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ng - 사실은 멈추어져 있던 것들

이원경展 / LEEWONKYOUNG / 李元京 / installation   2016_0908 ▶ 2016_1002 / 월요일 휴관

이원경_Moving_알루미늄 와이어_60×230×50cm×23_2016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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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6 Thinkartkorea 선정작가 기획 초대展

주최 / (주)신한화구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포네티브 스페이스 ponetive space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34 Tel. +82.31.949.8056 www.ponetive.co.kr www.thinkartkorea.com/gallery

그것, 애매하므로 사라지지 않을1. 논리학(수학)이 최고의 학문으로 추앙받던 18세기 중엽 독일의 철학자인 바움가르텐은 미학이란 학명을 주조하면서 미학을 '감성적 인식의 학'으로 정의한다. 데카르트가 진리인식의 기준으로 삼은 명석·판명함(clear and distinct)의 헤게모니는 감정이나 상상과 같은 심리적 현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배제시키는 오랜 전통의 출발점이었다. 명석한 것은 명료한 윤곽을 가지고 있기에 애매하지(obscure) - 가령 여자와 남자의 차이는 명석하다 - 않고, 판명한 것은 명석한 대상들의 본질이자 근거 - 가령 다양한 여성들의 차이를 아우르는 여성의 본질이나 실체 - 이고 그렇기에 혼연하지(confused) 않은 것이다. 바움가르텐은 명석판명한 논리적 인식에 비교해서는 열등하지만 그럼에도 인식적 가치를 갖는 미학의 대상을 명석·혼연한(clear and confused) 것으로 분류했다. ● 윤곽이 분명한 대상들을 놓고 거기서 그것들의 근거이자 원리를 찾는 것, 다시 말해서 특수들에서 보편을 찾는 것이 근대적 진리추구의 전제이고 방식이었다면, 21세기의 우리 역시 근대적 인간으로서 알게 모르게 그런 태도로 사물과 세계를 경험한다. 윤곽이 선명하지 않아서 명료하게 구별되지 않는 것, A도 B도 아닌 것, 가령 동성애자는 명석한 것이 아니기에 근대적 프레임에서라면 없는 존재들, 없다고 가정된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또 다양한 것들에서 그것들을 아우르는 어떤 하나의 고정된, 본질적인 실체를 찾으려는 근대적 방법론을 따른다면 무한한 차이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는 포스트모던한 시도는 무의미한 것이거나 위험한 것일지 모른다. 근대적 인간이었던 바움가르텐은 자신의 시대적 한계 안에서 감성적 인식이라는 역설을 내포한 학명을 주조했고, 예술이 인식적 활동인가 감각적 유희인가를 놓고 벌어진 지금까지의 논쟁에서 한 가지 관점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 명석판명한 것은 유한한 감각의 존재를 개념화한다. 삶에서 변화-시간을 제외하면 근거나 원리만 남을 것이고 그것은 생 자체를 딱딱한 고체로 만들고 결국 죽이는 것이다. 생은 무한히 다양한 것들이 차이로서의 무늬를 펼치는 것인데, 예술은 바로 그 무한한 차이를 음미하는 것인데, 명석판명한 인식은 다름 아닌 생을 길들이고 죽이는 폭력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다양성을 표준이나 규범, 상식이라는 이름하에 억압하고 환원하려는 프레임 안에서 살아간다. 이성을 감정이나 상상력보다 더 사회에 유익한 인간 능력으로 간주하는 사회에서 예술가는 단지 사회를 보충하는 잔여이거나 무가치한 존재들이다. 여전히 명석판명한 것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우리를 통치한다. 명석혼연한 것에 대한 예술가의 강박적 애착이나 애정은 그러므로 그 자체 '정치적'이다. 더 나아가 명석한 것의 반대인 애매한 것 그러므로 혼연한 것을 '재현'하려는 예술가들의 위반적 시도는 결국 이성에 포획당한 감각을 구하려는 실천이고 과학에 의해 거의 죽어버린 생을 되살리려는 안간힘이다. 