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la durée

우민아트센터 개관 5주년 기념 주제기획展   2016_1005 ▶ 2016_1210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6_1005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류승환_민성홍_이완_이창원_임선이_진시영

후원 / 우민재단

관람시간 / 10월_10:00am~07:00pm / 11,12월_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우민아트센터 WUMIN ART CENTER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사북로 164 우민타워 B1 Tel. +82.43.222.0357 www.wuminartcenter.org

예술이 '지속'에 대해 묻는다. - 궁핍한 시대의 예술가 ● 우민아트센터 개관 5주년 기념전시의 기획을 의뢰 받고 무엇보다 고민했던 것은 '과연 우리 시대에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 휠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은 자신이 살고 있는 '궁핍한 시대'에서 시인의 역할과 '지상의 척도'에 대해 물었다. 정신착란으로 36년간 광기의 어둠 속에 살다 고통과 고독 속에 죽었던 휠덜린은 사후에도 잊어진 존재였지만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 의해 비평의 지평으로 소환된 시인이기도 했다. 훨덜린은 자신의 시에서 '땅 위에 척도는 있는가? 그런 것은 없다.'고 했으나 햇살 아래 피어난 한 떨기 꽃에서 무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도 했다. 비탄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그를 통해 오늘날 예술의 가능성과 소명은 무엇인가를 반성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이 지나친 것일까.

류승환_실존은 땅에 묻고 영혼을 하늘에서 거두는 목숨나무_종이에 펜_37×457cm_2015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풍요롭고 행복한 시간으로 인식한 시대는 과연 얼마나 될까. 하우저(Arnold Hauser)에 따르면 자신의 시대에 대해 고전의 부활이라 하여 스스로 르네상스라 이름 붙였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조차 그들의 시대가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동요가 격심했기 때문에 조화와 안정을 추구했다고 한다. 불안과 동요가 역설적이게도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탐닉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 시대는 궁핍이 아니라 모든 것의 과잉이 포화상태에 이른 나머지 '잉여'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디어의 시대에 이미지의 포화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므로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또한 정보화 사회의 도래는 구텐베르크 이후 인쇄기술의 발달로 나타난 지장본 도서가 가져온 지식의 혁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정보의 폭발을 가져왔으며, 정보들이 하이퍼링크를 통해 서로 연결, 공유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제, 증식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SNS의 일상화는 나의 존재가 세계를 향해 전면적으로 개방돼 있으며 그만큼 통신망에 종속되도록 만들고 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넘쳐나고 과잉이 낳은 잉여가 유동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폭발 직전에 이른 잉여 언어'는 거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언어가 성찰을 추월하여 유희의 수준으로 남용되는 현실에서 나 역시 '잉여언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다. 말의 과잉과 포화는 그만큼 죽은 언어가 만연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술도 예외는 아니다. ● 통념의 전복, 낡은 것에 대한 공격, 상식에 대한 도발과 위반, 금기에의 저항, 기성에 대한 부정과 새로움으로 향한 열망을 동력으로 성장해온 아방가르드 예술이 미술관 속에 역사적 유물로 모셔지는 현실에서 전위정신은 본래 빛을 상실한 채 의사(pseudo) 전위를 남발한다. 이 의사 전위야말로 전위의 이름으로 부유하는 죽은 전위일 것이며 이미 죽은 정신이 남겨놓은 껍질일 것이다. 풍요 속의 결핍, 이 상황에서 예술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전위로 위장한 낡은 형식이 넘쳐날수록, 주체와 대상이 불분명한 공격정신이 횡행할수록, 예술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 진부한 넋두리로 느껴지는 순간일수록 우리는 거듭 물어야 한다. 궁핍한 시대에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민성홍_Overlapped Sensibility: Carousel_ 세라믹, 나무에 아크릴채색, 스틸, 합성수지, 나무, 모터, 천, 조명_가변설치_2015

