶이 솟아나는 물렁물렁한 틈이다. 비가시적 경계에 의존하는 자율성, 정체성, 환원적 동일성이 더 이상 불가능한 곳, 다름 아닌 그 비가시적 경계가 가시화되는 곳, 따라서 차이가 동일성을, 타율성이 자율성을, 수동성이 능동성을, 동사가 명사를 압도하는 곳, 명료한 선들, 그어진 선들이 녹아버리거나 뒤죽박죽이 되거나 아예 없었던 것으로 판명되는 곳. 혹은 경계를 나누는 선들은 모두 "단명하는ephemeral" 곳. 작가가 고집스럽게 가리키고 드러내고 지키려는 선 아닌 선들이다. ● 파리에서 이루어진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들인바 「불규칙한 간격Intervalle irrégulier」이나 「사라지다disparaître」 연작은 바로 그런 경계들, 영원할 것 같은 선들-개념-이 애매해지고 불규칙해지고 사라지는 경계들을 가시화하려는 작업들이다. 그는 해안선이라는 '개념', 의식에 굳건히 안착해 있는 기호, 경험적 실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을 해체하려는 시도로, 오직 밀려왔다 밀려가기만 하는 파도의 거품, 끝자락, 찌꺼기를 따라가며 막대기로 선을 그렸다. 해안선, 즉 사전적인 의미에서 바다와 육지가 맞닿은 선을 뜻하는 해안선이 가리키는 선, 의식적 기호가 가리키는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인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무수히 많은 선들, 끊어지고 사라지고 거품뿐이고 선 아닌 선들, 차이와 다양성의 선들이다. 해안선은 지시성(referentiality)을 상실한, 말하자면 텅 빈 기호이고, 그 자체 기표이고, 그렇기에 죽은 말이다. 작가는 자신의 느리고 고요하고 무의미한 행위, 말하자면 애써 해안선이라는 개념에 걸 맞는 해안선을 그려보려는 시도가 남기는 자국, 흔적, 찌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개념의 찌꺼기, 거기에 어쩌면 생(life)이 오롯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념이 가리키는 현실을 찾으려고 하면서, 그러나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찌꺼기들, 잔여를 자국으로 남기면서 작가는 죽은 언어로부터 비껴나는 생의 물질성(?!), 희미하고 덧없는 물질성을 남긴다. 심지어 해안선이라는 인간적 기호들을 '밟고' 선 바다 새들의 무료하고 무미건조하고 일상적인 장면을 「불규칙한 간격」연작 이후에 사진으로 기록하고 작업으로 포섭해들임으로써, 언어가 삶에 가하는 경직되고 일방향적이고 무차별적인 폭력의 '바깥'을 가리키려고 했다. 바닷새들의 일시적 체류/휴식에 대한 '진부한' 이미지는 작가의 개념적 퍼포먼스의 맥락 안에서 새로운 '의미', 위반적 은유로 재전유된다. 저 사진은 진부한 '키치'일 것이지만 작가의 재활용 덕분에, 새로운 맥락 안에서 낯선 '의미', 모호성을 성취하게 된다. 「사라지다」는 헤어무스로 보도 블럭 위에 '사라지다'라는 동사를 쓰고 그것을 보완/보충하는 시각적 행위이자 이미지로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는 남자(작가)의 뒷모습이 상연되는 세 장의 사진이다. 이 퍼포먼스에서 보도 블럭에 쓰인 글자와 사라지는 남자 사이에는 전형적인 예술작품의 제목과 이미지 사이에서 작동하는 안정적인 의미가 자리하게 된다. 물론 바깥에 있어야 할 제목이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이미 안과 밖, 주도적 의미와 보충적 이미지 간의 위계서열도 허물어져 있다. 심지어 무스로 쓰여진 글자 자체가 사라지는 기이한 상황이 포함되면서 이 퍼포먼스, 이 상황은 더욱 불안하고 모호해진다. 행위와 언어의 일치는 언어의 휘발, 남겨진 거품의 간섭을 받는다. 사라지다란 개념을 설명해주던 남자의 행위가 장면에서 사라지고, 심지어 그 언어도 사라진 골목에서 우리 눈은 무스 찌꺼기에 꽂힌다. 사라지다란 동사는 나타난 '이미지'로 인해, 즉 dis-paraître란 동사에 이미 항상 내포되어 있는 나타남과 사라짐의 동시성으로 인해, 그것을 가시화한 희박한 거품더미로 인해 사라지지 않는다. 개념은 사라지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작가는 사라짐이 남기는 것, 사라짐이 채우는 것, 없음 뒤의 있음을 제시한다. 이 있음은 고작 거품이고, 해독불가능한 '단서' - 알레고리(!) - 이고, 무의미한 내용이다. 이것은 시각화나 언어화가 불가능한, 흐릿하고 모호하고 불안한 존재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고, 그렇기에 부유하는 '생'에 대한 것이고, 비환원적 이질성들에 대한 것이다. 보완, 보증, 예시에 볼모인 삶이, 감각이 겨우, 흔적으로 거기에 남은 것이다. 물론 작가가 선택하고 해체하는 단어가 '나타나다'가 아닌 '사라지다'이기에, 즉 가시성의 비가시적 전제인바 비가시성이기에 이 장면은 개념미술의 성찰성만큼이나 감각적 '매혹'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나타남보다 사라짐이, 있음보다 없음이 우리를 더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그렇기에 매혹시킨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생은 애매해질수록, 흐릿해질수록 더 아득하고 더 '깊어지는' 것임을......

박창서_Ephermeral lines-N38-007_혼합재료_65.1×90.9cm_2016
박창서_Ephermeral lines-N38-008_혼합재료_65.1×90.9cm_2016

신작 「생에 그어진 단명하는 선들」은 모두 구글어스(google.earth)에서 찾은 38선 부근 위성사진을 모티프로 한다. 구글어스의 한반도 사진에서 작가는 휴전선을 따라 그어진 선들이 지나가는 풍경들 - 바닷가, 산, 강 - 이 흐릿하게 식별되는 배율의 이미지들을 골라 컬러로 출력했다. 그 결과 서해 바닷가나 내륙의 어느 산악지대, 강이 지나가는 지역이 풍경화'처럼', 혹은 추상화'처럼' 느껴지는 회화 '같은' 사진이 만들어졌다. 명확한 윤곽을 가진 구체적 대상이 그때 그곳에 '있(었)음'을 한 순간으로 포착해서 전달하는 사진의 존재론적 특이성은, 구체적 시간에 찍힌 부분 부분들을 이어붙인 구글의 지구 사진의 미묘한 시간성으로 대체/변화되고, 시각적인 멈과 가까움을 자유로이 끌어당길 수 있는 컴퓨터의 마우스 클릭을 조정해서 작가에게는 가장 회화처럼 보이는, 붓으로 그린 듯한, 회화적 시간성을 내포한 것 같은, 구체적 대상의 윤곽이 흐릿하게 처리된, 말하자면 시각성이 촉각성으로 대체된, 개념이 최소화되고 감각적 접촉이 일어날 것 같은 이미지를 출력했다. 이것은 재현적 회화를 대체한 '정확한' 사진을, 유령론(hauntologie, 데리다)적이고, 환영적이며, 탈-존재론적인 회화의 새로운 기법처럼 보이도록 전유한 것이다. 