도대체 명석해보이지 않는 존재들, 가령 아랍계 유럽인들, 아프리카나 남미계 미국인들, 난민들, 조선족, 동성애자와 같이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는 수많은 인간군 중 유독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선별된 전형들은 도통 이편으로 환원되지 않기에 타자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아니 우리는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야 하는 운명이고, 타자는 애매한 생을 은유하는 바로 '그것이다. ● 예술가는 자발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애매하고 혼연한 것, 근대적 미학에서도 배제된 것들을 보호하고 그것들에게 삶의 정당성을 수여하려고 한다. 오늘날 예술의 정치성은 명석판명한 것, 나아가 명석혼연한 것에도 포함되지 않는, 말하자면 타자의 타자성, 재현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고 한다는 데 있다. 잘 보이지 않아도,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아도 있는 것들, 그래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의 '힘'을 현시하면서 예술은 명석판명한 것들의 헤게모니에 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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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것(거시기?!)', 정확한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것(thing). 여전히 제대로 된 이름을 얻지 못해 떠돌고 있기에 늘 전(before) 혹은 이미(already)의 상태로 있는 것, 제 자리에서 밀려나 있는 것(non-site). 오늘날 타자의 타자성이나 재현불가능한 것으로 분류되는 것. 애매한 것, 상징적 그물에 걸리지 않은 것, 잔여들, 그 자체로 불온한 힘을 갖는 것... ● 김언희 시인은 '그것'에 대해, 아니 '그것'의 (탈)존재론(de-ontology)일 법한 이런 시를 썼다. "그것, 47 ● 낙원장 뒷문 같고 검은 폐문 같고 팔십 노구의 거미 같고 내장을 올가미로 쓰는 늙은 갈보 같고 시 같고 갈고리 같고 갈고리에 걸려 있는 고립된 인육 같고 적출된 장기 같고 절정 같고 찌꺼기 같고 농담 같고 웃음 같고 웃음의 해골 같고 도굴된 무덤 같고 구렁이를 목에 감은 아가리 같고 아가리의 아가리 같고 무섭게 찐득거리는 아가리의 고환 같고 다른 사람이 빨던 사탕 같고" ● '그것'은 정확히, 제대로, 올바르게 불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같고'(as if)의 반복으로서, 환유의 연쇄로서, 인접성을 통해서만 불려진다. 그것은 모든 이름으로 불려질 수 있기에, 하나의 이름을 갖지 않기에, 실체나 본질이 아니기에 '그것'이다. 그것은 명석판명한 것들에 부착된 이름을 통해서 불려지지 못한다. 물론 아무 이름이나 '같고'로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법(칙)'이 존재한다. 이제는 한정식 집일지 모르는 과거 요정이었을 낙원장 뒷문, 따라서 (검은)폐문, 그러므로 팔십노구(=폐문)=거미(검은), 늙은 갈보, 시(올가미로 언어를 낚는)... 이런 내적 법칙이 있다. 시인이 직접 본(읽은) 이름인 낙원장의 뒷문에서 시작된 환유의 놀이는 ' 다른 사람이 빨던 사탕 같고'에서 갑자기 멈춘다. 놀이는 끝나지 않기에 오직 놀이의 주체이자 대상인 인간이 쉬어야 하기에 급작스럽게 중지 상태로 보류될 뿐이다.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똥을 누어야 하는 나/너 때문에 놀이는 중지된다. 마침표는 없다. '같고'는 마침표를 모르는 연속과 대체의 놀이를 보증하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인식은 결론을 갖지만 욕망은 결론/마침표/휴식을 모른다. 욕망은 만족을 모르는, 종료를 모르고 그저 중지 상태로 멈추어 있는 괴물이다. 욕망이란 괴물은 자신의 만족불가능성을 현시하기 위해 계속 숙주에, 기표에, 이미지에, 대상에, 언어에 들러붙는다. 실체가 없는 욕망의 움직임은 오직 그것이 들러붙어 기생하는 상징적 기호들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존재이자 탈-존재. 