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정적단계 Treasure Island-Stillness

2016년 경기창작센터 공모기획展   2016_1117 ▶︎ 2016_1130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6_1117_목요일_07:00pm

참여작가 김동찬_민성홍_송민규_최진요_하석준_황경현

주최,주관 / 경기창작센터_경기문화재단

관람시간 / 10:30am~06:00pm / 월요일 휴관

경기창작센터 GYEONGGI CREATION CENTER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로 101-19(선감동 400-3번지) Tel. +82.32.890.4820 gcc.ggcf.kr www.facebook.com/creationcenter

『보물섬』, '극단적 만남'이 주는 부정의 변증법과 크리스탈 - #1. "관계가 '보물'이다." (조력자 최윤혜 큐레이터) ● 니에트! 니에트! 니에트! 인도 범어로 부정의 변증법이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니다, 그렇다"이다. 여기서 '아니다'라는 부정은 주어진 틀의 재현-역할극을 거부하는 것이다. 가령, 아티스트에게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능기를 당연히 주문하는 것, 그로부터 나아가 『보물섬』의 선장 노릇, 지주 노릇, 해적 노릇의 연기하는 것.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보물섬』은 유년 시절 모험가의 감정이입 하기 좋은 캐릭터들의 보고이다. 실버 선장의 호탕함과 교활함, 그 우상을 바라보면서 삶의 신산스런 모험을 예감하는 소년 짐 호킨스가 대표적이다. 그럼 '그렇다'는 무엇인가. 이번 『보물섬』 프로젝트는 그런 주어진 것, 그릇이 된 것 속으로 들어가 이미 알려진 '보물'을 획득하는 예술의 모험을 거부한다. 그릇이 된 것은 그릇된 것이다. 니에트! 니에트! 니에트! 주어진 낡은 그릇을 깨버린다. 그 부정들이 가리키는 곳을 긍정한다. 깨어진 그릇의 날카로운 파편들을 바라본다. "그렇다." 파편들의 커팅 엣지가 바바리안 스타일로 새롭게 재구성된다. "그렇다!"

보물섬-정적단계 Treasure Island-Stillness展_경기창작센터_2016

경기창작센터 기획 프로젝트 『보물섬』은 '고립'이라는 코드로 에워싸인 창작의 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성향이 다 다른 작가 6인이 각각 "앉은 자리에서 유목하기"라는 방법에서 나아가 "다른 작가들과 만나 교섭하기"라는 '극단적 만남'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 독특한 전시는 과정중심의 전시이다. 그 '극단적 만남'의 곡선적 궤적과 지난 시간의 구불구불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며, 다만 형태화한다는 원칙 하에서 6인의 작가 각각 5개 유형의 만남이 이루어져 총 30면의 커팅이 있는 다각형의 크리스탈을 내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만남의 스크래치가 보석의 면을 만드는 커팅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니에트! 니에트! 니에트! 라고 할 수 있다. 작가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부정하는 에너지로 스크래치와 커팅이라는 상처가 결국 보석을 만든다고 할까. 우리가 알고 있는 광물질적 구조로서의 크리스탈은 소금 결정처럼 빛을 내면으로 받아들여서 섬광처럼 내뿜는 매체이다. 그 매체가 『보물섬』에서는 작금의 아티스트들이 직접적 관계 맺기라는 실존적 모험수로써 이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김동찬_Landfill_혼합재료_360×360×360cm_2016

