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찬展 / LEEBYUNGCHAN / 李秉燦 / installation   2016_1119 ▶︎ 2016_1206

이병찬_Calling for mammon_광섬유, 엘이디, 폴리에틸렌 필름, 비닐봉지, 에어모터_설치_ 제주문화재단(구 제주대 병원 영안실)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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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찬 홈페이지_www.bclee.org

초대일시 / 2016_1119_토요일_04: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2:00pm~07:30pm

스페이스 엠 SPACE M 서울 서초구 바우뫼로 101(양재동 138-4번지) 경인상가 B1

견고한 공기의 꿈, 또는 스러지지만 소멸하지 않는 괴물 ● 이병찬의 「도시생명체(Urban Creature)」 연작은 무엇보다 관람자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스펙터클이다. SF나 호러영화에 나올 듯한 화려한 색상의 낯선 생물이 숨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장면은 어린이들도 좋아하는 원초적인 즐거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병찬의 작품은 단순히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러 번 겹쳐 칠한 유화처럼 그의 작품에는 다양한 층위가 숨어 있다. 이 생명체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를 통해 그 층위를 살펴보자. ● 도시생명체를 이루는 요소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비닐이다. 비닐은 소비생태계의 맨 밑바닥을 이루는 질료이다. 작가는 인천 송도에서 신도시의 탄생과 함께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비닐 쓰레기를 목격하며 괴물을 구상했다고 한다. 비닐은 그 자체로는 대개 상품이 아니지만 거의 언제나 상품에 부수되는 재료이며, 상품이 판매되는 즉시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물질이기도 하다. 한밤중에 주로 일하는 도심의 환경미화원들처럼, 비닐은 소비사회의 기저에서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이다. 모두가 언제나 사용하지만 관심을 갖지 않고, 늘 보고 있지만 인지하지 못한다. 상품을 빛나게 하지만 그 자신은 전혀 빛나지 않는 비닐은 조연도 못 되는 엑스트라이며 소비생태계의 최약자이다.

이병찬_urban creature-Calling for mammon_설치, 식물원_jardin des plasts, nantes, france_2016
이병찬_urban creature-Calling for mammon_설치, 식물원_jardin des plasts, nantes, france_2016
이병찬_urban creature-Calling for mammon_설치, 식물원_jardin des plasts, nantes, france_2016

할리우드 공포영화에서 정상성의 규범을 벗어난 약자나 억압받는 자들이 괴물의 모습으로 돌아오듯이, 소비생태계의 약자이자 억압의 대상인 비닐은 이병찬의 작품에서 괴물의 형태로 우리 앞에 돌아온다. 물론 이 귀환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들을 하나로 모아 라이터의 불꽃으로 피닉스처럼 되살린 작가이다. 바디우는 한 사회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가장 잘 보이게 되는 것이 사건의 한 징표라고 말한다. 소비의 사이클에서 보이지 않던 비닐이 누구에게나 잘 보이는 괴물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상품의 화려함 속에 감춰진 이 사회의 실상이다. 라캉을 빌어 말하자면 도시생명체는 소비사회라는 상징계를 슬며시 열어젖혀 그 이면에 있는 실재를 보여주는 구멍이다. 괴물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익숙하면서도 낯설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 그러나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눈에 잘 띄지 않는, 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공기이다. 예술적 상상력 속에서 공기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생명이자 운동이다. 희랍어 프네우마(pneuma)가 잘 보여주듯 고대인들에게 공기란 생명의 숨결이었다. 우리말의 바람 역시 단순히 기체 분자의 운동이 아니라 기의 흐름이며 신의 움직임이지 않은가? 비닐로 만든 괴물에 모터 팬으로 불어넣은 공기는 작가가 피조물에 부여한 인공생명이다. 공기는 또한 운동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바슐라르는 상상력이란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능력이라고 하였다. 상상력은 변신의 능력이며, 이러한 상상력의 변신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질료가 바로 공기이다. 공기는 자유롭게 한 가지 모습에서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인공생명을 부여받은 이병찬의 도시생명체들도 공중을 날며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이병찬_urban creature_설치_경기문화재단 시각예술지원프록램_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_2016
이병찬_urban creature_설치_경기문화재단 시각예술지원프록램_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_2016
이병찬_urban creature-Calling for mammon_설치, 울산_2016

