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어리 Lump

민정수展 / MINJUNGSOO / 閔貞守 / sculpture   2016_1019 ▶︎ 2016_1107 / 일,월,공휴일 휴관

민정수_덩어리-연쇄고리 시리즈_가변설치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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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수 홈페이지_www.minjungsoo.com

초대일시 / 2016_101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5:00pm / 토요일_12:00pm~05:00pm / 일,월,공휴일 휴관

열린문화공간 예술의기쁨 JOY OF ARTS 서울 용산구 효창원로70길 35 (효창동 5-390번지) 제2전시실 Tel. +82.2.717.5129 www.joyofarts.org

덩어리, 새로운 조각적 구성체-민정수의 근작들 ● 1962년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현대예술 일반의 감수성을 초현실주의와 관련하여 설명한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초현실주의는 단순히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의 1924년의 선언문을 전후로 활동했던 특정 유파를 뜻한다기보다는 20세기 이후의 현대예술에 뿌리내린 특정형태의 감수성을 지칭한다. 손택이 말하는 초현실주의적 감수성이란 "급진적인 병치 기법을 통해 충격을 주고자 하는 감수성"이다. "해부용 탁자위에서 우연히 만난 재봉틀과 우산"(로트레아몽), "마네킹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초현실주의 거리」"는 세계의 파편들을 급진적으로 연결한다. 손택에 따르면 이것은 현대예술이 버려진 것들을 향유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민정수_덩어리-연쇄고리 1_의자, 인형팔_140×69×88cm_2014
민정수_덩어리-연쇄고리 2_의자, 인형팔_99×83×70cm_2014

손택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형과 액자, 거울, 의자의 파편들(부분들)을 이어 붙여 새로운 상황을 연출하는 민정수의 작업은 초현실주의 감수성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사례라 할 만한 것이다. 민정수가 사물의 단편들을 재조립하여 만든 형태 안에서 개개 사물(의 단편들)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전혀 다른 의미를 얻게 된다. ● 이를테면 「덩어리-양피지 5」(2015)에서 PVC 인형을 절단하여 얻은 손과 다리들에 엉겨 붙어 공중에 비스듬하게 떠있는 액자(의 파편)를 두고 회화의 프레임으로서 액자의 본래 의미를 따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이런 "급진적인 병치"를 작업방식으로 취함으로써 이 작가가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 범박하게 말하자면 단편들의 급진적인 병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현존하는 세계질서의 파괴다. 민정수의 경우 오브제들의 '절단하는' 행위에서 드러나는 파괴적인 몸짓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세계의 구성이다. 절단된 파편들을 이어 붙여 새로운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괴 이후에는 확실히 새로운 건설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민정수의 "이어붙이는" 행위에는 구성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파괴-구성이 한 작업에서 똑같은 비중을 점할 수는 없다. 파괴든 구성이든 어느 한 쪽이 좀 더 힘을 갖기 마련인 것이다.

민정수_덩어리-연쇄고리 3_의자, 인형다리_100×84×78cm_2015
민정수_덩어리-연쇄고리 5_의자, 인형다리_104×55×92cm_2015

민정수의 경우 2011년 이전의 초기작들이 '파괴'적 경향이 좀 더 두드러진데 반하여 그 이후의 작업들에는 구성적 경향이 각별히 두드러진다. "총체성을 분쇄시키는 화면"(박영택, 2011)이 "구현충동의지를 뚜렷하게 환기하는…총체적 현실표상"(박천남, 2013)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초기작들부터 이 작가에게는 파괴보다는 구성이 좀 더 중요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인데 이 경우에도 초기의 느슨한 연결(이를테면 2010년의 「속박」, 「교감」, 「혼돈」과 같은 작업들)이 좀 더 최근 「덩어리」 연작들(2014~2015)의 좀 더 밀집된(빽빽한) 연결로 변화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뭔가 만들어보려는 의지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 그런데 민정수가 만들어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는 무엇인가? 위에서 나는 "단편들의 느슨한 연결"이 "좀 더 밀집된 연결"로 변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결과 「덩어리」로 지칭되는 민정수의 근작들은 콜라주나 아상블라주(assemblage)보다는 고전적 의미의 조각 작품 같은 외형을 갖게 되었다. ● 즉 이 작품들은 내 눈에 단편이나 파편들의 이어붙인 연결체로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완결된 고전 조각의 닫힌(closed) 형태로 보인다. 여기서 엉겨 붙어 모종의 전체를 구성하는 단편들은 절대로 다시 그 전체로부터 떼어낼 수 없을 것 같이 보인다. 그것들은 한데 엉겨 붙어(뭉쳐져) 어떻든 하나의 단일한 세계, 완결된 전체를 제시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덩어리다.