이 회화 같은 사진, 특정한 시계(視界)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현실을 찍은 사진, 굳이 화가의 그리기라는 행위가 없어도 컴퓨터에서 언제든 찾을 수 있는 회화적 이미지, 이쪽의 남한 사람들이나 저쪽의 북한 사람들이 가서 볼 수 없는 그러나 진짜 있는 곳을 특정한 날 위성에서 찍은 사진이 회화로 보이기에 작가는 '선택'했다. 이곳, 있다고 가정되지만 현실에서는 경험불가능한 곳, 이미 38선이나 휴전선과 같은 냉전시대를 가리키는 낡고 경화된 개념이 21세기에도 통치하는 곳, 컴퓨터의 마우스를 아무리 클릭해도 이 이상은 가까이 당겨지지 않는 이상한 곳, 아직 국가 안보를 이유로 한국 정부가 구글에 지도를 반출하지 않았기에 구글어스에서도 '블러한(물칠!)' 곳, 그럼에도 흐릿한 분단선이 그어져 있는 곳, 남한도 북한도 아닌 곳, 그 자체 모호한 곳, 경계, 그 경계를 명시하는 선, 흐릿한 선. 작가의 '선택'은 이런 다양한 내포들을 갖고 있다. 작가의 사유란 환원적 동일성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다. 작가의 사유는 더 많은 비환원성, 더 많은 이탈, 더 많은 파편들, 더 많은 내포들이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감각적 사유이다. 그의 한가하고 게으른 사유 덕분에 사진과 회화, 정치와 예술 사이에 수많은 선들이 그어진다.

박창서_Intervalle irrégulier_사진, 영상 퍼포먼스, filmée, sonore, Trouville_ 00:05:08, 60×80cm_2009_사진&필름 by Hung chih WANG
박창서_Intervalle irrégulier_사진_2009

작가는 컬러 사진을 출력한 뒤 그 위에 투명한 미디움을 여러 번 칠했다. 회화처럼 보이는 사진을 더욱 회화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눈을 속이기 위해, 매혹시키기 위해, 그는 붓을 들고 유화나 아크릴 위에 덧바르는 마감재를 발랐다. 사진의 복제가능성은 회화의 붓칠에 내포된 원본성, 진품성에 포섭되고 그려지지 않은 채 붓 칠이 얹혀진 '작품'의 출현은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란 의심을 제기하게 만든다. 이 어정쩡한 완성품, 작품은 사진도 회화도 아니다. 변종이고 트릭이고 질문이고 놀이이다. ● 게르하르트 리히터나 마를렌느 뒤마(Marlene Dumas)와 같은 화가들은 불확실성, 모호성과 같은, 어떤 개념적 정의도 불가능한 삶의 양가성이나 역설을 담지하기 위해 자신만의 블러링(blurring)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리히터는 사진처럼 보이도록 회화를 교정하면서 흐릿한 그림을 그렸고, 뒤마는 사진을 원본으로 하되 보도사진의 재현성- 그 자체 정치적 의도를 내포한 - 을 지우기 위해 블러링을 전략으로 구사했다. 두 사람은 개념적 확실성, 인식적 판단이 불가능한 삶을 보호하는데 회화를 도구로 사용했다. 박창서의 블러링은 그의 '개념'적 실천에 입각한 것이기에 즉 그리기를 통해 재현성을 위반하려는 전략이 아닌 퍼포먼스, 사진적 공정, 회화적 마감을 빌려서 성찰적 사유를 지속하기 위해 동원되고, 물론 그것이 그가 이해하는 바 삶의 진실에 충실하려는 방법임은 당연하다. 그는 "읽히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읽히기에의 거부는 정확한 이해와 개념화가 통치하는 현세에 대한 '정치적' 대응전략이다. 명확한 읽기, 선명한 읽기가 폭력이라는 근대 이후의 비판적 인식이 그의 작업방식 저변에 깔려 있다. ● 그의 회화적 사진, 회화적 공정이 가미된 사진에는 줄곧 분단선이 그어져 있다. 그것이 회화 같은 사진의 회화적 감상을 차단한다. 외적 풍경이건 심적 풍경이건 회화적 이미지에 대한 감상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들, 인공적으로 그어진 선들로 인해 차단된다. 이것은 종합적 감상에 대한 분석적 개입이고 자연 풍경에 기하학적 분할로 개입하는 '낯설게 하기'의 전략이다. 즉 이것은 예술이면서 예술이 아닌 것이다. 이 희미하게 그어진 선 하나로 인해 전체, 감상을 위한 내부가 쪼개진다. 작가는 분단을 고지하는, 엄연히 구글어스 사진에 실재하는, 자연주의적 풍경에 그어진 인공적이고 역사적인 선을 회화에 대한 개입과 전복을 위한 단서로 사용한다. 그렇기에 그의 연작 「생에 그어진 단명하는 선들」도 「사라지다」와 마찬가지로 수렴이 아닌 확산, 종합이 아닌 분석, 환원이 아닌 이탈에 충실해진다. 저 선은 한반도를 통치하는 냉전이데올로기의 '도상'이고, 풍경에 더 깊숙이 더 안으로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정치적 상징이다. 우리는 제도로서의 예술, 혹은 감상이라는 안정화 전략이 통치하는 제도예술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적 비판을 읽을 뿐 아니라, 오래도록 떠나있던 모국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바깥'을 떠돌고 있는 작가가 마주치는 비가시적 선들, 심적 이방인으로서의 그의 표류를 읽게 된다. 안에서 밖을 사는 자, 보이는 것이라고는 "한계와 간극"인 그런 자의 성실하고 집요한 읽기, 그리고 미세한 감각(하기).

박창서_Disparaître-hair mousse_사진_2009

단명하는 선들은 영원히 이어지거나 곧게 한 방향이거나 정확한 직선이 아니다. 단명하는 선들은 들쭉날쭉하고 바다와 강에서 휴전선이 그렇듯 갑자기 끊어지고 모여 있는 갈매기들이 딛고 있는 선처럼 면적이고 방금 저쪽으로 사라진 사람이 남긴 흔적처럼 옅게 현존한다. 단명하는 선들은 나누는 선이 아니라 침투하는 선이고, 동의하는 선이 아니라 의심하는 선이고, 상징적 기호가 아닌 감각적 이미지이고, 잘 보이면서도 안 보이는 선들이다. 불규칙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계속 사라지고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선들, 단명하는 선들, 작가가 보는 생의 이미지들이다. 마지막 작가와의 통화를 인용하자면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시골집의 논두렁"이 그 선들이다. 그의 작업이 연원한 생의 구체적 감각들, 그가 작업에서 기억하고 복원하려는 선들이다. 그리고 그의 늙은 아버지가 일생 밟고 지나다녔던 논두렁이다. 농부인 아버지, 화가의 꿈을 꾸던 그의 20대, 결국 예술가로 불리게 된 그가 찾아내고 들어가 있으려고 하는 경계, 개념에 잠식당한 머릿 속에서라면 도통 지워지지 않을 직선과의 싸움, 흐릿하고 희박한 것들로 채워져야 할 생에의 임무, 부정을 통해서 요청되고 보유될 생에의 긍정...... ■ 양효실