그 사이. 욕망은 정의될 수도, 명명될 수도, 개념화될 수도 없는, 그렇기에 '그것'이라 불리는 텅 빈 구멍, 껍질이다. ●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이다.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있지 않은 것을 있지 않은 것으로 말하는 것이 진리이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실재론자들에게 '그것'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고 비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위험하고 불온하고 무가치한 시도이다. 틀린 자들, '그것'에 충실하기 위해 틀린 쪽으로 가는 이들, 기표의 무한한 연쇄에 '(불)만족'하는 이들,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기꺼이 떠도는 쾌락을 긍정하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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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코바늘 '같은' 갈고리로 실 '같은' 알루미늄 와이어로 애매하고 혼연한 형상을 만든다. 이것은 뜨개질, 여성문화의 일환이지만 정확히 그렇지는 않다. 차라리 뜨개질의 패러디라 할 수 있다. 뜨개질의 클리셰적 이미지란 따스한 볕이 드는 아침이나 오후 차 한 잔이 탁자에서 식어가고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이미지. 뜨개질은 기다리며 침잠해 있는 사람의 지루하고 고요한 시간성의 은유이다. 그녀들은 고요한 미동(微動) 같은 것이고, 격렬한 바깥이나 정동(affect)에서 유폐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뜨개질은 격렬한 노동이고 발작적 경련 상태에서 전개된다. 손마디와 어깨만 아픈 게 아니고 척추와 온 몸이 뒤틀린다. 갈고리로 와이어를 감고 잇는 작업, 더구나 2미터에 달하는 입체를 생산하는 작업은 작가가 몸을 움직인다기 보다는 작가의 몸이 맞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만큼 고된 일이다. 선명한 윤곽을 갖고 있지만 - 그녀는 물체의 '껍질'을 뜬다 - 뭐라 이름붙이기 어려운 물건들, 형상들, 짐승들을 만들어내는 실천은 동시에 그녀의 몸에 일으키는 폭력이기도 하다. ● 뜨개질의 고요한 시간성을 작가는 격렬한 정동으로 대체한다. 작가는 관습적인 뜨개질 하는 여자들처럼 한 곳에 앉아 있지만 그 자리에서 작가의 몸은 격렬해진다. 그녀는 한 자리에서 그 자리를 진동하게 만든다. 아니 그녀의 몸은 한 곳에서 이미 떠나 있는, 멈춰 있지만 한시도 고요하지 않은 움직임의 이중성을 실연한다. (내가 작가의 작업에 대한 비평을 쓰면서 작업의 비가시적인 전제인바 몸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은 다음에서 살펴볼 작품의 '내포'에 이런 작가의 몸의 정-중-동이 함축되기 때문이다.) 작업실을 가질 여유가 없는 작가의 '자리'는 고작 집안 어디이지만 그녀의 몸은 제 자리에 붙들린 채 두드려 맞고 있는 동물 같다. 그녀는 언제나 안에 있지만 이미 바깥에 있다. 뜨개질 같고 노동 같고 폭력 같은 작가의 공정은 그녀가 출현시키는 형상의 낯섬과 연동한다. 제 자리에 앉은 채 그 자리를 보유/유지/지지하는 고요함이 아닌 그 자리를 거부하는 것 같은, 그 자리를 밀어내려는 것 같은 움직임이 작가의 (무)의도적 전략이다. ● 전작((前作)과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에 출품된 형상들 역시 식물의 실뿌리나 잔뿌리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마치 김언희 시인의 '그것'이 낙원장이라는 구체적 장소와 이름에서 출발하듯이 작가의 작업 역시 냉장고의 야채 칸이나 부엌 귀퉁이에서 한동안 잊혀져 있던 푸성귀들에서 자라난 뿌리가 시작이다. 생의 집요함을 현시하는 것들, 지긋지긋한 생에의 욕망과 공포를 간직한 것들, 뿌리에서 잘려진 채로 계속 성장하는 것들,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순들이 올라오고 있어서 평소에는 안 보이는 구멍을 결국 가리키게 되어 있는 것들, 이미 죽었는데 아직 죽지 않은 것들, 곰팡이, 실뿌리, 시체에서 자라는 머리카락, 유령, 좀비, 이번 생.... 