베르그손의 지속, 예술의 지속 ● 우리는 우리의 삶이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생명체인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탄생과 죽음이란 두 점이 만드는 선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즉 영원한 삶으로서의 지속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선분을 양쪽으로 끝없이 늘릴 수는 없을까. 이 전시의 주제인 '지속'은 이러한 상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만약 시간이 직선적으로 펼쳐진 것이라고 한다면 수평적으로 이어진 과거-현재-미래를 시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이러한 직선적인 관념은 시간을 정적이며 측정 가능한 것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실제로 시간을 측정하는 가장 보편적인 도구인 시계는 시간을 분초단위로 나눠 소유, 지배하고자 한 인간의 욕망이 시간을 단위화한 결과일 뿐 시간 자체와는 무관하다. 만약 시간을 선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과거는 이미 지나친 어느 시점이기 때문에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다. 또한 시간이 직선으로 운동하는 것이라면 현재는 매번 무에서 새로 시작하는 순간들의 점적인 병렬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동질적이고 계산 가능한 것이라기보다 변화무쌍한 리듬과 흐름(flux)을 지닌 지속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시간이 곧 지속이며 지속의 흐름은 부단히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완_메이드인 코리아 가발_단채널 영상_00:10:58_2015

궁핍한 시대의 예술에 대해 혼자 이런저런 생각과 상상, 몽상과 사유를 하다 문득 '지속'이란 개념을 떠올리긴 했으나, 지속은 이미 백 년 전쯤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이 제안했던 어쩌면 낡은 개념이다. 수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베르그손은 젊은 시절 특히 스펜서(Herbert Spenser)의 사회진화론에 경도되었으나 모든 시간과 공간을 수리적으로 인식하던 당시의 과학과 지성이 지닌 문제를 깨닫고 순수직관, 생명, 창조적 진화, 약동하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지속에 대해 주장했다. 지속을 시간의 본질로 파악하고 기계론적인 진화론에 맞서 '창조적 진화'를 주장했던 그는 시간과 공간은 분리돼 있다는 뉴턴(Isaac Newton)의 논리의 맹점을 그 원천에서 극복하며 시간과 공간은 결코 분리할 수 없음을 논증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부정하며 아인슈타인과 역사적으로 유명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베르그손의 인문학적, 철학적 고집은 과학적으로 잘못된 판단으로 규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후배 철학자들로부터 관념론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중에서 사회적 실천과 변혁을 중시했던 대표적인 프랑스 마르크주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시간을 중시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공간을 폄훼했던 베르그손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르페브르에게 있어서 공간은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행위의 장이므로 사회적 공간이 결여된 베르그손의 사유가 보수적인 비합리주의 철학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창원_4개의 도시: 바그다드, 평양, 서울, 후쿠시마_ 유리 쇼케이스, 실크스크린, LED 조명, 좌대_113×45×45cm×4_2014

이처럼 아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성찰과 검증에 대한 부정, 사회의 개혁을 위한 실천의지의 결여 등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하더라도 다시 베르그손으로 돌아가 지속에 대해 생각해 본다. 창조의 원천인 지속은 생물학적인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앙리 베르그손이 말했던 것처럼 생성, 변화하는 자연 그 자체이다. 우리는 생성, 변화, 흐름의 특징을 지닌 지속 속에서 살아가며 움직이고 존재한다. 세계와 자아는 지속하면서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며 흐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을 떠나서 세계를 규명할 수는 없다. 그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물질이며, 최소단위의 물질이라도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므로 그의 관심은 『물질과 기억(Matiére et mémoire』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물질의 문제와 만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독특하게도 그는 물질을 이미지의 총체로 파악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물질이란 이미지의 총체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미지'라는 말을 관념론자들이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한 것이고, 실재론자들이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덜한 어떤 존재 '사물과 표상' 사이의 중간쯤에 위치한 존재로 이해한다." ● 지속의 특징인 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이미지이며, 그 이미지를 뇌라는 장기를 통해 포착해 형성한 것이 지각이다. 이렇게 누적된 지각에 의해 기억이 구성된다. 이미지를 창출하는 시각예술은 누적된 지각에 의해 구성된 기억이 재생된 결과물이자 우리가 기억 속에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억은 시간의 본질인 지속 속에 거주한다.

