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 우리들

엄효용_김형섭 2인展   2016_1004 ▶ 2016_1015

엄효용_관광로 벚나무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80×142cm_2015

초대일시 / 2016_1004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여니갤러리 YUNI GALLERY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9-20번지 Tel. 070.4367.6080 yunigallery.com

우리들, 나무들 ● 젊은 날 우리가 거쳐 왔던 시각적 스펙터클이 있다. 그때 사진은 초산업시대에 근대의 유산들과 유니폼과 초상을 찍으면서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을 보여주었다. 즉, 우리는 지시하는 대상을 넘어서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보여지는 것들 바깥의 체계와 태도를 찍고 있었다. 재현되는 대상이 일차적 질료로 작동한다면 우리는 사진에서 태도와 세계관과 이면의 실재계를 목도하기 시작했다. ● 엄효용과 김형섭, 두 사람은 나무를 통해 단순한 재현을 넘어선 하나의 세계, 하나의 초월, 중립, 혹은 태도를 드러내고자 한다. 엄효용은 여러 그루의 가로수들을 찍고 찍고 찍어서 그것들을 수백 장에 이르기까지 중첩시킨다. 거기에는 공간과 시간의 포개짐이 있다. 그는 대체 이 중첩된 나무라는 지시체를 이용해 어떤 기억을 환기시키며, 어떤 시선을 끌어오고자 한다. 김형섭은 회색 지대를 막으로 삼아 팔다리가 꺾인 나무들 이미지를 정교하게 잘라내어 그 앞에 세워놓았다. 그는 과실을 맺기 위한 나무나 가로수의 역할에 맞도록 형태가 변형된 나무들 이미지에서 인간의 어떤 태도를 생각해보자고 한다. ● 우리는 엄효용과 김형섭의 지난 작품들을 먼저 생각해본다. 그들이 경유했던 디스플레이의 시대에 김형섭의 캔디와 롤리팝은 시각적 확장성이라는 강력한 도구로 미각과 후각을 포섭했다. 우리는 그 달콤한 대상들 앞에서 우리 몸 안의 감각들을 마주했다. 엄효용의 대상들은 중첩된 파스텔 색조 안에 자리 잡고 우리 시대의 어떤 취향과 선호를 드러내는 색면추상처럼 작용했다. 그들이 가졌던 태도와 테크닉은 이미 오래 전에 절차탁마 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예측불가능한 변주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 우리는 그러한 여정을 거쳐 지금의 전과 후를 동시에 바라본다. 우리는 순수한 재현이 낳는 의미 생성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 시대에 들어와 있으며 형식적 결정론과 표현적 기술우위를 논하던 시기와 세기를 달리하고 있다. 우리의 재현개념은 매순간 통시적으로 작동한다. 저 나무를 통해 우리는, 지각 가능한 현재, 상상 가능한 미래, 유추 가능한 과거를 동시에 바라본다. 지금은 관찰자의 존재가 대상의 위치와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게 된 시대, 과거조차 미래와 마찬가지로 불확정적이라는 것을 객관적 지식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 양자물리학의 시대이다. 즉, 사진 앞에 선 관람객은 작품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고, 그의 인식은 갤러리라는 공간을 넘어서며, 어떤 도전과 공감을 요구받게 되며, 바로 그 순간을 다르게 선택함으로써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변전시킬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무를 통해, 혹은 우리와 나무는, 둘 다 관찰자가 되어, 우리의 기억과 인간의 욕망과 과거의 나무들과 미래의 가로수들을 대상을 삼아, 지금 이 순간을 넘어선 시간들을 동시에 불러올 수 있다. 작품 앞에 선 순간, 우리는 공간과 시간과 같은 근본 매개물 자체를 충만과 형태로 재해석(파노프스키)하면서 질문을 받아들이게 된다. 지금의 사진적 지각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구현하는가. 풍경사진의 심미적인 측면이 안내와 광고의 실용적인 측면과 결합한 시대, 아름답고 독특하고 신비롭고 몽환적이라는 모든 수사가 휴가지를 위한 기준이 된 시대에 사진작업에서 풍경은 무엇이 되었는가.