괴물들은 공기로 만든 조각이므로 가벼우며 유연한 운동성을 가진다. 비닐은 지금 여기서 공기를 잠시 가두기 위한 불가피한 틀일지도 모른다. 공기는 형태에 따라 자유롭게 모습을 바꾸며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마찬가지로 이병찬의 도시생명체들도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 부여된 생명은 단 하나이다. 공기는 상승의 벡터이며, 가벼움이다. 공기는 날아오르는 것, 새다. 도시생명체들은 비닐 속에 담긴 공기, 고체화된 공기이다. 낯선 생물에 생명을 불어넣은 공기는 팬으로 불어넣은 인공의 공기, 기계적 공기이며, 도시생명체는 비닐로 만든 사이보그이다. 그러나 이 생명체는 여전히 공기로서의 운동성과 유연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래서 도시생명체는 날아오를 수 있고, 변신할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다. ● 처음 탄생했을 때 도시생명체는 어렸다. 2012년에 주차장에 나타났던 새하얀 도시생명체는 『에일리언 4』에서 인간과 에일리언의 잡종으로 태어난 흰색 에일리언처럼 알에서 갓 깨어난 유충을 닮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생명체의 몸은 점점 화려하고 정교해졌다. 성장을 마친 생명체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낯선 생물은 도시를 배회하며 쇼윈도 안에 들어가거나(『거울 너머 환각』) 폐공장을 점령했다(『자연사 박물관』). 미지의 생명체는 그 존재만큼이나 머무르는 자리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낸다. 요즘 괴물은 나무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Calling for Mammon』), 식물원의 나무들 사이에 숨기도 한다(『2016 Nantes Scopitone Festival』). 공기로 만들어진, 바람을 닮은 괴물이 나무를 찾아가는 것은 왜일까? 나무는 대지이자 물이면서도 상승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공기의 닮은꼴이다. 공기가 급격한 상승, 추락 가능한 상승이라면 나무는 느린 상승, 추락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승이다. 대지에 단단히 발을 딛고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가는 물이다. 나무 사이를 떠돌며 괴물은 소비사회의 특이성에서 정상성으로 변신하기를 원하는 듯 보인다. 도시생명체는 샹들리에로 장식된 결혼식장의 천장에 오르는가 하면 나무에서 비닐로 된 기와지붕을 굽어보기도 한다. 중세 대성당의 가고일처럼, 괴물은 높은 곳에서 소비사회를 굽어보며 조롱한다. ● 도시생명체를 이루는 세 번째 요소는 소리다. 괴물의 곁에 선 관람자는 모터 팬의 소리, 방울 소리를 듣는다. 팬의 소음은 괴물의 호흡이며 방울소리는 괴물의 울음이다. 바슐라르가 바람을 가르는 새들의 날개짓을 울음소리와 바꿔치듯이, 도시생명체의 낯선 형상은 그 가벼움으로 인해 무당의 방울 소리로 변신한다. 그 방울을 흔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공기이며 바람이다. 방울 소리로 울며 공기 속을 날아오르는 낯선 생명체는 우리를 다른 세계, 신의 세계로 이끈다.

이병찬_urban creature-fake plastic tree_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_2016
이병찬_urban creature-fake plastic tree_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_2016

괴물을 이루는 마지막 요소는 빛이다. 도시생명체는 단순히 비닐로 만들어진 튜브가 아니다. 원색의 LED 조명 속에서 빛날 때 도시생명체는 극장의 스크린이 된다. 바람과 공기의 형상인 낯선 생물은 그 자체로도 꿈 같은 것이지만, 빛을 받은 괴물의 주위에서는 영화와도 같은 꿈이 펼쳐진다. 빛 속에서 도시생명체는 때로는 환상이, 때로는 악몽이 된다. 컬러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빛과 소리의 스펙터클은 성황당에 매달린 기원의 오색 천이 되기도 하고, 소비사회의 광고판이 되기도 하며, 금융시장의 자본 흐름을 보여주는 펀드매니저의 멀티스크린처럼 보이기도 한다. 환영이며 꿈이므로 괴물은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어떤 형상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괴물은 소비사회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소비사회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스펙터클의 사회는 모든 것을 스펙터클화하며, 도시생명체의 작가가 의도하는 소비사회 비판조차도 스펙터클을 위해서라면 감수한다. 스펙터클이 되면서 괴물은 점점 덜 불편해지고 있다.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 놀라움이라는 단일한 감정으로 변하면서 구멍 뒤의 실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병찬의 최근작은 '지나치게 재미있다'는 함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 도시생명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알 속 태아에서 유충을 거쳐 성충의 모습이 된 벌레 모양 괴물들은 나무를 떠나 어디로 갈 것인가? 괴물의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 기계문명의 원동력인 전기를 공급받는 한 도시생명체는 살아있지 못하더라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 앞에 나타난 괴물의 숙명이기도 하다. 데리다의 해체론이 말하는 형이상학의 운명처럼, 점차 소멸해가지만 결코 완전히 없어질 수 없는 모습으로 도시생명체는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 장태순

Vol.20161120f | 이병찬展 / LEEBYUNGCHAN / 李秉燦 / installation