작가가 발견한 자기 이미지이고 작가의 몸을 통해 솟아나는 타자성이다. 제 몸을 먹으면서 자라나는 것들, 계속 자라고 위로 솟아오르는 것들. 뿌리이면서 더 이상 뿌리가 될 수 없는 것들. 이제 그것은 정확히 불릴 수 없는 생의 기이함, 욕망, 괴이성을 현시하는 이미지로 은유로 계속 살아간다. 작가가 그것을 목격하고 그것에 탐닉하고 그것을 이상한 뜨개질로 반복하기로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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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실뿌리의 이런 '이후의(after)' 삶, 식물보다는 짐승성의 은유를 닮은 생의 잔여를 자신이 손수 만든 갈고리 코바늘로 중계한다. 이번 전시 『Moving 사실은 멈추어져 있던 것들』은 크게 보아 하나의 무대이고 한 개의 설치작이다. 어떤 대치/대면/대결을 위한 무대이고 설치이다. 한 쪽에는 21개의 도마뱀 같고 악어 같고 고래 같고 산삼 같다고들 하는 것들이 무리를 지어 위로 올라가는 운동성을 드러내며 공중에 걸린다. 하나이면서 다수이고 동질적이면서 이질적인, 거의 모든 양서류를 차용하면서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산삼으로도 보이는 이 애매하고 혼연한 이미지는 우글우글 모여 있고, 한 방향을 향해 하나의 표적을 향해 수직의 운동성을 발산한다. 다리는 2개에서부터 21개 까지 불규칙하고 뿔은 1개에서 7개까지 제멋대로이다. 환원불가능한 이질성, 명석한 차이와 판명한 분류를 불가능하게 하는 다수이다. 이 형상들은 입체이지만 접을 수 있는 유연성을 갖고 있고 어디든 걸릴 수 있는 가벼움을 갖고 있다. 전시장의 천장에 걸린 채 실내 공기와 관객의 미동에 따라 흔들릴 수 있는 이 설치물은 식물의 뿌리에서 착안된 것이기에 징그럽거나 혐오스럽거나 위협적이지 않다. 진액이 흐르거나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딱딱한 외피를 갖고 있거나 어디든 갈 수 있는 속도를 갖는 대신에 이 식물성 짐승은 그저 허공에 매달린 채 가볍게 느리게 흔들거릴 뿐이다. 21마리의 식물성 짐승은 그렇기에 장르 영화나 소설이 일으키는 심리적 공포나 시각적 혐오와 무관하다. 그냥 무리지어 상대편 식물성 짐승과의 대결, 대치에 어울릴 어떤 움직임-미동을 시각화할 뿐이다. ● 반대편의 '그것'은 '~같고'라는 환유적 놀이마저도 차단하는 형상이다. 빛나는 연분홍의 몸체에 200여개의 은색 '잔뿌리'가 돋아나 있는 이 '그것'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21마리의 '적'이다. 작가의 의도는 이 두 편이 대치 상태로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시각화하는 데 있다. 말하자면 뿔과 다리와 꼬리를 갖고 있고 싸움에 능숙한 무리와 무기라고는 등에 난 '잔뿌리'가 전부인 이 분홍 동물이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고 작가는 확신하는 것이다. 그것이 망상이 아니라면, 그것이 일종의 '꿈장면'처럼 무의식의 논리를 갖고 있다면, 이 대치는 이성으로 분석불가능한 어떤 '이유' 혹은 욕망에 기반한 것일 것이다. ● 그렇다면 한 쪽에는 짓밟고 물어뜯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양서류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이고 다른 한 쪽에는 그것들을 상대할 만큼 만만치 않은 힘을 가진 '그것'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모든 것을 이긴다. 욕망은 이성-감옥을 허물고 찢고 뚫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름-자리를 가진 것들은 이름-자리를 얻지 못한 것들을 결국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홍색이다. 분홍색은 여성의 색이고 폭력적 시위가 아님을 알리는 평화 시위의 색이고 맨 몸의 저항을 알리는 약한 빛이다. 갑옷을 입고 총을 든 공권력과는 대등할 수 없는 싸움, 언제나 지도록 되어 있는 싸움, 그러나 갈등과 에너지를 발산하려면 광장에 나와야 하는 이들의 싸움은 분홍색이다. 