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으로부터

현여람展 / HYUNYRAM / 玄與藍 / painting.sculpture   2016_1108 ▶︎ 2016_1113 / 월요일 휴관

현여람_Imprint (cm)_콘크리트, 석고, 아크릴채색, 펠트, 체리나무_30×45×18cm_2016

초대일시 / 2016_110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월요일 휴관

류가헌 ryugaheon 서울 종로구 통의동 7-10번지 Tel. +82.2.720.2010 www.ryugaheon.com blog.naver.com/noongamgo

가족 로맨스가 붕괴된 흔적들 ● 현여람의 첫 개인전 부제 '가족으로부터'는 뒤에 생략된 단어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가족이란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방어기제를 나타내는 검고 굵은 실꾸러미 형태, 그리고 그것들과 중첩되는 크고 작은 상흔들로 얼룩진 형태들로 가득한 작품들은 가족-사랑이라는 당연한 조합에 난 선명한 균열을 보여준다. 전시장의 작은 방 하나는 그러한 상흔들로 도배된 기념비적 장소로 연출한다. 가정이라는 곳, 즉 공적인 영역과 구별된 이 사적인 영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작가에게 당면한 절박한 사정이 아니더라도, 가족의 위기와 붕괴를 알리는 요즘의 많은 뉴스들은 냉정한 바깥 세계와 다른 따스한 가정의 이미지가 과도한 기대치임을 알려준다. 현여람의 '가족으로부터' 전의 작품들은 기대가 크기에 실망도 큰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 대에서 스스로 대를 끊으려는 극단적 개인주의의 시대,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필요악처럼 상당부분 불편할 수밖에 없다. ● 현여람의 작품에서 가족, 더 넓게는 인간간의 갈등은 뭔가 큰 사건의 폭발에 의한 것은 아니다. 작품의 크기가 대부분 작다는 것, 그러나 그려진 방식이 비슷하다는 것은 소소하면서도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회귀하는 것들은 한 번의 커다란 사건 못지않은 충격을 준다. 가해자는 폭력이라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는 작은 충격들이 쌓이고 쌓여 상대의 영혼은 멍이 드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그려졌다기 보다는 심신의 어떤 상태에서 즉발적으로 발산/배출된 이미지들은 드로잉의 성격을 가진다. 마음의 상처들을 감싼 듯한 붕대들은 여러 겹의 층위로 되어 있다. 그것은 한번이 아니라, 거듭되는 상흔을 증거 한다. 여러 재료로 서 너 층까지 겹쳐지기도 하는 작품에서, 이전의 층위는 완전히 말소되지 않고 그 흔적을 남긴다. 작업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어벽이기도 하지만, 방어벽 안팎으로 범람하는 것들은 실로부터 출발한 방어벽의 취약함을 알려준다.

현여람_Imprint(cs)_콘크리트, 석고, 아크릴채색, 체리나무_40×25×16cm_2016

많은 작품에 상수처럼 등장하는 굵게 꼬여 있는 검은 실 꾸러미는 학부 때 섬유미술을 전공했던 작가의 이력과 관계되면서, 혈연공동체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끈다. 작품 속 실 꾸러미는 가족이라면 '평생을 끊어낼 수 없는 질긴 인연의 끈을 나누었다고 생각'되는 사회 관념과 관련된다. 지금은 공예를 전공하고 있지 않듯이, 실은 끊겨 있다. 큰 작품은 실 꾸러미가 줄줄이 이어지는 모습이 나오곤 하지만, 사각형의 화면은 결국 그것을 잘라낸다. 잘라내지만 다음화면에 그것들은 또 나온다. 인연은 좋은 의미든 아니든 쉽게 끊을 수가 없다. 굵게 꼬인 검은 선에서 유전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작은 작품들이 반복되는 방식은 작품의 장식화로 이어질 수 있는 작업의 편리성이기 보다는,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내용과 관련된다. 작은 작품들은 긴 안목을 가지고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를 생각하면서 계획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다. ● 그때그때의 감정을 속도감 있게 쏟아낸 결과물이 소위 말하는 고상한 형식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더 시간이 걸릴 듯하다. 거듭된 방어는 거듭된 충격의 결과이다. 반복은 충격을 완화하려는 자구적 몸짓이다. '가족으로부터' 전의 출발점이 되었던 가족 간의 갈등에서, 말은 상처의 핵심이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비수가 되어 상대의 가슴에 꽂히고, 아물기도 전에 또 꽂히는 일이 반복된다. 작은 집을 떠올리는 나무 상자들 안에는 그렇게 박힌 파편들이 컬렉션처럼 진열되어 있다. 상처들은 무늬처럼 배열된다. 콘크리트를 석고에 박아 놓은 모습이 팍 박힌 충격을 있는 그대로 보존한 듯하다. 상자 안에도 실 꾸러미 형태가 있다. 상자 유리창에 그어놓은 선은 이중삼중의 방어망을 형성한다. 검은 실꾸러미는 화면을 장악하고 있지만 도처에 구멍은 숭숭 뚫려있다. 가족 간의 갈등으로 화가 날 때 혼자 방에 들어가 스케치와 드로잉을 했던 것에서 출발한 작업은 자기 위로 및 치유의 행위였다.