사건과 사건이 마주쳐서 상대화되는 시간의 크리스탈을 보여주는 드문 예 중에 하나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매체성이다. 그가 말하길, "나는 한번 싸워본 연후에 친구가 된다, 경의를 표할 만한 적이 아니면 친구로 삼지 않는다." 이 언명은 적의 시간이 서서히 그 밀도 그대로 변환되어 친구의 시간이라는 구체성을 합해가는 과정이라고 할까. 여기에는 여전히 적의 시간이 가진 팽팽한 긴장감이 부풀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보물섬』의 크리스탈은 '경의를 표할 만한 스크래치'와 '친구가 된 커팅'이 이어지는 경합적 상황이 허용되어 끊임없이 부정의 변증법이 가동된 산물이다. '극단적 만남'을 통해 '고립'을 깨고 "청각 시각 촉각처럼 서로 화답하는"(보들레르) '관계'를 맺자라는 것이 『보물섬』의 이념이 된 것이다. 말이 좋아서 관계맺기이지, 이러한 관계맺기는 전면적인 것이 아닌가. 액면가 그대로라면, 예술가의 자의식에 비춰볼 때 이는 굉장히 래디컬한 실험이자 기존의 레지던시가 감히 꿈꾸지 못했던 예술적 시도가 아닌가. 관계미학 같은 나긋나긋한 나눔의 형태와는 레벨이 다르다고 할까.

민성홍_난청지역: 안테나 새_목제 팔레트, 바퀴, 안테나, 라디오, 아크릴채색, 세라믹_가변크기_2016

#2. 작가 캐릭터: 부싯돌 김동찬 / 건축가 민성홍 / 교육가 송민규 / 기록자 최진요 / 전달자 하석준 / 망원경 황경현 ● 김동찬, 민성홍, 송민규, 최진요, 하석준, 황경현 등 6인 작가들은 "관계가 '보물'이다"라는 명제를 중시한다. 함께 『보물섬』 프로젝트에 동행하다가 독일로 훌쩍 떠나버린 '조력자' 최윤혜 큐레이터가 던진 이 명제는 이들 모두에게 공유될 만큼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관계'는 두 가지 변화를 내포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내부적 관계이다. 작가 개개인이 이 『보물섬』 프로젝트에 임할 때, 원안자 김동찬 작가가 제안한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놀이하듯 자신만의 소박한 '보물'을 찾는다" 라는 기분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프로젝트에서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질서'가 제멋대로 만들어지는 현상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각각이 하나의 갤럭시 같은 우주를 시현하고 있는 존재이고, 이 '극단적 만남'이란 마치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 은하의 충돌 같은 것이다. 고로 처음에는 다음과 같은 캐릭터의 수용이 자연스러웠지만, 그 #2에 제시된 캐릭터들은 시간 속에서 변이가 불가피했다. 가령, 최진요 작가는 만화로 프로젝트 전체를 기록하는 '기록자'에서 서서히 만화가 스케치하는 전체적 조망을 확보한 '전망자'로 자신의 입장이 바뀌어져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송민규 작가는 막연히 '교육가'라는 캐릭터를 받아들고 자신의 경기도미술관 전시 『퀀텀 점프』에서 파급되는 선순환의 과정으로 수용했지만, 그 캐릭터가 점차 미끄러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송민규, 최윤혜_보물섬에서 보물을 찾아 떠난 사람 01~08_ 캔버스 패널에 아크릴채색_60×60cm×8_2016 송민규_보물섬의 교실_153개의 목제 팔레트_150×300×800cm_2016

또 하나는 외부적 관계이다. 관계맺는 양상의 변이가 일어나는 것이다. 가령, 애초 원안을 제안한 김동찬 작가 역시 '부싯돌'이 일으키는 작은 불씨가 일으키는 불꽃이라든가 불씨와 불씨가 합해지는 아궁이 속 풍경이라든가 다소 가볍게 생각했던 흔적이 있다. 그러나 『보물섬』 프로젝트는 하석준 작가가 '전달자'로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내부와 일대에서 행한 미디어 퍼포먼스를 감행함으로써 『보물섬』 프로젝트 전체에 준엄한 리얼리티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전달자'라기보다 '도발자'라고 할까. 이미 하석준 작가가 영상 미디어를 자신의 몸에 장착하고 이동하는 실시간 캐스트의 영상을 '전격적 유출'(프레드릭 제임슨)의 퍼포먼스를 행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보물섬』의 추진체가 마치 새턴 2호의 1단계 로켓이 뿜어내는 엄청난 추진력처럼 흥분감에 휩싸이게 한 것은, 그리고 나아가 『보물섬』 프로젝트의 성격을 '극단적 만남'으로 돌변하게 한 것은 이 이 퍼포먼스에 힘입은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프로젝트의 동행이었던 최윤혜 큐레이터가 하석준 작가의 퍼포먼스와 그에 합선-합류한 작가들 앞에서 바로 위의 명제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관계는 '보물'이다."