박창서_Le pont-neuf n’est pas un pont neuf-hair mousse_사진_2009

A Line is Ephemeral, Faint Life Flows over Boundaries ● That each visual image is in and of itself 'presence' came increasingly to be considered under the viewpoint that image is secondary to metaphysical ideologies, epistemological reality or practical consciousness, or at best complementary to these. Images were therefore recognized to purport accurate or justified re-presentation as its aim, and faced the task of heightened accuracy to conserve/guarantee what they indicate, i.e. generalized existences, immediate reality or objects. The inherently deceiving attributes and inexactitude of image helped defend the ideas of some philosophers and men of religion to stipulate its censorship and ban. However, image's role proved firm upon the realization that the whole of daily experience of life hinged on it. The downfall of Christianity and metaphysics was an evidence, whereby visual images no longer went under intellectual, conscious framing, and even found themselves free of representational obligations, hence becoming a 'spectacle', signs of 'obscenity' and 'visual system' and encompassing all aspects of our lives, while also constituting our limits. These are images without referent, without access for intellect, closer to numbing than rendering sensible. The mechanically and unconsciously driven 'belief' that these images each have an indubitable reference to an existence, world or object dissimulates their drift and fragmentation. That the 'beyond' of the visible where truth lies in and of itself is consigned to backwater is responsible for the human concerns and suffering in the epoch of floating, unfixed images. This is of the feeble-mindedness that makes us believe too easily, as a result of being unable to draw satisfaction from what one sees, as a result of the inclination to hasten judgment on what is visible, or as a result of the willingness to affix what one already knows to what one sees. It is also of the inertia that leads one to find the original in images whose originals are already lost and to attribute certain meanings to the serial continuity of infinitely reproducible images, which moralizes and 'modernizes' our age of simulacra. It is regression, compulsion and uncritical reaction. ● Still, images float between those who believe their core function lies in faithful reference, while neither concealing nor designating its object. The artists who are conscious of the problems of visual images operate within the spectrum of the mode of daily experience and the (non-)ontology of image. The inertia/attitude, mechanical or conscious, that seeks to discern the self-evidence of the world in what holds images in place or in the world as it appears restricts the autonomy of images. If this were to be the case, the excess staged by images, or images that deceive us but doesn't embrace anything would curb the life's senses. It is such particularity of the times we live in that certain artists ask crucial question on what images really ought to be, what seeing or being seen really means. Their artistic and quotidian practices seek to detach images from stiffened concepts as well as to liaise insignificant images back to the life's senses. ● Leading up to this personal exhibition, the trajectory of the artist Park Chang-Seo since his 20s, having recently taken a fresh turn as he returned to home soil after 10-odd years of studies abroad in 2014, is kaleidoscopic and even fascinating. He was a social-science student, loosely