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 New-法古創新: 간송을 기리며

간송 전형필 선생 탄생 110주년 기념展   2016_0909 ▶ 2016_1023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고미술 / 겸재 정선 현대작가 / 배정완_이세현_이창원_송현주 윤기원_이이남_신수혁_정희승_장재록 김서_최현준_이하린_정진원_신이철 신형섭_김동현_유승호_장우석_지지수 코디 최_유비호_손종준_정주영_진희란 이원호_김형규_김다움_김길후_장종완 기슬기_김기라_이상용_백정기_구범석

주최 / 간송미술문화재단_서울디자인재단_SBS 주관 / 간송C&D

관람료 / 성인 8,000원 / 학생(초·중·고),장애인(4~6급) 6,000원 20인 이상 학생 단체,문화가있는날(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4,000원 만 4세 미만 미취학 아동, 국가유공자·장애인(1~3급) 및 동반 1인 무료

관람시간 / 10:00am~07:00pm / 금,토요일_10:00am~09:00pm / 월요일 휴관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DONGDAEMUN DESIGN PLAZA, DDP 서울 중구 을지로 281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 Tel. +82.2.2153.0000 www.ddp.or.kr

서구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천재로 칭송을 받는다면, 동양에서는 송나라 시대의 소식(蘇軾)이 천재로 추앙 받는다. 소식은 정치가이면서 예술가이며 시인이었다. 최고의 관개기술자였으며 요리까지 개발했다. 백성들에게 매우 친밀하고 인정이 넘쳐 가는 곳마다 추앙 받았다. 유학자이면서 불교 · 도교 가리지 않고 호기심을 가졌다. 그는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탄미해서 시를 짓곤 했던 흔한 시인이 아니었다. 고도의 철학적 사유의 경지마저 넘어섰던 희대의 문사였다. 「제서림벽(題西林壁)」이라는 유명한 시를 읽어보자. "옆에서 보면 산령이오 곁에서 보면 산봉이로세, / 멀고, 가깝고, 높고, 낮기가 각각 다르구나. / 여산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 바로 이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로구나. 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 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겸재 정선_풍악내산총람
겸재 정선_통천문암

우리는 살아가는 공간에 익숙해있다. 익숙해 있다는 것은 망각해 있다는 것이다. 발견(發見, discovery)이란 망각에서 풀려나 태초로 보게 되는 사실이다. 망각은 그리스어로 레테(lethe)의 강이고 진실은 레테의 강을 건너서 망각을 극복한 아레테리아(aletheria)이다. 망각은 익숙함 혹은 편안함으로 둘러싸인 상태이다. 디스-커버(dis-cover)는 이 둘러싸인 껍데기를 떼어놓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진실은 편안한 이불을 들춰내는 것이다. 이불 속에서 편안할 때 누군가 그것을 갑자기 들춰내면 몸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진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가 여행을 가거나 이사를 갔을 때 낯설고 불편하고 불안한 것은 망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예술은 우리의 망각을 상실시키는 행위이다. 예술의 목적은 편안한 껍데기를 갑자기 들춰버리는 것에 있다. 소식의 위대한 시구(詩句)는 비단 공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시간에도 적용된다.

이세현_Between Red_016JUL01

우리는 우리가 처하고 있는 시대와 상황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살아간다. 그 느낌은 총천연색이다.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와 상황의 의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느낌을 간파할 수 없다. 우리가 느끼는 조선시대에 대한 느낌은 흑백색이다. 그러나 그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의미를 안다. 이를 어려운 말로 역사의 내부자와 역사의 외부자라고 한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사는 역사의 내부자로서 이 시대를 생생하게 느낀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우리의 후세대 사람들만이 알게 될 것이다. 소식은 시 한편으로, 인식주관이 내부에 처해지면 생생하게 체험하지만 객관을 잃게 되고, 이로부터 이격되어서 심적 거리를 두면 객관성의 길이 열리나 생생한 감각은 잃고 마는, 인간의 한계를 파악한 것이다.