임선이_Even Division_topographic maps_70×202×181cm_2014

시간의 속성은 흐르는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이미 지나간 체험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의식은 지속하는 것이므로 비록 지나간 과거라 할지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물질과 기억』에서 베르그손은 '과거가 이미 지나간 것이라고 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지각하지 않을 때의 물질적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과거에 겪은 체험 전체가, 지금 여기 현전(現前)한다. 여전히 존재하는 과거의 이러한 존재방식이 '기억'이다. '기억-이미지(souvenirs-images)란 과거가 아니라 지금 체험되는 것이다. 그것을 베르그손은 순수지속(durée pure)이라고 했다. 즉 "순수한 지속이란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그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둘 때, 즉,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분리가 사라지는 그때, 우리의 의식 상태들이 취하게 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 나로서는 이 전시를 통해 베르그손의 철학에 대해 장황하게 언설할 의도가 전혀 없다. 베르그손의 등에 올라타서 현학적인 담론을 늘어놓는 것 또한 이 전시의 목표가 아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밝히자면 폭발 직전에 이른 담론의 과잉과 만연, 미국 저널리스트 톰 울프(Tom Wolf)가 이론이 실제를 추월해버린 전후 미국 현대미술의 현장을 보며 썼던 『칠해진 글자(The Painted Word)』에서 진즉 저널리스틱하게 풍자했던 '말씀의 시대'는 실제로 그가 목격했던 시대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말씀들조차 권능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이 시대에 눈과 마음은 물론 손이 일치된 예술은 지속되어야 한다.

진시영_NEW FORMS_Flow of Light_단채널 영상_2015

지속 가운데 거주하는 예술을 향하여 ● 이 전시의 주제를 설정하기 위해 작가조사를 하던 중 문득 류승환이 쓴 다음과 같은 작업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하루의 삶과 정보, 지식, 깨달음 등이 기록되듯이 그려지며 거기에는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세 가지 항목의 내용이 변화와 흐름으로 나타난다. 내가 머무는 공간에서 얻어진 이미지(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와 그것이 진행되는 시간의 연속성을 표현한다. 형상은 나의 손과 시지각이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기록이며 여러 가지 삶의 환경과 유기적 관계를 가진다." ● 1991년부터 매일 겪는 일상적인 경험, 즉 독서와 삶의 성찰을 통해 떠오른 이미지들을 마치 일기를 쓰듯 A4크기의 종이에 기록하고 있는 류승환의 작업은 다소 신경질적일만큼 집요하면서 유연하다. 그의 드로잉의 모티브는 고대문화, 미생물, 언어, 수학과 기하학, 전파, 상대성이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일 몇 센티미터씩 지둔하지만 지속적으로 그려온 길이는 약 5백 미터에 도달하고 있다. 그의 작업노트와 드로잉은 나로 하여금 이 전시의 주제를 '지속'으로 정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그렇다고 나머지 5명의 작가들이 지속이란 주제에 무임승차한 것은 결코 아니다. 어쨌든 류승환의 드로잉은 로만 오팔카(Roman Opalka)가 매일 숫자를 쓰고 그것을 읽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기록했던 작업과 상응한다. 그러나 숫자만 기록한 오팔카와 비교하자면 류승환의 작업에는 이야기의 흐름이 있으며 그 뿌리는 또한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의 작업에서 볼 수 있듯이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바로 지속에 대한 사유와 만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완 역시 지속이란 개념과 부응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업태도와 방법 또한 삶의 지속이란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에게는 일상 자체가 지속이다. 이완의 대표작인 'Made in' 연작은 우리가 매일 먹고 있지만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이 필요한지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작가 스스로 한 끼의 아침식사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단순하면서 원초적인 질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그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주요 생산품을 직접 제작하기 위해 중국, 일본은 물론 타이완,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의 오지를 찾아가 그곳의 주요한 나무젓가락(중국), 쌀(캄보디아), 비단옷(태국), 금(미얀마), 설탕과 설탕숟가락(타이완), 나무탁자(인도네시아)등을 현지주민들과 함께 생산하였다. 당연히 현지의 주민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된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작가 또한 온갖 위험과 예상치 않은 문제와 마주치면서도 목표로 한 생산품을 제작하면서 한 끼의 아침식사가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시스템과 연결돼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찾아간 아시아의 오지는 식민경험과 후기식민적 모순을 동시에 지닌 지역으로서 작가는 이 무모한 제조활동을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질서 아래 이 지역의 전통, 역사, 인종, 종교, 노동의 역사가 변화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도 지속 중인 '메이드인' 연작은 아시아지역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를 예술행위로 조사한 일종의 보고서이자 작가 특유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지속 la durée展_우민아트센터_2016