connected himself to the protesting groups both on and off campus since his enrollment in the early 1990s. Until graduation and moving overseas, he encountered "Dansaekhwa" which, led by the artists from Daegu regions, inquired into the materiality of expression under the influence of Mono-Ha. Figuring in his cultural backdrop were the attitude soaked up from student movements under civilian government and the narrative images of "Minjoong-Misool" (people's arts), political by nature. Along with this, he seems to have been confronted with a sense of urgency in regards to revamping the relationship between politics and art, which is subsequent to his learning of the grammar in a more established, liberal and self-referential part of the world. Moving to Paris provided an opportunity for Park to re-consider these contemporary matters in question revolving around political art and the politics of art. There, he encountered conceptual artworks, the kind that criticized the institutionalism of art and visualized non-visible presuppositions that differentiate (liberal) art and politics, while sharpening and elaborating the art-politics relationship. Park devoted his 30s to studying, organizing and 'producing' works in the context posterior to the era of (Modernist) painting and contemporary art. Now entering his early 40s, he is embarking upon a new path in his home country after completing his Ph.D. His latest personal exhibition condenses his 10 years of learnings, reflections and questions; in Daegu, the city that fostered the thriving scenes of "Dansaekhwa" as well as contemporary "Korean" art, relatively far from Seoul. One can construe the decision to hold his first personal show in Daegu rather than in Seoul as a candid effort to retrace the 'origin' of the 20-year span before he finally became an 'artist'. It represents this earnestness, privileged over the hasty and canny attitude towards the external allure of the ravishing art scenes of Seoul and the prospect of (successful) entrance into those scenes, as well as remembering his long-delayed introduction to painting during his university years. ● The exhibition's title 『Ephemeral Lines in Life』 is intended to cover the purview of his Paris works as well as more recent endeavors, and is also taken directly from his latest projects. The title of this text, relating to short-lived, ephemeral lines traced in the thick of life, testifies for the (conceptual) artists who devote significant labor to artistic causes and spend the majority of their time in their studios, that is, who contemplate, doubt, distort and raise questions. In experiencing the presented works, we encounter straight, uneven, non-visible lines. Any superficial 'appreciation' would strain against the question of 'what' the lines are or their 'aboutness'. One ought to put between parentheses the attitude of perambulation around the works of art and also that of searching for concealed meanings 'inside' these works, in order to retrace the recent tracks that Park has been following in detouring, distancing, letting himself out, standing beside and shuttling between Seoul and Daegu. ● If we remain faithful to Park's own phrases, his works might well be understood as being about "limits and gaps". He 'chooses' his place where heterogeneous worlds meet and reveal their differences. This place is where the internally consistent self becomes curtailed to its bare minimum and its presence almost fully reduced, where alterities flood in towards the standing point, where political tensions and