현여람_Imprint (ws)_콘크리트, 석고, 아크릴채색, 화이트오크_38×25×16cm_2016

그렇게 쏟아내듯 그리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실 꾸러미는 착종된 인연을 암시하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는 폭언을 일삼는 '아버지의 혀를 묶어버리고 싶다'는 원망이 투사된 것이다. 그림에는 실만 있지만 그 가운데에는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혀가 생략되어 있다. 작품 속 실은 혀를 묶음과 동시에 막는 역할을 한다. 화면의 제일 위층을 강하게 점유하는 검은 실타래 형상, 화면과 평행으로 수직/수평으로 배열된 실꾸러미는 방어막의 느낌을 강조한다. 실의 색은 화면의 어느 색보다도 강력하다. 그것은 방에서 검은 매직으로 그리던 버릇이 고착된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을 말하는 이들은 이러한 '방패'에서 혈연관계가 보장하는 안전망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주술적 성격을 띄는 이 형태는 실모양이 기본이지만, 풀을 바를 때나 소스를 뿌릴 때, 뭔가 좍좍 지우거나 수정할 때처럼 용수철처럼 꼬이거나 지그재그 형태도 발견된다. ● 어떤 형태든지 이 심리적 '부적'은 상처를 완전히 가리지 않고, 말소 하에 둔다. 새로운 상처보다는 덧나는 상처가 더 많기 때문에, 삭제 보다는 흔적이라는 방식은 적절하다. 비닐, 삼베 등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화면도 나름의 방어막이다. 일회용 밴드를 뗄 때 덧나지 말라고 막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여러 층들에도 불구하고 주체에 가해졌을 강한 충격을 완전히 흡수하지는 못한다. 칠해졌다기보다는 묻어있는 듯한 물감은 상처에서 나온 체액 같다. 어떠한 방어벽도 없이 체액/물감이 그대로 방치된 것도 있다. 실꾸러미 방어막 위로 또 생겨난 흔적들도 있다. 상처를 싸매고 있으면 잘 아물지 않음을 염두에 두듯, 작가는 작업과 전시를 통해서 상처를 개봉한다. 작가는 '나의 내적 상처를 외부에 내놓음으로써 나의 상처 자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가족 역시도 사회 속 인간관계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현여람_Imprint (rm)_콘크리트, 석고, 아크릴채색, 펠트, 레드오크_30×45×18cm_2016

작업은 일상생활 속에서 억압된 것들이 솟구칠 계기를 마련한다. 의식이 다독거리며 합리화하는 것을 무의식은 분출하고 폭로한다. 가족사진이 등장하는 작품의 이야기는 좀 더 직접적이다. 가족사진 중 지워진 가장의 얼굴이 상처와 병렬된 작품은 아무리 예술이 솔직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작가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하는 죄책감을 준다. 가족사진은 화면의 한가운데에 있고, 문제의 핵심이다. 아이를 안고 있는 부부의 모습은 전형적인 가족사진으로, 특별히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보편적인 울림을 줄 수 있다. 나무상자들은 가족이 거주하는 집의 축소판이다.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있는 나무상자는 형태 뿐 아니라, 재료 상으로 볼 때 집을 말한다. 보통 나무는 내장재고 콘크리트는 외장재지만, 여기서는 그 관계가 뒤바뀌어 있다. 안팎이 뒤집혀진 모양새는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하는 소통의 절박함을 암시한다. ● 상자 안의 파편들 가장자리에서 푸른 연기가 나오듯이 펠트 천으로 연출한 것은, 아물었다고 생각되는 두터운 딱지 안으로 아직도 활화산처럼 움직이고 있는 심층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그것은 언제고 다시 분출될 기미가 있다. 스위치는 언제든 다시 켜질 수 있고, 쌓인 에너지는 폭발할 수 있다. 나무상자가 아니라, 뚝 부러진 판자들 위에 얹힌 이미지들은 더욱 취약하다. 붉은색/녹색 계열의 색채가 공존하는 작품들은 상처와 (자가)치유의 거듭된 실행을 알려준다. 보색 관계의 밀고 당김 속에서 실타래는 작은 작품들에 비해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작품제목처럼 『관계의 흔적』이다. 깔아뭉개듯이 바닥에 놓고 그린 작품들은 작업이 일정부분 심리적 갈등의 간접적 해소임을 알려준다. 가정 내의 '권위적인 의사소통으로부터 받은 마음 속 상처'를 말하는 작가에게 갈등의 원인을 단적으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가족에 내재한 가부장적 관계다.