인테리어 제품의 하나인 천장설치 선풍기(ceiling fan)를 회전판으로 이용한 민성홍의 설치작업은 과거 유럽에서 마상훈련을 위한 기구로 사용되었던 카루젤(carousel)이 18세기 이후 오락시설인 회전목마(merry-go-round)로 바뀐 사실에 착안하여 상황적 공간을 연출한 작품이다. 그의 'overlapped sensibility'은 회전목마의 형식을 차용하지만 실제로 회전판 위에서 돌고 있는 것은 목마가 아니라 작가가 세라믹으로 제작한 새의 머리이며 특히 부리가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부리는 다윈의 진화론에 영감을 부여한 자연선택설과도 연관된다. 기사의 훈련기구로부터 놀이기구로, 놀이기구가 다시 진화론으로 연결되는 그의 작업은 실제로는 연극무대처럼 연출된 것이며, 수없이 반복 운동하는 회전판 위의 새머리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끊임없는 순환을 거듭하는 인간의 반복적 삶을 암시한다.

지속 la durée展_우민아트센터_2016

이창원은 '그림자 주조자들(Shadow Casters)'이란 제목으로 2014년 시몬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에서 「성스러운 빛」이란 이름의 설치작품을 발표했다. 유럽의 고딕성당에서 볼 수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설치작업은 장미창처럼 연출된 검은 상자 속에서 영롱한 색깔을 지닌 '성스러운 빛'을 발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상자의 뒤로 돌아가 보면 형형색색의 빛은 쓰레받기, 반찬통, 대야, 세제 용기 등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플라스틱 용기들이 조명을 받아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작업은 만연하는 플라스틱을 통해 인스턴트 문화의 가벼움과 종교란 무겁고 본질적인 문화를 교차, 비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전시에 그는 바그다드, 평양, 서울, 후쿠시마를 주제로 한 「4 도시들」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산추징과 관련된 「거울의 천사(Angel of the Mirror)」를 출품한다. 「4 도시들」은 이라크의 바그다드처럼 전쟁으로 상징되는 도시이며, 평양은 분단과 이념대립으로, 후쿠시마는 핵발전소 폭발로 갈 수 없거나 혹은 가지 않는 도시이며 그 가운데 위치한 서울을 주목한 설치작업이다. 네 개의 상자 속에는 오브제 대신 조명이 설치돼 상자 벽면에 네거티브 이미지로 인쇄된 도시의 풍경을 전시장 벽면에 포지티브 이미지로 흐릿하게 비추고 있다. 반면 「거울의 천사」는 전두환 일가의 재산을 추징하며 압수했던 미술품 경매에 얽힌 보도를 보며 예술은 권력과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가란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당시 압수한 미술품 중에는 거울을 든 천사를 표현한 세라믹도 들어있었는데 그것으로부터 착안하여 인형이 들고 있는 거울 속에 광주의 이미지를 네거티브로 인쇄해 조명이 비추면 그 이미지가 벽면에 포지티브로 반영되도록 했다.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며, 그 얼개를 엮고 있는 기억들을 소환하는 이창원의 작업은 베르그손보다 르페브르의 사회적 실천의 장으로서 공간에 대해 주목한 특징이 있다.

