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열展 / LEEJAEYUAL / 李宰列 / painting   2016_0923 ▶ 2016_1007

이재열_관폭도_장지에 아크릴채색_116×91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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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열 블로그_blog.naver.com/sanjung33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스칼라티움 아트 스페이스 상암점 SCALATIUM ART SPACE_SANGAM 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240(성산동 420번지) 서울월드컵경기장 2층 Tel. +82.2.306.3600 scalatium.com blog.naver.com/artscalatium

'켤레의 상상력'과 그 이면의 동력 ● 최근 몇 년간 전통회화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이재열 작가의 그림들은 무엇보다 그 접근성에서 장점을 갖는다. 초현실주의니, 고전주의니 하는 식의, 시대를 개관하는 양식적 특성 따위는, 정치나 사회 영역보다 언제나 몇 걸음쯤 빨리 걷는 예술가들에 의해 내던져진지 오래다. 이미 니체가 19세기에 예견했던 '모더니즘-너머'의 세계는 이제 철학과 문학 예술을 거쳐 일반인들의 생활세계로도 상당부분 내려앉은 바, 21세기 초입의 우리는 무엇이 전위적이며 보수적인지조차 규정하기 어려우며 그 어떤 사안에도 '다양성'과 '개별성'이란 토를 달지 않고서는 출발조차 할 수 없는 복잡성과 획일성의 혼잡 속에 숨가쁘게 살아가고 있다. 한없이 복잡해보이면서도 지나치게 획일화된 삶, 혹은 그 반대로 말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그런 시대. ● 일상이 현란한 시각적 스펙타클로 뒤덮인 환경에서, 무엇을 그렸는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조선시대 회화에 대한 약간의 교양을 양념처럼 지니고 있다면 더욱 쉽게 감상할 수 있는 그림들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은 약간의 위안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

이재열_묘작도_장지에 아크릴채색_116×91cm_2016

작가의 시선을 거쳐 재구성된 그림들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어진다. 강희안의 「고사관수(高士觀水)」나, 김명국의 「달마(達磨)」, 변상벽의 「묘작(猫雀)」, 장승업의 「호취(豪鷲)」등 원화의 구도와 구성요소가 비교적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갈래, 윤두서의 「자화상(自畵像)」이나 정선의 「박연폭포(朴淵瀑布)」등 옛 그림이 작업의 모티브가 되었음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구성에서 좀 더 대담한 변형과 추상을 가미한 갈래, 기존의 작업을 통과하면서 얻은 조형적 요소를 자발적으로 구성하여 성립한 세 번째 갈래가 그것이다. 본디 문학과 예술에서 '모티브(Motif)'란 소재나 제재, 혹은 테마처럼 여러 갈래와 연관을 맺으며 창작과 표현의 동인으로 작용하는 바, 이 영역이야말로 예술적 영감과 숙련된 노동이 신비롭게 만나는 지점, 다시 말해, 예술가의 주관적 심상이 외화되는 매개이자 매체와 같은 통로임을 이재열의 작업이 분화하고 분기하는 과정을 살피면서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재열_세한도_장지에 아크릴채색_91×116cm_2016