민정수_덩어리-삼투막 1_거울, 인형팔_148×59×52cm_2015
민정수_덩어리-양피지 1_액자, 인형다리_64×54×35cm_2015

그런데 그 덩어리들은 여전히 '조각작품 같은' 것이지 '조각작품'인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덩어리지만 조각적 매스(mass)라기보다는 럼프(lump), 즉 마음에 맺힌 응어리 같은 성격의 덩어리다. 매스의 성격을 갖는 조각의 덩어리와 럼프의 성격을 지닌 조각같은 덩어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일단 전자를 매스-조각으로 후자를 럼프-조각이라고 하자. 먼저 매스-조각에서는 표면 안쪽의 심층에 존재하는 어떤 단일한 내면을 상정할 수 있지만 럼프-조각에서는 그런 단일한 내면을 상정할 수 없다. 그 안에는 하나의 존재(단일한 내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존재들이 우글우글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흔히 보는 조각의 둥근 매스를 보면 그 안에는 텅 빈 공간이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럼프-조각의 내부는 빈틈없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을 것만 같다. ● 마찬가지 이유에서 민정수의 럼프-조각에서는 조각의 외양, 곧 실루엣의 의미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보통의 조각적 매스에서 실루엣은 하나의 단일한 형태를 출현시키지만 민정수의 럼프-조각에서는 하나의 일관된 실루엣을 취할 수가 없다. 의미의 층위에서 그 실루엣이 인간(그것도 아기)의 손과 발을 계속 내 눈 앞에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그 손과 발의 이미지를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전체의 실루엣을 따라 하나의 단일한 형태를 포착할 수 있겠는가!

민정수_덩어리-양피지 3_액자, 인형다리_71×93×35cm_2014
민정수_덩어리-양피지 5_액자, 인형팔·다리_144×75×63cm_2015

정리해보자. 민정수의 「덩어리」 연작은 사물의 단편들을 연결하여 얻은 것이라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적 콜라주, 또는 아상블라주로서의 성격을 갖지만 그 단편들이 서로 엉겨 붙어 하나의 단일해 보이는 덩어리를 이룬다는 점에서 콜라주, 아상블라주라고 부르기는 곤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조각에 가깝다. 하지만 다시 그것을 조각작품과 비교해보면 곧장 차이가 두드러진다. 그것을 하나의 조각적 형상으로 보려고 하면 이제는 엉겨 붙어 있는 사물의 단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여느 조각 작품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내면의 울림, 독백보다는 떠들썩한 개체들의 복수적 울림, 웅성거림이 두드러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을 조각으로 부르기도 곤란하다. 지금까지 부득이하게 그것을 럼프-조각이라 지칭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금 민정수로부터 새로운 조각적 구성체가 출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민정수_덩어리-양피지 시리즈_가변설치_2016

민정수의 작업에서 지금껏 다루지 않았던 또 다른 요소를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그것은 액자와 거울, 그리고 의자의 단편들이다. 이것들은 민정수의 「덩어리」 연작에서 PVC인형의 절단된 단편들(신체들)이 엉겨 붙는 지지대로서 기능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서 「덩어리」의 의미작용에 관여하는 모양새다. 우리의 일상에서 거울이나 액자는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매체이며 의자는 떠도는 주체의 정착, 또는 정박을 의미하는 매체다. 그러나 이쪽과 저쪽의 연결이 또는 정착이나 정박이 어디 쉬운 일인가? ● 가령 내 안에는 하나로 통합할 수 없는 여러 자아들이 공존한다. 분열증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나는 그 자아들을 통합해 하나의 통일된 주체를 구성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내게 불가능한 과제에 가깝고 나는 매순간 수많은 자아들을 다독거리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민정수의 「덩어리」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내 삶을 적확하게 재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게다. ■ 홍지석

Vol.20161019d | 민정수展 / MINJUNGSOO / 閔貞守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