지속 la durée展_우민아트센터_2016

이완이 노동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현지의 노동자들과 동화하며 투입된 시간과 노동에 비하자면 사소할지도 모를 생산물을 통해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소외된 육체노동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면 임선이의 작업은 그 자체가 집요한 노동의 결과물이다. 이창원의 작업이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도시를 가로지르고 이완은 오지의 노동현장으로 스며들어가 그 공간을 읽어내고자 한다면 임선이는 공간의 물리적 구조와 그것의 지층을 해부, 재조립한다. 지도에 표기된 등고선을 따라 오려낸 수천 장의 종이를 쌓았으나 내부가 움푹하게 패인 네거티브 공간을 통해 낯선 풍경을 보여주고자 한 임선이의 작업은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 놓여있다. 종이를 쌓아 만든 이 풍경은 실제 인왕산이나 남산과 같은 실재하는 자연대상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지만 지리적 특성을 평면 위에 옮겨놓은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하였기 때문에 실제 대상을 벗어나고 있다. 즉 어느 정도 독도법의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삼차원의 조밀한 공간을 평면에 축소해놓은 지도를 통해 공간을 지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실재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작가는 이 풍경을 근·중·원경의 세 초점의 시선(trifocal sight)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실제 지도를 옆에 놓고 비교한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 앞에서는 시선의 교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공중파 텔레비전의 정규방송이 끝날 때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애국가의 배경인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가졌던 의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집요하면서도 모호하고, 집착이 지나쳐 신경증적으로 보이기조차 하는 이 구축된 풍경은 견고하면서도 시선의 진동(oscillating eyes)을 유발한다. 인왕산을 소재한 작품에서 석양을 받아 붉게 물든 풍경처럼 온통 붉은 색으로 뒤덮인 이 가공의 산수는 '삼천리 금수강산'에 대한 강한 자기최면, 즉 우리 산하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배워왔던 유토피아적 환상에 대한 이의제기이자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란 지각심리학적 가설을 그 원천으로부터 뒤집고 있다. 반면에 남산을 대상으로 한 작업은 차갑지만 다소 몽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점은 입체설치작업을 사진으로 출력한 작품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위장한 허구의 풍경을 통해 우리의 지각체계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지속 la durée展_우민아트센터_2016

마지막으로 진시영은 미국 뉴욕에 유학 중이던 2004년과 2005년 사이 건물의 입구를 300여장의 붉은 벽돌을 쌓아 막은 후 건물주변의 색깔과 같은 흰색으로 칠하는 집요한 노동과정을 촬영한 장소특정적 작업을 발표했다. 그의 작업은 막은 입구의 벽돌을 허물고 그 건물이 애초에 있었던 대로 되돌려 놓고 아치모양의 그 공간에 벽돌을 쌓고 페인트를 칠하는 작업과정을 기록한 비디오를 비쳤다. 시지프스의 노고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작업 역시 시간의 흐름이 지속이란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귀국 후 2006광주비엔날레에서 발표한 「일상의 단편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오래된 가게의 간판들을 수집해 도시의 구조를 재구성하여 도시에 얽힌 기억을 기록한 영상과 함께 보여준 설치작업으로서 도시공간에 스며든 시간과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대한 작가의 탐구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뉴미디어 아트와 현대발레와의 협업을 통해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복합적 작업을 발표하고 있는 그는 이 전시에서 네 개의 독립된 영상이 '뉴폼'이란 큰 주제 아래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된 작품을 발표한다. 빛을 흡수한 무용가의 몸이 스스로 발광하며 공간에 빛의 드로잉을 그리는 상호작용적 퍼포먼스는 신체와 그것의 확장으로서 빛의 율동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든다. 그의 뉴미디어아트는 인공의 빛과 자연의 빛이 어우러지면서 신화와 우주, 태초의 빛과 그것의 파동이 만들어내는 파노라마, 점에서 출발하여 선으로 이어지다 무한한 공간 속에서 빛의 율동으로 확산되는 드라마를 연출한다. 영상과 무용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융복합적 접근방법과 실천에서 지속을 통해 예술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속 la durée展_우민아트센터_2016