내게 이재열의 작품이 그 형식상의 가벼움과 용이한 접근성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호하고 모순적인 매혹을 담고 있는 듯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무엇인가를 보고 다른 무엇인가를 떠올린다는 것, 혹은 어떤 대상을 보고 '(이곳 저곳을) 생략하면 어떨까'라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 이러한 표현-욕구는 사실 대단히 인간적인 현상이며, 선사시대부터 현생인류까지 공유하는 본능과 같은 인식패턴이기도 하다. ● 배경을 생략하고, 과감하고 선명한 원색으로 바꾸거나 직선/나선/점과 같은 수학적 기호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모티브가 되었던 원화들은 전혀 다른 시각적 형상으로 변모한다. 이재열의 그림이 대부분 조선시대 그림을 차용하거나 변용하는 데서 출발한 것은 사실이고, 또한 그이가 꽤 오랫동안 수묵산수를 탐구했던 이력도 분명하므로, 명쾌한 필선이나 여백 처리에 그와 같은 흔적이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엄밀히 말해 이재열의 작품이 주는 시각적 체험은 전통그림이 주는 미감과는 정반대의 것에 가깝다. ● (감상이야 워낙에 주관적 편차가 큰 영역이긴 하지만) 우리가 옛그림을 즐긴다거나 옛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떠올리는 감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은은하게 번지는 수묵선염(水墨渲染)이 주는 맑은 운치를 감상하거나 즉흥적인 선비화가의 필선에 감정이입이 되거나 부감법에 의한 산수를 통한 고원(高原)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재열의 그림들이 갖는, 견고한 윤곽, 강렬하고 단순한 색면이 압도하는 화면, 통제된 리듬감 등이 주는 시각적 경험은, 그이의 작품들이 대단히 의식적인 조형적 작업의 결과물임을 선명히 함과 동시에 확장보다는 수축, 번짐보다는 안으로 응집하기, 에둘러 말하기보다는 직설적인 화법의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종류이다. '몇 백년 전의 그림 보기'에서 출발하여 20세기 초입의 구성주의적 추상미술로, 혹은 팝아트로, 혹은 하나의 디자인에 가까워 진 듯한 이재열의 작업은, 소재나 주제, 형식면에서 태생적으로 이중성/모순성을 내장하고 있고 이것이 내게는 퍽 흥미롭게 여겨진다.

이재열_어부사시가_장지에 아크릴채색_91×116cm_2016

15세기 강희안의 「고사관수(高士觀水)」를 보지 않았다면 전시된 그림도 없었을 것이므로 이것은 '켤레의 상상력'이라 이름할 수 있는 동력이지만, 이 상상력은 원화를 보란 듯이 배신하고 시치미를 뗀 채 '지금-여기'에 존재한다. 한 때, '모든 예술은 하나의 질문이다'는 식의 언설이 인간의 상상력을 지배한 때도 있었지만, 이미 지난 세기의 일일 뿐, 이제 더 이상, 어느 영역에서도 '왜?'라는 질문은 대접받지 못한다. 그저 '어떻게?'가 중요할 뿐인 시대. 이것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을 갈라치는 중요한 특질이기도 하지 않던가. ● 따라서 그의 그림을 두고 '왜?'라고 묻는 것은 어딘지 초점이 어긋난 물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이미 더 이상 '왜?'라는 질문이 옹색하고 군색하며 사방이 그저 '어떻게?'로 가득차 있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가 관심의 초점인 사람에게 '왜?'는 '그냥' 혹은,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고 대답할 수 없게 하는, 뭔가 그럴듯한 정답을 마련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주는 촌스런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 앞에서 '왜?'라고 질문을 던져 보았을 때, 나는 어렴풋이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내장된 어떤 본능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하게 되었다.

이재열_조는 새_장지에 아크릴채색_116×91cm_2016

"대상의 세계와 꿈의 세계 사이에서 매개체 구실을 하는 것은 우리의 감성" (바슐라르)이란 말처럼,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되 무감각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건 자기 시선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대단히 인간적인 본능이다. 여기서 길게 상술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의 역사가, 철학이, 혹은 인간의 언어가 모두 '단순하게 파악하고 표상하고자 하는 본능'과 연관이 있다는 정도만 짚어두자. 그러니 앞으로 어떤 전시공간에 입장하건, '이 작가의 작품/작업은 무엇과 무엇 사이를 매개하고 있을까'를 염두에 둔다면 인공지능이 점점 더 우리 곁으로 올 것이 분명한 이 시대에, 우리는 조금쯤 우리 스스로의 인간다움에 복무하는 감상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하여경

Vol.20160923e | 이재열展 / LEEJAEYUAL / 李宰列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