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객(看客): 그다음은 말할 수가 없읍니다

기슬기_박은하 2인展   2016_1009 ▶︎ 2016_1022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인천문화재단_인천아트플랫폼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인천아트플랫폼 INCHEON ART PLATFORM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218번길 3 B동 전시실 Tel. +82.32.760.1000 www.inartplatform.kr

기슬기, 박은하 작가는 10월 9일 일요일부터 10월 22일 토요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 B동 전시실에서 『간객(看客): 그다음은 말할 수가 없읍니다』전을 인천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진행한다. ● 전시제목 『간객(看客): 그다음은 말할 수가 없읍니다』에서 '간객(看客)'은 쉬운 한자어로, 구경꾼, 관객(觀客)과 동의어이지만 이들에 비해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단어이다. 이는 어떤 필요에 의해 생겨난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소통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장 콕토의 '산비둘기'라는 짧은 시에서 인용한 '그다음은 말할 수가 없읍니다'라는 부제 또한, (말 그대로)어떤 현상에 대해 언어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것을 노래하는데 이마저도 시라는 형식으로 표현하면서 (언어를 통한)소통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 시를 처음 알게 된 오래된 책의 번역 '없읍니다'를 수정하지 않고 인용한 것도, 예전엔 옳았고 지금은 잘못된 맞춤법이 야기하는 시각적 불편함을 그대로 내보이기 위해서이다. ● 제목에 대한 설명에서 상상할 수 있듯이 이 전시는 작품 또는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일어나는 작가와 관객 간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로 크게, 관객이 미술작품을 관람하는 방법들(『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의 전시영상, 간객), 작가가 미술 작품을 제작하는 태도들(먼지 탑, 침입자), 그리고 조형언어를 통한 소통에 대한 의문들(그들에겐 이 세계가 필요해, 부드러운 단절)이라는 세 가지 소주제들로 이루어진다. 작품을 들여다보고 대상을 다시 바라보는 방식에 따른 소통의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에 대하여 영상설치형식으로 전시한다. ● 『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2015)』라는 전시에서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다양한 자세들과 행동들을 관찰하면서 갖게 된 미술 작품을 통한 소통자체에 대한 몇 가지 의문들을 구체화하고자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 특히 작품『간객』은 다양한 연령층의 비미술전공자들이 미술작품 감상이론에 대한 글을 음독한 뒤, 모르는 단어나 문장에 표시하고 이에 대해 작가가 하는 설명을 들은 후 다시 낭독하는 수차례의 개별 세미나를 거쳐, 인위적인 개입을 통한 미술작품 감상에 대한 이해도의 변화에 대해 고찰한다. ● 기슬기, 박은하 작가는 각각 사진과 회화라는 형식으로 작업해오면서 갖게 되었던 시각예술 자체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들을 다른 매체(영상 설치)를 통해 가시화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평면성이나 익숙한 규칙들을 타자화하려는 기초적 단계에서 다른 성향의 개방성을 발견하고 이를 단초로 근원적인 질문을 구체화하거나 주변부의 이야기에 대한 표현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 인천아트플랫폼

기슬기, 박은하_간객(看客): 그다음은 말할 수가 없읍니다展_인천아트플랫폼_2016
기슬기, 박은하_간객_단채널 비디오_00:08:19_2016
기슬기, 박은하_부드러운 단절_단채널 비디오_00:56:00(루프)_2016

'간 객'의 입장에 앞서 ● 여러분은 분명 몇 번의 고민 끝이 전시장 입구에 발을 들여놓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오랜만에 이런 곳에 오셨지만, 막상 어두컴컴한 이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 작품들 속에서 혼란을 겪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하려고 안간 힘을 쓸 것이고, 그래도 모르겠다고 투정 아닌 투정과 자기비판과 반성을 끊임없이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여러분에게 이 공간에서 만큼은 작품을 이해하기보다는 유희를 더 필요로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번 전시는 여러분과 예술가(작품), 더 크게 말하면 여러분과 예술 사이에서의 간극을 고민합니다. 부디 이곳에서 해석의 정답이 있다고 가정하지 마십시오. 간극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 이 글에서 필자는 작품의 내용을 절대로 설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필자 스스로가 느낀 아주 조금의 단서를 던질 것입니다. 그러나 '정답'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다른 이의 정답은 없습니다.