abrasive encounters occur incessantly, where production and difference isolate the conceptualization that guarantees continuity of the sensible, creating a gap where a new third entity emerges: where any sense of autonomy, identity and uniformity that depends on non-visible limits is no longer possible, where these non-visible limits become visible whereby difference and heteronomy, passiveness and verb override respectively identity, autonomy, activeness and noun, where the lucid, configured demarcation melts away, entangled or become attenuated to the point of disappearing. As determined lines of demarcation are in fact "ephemeral", so are lines that are also non-lines, which Park points out, reveals and defends. ● His performance series such as Intervalle irrégulier and Disparaître, kept in the form of photographic record, attempts to visualize the above "limits", lines supposedly eternal in presence but harboring more and more ambiguousness and irregular as concepts before they disappear. Park marks and breaks down his own linear traces along the shoreline, each of which is understood as a 'concept', which is a sign deep-seated in our conscience, inviting a notion that does not exist in any empirical terms. This practice follows the foam created by waves, crashing in and sliding out on the shore, which in turn creates uneven edges and brings ashore offscum that settles along them, with a mere stick. Lexically, the lines indicated on the shore can be understood as borders on which a body of seawater and the fringe of land come in contact: indicated by signs entering the conscience, these objective, generally accepted lines do not actually exist. What does exist is discontinuous, frothy, an infinite number of fragments that are non-lines, lines of difference and multiplicity. The shorelines are signs devoid of any referentiality, signifiants, thereby dead. The artist leaves as his record various traces or residues of his attempt to mark the indented lines, or signs predicating upon "shoreline" as a concept: an attempt that is slow, serene, disinterested action. Perhaps it is that life itself is lodged in what is left of the process of conceptualization. That is, in search of the right predicate, supposedly extractable from reality corresponding to a concept, but also leaving the residue that cannot be fully translated into a concept, the artist's primal inscription leaves faint, ephemeral material traces that evade the inanimate language. ● The work's scope is extended towards other "irregular gaps" opened up by seabirds disinterestedly 'treading on' the shorelines-signs. The whole process is captured in photographs and brought into the scope, the purpose of which lies in indicating the 'outside' taken on by the violence of language that unilaterally and recklessly determines life. The 'hackneyed' image of the birds' momentary dwelling/resting is reappropriated, or bestowed a new 'signification', which is a transgressional metaphor in the context of Park's frame of performativity. 