이창원_간송의 기억

우리는 이 시간, 이 나라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지금 하는 예술도 이 시간과 이 공간에 영원히 귀속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 예술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상세히 물어볼 것이 있다. 이 시간, 이 공간에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참된 예술은 자기가 누구인지 묻는 기나긴 여정의 흔적이다. 나를 모르고, 또 내가 사는 시대와 공간의 의미를 묻지 않고 하는 예술 속에서 참된 의미가 발현될 수 없는 노릇이다. 예술은 존재론적 장식이 아니다. 나의 삶을 드러내고 나를 키워준 시공간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자기를 알고 자기가 아는 시대를 아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자기 눈을 뽑아서 자기를 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다.'고 말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고백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편안한 이불자리에서 감미로운 순간 누군가 갑자기 이불을 걷어낼 때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처럼 나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일은 실로 고통스럽다. 이 역시 철학자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의 말이다. 그러나 예술하는 사람은 아픈 고통과 소스라치는 놀람을 감내해야만 한다. 더욱이 내부자, 즉 인사이더로서의 답답함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창원_간송의 기억_부분

간송 전형필 선생은 평소에 "예술품의 존귀한 바는 그것이 우수한 작품일수록 그 시대와 문화를 가장 정직하게 똑똑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말했다. 살고 있는 시대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태도에서 예술의 의미가 발현된다는 뜻이다. 또한 선생은 "'나의 것'에 대한 노력만이 앞으로 기대되는 새로운 국보의 발견으로 우리들을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물음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나의 것'에 대한 근본이 무엇인지 자각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즉,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물어서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예술가의 의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은 예술가가 잊어서는 안 될 가장 중대한 창작의 태도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둡다. 그것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질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불이 필요하다. 우리의 사위(四圍)를 밝게 비춰줄 불이 필요하다.

신이철_청화백자사이보구용문대호 靑華白瓷思利寶具龍紋大壺

우리는 누구나 불에 대한 아주 원초적인 느낌을 갖고 있다. 우리가 불을 다루게 되면서 문명을 열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불은 이율배반적이다. 그것을 조절하고 거리를 두면 아주 편안함과 유익함을 얻게 되지만, 조절하지 못하면 재화가 되고 또 너무 다가서면 다치게 된다. 최초에 우리는 집안에 있는 불을 보고 마치 나방처럼 뛰어들려는 욕망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혹은 그 속에 손길을 뻗은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손을 톡하며 때리거나 뒷덜미를 잡았다. 이렇듯 아버지의 제재에 의해서 불에 대한 원초적 경험은 좌절된다. 불에 대한 학습은 원초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 혹은 사회적인 것으로 변형된다. 그러다 소년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든다. 그리고 언젠가 아버지의 성냥을 몰래 훔친다. 친구들과 들판이나 숲 속의 공터로 간다. 불을 피운다. 그 불에 야생으로 나는 과실과 열매, 그리고 곤충과 양서류를 구워먹으면서 허기를 달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짜릿함이다. 불을 다루었다는 기쁨은 자기의 능력을 아버지와 비교하게 된다. 아버지도 내 나이 즈음 불을 훔쳤을까? 지금 나의 불 다루는 솜씨는 아버지의 그것과 견주어 어느 정도일까? 갈 길은 얼마나 남았을까? 이를 정신분석학에서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라고 한다. 최고의 신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친 어린 프로메테우스는 자기의 능력을 제우스에 견주어보았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만지면서 열락의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제우스의 제재에 맞닥뜨리게 되는 운명이 기다린다. 고통의 형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고통을 대신할 보상을 받자.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인간들에게 나누어준다.

유승호_낭만에 대하여

예술가는 프로메테우스이다. 불은 예술이다. 주신(主神) 제우스는 예술의 관습과 법도, 즉 제도이다. 인간은 관객이다. 예술가는 불을 과거의 제도로부터 가져온다. 그 불을 나누어 가져오는 순간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온다. 동시에 그 불을 나누어 가져오는 순간 고통의 운명은 정해진다. 불을 꺼내오는 순간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와 스스로를 비교하듯이 우리 예술가는 모두 자기만의 불을 자기만의 제우스하고 비교하게 된다. 그 제우스 중에 미켈란젤로도 있고 마우리치오 카텔란도 있고 게르하르트 리히터도 있을 것이다. 그 제우스 중에 겸재 정선도 있고 혜원 신윤복이나 추사 김정희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가져온 불이, 예술이 얼마나 세상을 비추어줄지 고뇌하게 된다. 나의 불은 아름다운가? 나의 불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내가 불을 훔친 것은 과연 온당한 것인가? 나는 어째서 불을 훔쳤단 말인가? 이러한 사유는 지대한 기쁨과 말하기 힘든 외로움이라는 흐름으로 서로 소용돌이쳐서 넘치게 된다. 이 엄청난 기운의 소용돌이를 잘 조절하는 일에서 작업의 성패가 갈린다.