기슬기, 박은하_그들에겐 이 세계가 필요해_2채널 비디오_00:02:30, 00:02:32(루프)_2016
기슬기, 박은하_침입자_左잡초, 나무좌대, 단채널 비디오_△ 00:05:47(루프), ▽ 00:05:19(루프)_2016

불통(不通) ● 며칠 전 한 철학자(그)의 낭독회에서 들었던 내용이 이번 기슬기, 박은하의 전시 『간 객』을 떠올리게 하여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그는 소쉬르(Saussaure, 1857~1913)의 기호학과 연계하여 예술의 특정한 성격을 넌지시 그리고 가슴 속으로부터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그 이후로 '우리에게 "예술"은 무엇일까? 예술은 왜 "예술"이라고 불릴까?'라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다. ● 눈빛, 말, 행동 등을 통해 나의 생각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것을,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소통)'이라고 한다.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하기 위해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약속'이다. 약속이 없으면 내가 누군가에게 A라고 전달했을 때, B나 C로 잘못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약속'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고,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소쉬르의 기호학을 필자의 생각에 반영하여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인간은 그 약속을 위해 -우리가 실생활 속에서 필히 사용하고 있는- 문자, 부호 등의 기호를 임의적으로 만든다(혹은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아'라고 쓰면 [ㅏ]라고 소리 내어 읽듯이('아'라고 썼는데, [ㅓ]라고 읽으면 틀렸듯이), 그리고 '연필'이라고 쓰면 지칭하는 사물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듯이('연필'이라고 썼는데, '종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기호는 약속인 것이다. ● 그런데 그러한 기호는 약속을 하기 위한 껍데기라고 말하고 싶다. 만일 우리가 '연필'에 실제 사물인 "연필" 또는 사물, 사건, 사람, 의미 등 다른 어떠한 것과도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문자로서의 '연필'은 -마치 우리가 문자 'Æ»¿¢¸º£'을 읽고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냥 껍데기일 뿐인 것이다. 그러한 껍데기에 "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특정한 의미를 넣는 순간 그것은 약속할 수 있는 기호가 되는 것이다. 그럼 나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껍데기 중 문자가 아닌 다른 것을 발견해보자. 만일 한글, 한문, 한국어, 영어 등의 문자와 언어 자체가 없다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문자나 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어떤 이에게 나의 생각을 전달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조약돌을 쌓거나, 나뭇가지로 수를 늘리고 줄이거나, 눈을 굴리며 깜빡거리거나, 어떠한 형상을 그리는 등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 방법으로 소통하려고 하지 않을까. ● 그중 마지막에 언급한 그리는 것을 이번 전시 『간 객』과 연계해 말해보고자 한다. 해와 달, 사냥꾼과 짐승 등의 모습 등 그림을 기호로서의 기능으로 중요시한 시대가 있었다. 그림으로 그려진 해는 하늘 가장 높은 곳에서 서민들에게 빛을 밝혀주는 권력자를 의미하기도 하였고, 곡식을 자라게 해주는 전지전능한 생명의 신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동양화 사군자의 '매․난․국․죽(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이 각각 사람, 예의, 법도, 앎을 뜻한다는 사실을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학교 수업을 통해 배워왔고, 또 다른 동양화 '십장생도'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소나무, 돌, 학, 거북이 등 자연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장수를 기원한다는 사실을 환갑잔치 병풍이나 결혼식 폐백 한복에서 보곤 한다. ● 그럼 오늘날의 그림이 이처럼 기호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그림이 이렇게 무조건 기호로써의 기능만 가지고 있는가? 만약 그림이 기호라면, 그토록 사회 구성원들과의 약속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호로서의 그림을, 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가? 지금 이 순간 당신도…, 어차피 이해 못할법한 그림(작품)들을 보고 있자하니, 전시장 안쪽으로 쉽사리 발걸음을 안 하게 되지 않는가?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그 원인을 잠시라도 함께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지, 작가와 작품에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일지. 우리는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까? ● 전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일반적으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작품' 또는 '그림'이라고 부른다고 치자. 그렇다면 앞서 말했던 문자나 부호처럼, '그림'을 사회적 약속의 기호로 정했다고 가정해본다. 색, 선의 굵기와 길이, 형상(어떠한 모습) 등 모든 것이 앞서 말했던 기호가 되었을 때 -소통을 위해서- 각각의 기호(껍데기)는 각각의 의미(알맹이)를 품게 된다. 마치 앞서 언급했던 십장생도처럼 말이다. 이해하기 쉬운 예로, 미술사에서 대표적인 상징적 그림으로 알려진 작가 필립 드 샹파뉴(Philippe de Champaigne, 1602~1674)의 작품 『바니타스(Vanité)』를 살펴보자. 그림 속의 시들어버릴 것 같은 꽃, 해골, 모레시계 등을 각각의 기호화하여 삶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치 기호(사물의 이미지)가 있고, 그것들 하나하나에 뜻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약속하지 않았다. 예술가는 어느 누구와도 시든 꽃과 해골이 죽음을, 모래시계가 시간을 내포한다고 약속한 적 없으며, 그것을 정반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다. 다분히 상징적이고, 그리고 상징적이지 않다고 반박하기 어려운 그림이지만 이 그림은 확실한 사회적 약속을 하지 않았다. 앞서 예로든 사군자, 십장생도와는 다른 입장인데, 그것을 그린 작가는 분명 자신의 그림을 어떻게 읽어달라고(사회적 구성원들이 이 그림을 삶과 죽음으로 봐야한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그린 것은 사회적으로 약속한 기호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사실 애초부터 기호를 갖자고 약속조차 하지 않았으니, 전시를 소개한 평론가, 큐레이터 등의 글 역시도 기호로 약속한 것이 아닌 셈이다. ● 이러한 이유로 전시장이라는 한 공간 안에서 예술가(작품, 그림 등)와 관람객 사이에서 갈등과 오해, 그리고 책임소재를 따지는 상황 등이 자주 발생하곤 한다. ●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의 쉬운 이해를 돕는 친절한 설명이 없이, 전시장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작품은 굉장히 무책임하고 일방적이며 이기적이다.', '설명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부터 열까지 글 속의 대명사를 모두 찾고 이해해야 읽히는 설명문은 굉장히 폭력적이다.' 그러나 또 한편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은 여러분이 해석하기 나름이고, 사고의 세계는 열려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 한번쯤 느껴본 적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미술 작품이 기호가 되길 바라는 듯하다. 관람객은 흔히 그림 속 A의 도상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B의 도상을 보면 그만의 의미를 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품 바스티스처럼 A, B, C, D의 도상을 합치면 작품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명확히 말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는 그렇게 추측해보는 것조차 노력해보지도 않고 예술가는 괴상하다고 생각하거나 예술가들만의 세계가 따로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예술가와 관람객,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작품의 구성요소를 각각의 기호로 보자며 약속한 적은 없다. 예술가는 작품을 껍데기에 의미를 귀속시키지 않으며, 많은 해석의 여지를 주어 관람객들의 사고에 혼란을 준다. 그것은 기호가 아니라, 이미지 자체인 것이다. 예술가는 창작의 과정, 작품을 선보이는 순간 그 수많은 혼란을 용인하고 받아들일 자세를 가지며, 어쩌면 해석의 여지 속에서 발견되는 새로움에 흥미를 갖는다. ● 예술이란 임의적인 기호를 통해 소통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이다.