다시 지속에 대하여 ● '지속'을 주제로 한 이 전시의 핵심어는 존재와 시간, 생명, 그리고 이미지이다. 전통적 의미에서 이미지는 원본의 복사를 의미하는데 이미지의 어원인 라틴어 이마고(imago)는 어떤 것을 닮아있거나 그 겉모습을 본뜬 것을 의미하는 '에이콘(eikon)'과 상응한다. 이 에이콘은 '보다'란 뜻을 지닌 고대 헬라 동사 에이도(eido)로부터 파생한 '에이도스(eidos), 즉 플라톤 철학에서는 영혼의 눈(직관)으로만 볼 수 있는 형상(形相)을 의미하므로 에이콘과 에이도스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미지는 실재가 아니라 상상이나 공상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나 가상을 일컫는 '판타스마(phantasma)'와도 대응한다. ● 이미지는 경험의 잔상일 수도 있고 순수한 착각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이미지는 우리의 몸을 매개로 지각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물질로 구성된 몸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우리는 물질계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몸을 통해 생존할 뿐만 아니라 세계와 사물을 지각하고 소통하는 한 몸 그 자체가 이미지이며 실재이다. 따라서 몸을 떠난 이미지란 성립할 수 없으며, 그 이미지를 지각하는 주체도 바로 우리의 몸이다. 몸은 내부의 심층세계로 열려 있지만 외부세계, 즉 사회, 자연환경을 향해 열려있기도 하다. 몸 자체가 행위의 장인 것이다. 예술은 이 행위가 빚어낸 분비물이자 세계로 향해 대화를 제안하며 보내는 신호이기도 하다.

지속 la durée展_우민아트센터_2016

이 전시의 목표는 이미지와 그 개념의 역사를 규명하는 것에 있지 않다. 또한 앙리 베르그손의 철학을 논증하기 위해 시각예술을 동원하고자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예술이 사물화된 현실에서 경험과 사유의 두 꼭지점을 마치 진자운동 하듯 진동하며 예술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예술이 변화하면서 흐르는 지속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인 자유를 표현하는 한 형식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작가들을 통해 지속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 것이 이 전시의 진정한 취지이다. 유한하며 모순에 차 있으면서도 지각을 통해 자아와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드러내는 이 작가들을 통해 우리 또한 지속의 흐름 위에 있음을 느끼고 깨닫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전시가 추구하는 바이다. ● 이 전시에 참가하는 작가는 대부분 지둔하지만 집요하게 자기세계를 천착하고 있다. 이들을 통해 시간의 본질인 지속을 발견한다는 것은 경이롭고 즐거운 일이다. 단지 오랜 시간의 공력에만 호소하며 노동에 헌신하는 것을 지속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속이란 지성에 의한 분석과 추리로 도달할 수 없는 그 너머에서 끊임없이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의 특성을 드러내는데 유효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거듭하여 지속은 생성이자 변화이며 생성이고 자유이다. 어떠한 경우든 예술은 지속되어야 한다. ■ 최태만

Vol.20161003h | 지속 la durée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