'Kitsch' would be one of the words with which to describe the photographs, but only until the artist re-uses it for the aim of contextualizing afresh, of a foreign signification, an ambiguity. Disparaître is a work consisting of three photographs in which the French verb, meaning 'disappear', is written on a sidewalk with hair-styling foam. The work itself is a supplement to the written word, while the process shown within the work is accompanied by a man walking away into the distance. What slips into the gap between the disappearing letters and the disappearing man is a subtle signification that operates between the commonplace title and the image. The title itself is an integral part of photographic evidence of disappearance, which offsets the hierarchical relationship between inside and outside, between dominant meaning and supplementary image. This performance, this situation passes into a more unstable, ambiguous stage as the letters themselves become involved in the dynamics precisely by its disappeance. The coincidence of action and language then meets the volatile reaction of the remaining foam. As the man who is the agent of the interpretation of the concept of disappearance retire along with the letters, our eyes are drawn onto the moose residue. 'Disparaître' qua verb does not simply disappear due to the fading of the pale chunk of foam that visualizes it, but remains in reference to the image and the simultaneity of appearing and disappearing, which is always already comprised in the verb. Concept would suggest that what disappears is nullified, but Park points towards what disappearance leaves behind and capacitates, and the 'there-is' posterior to the 'there-is-not'. This 'there-is' is mere lather, indecipherable 'evidence' – allegory(!) – , a content devoid of any meaning. This endeavor is the way in which to communicate the idea of the indeterminable that cannot be visualized or represented via language, the idea of the murky and ambiguous. It therefore alludes to the constantly floating 'life', an irreducible heterogeneity: 'life' that is taken hostage by the function of complementarity, warrant and exemplification, subject to the senses and left scantly. Because the word chosen and deconstructed by the artist is 'disappear', as opposed to 'appear', that is, points towards the non-visibility that is inherent in the act of seeing the visible, these staged scenes are not only for the contemplation of conceptual art but also for the captivation of the senses. It is of the unconscious realization that what brings about pain and uneasiness and captivates us is disappearance rather than appearance. The more ambiguous and murky our life is found to be, the more it becomes remote and 'deepened'...... ● Park's latest work, Ephemeral Lines in Life, uses as its central motif images of geographical locations marked around the 38th parallel, taken from Google Earth. He works with selected and printed out color-images of land features of the Korean Peninsula – shorelines, mountains and rivers, barely distinguishable – along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The results were photographs that capture the views of mountain contours and edges of rivers; which resemble paintings, depicting them 'like' a landscape representation or 'like' an abstract stint. The ontological particularity of photograph, a medium that conveys what has been captured in a moment of the emergence of a concret, well-formed object's 'there-is(was)', is replaced by or re-formed into a subtle temporal sense appropriated from Google-generated pictures, each of which was taken at a certain point in time. The printed images are designed in such a way to resemble painting, by mere mouse-clicks on the computer to uninhibitedly manipulate the focal length, giving painterly impressions, as if bound to the sort of temporality typically characteristic of painting. Shown on these images are blurred contours of the object of observation, with the visual aspects partially replaced by a sense of tactility, the image's concept minimized, and