분홍색 살과 20여개의 잔뿌리는 이 싸움이 승산이 없는 싸움임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희극적이다. 지는 싸움, 분홍, 잔털이 전부인 것, 적일 수 없는 것을 적으로 만드는 저 짐승들이 수십 마리이기 때문이고 저 수십 마리에 대적하려는 이편이 분홍이기 때문에 이 싸움은 희극적이다. ● 이 대치는 반논리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이 무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가리키거나 반복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충실한 이 무대, 이 장면을 '감상'하기 위해 우리는 이미 일어난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치들, 크기, 규모, 힘이 명석판명하게 배치되어 있던 싸움들을 제거하고 지워야 한다. 이것은 이기기 위한 것도 명분을 갖는 것도 이유를 갖는 것도 아닌 대치이다. 이것은 그런 대치에 포획당한 현실 너머, 불가능한 상황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고 이런 싸움, 이런 관계는 도대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유혹한다. 이 가볍게 흔들리는 장난감 같고, 이 움직이는 조각 같고, 이 누가 입었다가 벗어놓은 허물 같은 형상들을 갖고 놀려면 제 자리-이름을 차지하려고 온 생을 다 허비하는 무대 바깥으로 한참 나와야 할 것이다. ● p.s. 작가가 만들어내는 형상은 역설적이게도 갈고리에 걸린 와이어에서 나온다. 부드럽게 휘는 금 속 선에서 텅 빈 입체가 나온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아닌 우리는 그저 바람'처럼'이라고 말하는 유한한 육체의 존재들이다. 우리는 그물에 걸린 것들을 모아놓은 것으로서, 그렇게 우리이다. 어쩌면 우리는 걸리지 않은 채 방금 이쪽에서 저쪽으로 불었던 바람일지 모른다. 그것을 암시하는 것은 그물에 걸린 '그것' 정도이다. 수많은 이름으로 대체되거나 어떤 이름으로도 아직 불려지지 않았거나 너무 많이 불려져서 닳을 대로 닳아버린 '사탕' 같은 그것 말이다. 너무 달콤한, 그러나 더럽게 다른 사람의 침(욕망)을 묻힌 이 생 같은. ■ 양효실

이원경_Moving_알루미늄 와이어_60×230×50cm×23_2016_부분

『Moving 사실은 멈추어져 있던 것들』 전시를 준비하며1. 언제나 그것이... 하나의 모습으로 보여지지만 그 자체가 하나 이상이거나 자기 자신과 다른 상반되기까지 한 속성을 함께 갖는 이미지들에 나는 관심이 많다. 이전의 평면작업에서 식물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 소화의 과정이라는 동물적 특성을 함께 갖는 '식충식물'이 그랬고, 현재의 설치작업의 재료인 '알루미늄와이어'가 그렇다. ● 알루미늄은 금속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비금속으로 분류된다. 알루미늄와이어는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나 강철과는 다른 연성이 있어서 실로 뜨개질을 하는 것 보다는 많이 고되지만 '뜨개질'이라는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뜨개질은 이미지 자체가 포근하다. 나는 알루미늄와이어로 뜨개질 작업을 한다. 그래서 알루미늄와이어는 나에게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의 이미지와 그에 상반되는 부드럽고 따뜻한 뜨개질의 이미지를 동시에 담고 있는 매체다. ● 이렇게 성격이나 이미지가 상반되거나 여러 가지일 때, 그것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워서 모호하고 애매해진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주도적으로 모호하고 애매해지는 상태에 중점을 둔다. 명확하게 정의된 것은 의미가 그 상태에 머물고 더 이상 상상의 여지가 끼어들기 어렵다. 하지만 모호하고 애매한 것은 정의된 것 외부로 끊임없이 '시선 - 세상에 더듬이를 세우고 있는 내게 있는 이미지와 의미들 - ' 이 확장된다. 그렇게 확장되는 풍요로움이 마음에 들고 작업을 지속하게 해주는 촉매가 된다. ● 명확한 것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곤 한다. 난 그 강요의 파괴력과 폭력성에 아주 질색을 한다. 