엄효용_논현로 은행나무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50×90cm_2015
엄효용_석봉로 은행나무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40×30cm_2015
엄효용_석봉로 은행나무-1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40×30cm_2015
엄효용_소월로 은행나무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100×75cm_2014

엄효용의 사진은 나무의 초상화이다. 어떤 한 그루의 초상화, 혹은 짝을 지어 서있는 몇 그루의 초상화이다. 우리는 이 사진 속의 나무 하나에 여러 나무들이 포개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효용은 동호대교와 남산 순환도로에 줄지어 서있는 나무들 하나하나를 찍어 중첩시켜놓았다. 각자의 자리에 서있는, 서로가 서로와 비슷한 가로수들 수십 그루를 우리는 한 자리에서 한 나무의 초상처럼 보게 된다. 애초에 각각의 나무가 갖고 있을 개별적 정체성은 가로수라는 역할에 맞는 유사함, 획일화된 형태와 키에 묻혀 지워졌다. 우리는 이 초상사진 속에서 수십 그루 각각을 구분해내지 못한다. 단지 그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쌓인 어떤 중첩된 공간을 보게 될 뿐이다. 또한 우리가 동호대교를 달릴 때 옆을 스쳐지나갔던 가로수들이 압축된 시간 속에서 한꺼번에 불려와 하나의 이미지로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무는 공간과 시간의 중층 대상으로 여기에 있다. 이 대상의 개체성을 지우고, 우리는 대신 무엇을 만나게 될까. 유형의 하나로서 존재했던 단독의 개체들 대신에 이 격렬하게 서로 겹쳐진 무수한 단독자 나무들은 어떤 노스탤지어에 다가가 있는 것일까. ● 이 사진들의 파스텔 질감이 갖는 회화적 전략은 사진이 모든 세계를 재료로 삼는, 즉 회화적 질감이 내포하는 이미지까지 재료로 포괄하는 방식의 일부이다. 이 사진들이 대상으로 채택한 가로수들은 그 공간과 시간과 그때의 우리의 시선들을 불러온다. 한 그루의 나무 초상을 통해 압축된 수많은 나무들, 그 장소들, 시간들을 동시에 보게 된다. 저 하나의 나무와 눈을 맞추면서 나무가 서있는 맥락을 살피고, 그 앞에 서서 인식가능한 모든 것을 통합해서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의식한다. 우리는 시간을 쌓아올린다. 이제 나무를 통해 우리는 그 시간들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기억 속의 나무 전체와 우리가 맺는 관계를 이 제단화에 다름 아닌 사진 앞에서 다시 불러온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것,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 이렇게 나무와 같은, 어떤 대상 앞에 늘 서있지 않았는가. ● 지금의 풍경사진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거나, 사진 자체가 주체가 되어 우리 시대를 관찰하거나, 우리의 현재 안에 포함되어있는 과거와 미래를 재편할 의지를 주거나,최소한 직시할 시선을 주어야, 대체로 이 시대의 풍경 이미지로 동의될 수 있을 것이다. 엄효용은 우리가 성장기에 이름을 불러줬던 나무들이 가로수를 이루며 도시의 자동차 도로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본다. 기억 속의 그 나무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우리 옆에 와있다. 그래서 그는 나무들이 이제 더 이상 지난날처럼 존재하지 않는 사태를 돌이켜봄으로써 우리 자신 역시 그러함을, 우리가 도로를 달릴 때 옆에서 스쳐지나가면서 끊임없이 멀어지고 있을 뿐인 나무들은 사실 언제나 멀어지고 있는 우리 자신의 과거를 표상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가로수들의 군집적 이미지가 회고의 방식으로 도로의 끝에서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노스탤지어는 지금 이곳의 나무를 다른 시각으로 지각하게 하고, 그 공간과 시간을 상상하며 우리가 어떤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지 유추하게 만든다. 이제 엄효용의 사진은 말을 거는 주체가 되어 이 시대 풍경이미지의 하나를 이룬다.