기슬기, 박은하_먼지탑_단채널 비디오_00:07:37_2016
기슬기, 박은하_지난 전시 기록 영상과 책_2016

우리의 불통, 인정하고 만나기 ● 이번 전시에서 작가 기슬기, 박은하는 우리의 불통을 인정한다. 두 작가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던 중 어느 날 필자는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들었는데, 듣고 난 후 전시장이 작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좋으면서도 불편한 곳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뇌보다 마음을 먼저 건드릴 수 있을까, 정신을 어떻게 하면 -불확실하고 간접적인- 예술적 방식으로 작품에 녹여낼 수 있을지, 작가의 고민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고민은 일전의 두 작가의 프로젝트 전시 『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예술가들 사이에서 감각적이고 실험적이라는 평을 들은 전시, 그 전시에서 어린이 관람객은 프로젝터에서 영사된 영상작품 앞에서 그림자놀이를 하며 즐거워하였다. 작가가 기록한 영상을 보면, 전시장 내 프로젝터로 가득 큰 면을 채운 영상 작품은 이내 가려지고, 관람객이 흔드는 현란한 몸짓의 그림자가 전시장을 채웠다. 그리고 프로이트를 언급하며 쓰인 전시 설명글은 이해와 정서적 교감 없이 무미건조하게 읽혀질 뿐이었다. 말 그대로 글자가 읽혀지고 있었다. ● 전시 기간 동안 이러한 불통의 모습, 또 다르게 해석하면 전시를 대하는 관람객의 다양한 모습을 두 작가는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된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전시장 안에서 작품을 매개로 관람객과 소통한다'는 암암리에 떠도는 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한 허구적이고 의미 없는 말들은 예술가와 관람객을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술을 감각(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한다는 것, 즉 언제부터 기원이 되었는지 모를 전시장 속의 인위적인 규칙들이 둘 간의 '사이'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인위적인 규칙들을 발견해보고, 그 규칙들을 제대로 지켜본다면 관객과 작품(작가)은 과연 불통을 깰 수 있을까? 관람객은 해탈의 미소를 지으며 전시장을 빠져나올 수 있을까? (*참고 : 작품 「간객」) 이 전시는 세 가지의 고민을 품고 있다. '전시를 관람하는 관객의 방법',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태도', '조형언어(작품)의 소통 가능성'이다. ● 이렇게 고민을 이곳에 풀었을 때, 여러분은 분명 무수한 단서들과 쉬운 설명이 있을 거라는 한 가닥의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는 당연히 · 어쩔 수 없이 -다큐멘터리 영상이 아닌- 예술언어로서의 영상 작품을 선보이게 되고, 이는 또 하나의 불통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저기 어둠 속에 밝혀있는 이미지를 기호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인정하자. 그것은 예술이다. ■ 이아름

Vol.20161015f | 간객(看客): 그다음은 말할 수가 없읍니다-기슬기_박은하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