its touchability elevated. The level of accuracy that photography enjoyed allowed it to replace representational paintings. Here, photographs are re-appropriated in such a way to be staged as a different technique of painting, rendering the images hauntologic (Derrida), phantasmagoric, non-ontologic. Park 'chose' these images by virtue of the painting-like quality. They communicate what is seen as reality in a specific visual setting, computer-generated, painting-like images that are readily available without requiring any action of painting, photographically acquired showing places that cannot be visited from either side of the divided peninsula but that nonetheless exist. These places are existent but cannot be subject to no real-life experience, still governed in the 21st Century by rigid, Cold War-related concepts such as "38th Parallel" or "MDL", on which the computer's zooming can draw the focal length only to a certain extent, and which is 'blurred (water-brushed!)' due to the government's security restrictions concerning the disclosure of geographical information to Google Earth; but nevertheless accompanied by dimly marked demarcation lines belonging neither to the North nor to the South, ambiguous in and of itself: limits or lines that determine limits. Park's choice comprises all these connotations. The reflection of the artist does not comply with reductive identification. It is capable of mobilizing more irreducible things, more deviation, more fragments and more connotations. Owing to his lethargic, unhurried thinking, numerous lines are drawn between photography, painting, politics and art. ● A clear liquid material was applied repeatedly on the prints. The material is a kind of finishing material, typically applied with brush on oil or acrylic paintings. This, in order to make them look even more like paintings, to trick our eyes, to mesmerize. The reproducibility of photograph is subsumed into the originality and authenticity adhering to the painter's act of brushing. The laying of this material, applied 'like' painting but the effect of which cannot be 'painterly', raises questions about the understanding of this 'work of art'. The nature of this equivocal outcome is neither photographic nor painterly, but rather that of mutation, tricks, questing and play. ● The likes of Gerhard Richter and Marlene Dumas, for whom uncertainty and ambiguity are something to be embraced, used the technique of blurring in furtherance of staging the paradox or ambivalence of life that resists all conceptual definitions. Richter strategically obscured the boundaries between photography and painting by blurring his representations; Dumas used her own technique of blurring to obscure the representationality – carrying in itself certain political messages – of news photos via which she draws ideas. Both artists used painting as their medium to reflect the implausibility of conceptual definitions and cognitive determination inherent in life. Park's process of blurring nevertheless finds its most fundamental ground in his 'conceptual' practice: the process is not meant to impose a definitive rupture in the representationality through the act of painting, but should be understood as a strategy consisting of elements of performance, photographic procedure and painting, which allows him to continue and carry forward his reflections. This is of course Park's own way of remaining true to his beliefs about life. He says: "Never be read." His resistance to external determinations is a 'political' strategy aimed