현여람_Imprint (wm)_석고, 화이트오크_30×45×18cm_2016

그녀는 '누구나 사회적 관념에 들어맞는 가정생활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는 가족이 심신을 달랠 수 있는 안식처, 서로 간의 완벽한 이해와 의사소통으로 이루어진 관계일 수 있지만 누구에게는 단절된 상호작용, 갈등, 심지어 폭력으로 얼룩진 집단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가족을 지배하는 권력 형태에 갈등은 내재되어 있다. 줄리엇 미첼은 『여성의 지위』에서 부권제의 주요제도는 바로 가족이라고 지적한바 있다. 부권제는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권력관계를 보여준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과 국가의 기원』에서 가부장적 가족의 발생과 함께, 더욱이 일부일처제적 개별 가족의 발생과 함께 가족은 사회와는 무관한 사사로운 일로 되었다고 말한다. 이 '사사로운' 영역은 쉽게 간과되곤 하지만, 사실은 매우 정치적인 영역이다. 어느 동물보다도 많은 보호, 교육기간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게 이 사적 영역은 역할은 막대하다. ● 가정 역시 타자에게 의존해야 하는 인간 고유의 사회이다. 이 작은 사회는 지배/피지배의 권력관계가 명확한 큰 사회의 축소판이다. 두 사회가 명확히 분리된 것은 분업화가 보편화된 근대이다. 이러한 분리 속에서 가부장제는 봉건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업그레이드 된다. 남성은 공적 영역을 여성은 사적 영역을 담당하게 된 핵가족의 시대에 지배와 억압은 이 사랑의 장소에도 어김없이 스며든다. 린다 글레논은 『여성과 이원성』에서 사회학자 퇴니스의 이분법을 해설한다. 퇴니스는 사적인 삶/공적인 삶을 대조하면서, 친밀함, 감정적임 그리고 공동사회적인 모습들은 사적인 영역에서 발견된다고 본다. 그래서 퇴니스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육아 담당자로 보고 여성을 공동사회의 대표자 혹은 운반자로 보았다. 퇴니스는 여성을 자연의지와 공동사회와 일치시켰고, 남성을 이성적 의지 및 이익사회와 일치시켰다. 그러나 공적/사적 영역의 구별에 바탕 한 이러한 이분법은 양성 모두를 억압해 왔다.

현여람_결 (drawing_트레싱지와 삼베) 종이, 트레싱지, 삼베, 먹, 아크릴채색_32×45cm_2016
현여람_결(moon)_종이, 트레싱지, 먹, 아크릴채색_45×32cm_2016

남/녀의 대립에는 가장/식솔, 어른/아이 등의 대립 또한 포함되어 있다. 사회주의적으로 말하면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대립에 해당한다. 무한 경쟁이 행해지는 공적 사회의 안쪽이 평화로울 리 없는 것이다. 가족의 위기는 더 광범위한 사회적 위기의 증후이다. 사회적 억압에 대해서는 노동운동 등 공적인 목소리와 집단적인 움직임이 있을 수 있지만, 사랑과 보호로 포장되어 있곤 하는 사적인 영역에서의 억압은 미묘하다. 아동학대 사망 등, 최근의 몇몇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가족 구성원이 죽어 나와야 그 문제점이 비로소 사회에 드러나는 무풍지대가 바로 가정이다. 물론 예술은 이 사회적/개인적 문제를 고발하는 창구는 아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공적 영역에서 거의 배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예술은 이러한 사적 영역에서의 드라마를 공유할 수 있다. 자아와 일치되기도 하는 이 사적 영역에서 방어벽은 느슨하다. ● 그러나 거듭된 상처는 방어벽을 구축하게 하고 또다시 무너지게 한다. 일정부분 패턴화 되어 있는 현여람의 작품에는 이 반복되는 과정이 나타난다. 작품은 트라우마가 발생되었던 상황으로 되돌아가며, 이러한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의 지배하에 두고자 한다. 프로이트는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 어떤 일이 바라던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을 때 인간은 그 일을 다른 식으로 반복함으로서 없었던 것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화면에 충격을 가하고 덮고 다시 충격을 가하는 과정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의 반복이다. 상처로부터 야기된 불안은 반복적 행위를 야기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불안은 외상에 대한 예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완화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그 외상의 반복이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출생 때부터 시작되는 위험한 상황에 대해 인간은 그와 비슷한 위험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마자 그 상황을 피하려 한다. 자아가 위험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그 괴로운 경험을 단지 조짐으로만 제한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다.