김형섭_ftn004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110×145cm_2013
김형섭_ftn005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60×100cm_2013
김형섭_ftn008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60×100cm_2013
김형섭_ftn021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90cm_2013
김형섭_ftn028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90cm_2013

아주 오래전부터 자연이 만들어내는 모양과 색, 유기성의 조화와 불균질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할 때 놀라움의 대상이었고 세상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의 최초의 모티브가 되어왔다. 그런데 김형섭이 모티브를 가져온 자연물들은 애초의 자연스러움과 경탄의 대상으로서의 위용을 잃고 전락한 상태에 처한 것들이다. 그의 질문은, 인간에 의해 각색된 자연에게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이다. 자연물의 불완전한 형태로부터 완전성에 대한 개념을 추출하고(리글) 추상하여 단순한 지각을 넘어서서 세계를 설명하고 묘사하고자 했던 시도들이 도구적 인간, 미적 인간의 시작이었다. 아, 윤리적 인간이나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는 인간도 그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제 그 시대로부터 멀리, 혹은 이 시대의 천변만화 속에서, 김형섭은 자연을 단지 수단으로 삼는 인간만 남은 것은 아닌지 염려한다. 기술우위, 인간절대우위 시대에 인간이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전지전능(全知(全能))하게 나무를 용도껏 전지(剪枝)하는 풍경을 통해, 인간의 삶에 유용하도록 변형된 나무의 수형(樹形)이 나무의 수형(受刑)으로 선고된 것은 아닌지 그는 나무의 미래를 묻는다. ● 그 물음에는 어떤 포즈가 있다. 이 나무들은 원래 서있던 자리로부터 떠나, 개체적 특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정물이거나 풍경이 될 수도 있었을 맥락에서조차 벗어나, 나무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렸지만 잘려버린 손의 흔적만을 안고 있다. 김형섭은 이렇게 인간의 의도와 유익에 따라 변형된 나무들만이 남게 된다면, 용불용설의 법칙에 따라 전지된 상태로 진화되지 않겠느냐고 짐짓 농담의 제스처를 취하며 묻는다. 하지만 나무의 미래에 대한 그의 물음에는 우리와 자연의 근원적 공생에 가닿아 있는, 윤리적이며 동시에 심미적인 인간을 향한 포즈가 있다. 그의 제스처 이면에는 이미 드러난 우리 욕망의 바닥을 다시 검토해보자는 간절함이 숨어있다. ● 김형섭은 최상위 포식자 인간에게 포획된 나무를 통해 우리 시대가 진행되는 방향을 궁금해 하고 있다. 실제 그곳에 놓여있는 대상은 사진 안으로 들어와서 카메라가 사물을 느끼는 능력의 한 부분(손탁)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그는 마치 회색의 막 너머에서 나무의 고통과 우리의 욕망을 가림과 동시에 프레임 바깥에서 우리가 그것을 지각하고 상상하고 유추하게 한다. ● 김형섭은 기록의 의미에 곁들어 나무와 우리의 미래를 상상해보자고 한다. 실용성이 아름다움과 거래되고 동등한 가치를 갖게 될 때, 하나의 형질로만 다듬어진 나무들 앞에서 우리는 관찰자로 서본다. 저 나무가 스스로에게 유용한 원래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시대는 가버린 것인지, 저 나무의 잘려진 가지들 앞에서 우리가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사진작업이 압도적인 대상성을 찍어내는 것의 일환이라면 지금 이 사진들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과 고통을 봤을 때 이 사진이 찍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할 기회로 김형섭이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 김미영

Vol.20161004f | 나무들, 우리들-엄효용_김형섭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