하지만 모호하고 애매한 것들은 이것이기도 하면서 저것이기도 한 상태에 날 놓아두고 충분히 바라보고 고심하는 시간을 갖는 데에 아무런 제재나 억압을 가하지 않는다. 돌출행위를 일삼는 반항아는 아닐지라도 잠정적 청개구리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물은 '모호함과 애매함의 바다'일 것이다. 2. 요즘은 실뿌리를 모티프로 한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뿌리는 땅에 묻혀 보이지는 않지만 토양으로부터 양분을 흡수해서 몸체를 키우고 단단히 지탱하므로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대상인 줄기, 잎, 꽃, 열매에 비해 식물로서의 이미지와 위상이 미미하다. 더구나 실뿌리는 아주 작고 단순한 형태에 육안으로 보기 어려운 것도 있다. 땅속에서 작게 정지된 모습으로 뿌리의 가장 끝에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이런 실뿌리를 가지고 나는 애매화(?) 작업에 돌입한다. 미세하고 작고 단순한 실체에 크고 두툼하고 다소 위협적인 형태를 부여한다. 땅속에 묻혀 단단히 고정된 것을 공중에서 마치 꿈틀 되기라도 할 양으로 역동성을 최대한 강조하여 실뿌리가 갖는 원상태의 배치를 뒤집어본다. 이렇게 변화된 이미지의 실뿌리 작업과 먼저 대면한 이들은 자신들 내면의 유사한 이미지의 형태를 떠올리며 말한다. '도마뱀 같아, 고래 같아, 악어 같아, 산삼 같아...' 이렇게 나의 실뿌리들은 다른 아주 많은 이름을 얻는다. 3. 선생님께 스케치와 그간 작업한 이미지를 가볍게 사진을 찍어 보내드렸다. 내 작업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해주셔서 난 일상언어이지만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로 선생님께 열심히그러나 조심스럽게 설명해 드렸다. 작업이 아직 다 완성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실뿌리를 모티프로 한 개체 21마리(?) 와 그들과 대치 상황을 이룰 털이 덥수룩한 '연분홍의 무명(無名? 혹은 미명:未名)이' 에 대해서 형태와 각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상세하게 말씀 드렸다. 며칠 후 선생님께서 이번 나의 전시를 위한 글을 써서 보내주셨다. 말씀 드린 내용만으로 선생님은 이미 전시 광경을 보신 듯, 실은 앞으로 펼쳐질 전시에 대한 기대감과 압박의 무게를 더해 내 작업 보다 더 힘이 있는 글을 보내주셨다. 그에 걸 맞는 전시를 만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이다. 4. 2층이 한 공간을 이루는 전시장에 작품을 설치했다. 몇 달 전 이 공간을 미리 답사하며 사진으로 기록할 당시엔 몰랐는데, 설치하는 사이사이 눈에 띄는 공간이 보인다. 이 전시장은 2층이 통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데, 지하가 1층이고 지상과 연결된 층이 2층인 공간이다. 그런데 지하인 1층의 한 벽면이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1층에 설치하기로 예정된 실뿌리를 기반으로 한 이 군집의 작품은 21개로 완성되어, 본래 고정되고 정지된 실뿌리의 원상태를 뒤집어 강한 역동성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 벽면이 자꾸만 나 좀 봐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아무래도 난 저 벽면에 어울릴만한 녀석으로 실뿌리 한두 마리를 더 만들어야 될 것 같다. 벽을 뚫고 나오는 모습을 만들면 내가 의도한 바를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아, 피곤하고 졸린데...과연 그럴 수 있을까?", "뭐, 해봐야 알겠지..." 여튼 그것이 내가 원하는 역동성을 더 배가시킬지 감소시킬지 예상을 확실히 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이 전시의 설치를 모두 마치려면 나는 이 동네 헤이리에 머물며 며칠 더 뜨개질을 해야 될 것 같다. (2016. 8. 23.) ■ 이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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