현여람_가족으로부터_패널사진, 아크릴채색_35×32cm×2_2016

현여람에게 작업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을 넘어서, 불안과 공포를 은유하는 놀이이기도 하다. 이 상상의 세계에서 가부장적 권력이 전능화 되는 상징적 우주는 전복된다. 작품 마다 매번 전복되지만 수많은 전복들은 동시에 수많은 상처를 암시한다. 물론 전복적 행위는 죄책감을 낳는다. 특히 가족사진을 훼손한 행위는 자책감을 줄 것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아버지의 월권은 아버지만의 탓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가족 중에서 자신이 아버지와 가장 닮아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죄책감은 자신을 향한 것, 즉 초자아의 자아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작가가 수 십 년 간 겪어온 가부장의 '권위주의적 소통'은 그래도 중산층 가족의 특징이다. 사회의 양극화가 더 진행되면 그러한 보호막조차도 없는 가정은 늘어날 것이다. 죄책감은 자기 징벌로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엄격한 초자아와 그것의 지배를 받는 자아 사이의 긴장을 죄책감이라고 부른다. ● 프로이트에 의하면 문명은 개인의 공격성을 약화시키고 무장을 해제시키는 한편, 마치 정복한 도시에 점령군을 주둔시키듯 개인의 내부에 공격성을 감시하는 주둔군을 둠으로서 개인의 위험한 공격 욕구를 통제한다. 죄책감은 외부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의 직접적인 표현이고, 자아와 그 권위자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죄책감을 문명의 진보를 위한 대가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종교는 죄책감이 문명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결코 간과한 적이 없었다. 초자아의 준엄함을 보여주는 죄책감은 양심의 엄격함과 동일한 것이다. '완화된 공격성인 죄책감'(프로이트)은 자아의 위기를 불러올 범람의 위기를 막아내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예술은 자아가 이런 식으로 감시받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다. 현여람의 작품에 편재하는 실이라는 도상은 결박과 해방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가진다. 증상이자 치유인 작품은 자신을 보호하고 극복하는 주술적 사물이 된다.

현여람_자국_아크릴채색, 유채, 패널_72.7×52cm_2016
현여람_관계의 흔적_아크릴채색, 유채, 패널_122×180cm_2016

가부장제는 보편적인 권력 형태로 신권과 왕권 등에도 그 흔적을 남겼으며, 신화의 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이미지와 상징; 주술적-종교적 상징체계에 대한 시론』에서 '살아있는 모든 존재 위에 그물 하나가 펼쳐져 있다'고 말한 한 랍비의 언명에서, 주술적 혹은 종교적인 생명관 만을 본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인간 상황 자체를 본다. 즉 그것은 현여람의 작품 속 편재하는 실처럼 인간 실존의 조건이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생명의 끈은 많은 나라에서 인간의 운명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운명의 여신들은 인생의 실을 잣는다. 우주자체가 하나의 직물, 거대한 그물로 생각되었다. 예를 들면 인도의 사변에서 바람은 실로 꿰듯이 이승과 저승, 모든 존재들을 연결시켜 대우주를 직조한다. 우주에 있어서나 인생에 있어서나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짜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는 보호와 속박을 동시에 암시한다. ● 엘리아데는 사람들은 악마나 주술사의 결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매듭과 부적을 이용했다고 말한다. 결박, 속박, 포박 등의 개념과 이어지는 인연의 그물망에서 완전한 해방은 불가능하다. 피에 기반 한 연결망인 봉건제는 무너졌지만, 그 대신 자본의 지배가 다시 펼쳐졌다. 자본의 상속이 가능한 피의 관계는 여전하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일부일처제 가족은 남편의 지배에 따른 것으로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자는 명확한 목표가 있다고 말한다. 혈통이 확실해야 할 필요성은 아이들이 후에 직계 상속인으로서 아버지의 재산을 소유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가족 역시 이러한 가족의 기원에서 멀지는 않다. 역사상 많은 혁명가들이 시도했던 인간 해방은 또 다른 복속을 위한 상대적인 것에 불과했다. 예술은 인간의 안팎을 감싸는 이 권력의 그물망과 상호작용한다. 현여람이 수시로 짜고 있는 예술이라는 대안의 그물망은 매듭지어진 존재의 매듭 풀기라는 과제를 말한다. ■ 이선영

Vol.20161108a | 현여람展 / HYUNYRAM / 玄與藍 / painting.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