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ew and Underneath

문성윤展 / MOONSUNGYOON / 文盛玧 / painting   2016_1115 ▶ 2016_1121

문성윤_붓꽃 Brush Flower_장지에 파스텔, 흑연_206×138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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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윤 홈페이지_www.cargocollective.com/moonsungyoon

초대일시 / 2016_1115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_01:00pm~07:00pm

사이아트 스페이스 CYART SPACE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28(안국동 63-1번지) Tel. +82.2.3141.8842 www.cyartspace.org

검은 형상, 존재의 회화 ● 하나의 선(線)에 또 다른 선(線)을 덧붙이는 식으로, 그리고 그 위에 또 다른 선(線)을 더하는 식으로 배경으로부터 어떤 형상이 드러난다. 그렇게 수천 개, 수만 개의 선이 쌓여 세상에 현시된 형상은 까맣다. "시커멓다"해도 좋을 정도다. 그 시커먼 형상은 처음에 꽃의 이미지로 보였다가 이내 타오르는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다시 바람처럼 흩어져 배경으로 돌아간다. 거기서는 시커먼 바다의 떠들썩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나는 거기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규칙적이지만 변화무쌍한 리듬과 호흡을 감지한다.

문성윤_붓꽃 Brush Flower_장지에 파스텔, 흑연, 금분_206×141cm_2016
문성윤_Self-portrait_장지에 먹, 파스텔, 흑연_206×141cm_2016

문성윤의 '검은 회화'에서는 항상 뭔가가 출현해서 내 감각을 자극한다. 그러나 방금 전에 나를 덮쳐 왔던 무언가는 이내 다른 무언가로 돌변하여 또 다시 나를 덮친다. 그것이 "나를 덮친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온전히 파악하고 장악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 앞에서 나의 관심사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것이지만 어느새 나는 그 앞에서 멍해진다. 검은 바다에서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는 언제든 내 인식능력으로 포괄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성윤의 시커먼 회화의 장(field)에서 넘실대는 형상들을 내 인식에 포괄하거나 장악하려는 시도는 수포(水泡)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나마 일렁이는 파도 앞에서는 "그것은 파도일 따름이야"라고 규정해버리면 되지만 문성윤의 시커먼 형상에서는 그런 최후의 보루, 그것을 규정하는 최종의 심급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문성윤_붓꽃 Brush Flower_종이에 연필, 오일파스텔_110×74cm_2016

이렇게 "그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은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그 자체 "거기 있음"은 확실하다. 하이데거式으로 표현하면 "존재자"는 불투명하지만 "존재 자체", "있음 그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성윤의 검은 회화는 "있음 그 자체"에 대한 존재론적 명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게다. 문성윤의 작업 노트에는 "표면이 없는 깊이"라는 문장이 존재하는데 여기서 "표면이 없는 깊이"를 나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육박하는 회화"를 지칭하는 언술로 이해한다. 그렇게 다시 문성윤의 회화를 보면 선(線)에 선(線)을 끝없이 덧붙이는 방식으로 구성된 문성윤의 회화면은 매우 밀도가 높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검은 색의 농도와 강도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높다.

문성윤_파도 Wave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파스텔_110×80cm_2016
문성윤_파도 Wave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파스텔_110×80cm_2016

그 강도 높은 회화면은 화면 형상의 물질적 확실성, 즉 물리적인 있음을 새삼 환기한다. 그러나 물질적 확실성이 높아질수록 의미의 확실성은 경감되기 마련이다. 앞에서 나는 문성윤의 형상이 "선(線)에 선(線)을 끝없이 덧붙이는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했는데 그렇게 선에 선을 덧붙이는 행위는 이미지-형상-의미의 수준에서는 지금 내 앞에 출현한 이미지, 현재 발현된 의미를 지우는 행위에 상응한다. 하나의 선에 또 다른 선을 겹치는 일은 필연적으로 선행하는 선을 지우는 일, 사라지게 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행위의 반복을 통해 우리 앞에 마침내 등장한 형상을 아무 의미도 없는 상태, 의미의 공백 상태로 지칭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한 때 출현했으나 지금은 지워진 어떤 것(들)을 한 없이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을 차라리 의미로 충만한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문성윤_81장 사라지는 붓꽃 드로잉 81 Drawings of the Disappearing Brush Flowers_ 종이에 연필, 오일파스텔_각 35×27.9cm_2016

그리고 지금 나는 지금 또 다시 내 앞에 출현한 오늘을 마주 대한다. 아직 나는 이 "오늘"로부터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했으나 그 "오늘"의 무게는 확실하게 느낀다. 더하여 그 무게감을 제대로 느낄 겨를도 없이 "오늘"은 마침내 부서지고 사라질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오늘을 살아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도저히 회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성윤이 하나의 선(線)에 또 다른 선(線)을 덧붙이는 식으로 드러낸 형상들이란 결국 그 "오늘의 무게"를 가시화하는 작업이 아닐까. ■ 홍지석

Vol.20161119d | 문성윤展 / MOONSUNGYOON / 文盛玧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