towards our own time that is governed by accurate awareness and conceptualization. The critical stance, adopted after the era of modernism, which sees a seed of violence in accurate and clear 'reading', underlies his œuvre. ● His painting-like photographs, or photographs on which he worked with painting-related means, constantly attended with fragments of the demarcation line. This latter suspends any attempt to see the work as a painting: be it through the scenes or situations external or through those internal to the spectator, the experience of the image is disturbed by traversing, artificial lines. It is an intervention of analyses on the overall experience and a strategy that involves geometric fragmentation: the images are 'rendered strange'. Put differently, it is art, and at the same time not art. The dimly traced lines disturb the experience of the work and dismantle its wholeness. These lines, which inform the spectator of the territorial division, suggests that they seem so evidently existent on Google Earth, traversing the naturalistic settings, artificial and at the same time historic, and are used as agents of intervention and subversion of painting. Thus, in Ephemeral Lines in Life and Disparaître, more focus is given to expansion than acceptance, analysis than synthesis, and emancipation than reduction. The lines are in effect symbols of the Cold-War ideologies that still loom over the Peninsula, political symbols that intercept any infiltrating gaze towards the landscape. We see that the artist propounds a self-conscious critique of the kind of strategy that is institutionally inclined towards unhindered, simplified appreciation and the institutionalist notion of art. The critique also alludes to the absence of the artist's definitive root in his home country after so many years spent abroad, along with the non-visible lines that he encounters whilst still remaining a stranger who floats 'outside the borders'. He lives the inside from the outside, tries to read diligently and relentlessly and lives the "limits and gaps", and minute senses (or sensing). ● Ephemeral lines are never truly straight. They stretch in an uneven, rugged fashion: almost indistinctively, as one would imagine lines traced by someone who just drifted another place: lines that are discontinued into rivers and large waters and form an area which seagulls just landed on. Ephemeral lines do not divide but infiltrate, raise questions rather than comply. They are not symbolic signs but images open to the senses, and are perfectly visible but cannot be fully experienced. They are images of life that Park envisages by maintaining irregular intervals, continuing to disappear but without ever quite fully doing so, fugitively. To quote Park's remarks from our last phone conversation, these lines are "ridges of my old country house that I stood on", the very ridges on which his father stood all his life. His works prevail over the limitations via memory and reconstitution channeled towards the concret senses that an eternal life subsumes: his farmer father, his 20s which gave him the dream of becoming an artist, the limits that he is trying to infiltrate having earned the title, the conflict with the notion of straight line that incessantly haunts his mind encroached by concepts, his destiny to saturate life with the faint and the indistinct, the affirmations of life that will be demanded and sustained by negations... ■ Hyo-Sil Yang

Vol.20160902k | 박창서展 / PARKCHANGSEO / 朴昶緖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