유승호_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우리는 특이하게도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담론과 형식을 받아들여 창작하는, 전무후무한 생태계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예술을 보면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다. 우리가 산으로 들로 나가서 꽃을 보면 귀화식물이 많이 눈에 띈다. 돼지풀 · 도깨비바늘 · 개망초 · 실망초 · 개쑥갓 · 큰방가지똥 · 서양민들레 · 큰개불알풀 · 광대수염 · 자운영 · 미국자리공 · 뚱딴지 ·메귀리 등이 그것이다. 어느 것 하나 호의적인 명칭이 없다. 그러나 어쩌다 금강초롱 · 할미꽃 · 패랭이꽃 · 원추리 · 은방울꽃 · 눈갯버들 · 머위 · 봄구슬봉이 · 제비꽃 · 바람꽃을 만나게 되면 한없이 반갑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게 된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나고 자라서 이러한 감정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인에게 올리브 잎이 사랑스러울 것이며, 파나마 사람은 바나나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매화꽃과 댓잎이 가장 사랑스러울 것이다. 하물며 식물도 이런데 예술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술가 중에는 실망초나 개쑥갓, 아니면 큰개불알꽃 같은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이 많다. 안 될 것까지야 없지만 슬픈 일이다.

코디 최_VIRTUE714

간송 전형필 선생도 어쩌면 또 다른 의미에서의 프로메테우스이다.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시대라는 제약이 있었다. 사회는 엄혹했고 꿈꿀 권리를 상실한 시대였다. 모두 어둠 속에 갇혀있었다. 선생은 타오르는 불잉걸을 몸소 품 속에 숨겨 되찾아왔다. 우리나라가 장차 독립되어 문화적 강국이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쁨도 남달랐겠지만 온갖 고초도 겪어야만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의 거의 모든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하고 연구했다. 선생이 이렇게 한 것은 수집의 즐거움이 컸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적 독립을 꿈꾸었고 광복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주역』의 64괘 중에 복괘(復卦)가 있다. 위는 땅이고 아래는 우레이며, 초효만이 양효로 되어 있다. 아직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땅 속에 불 에너지가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 복괘의 의미다. 광복은 불 하나를 다시 얻었다는 뜻이다. 선생은 불잉걸을 가져와 우리 마음 속에 다시 지핀 문화적 영웅이다. 예술가는 물론 이를 향유하는 우리 모두 선생의 이러한 자기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 이번 전시회의 목적이다.

정주영_인왕산8-1, 8-2, 8-3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은 옛 것을 본받아 새 것을 창조한다는 뜻인데, 그 기원이 상당히 오래되었다. 은나라의 시조 임금인 성탕(成湯)은 은나라의 시조인 성탕(成湯) 임금은 매일 아침마다 사용하는 세숫대야에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이라고 썼다. '언젠가 한때 새로워진다면 나날이 새로워질 것이고 또한 더욱 새로워질 것이다.'라는 뜻이다. 새로움의 시작은 언제나 과거의 성과를 잘 따라 배우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찬연했던 과거가 있다. 그러나 찬연했던 과거를 망각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 현재의 전 지구적 담론과 형식에 아주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익숙함을 걷어내기란 실로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익숙함을 걷어낼 때 새로운 발견이 기다린다. 그 발견이란 무엇인가? 간송 선생과 우리 조상들이 예술을 한 목적이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목적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개인의 명예와 영달을 위해서 예술하고 있다. 조상들은 천명(天命)에 귀를 기울였다. 하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이 땅에 나는 풀 한 포기부터 구르는 돌멩이까지 의미가 있다. 하늘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면 어느 한 사람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깨우침을 그림에 표현하고 글로 나타냈다. 이러한 마음씨가 상현에서 성현으로 이어졌고 성현의 마음을 배우고자 노력했고, 그러한 마음이 예술 속에서 시 속에서, 그리고 노래 속에서 퍼졌다. 아직 한없이 부족한 우리지만, 언젠가 조상들이 생각했던 마음을 깨닫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전시 제목을 「법고창신」이라고 지은 이유이다. ■ 이진명

Vol.20160909e | Old & New-法古創新: 간송을 기리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