최진요_팔레트-쌓기_목제 팔레트, 바퀴, 공업용 포장랩_가변크기_2016

애초 『보물섬』 프로젝트는 10월 중순 경기창작센터 오픈스튜디오에 걸쳐서 가전시를 한 바 있다. 그 전시의 면면에서 '바퀴'라는 이동성의 사물이 공통적이었다.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지는 것처럼 이동성의 부여는 『보물섬』이 어디론가 미끄러지거나 움직인다는 의미로 읽혀졌다. 게다가 황경현 작가는 자신에게 부여된 '망원경'이란 캐릭터를 십분 이해하여 『방주』라는 작품으로 승화시켰는데, 이 『방주』는 전시를 본 이들에게 "보물섬을 향해 항해하는구나"라는 독해가 가능하게 했다. 『방주』란 성경에 나오듯 마른 뭍에서 따온 올리브나뭇잎을 물고온 비둘기에 의해 살 수 있는 땅, 즉 '보물섬'이 발견된다는 서사가 깃들어 있다. 황경현 작가는 거기에 거울의 시각적 자기 되먹임 장치를 부여하여 그 여행이 내면적인 형태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바퀴'라든가 '여행'이라든가 하는, 어느덧 공통성의 규칙처럼 부여된 컨센서스는 다른 작가들의 반발에 의해 깨어졌다. ● '극단적 만남'이란 기실 기획자가 큐레이터 없이 작가들끼리 합의할 수 없는 단계에서 새로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즉각 폐기하거나 일시적인 연대가 이루어지는, 그러면서도 가냘픈 강철의 끈처럼 단단하게 이어져 있는 절대모순적 공통체를 끌고가는 동력 같은 것이었다. 김동찬 작가의 유희적 제안은 곧 송민규 작가의 보다 진중하면서도 밀도 있는 추진에 의해 접혀지는 형국이었다. 또한 다른 작가들이 유동적인 조건 아래에서 궁싯거리고 있을 때, 하석준 작가와 황경현 작가는 일단 규칙이 정해지면 일사천리로 작품을 만드는 식이었다. 그것이 되레 후폭풍으로 작용했다고 할까. 송민규 작가는 12개의 카드를 모으면, '보물'을 찾는다는 마치 드래곤볼 같은 서사를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민성홍 작가는 '건축가'로서 자신의 애초 부여된 역할을 묵묵히 추구해갔다고 할까. 그것도 이제는 반항적인 입장으로 보일 만큼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내재적 판을 잡고 있었다.

하석준_고통의 플랫폼:2016 보물섬_퍼포먼스_2016

#3"'둥글다'는 말을 명사형으로 만들려면 '둥금'이라 해야 할지 '둥긂'이라 해야 할지 망설여질 때가 있다. '살다'의 명사형이 '삶'인 것으로 봐서는 '둥긂'이라 해야 할 테지만 그 말에는 어떤 짐승의 내장처럼 하릴없이 포개지고, 지나가는 발길에 여러 번 밟힌 팻트병처럼 쭈그러진 어떤 느낌이 있어, 본래의 '둥글다'는 말이 가진 반듯하고 단정한 느낌이 다 사라진 듯하다. 그래서 나는 맞춤법에 맞는 안 맞든 '둥금'이라고 써야겠다고 선뜻 마음을 정한다. 물론 거기에도 내장을 다 걷어낸 짐승의 뱃속처럼 휑한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일출의 수평선에 나타나는 여리면서도 선명한 금, 날카롭게 갈라진 사금파리 같은 금, 때로 얇다란 종잇장처럼 손가락을 베이게 만드는 금이 있다." (이성복) ● 결론을 말하면, 『보물섬』 프로젝트는 악전고투였으며, 마음공부였으며, 사회화 과정이었다. 이번 전시가 보여주는 것은 그 안팎의 내적 투쟁이 어떻게 '관계맺기'의 상처들을 통해서 크리스탈의 사방팔방 뻗쳐가는 빛을 보여주는가이다. 즉 보여주기의 보여주기라는 전시. 이렇게 된 것은 이 작가들 6인이 개인별 5개 관계, 총 30면의 조마경[照魔鏡]처럼 진실의 일단을 마주하여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구체적 빛살들이 어떤 형태화가 되었는지는 불문에 부치더라도 이것은 새로운 물질적 형태 이전에 비물질적 사건의 새로운 관계망과 연관된다. 차라리 서해 저 앞바다에 떠 있는 풍도나 누에섬으로 항해하는 물리적인 여행으로서의 '보물섬' 서사였다면 쉬웠을 텐데, 이것은 섶을 지고 불구덩이 속에 들어간 듯한 카오스의 서사였다.

황경현_Ark(Void Drawing)_공간설치_191.5×330×550cm_20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물섬』 프로젝트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은 작가들의 그 거대한 자아의 껍질이 파괴되고 작가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원형질적인 접촉과 새로운 단계의 둥글어짐이 나오는 것, 그 시간적 발효 과정이 드디어 말을 하는 것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보물을 만드는 '관계'의 과정은 지난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중심적 프로젝트가 만들어낸 '관계'의 크리스탈은 매우 특이한 형태라는 것도 지적되어야겠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묘[妙] 차원'에 놓여진 것이기도 하고, '묘[妙] 차원' 자체이기도 하나, 그것은 이성복 시인의 언어를 빌리면, '둥금'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난데없이 '둥금'이란 무엇인가. 이 '둥금'이란 표준말이 아니다. 시인이 조어해낸 말이다. ● '둥금'의 바른 표기는 '둥긂'이다. 이것은 본래 주어진 대로 '둥글다'의 명사형으로서 영어로 치면 circle의 가시적인 면을 지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겉보기 등급의 말 그대로 '둥긂'이다. 반면, 시인의 '둥금'은 무엇인가. 이것은 본래 둥글지 않은 것이 둥글어진 것이다. 즉 '둥글어짐'이다. 본래 '둥긂' 속에 포함된 "리을"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시인은 이를 "어떤 짐승의 내장"이 없어진 것 같다고 표현했는데, 이 『보물섬』 프로젝트에서는 예술가의 에고가 아닐까. 욕망과 지혜, 감흥과 제어 그리고 고독 같은 정서적이며 지적인 타입의 에고가 '극단적 관계'에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둥금'이란 온전히 짐승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과정을 온전히 겪어내고 다음 단계로 점프한 이들이 누릴 수 있는 '보물'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는 『보물섬』의 소년 짐 호킨스가 하는 말도 일리가 있다. "(보물은) 있었어요. 바다에 나간 것, 모험 그리고 온갖 부류의 사나이들을 만났던 거.. 그게 다 나의 보물이었어요." 괜히 '보물섬'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보물섬』 프로젝트의 니에트! 니에트! 니에트! 라는 부정의 변증법은 작가들의 마음의 구조를 변형시켰고, 그에 따른 작업의 형태로 계속되는 변이의 곡선 위에 두었다. 동시에 이들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프로젝트의 성격마저도 그 '극단적 만남' 속에서 둥글어지게 만들었다. 이 과정의 결말을 어떻게 될까. 아무도 모른다. 단지 이런 연상이 가능하다. 까마귀 자리에 있는 두 개의 안테나 은하[antennae galaxy]가 서로의 내부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성을 가져와 결국 하트 모양의 새로운 은하가 되었다는 우주적 상상력을 펼치기에 경기창작센터는 천문에 열려 있다는 것. 그러나 해피엔드를 원하는 것과 잔혹하더라도 진실을 수확하는 것은 별개이다. ● 이윽고 송민규 작가를 포함한 6인의 작가들은 최근에 이렇게 자신들의 각성을 단적으로 표현했다. "이곳은 '보물섬'이 아니다." ■ 김남수

Vol.20161118j | 보물섬-정적단계 Treasure Island-Stillness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